난 할 수 있어 21화
최재한은 대찬을 바라봤다.
“너 나랑 팀 할 거지?”
“그럼.”
대찬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뿐만 아니라 재학생들은 서로 숙덕공론을 하느라 바빴다.
“야, 너무 많이 모이면 그만큼 상금도 나눠 가져야 되잖아?”
한구석에서 숙덕거리던 모임의 누군가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마구잡이로 모여들었던 팀이 일시에 해체되기도 했다.
최재한은 그쪽에 잠깐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대찬을 바라봤다.
“넌 나 방출 안 시킬 거지?”
“내가 팀장 한다고 한 적 없는데?”
“그럼 내가 하겠어? 말 돌리지 말고 빨리 말해. 방출 안 시킬 거지?”
“그래, 안 시킨다.”
대찬은 간단히 대답했다.
모든 설명을 마친 민승기는 선배들을 향해 꾸벅 고개 숙이고는 다시 말했다.
“지금부터 축하 연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연회장으로 이동하여 마음껏 즐겨 주십시오.”
고급 정찬이 차려졌다.
하지만 재학생은 이미 우승자가 얻을 거액의 상금에 정신을 뺏긴 상태였다.
눈앞의 음식보다 먼 곳의 상금을 위해 뛰기 시작했다.
돈이 돈을 부르는 건 상식이었다.
100만 원의 자본금만 쥐고 시작하는 것보단 한데 돈을 모아 출발하는 편이 좋다고 재학생 모두는 생각했다.
다만, 팀장의 절대적인 권한이 문제였다.
자칫하다간 죽 쒀서 개, 돈 벌어서 팀장 주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한두 푼이라면 의리를 택하겠지만 액수가 그렇지 않았다.
그런 논의가 벌써 대찬과 가까운 선배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유백기, 민승기, 김산하를 비롯한 01학번 선배들이 수군거렸다.
“아무래도 우리끼리 뭉치는 게 좋겠지?”
“응, 그 편이 나아.”
“누가 팀장 하지?”
“승기가 하는 게 낫지 않아? 회장님이니까.”
“역시 그게 좋겠다.”
민승기가 팀장으로 추대되는 분위기에 누군가 찬물을 끼얹었다.
유백기였다.
“난 반대.”
“왜?”
“팀장 파워가 안 그래도 센데, 회장 권위까지 더해져 봐. 분란 소지가 있어.”
민승기는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그게 무슨 뜻이냐?”
“기분 나빠하지 마. 네 성격이 문제라는 게 아니라 지위가 어쩔 수 없는 거야.”
“난 그렇게 비열한 짓 안 해.”
“알아. 그래도 회장이 팀원으로 있어야 팀장이 딴 짓 못하도록 압력도 넣을 수 있잖아?”
“그럼 넌 누가 팀장 했으면 좋겠단 건데?”
“뭐, 누가 돼도 상관은 없는데…….”
유백기는 말끝을 흐렸다.
팀장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긴 하지만 인심을 잃을 수밖에 없는 자리이기도 했다.
김산하는 선수를 쳤다.
“난 안 한다. 딱 질색이야.”
“그럼 뭐…….”
1명뿐이었다.
유백기.
민승기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네가 해, 유백기.”
“뭐… 그럴까나?”
유백기가 팀장이 됐다.
그의 팀은 에피니키온의 근간인 01학번이 주축이었다.
회장과 그에 버금가는 대외협력국장이 포함돼 있었다.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였다.
굳이 먼저 부르지 않아도 사람들이 몰렸다.
순식간에 유백기의 팀은 20명으로 불었다.
“후배가 팀장인 팀에 선배님들 모실 수는 없습니다. 죄송해요.”
유백기는 사람을 골라 뽑았다.
그는 자신의 위 학번들은 모두 배제했다.
“조대찬, 서원웅, 최재한, 너희 우리 팀 들어와라.”
유백기는 선배는 배제해 놓고 후배들에게는 은근한 압력을 넣으며 포섭하려고 했다.
대찬은 그 의중을 뻔히 내다봤다.
선배는 쳐 내기 어렵고 후배는 쉬웠다.
그걸 알고도 자진해서 범의 아가리로 들어갈 까닭은 없다.
대찬은 정중히 사양했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따로 해 보려고요.”
“뭐? 왜, 같이 하면 좋잖아.”
대찬은 첫 번째 삶에서의 악연을 떠올리고 욕지기를 느꼈다.
‘너는 좋겠지. 나는 아니야.’
무슨 일이 있어도 유백기와 한패가 되는 일은 없을 거다.
대찬은 한패는커녕 그의 대적자가 되어 그를 무너뜨리길 원했다.
