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0화
대찬의 부탁에 선배는 흔쾌히 응했다.
“당연히 가야지. 더 위에 기수 선배님들도 오시지?”
“예. 모두들 최대한 일정을 맞춰 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알았어. 수고하고.”
“네, 선배님.”
대찬은 선배들의 연락처가 적힌 수첩을 열심히 뒤로 넘겼다.
뒤로 갈수록 높은 기수의 선배들이었다.
“와우.”
대찬은 그 수첩에 적힌 이름들을 보고 에피니키온의 저력을 실감했다.
1기, 그러니까 대찬보다 24년 선배들의 이름들이 적혀있었다.
에피니키온의 창립 멤버들은 그 면면이 화려했다.
재계 5위 필래그룹 회장 서청수.
재계 1위 삼라전자 개척전략실 부실장 양문수.
재계 2위 대연자동차 경영부본부장 정의환.
NS 한국법인 사장 안두홍.
산업부 차관 한긍윤.
하나같이 화려한 면면이었다.
“선배들이 에피니키온에 목숨 거는 이유가 있었네.”
1기 이하 선배들 역시 한국 사회의 주류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대찬이 연락을 돌린 가까운 기수의 선배들이 기를 쓰고 참석하는 건, 이 주류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려는 의중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찬은 본인이 에피니키온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반발감마저 들었다.
“얼마나 자기들끼리 배부르게 해 처먹었을까.”
필래유통 시절에도 대찬은 이런 인맥의 피해자였다.
에피니키온에 발을 들인 건 이제 고작 두 달째였고, 그 대척점에 서서 살아온 것은 10년을 헤아렸다.
반발감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물론 저 빽빽하게 얽힌 인맥 탓만 할 수는 없다.
두 번째 삶과는 달리 첫 번째 삶은 자기합리화를 반복하며 미지근하게 살아왔으니까.
치열하게 살지 않은 대찬의 책임도 분명했다.
하지만 얽히고설킨 인맥의 그물이 노력의 발목을 잡았단 사실도 분명했다.
어쨌든 대찬은 이제 인맥의 울타리 안에 발을 들였다.
“손에 쥔 무기는 최대한 활용할 거야.”
하지만 대찬은 한 가지 각오만큼은 가슴에 아로새겼다.
“그래도 남들처럼 더럽게는 안 굴어.”
밀레니엄 키즈의 날은 서울 모처의 호텔에서 이뤄졌다.
물론 선배들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었다.
일개 동아리 행사를 이런 호화스러운 장소에서 하다니.
충격의 연속이었다.
과거의 대찬이 소속되었던 대학 동아리는 에피니키온에 비하자면 초라했다.
선배들도 참석하는 큰 모임이 있어도 파전을 안주로 두고 찌그러진 양은 사발에 막걸리를 부어 마셨다.
그것만의 낭만이 있기야 했다.
하지만 처지가 궁색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캐주얼 말고 정장으로 입고 와야 돼. 다들 알았지?”
신입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민승기는 신신당부를 했다.
그 옆에서 유백기가 실실 웃으면서 첨언했다.
“이래도 꼭 청바지 입고 오는 등신들이 있지. 격 떨어지게.”
“다 늘어진 아빠 양복 빌려 입고 왔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그 옆에 앉은 김산하가 톡 쏘았다.
유백기는 받아치지는 못하고 김산하를 째려보고 말았다.
“아무튼 중요한 행사니까 긴장들 좀 하는 게 좋을 거야.”
“네.”
신입들은 다들 당차게 대답했지만 대찬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밋밋한 표정을 짓고 있는 대찬에게 서원웅이 속닥거렸다.
“정장 있어?”
“아니. 하나 장만해야겠는데.”
대찬의 대답에 서원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사 줄게. 대학생 용돈으로는 버겁잖아.”
“괜찮아.”
대찬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
서원웅이 거듭 물질적인 호의를 베푸는 게 편하지만은 않았다.
단순히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호의에는 대가가 따른다.
베푸는 쪽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대가는 따르기 마련이다.
받는 쪽은 반드시 대가에 대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대가는 명시적인 보답일 수도 있고, 단순히 받은 은혜에 대한 부담감일 수도 있다.
대찬은 서원웅으로부터의 은혜를 한량없이 받을 생각이 없었다.
서원웅은 단순한 우정의 표시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대찬은 항상 그것의 무게를 생각해야만 했다.
대찬은 스스로를 위해서, 그리고 둘 사이의 건강한 우정을 위해서라도 호의를 사양했다.
“캐주얼 정장 정도는 내 주머니 사정으로도 괜찮아. 마음만 받을게.”
대찬의 말에 서원웅은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제든지 내 도움 필요해지면 말해. 너한테는 언제나 열려 있으니까.”
“말만으로도 고맙다.”
대찬은 서원웅의 팔을 툭 건드렸다.
우아한 클래식이 흘렀다.
영화에서나 보던 파티 장면이 대찬의 눈앞에 펼쳐졌다.
대찬은 서원웅에게 말했듯 저가의 캐주얼 정장을 입고 기념식에 참석했다.
식장은 늙고 젊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외모, 성격, 직장, 모든 것이 달랐지만