그는 빙긋 웃으면서 좋은 말로 사양했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초짜 1학년끼리 하는 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서요.”
그러자 김산하가 불쑥 나섰다.
“나도 껴 줘!”
“선배는 1학년 아니시잖아요.”
“누나라고 하랬지.”
“선배가 누나로 바뀐다고 2학년이 1학년 되는 건 아니에요.”
대찬은 극구 1학년끼리 팀을 짜겠다고 선언했다.
김산하가 꺼려지는 건 아니었다.
그로 인해 불필요한 미움을 사기 싫을 뿐이었다.
유백기와는 선을 긋되, 그가 확보한 사람까지 빼 올 필요는 없었다.
대찬이 사양하자 유백기는 순순히 물러났다.
“뭐, 그래라.”
“아마 이편이 선배께도 좋을 거예요. 저희가 무슨 대단한 도움이 되겠어요.”
“하긴 그것도 그렇네. 무슨 대단한 도움이 되겠냐, 너희가.”
대찬은 겉으론 웃었지만 속으로는 이를 갈았다.
‘그 시건방진 표정을 언제까지 짓나 보자.’
유백기는 합류하지 않은 대찬을 곰곰이 속으로 따져 보곤 별로 아쉬워하지 않았다.
‘조대찬 저거는 어째 다루기 까다롭단 말이야……. 애초부터 배제하는 쪽이 나을지도.’
어차피 대찬 일당이 아니더라도 유백기의 팀원이 되고 싶어 하는 02학번들은 차고 넘쳤다.
100명을 헤아리는 재학생 부원 중에서 유백기는 무려 30명을 포섭했다.
모두 01학번과 02학번이었다.
대찬의 팀은 그를 포함해 최재한, 서원웅뿐이었다.
최재한이 대찬에게 말했다.
“우리도 다른 팀이랑 합치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 우리는 우리끼리 가자.”
대찬의 말에 서원웅도 동의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
“자본도 3백이면 충분하지.”
“그런가…….”
대찬과 서원웅의 쿵짝에 최재한은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중간고사도 끝났겠다, 에피니키온 부원들은 이 일에 몰두했다.
대찬도 이 기회를 순순히 놓칠 생각은 아니었다.
매주 한 번씩 있는 에피니키온 정기 모임 때도 팀끼리 모여 숙덕공론을 했다.
“그냥 확 전부 복권이나 사 버릴까 보다.”
“야, 토토는 어때? 내가 또 메이저리그는 완벽하게 분석하거든?”
요행을 노리는 시답잖은 소리들이 심심찮게 들렸다.
분명히 자본을 활용하라고, 증명할 자료도 구비하라고 조건에 명시되었음에도 그런 소리를 운운했다.
진지한 의견을 내놓는 쪽도 있었다.
그래도 창업 동아리라는 간판에, 고원대 최고 동아리라는 명성에 걸맞은 사람도 분명히 있었다.
“올해는 황사가 5월까지도 심하대. 길거리에서 마스크 팔아 보는 건 어때?”
“일본이랑 독도 문제 심하잖아. 독도 프린팅 한 티셔츠 파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 애국심 마케팅.”
대찬, 최재한, 서원웅 역시 머리를 맞댔다.
“우리도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말이야.”
“그냥 우리 부모님한테 돈 달라고 할까?”
“부럽다, 야.”
대찬과 최재한은 입을 모았다.
서원웅의 의견은 시원했지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대찬은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내내 고심했다.
준수한 수익을 창출할 방법은 있었지만, 안두홍이 제안한 규칙은 냉혹했다.
승자 독식.
2위는 꼴등과 같단 누군가의 말이 이 판 한정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조금 더 고심해 보자.”
장고에 빠져 조용해진 이들과는 달리 유백기의 팀은 떠들썩했다.
이따금 웃음도 터져 나오는 걸 보니 얘기가 잘 되는 듯했다.
그 중심에서 함박웃음을 짓는 유백기를 보고 대찬은 속이 배배 꼬였지만 평정을 찾았다.
사적인 적개심으로 임할 일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가치를 발전시키고 증명해내기 위한 일이었다.
물론 최재한과 서원웅의 가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찬은 달아오른 가슴을 차갑게 식혔다.
시일이 경과돼도 이들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런데 최재한은 이런 쪽에는 영 글러먹었다.
서원웅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결국 대찬이 해내야만 했다.
하지만 대찬도 선뜻 이렇다 할 방법을 강구하지 못했다.
“에이, 이걸로 그냥 술이나 퍼마실까 보다.”
독서실에서 머리만 벅벅 긁던 대찬은 괜히 신경질을 내면서 일어났다.
수확이 없었다.
도통 무릎을 탁 칠 만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귀가하려던 대찬은 막차 시간이 끊긴 것을 보고 털레털레 발걸음을 동아리방으로 돌렸다.
막걸리 냄새가 밴 소파에서 새우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왜 꼭 동아리방 소파에서는 술 냄새가 나는 걸까?’
대찬은 피식 웃으며 동아리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둠 속에 정적이 흘렀다.
소파에 몸을 묻었다.
만사가 귀찮았다.
‘그래도 이는 닦고 자야지.’
대찬은 중얼거리면서 무거운 몸을 일으켜 불을 켰다.
탁.
“으악!”
스위치를 누르자마자 대찬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연히 방 안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불을 켜자마자 머리를 풀고 고개를 숙인 여자가 대찬의 시야 안에 들어왔다.
대찬은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켰다.
고개를 모로 기울여 여자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산하 선배?”
훌쩍.
김산하는 말 대신 코를 훌쩍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왜 그러고 있어요? 불도 안 켜고, 사람 놀라게.”
“…랬잖아…….”
“네?”
김산하는 고개를 확 들며 말했다.
“누나라고 하랬잖아! 선배라고 하지 말라고!”
“죄, 죄송해요……. 아니, 선배라고 했다고 무슨 소리를 그렇게 질러요.”
“꼬치꼬치 따지지 마. 그럴 기분 아니니까.”
대찬은 살짝 미간을 좁히며 김산하와 마주앉았다.
자세히 보니 눈가가 붉었다.
“울었어요?”
그러자 김산하는 황급히 손등으로 눈을 훔쳤다.
“우, 울긴 누가!”
“안 울었음 됐고요.”
눈 가리고 아웅이었지만 대찬은 굳이 김산하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찜찜한 구석이 있어서 대찬은 다시 물었다.
“진짜 심각한 일 아닌 거 맞죠?”
“…그래.”
“그럼 저 양치 좀 하고 올게요.”
칫솔을 물고 나가려는 대찬을 김산하가 붙잡았다.
“잠깐만.”
“왜요?”
“이 닦지 마. 나랑 소주 한잔해.”
대찬은 살며시 웃었다.
“사 올게요. 2병?”
“3병.”
소주 3병, 종이컵 2개, 새우깡 하나.
단출한 술상이 차려졌다.
대찬은 김산하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먼저 묻지 않았다.
침묵 속에 잔이 몇 순배가 돌았다.
김산하는 술 냄새 섞인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진짜 유백기 개새끼 아니냐.”
상종 못할 개종자죠.
하마터면 격한 동의를 표할 뻔했다.
대찬은 가까스로 되물었다.
“…왜요?”
김산하는 곧바로 동의하지 않고 왜요, 하고 되묻는 대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재수 없어, 진짜.”
“무슨 일 있었어요?”
“너도 그렇게 순진한 표정 짓지 마. 너도 공범이야!”
“유 선배 욕하다가 갑자기 왜 저한테 불똥이 튀어요?”
“네가 날 팀에 받아 줬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니까.”
“얘기해 봐요, 무슨 일인데요.”
“유백기 그 새끼가 나 도려냈어. 팀에서 나가래.”
그 순간 허탈함과 분노에 휩싸인 김산하가 대찬 자신과 겹쳐 보였다.
대찬의 목소리가 본능적으로 튀어 올랐다.
“왜요? 이유가 뭔데요?”
김산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가 보기에 대찬의 격한 반응이 자신을 위하는 것처럼 보인 까닭이었다.
“내가 당했다니까 막 화가 나고 그래? 꼭 네가 당한 것처럼?”
“네? 아, 네, 뭐…….”
대찬은 웃으면서 어물쩍 넘어갔다.
김산하는 종이컵 가득 술을 따라 마시곤 말했다.
“유백기. 아, 이름도 말하기 싫어. 이제부터는 그 새끼야.”
“좋으실 대로.”
유백기를 그 새끼라고 부르는 데 대찬도 대찬성이었다.
“그 새끼가 우리한테 그랬어. 선배들이 먼저 모범을 보이자. 일단 단기간에 수익 창출할 방법은 주식이 제일 좋은데, 01학번 자본으로 먼저 주식에 투자하자.”
“그래서요?”
“01학번 중에서도 회장인 승기랑 대외국장인 나랑 팀장인 자기 돈으로 먼저 하자고 했어. 뭐, 자기도 안 빠진다니까 그러자고 했지.”
잔뜩 열이 뻗친 김산하는 종이컵 가득 잔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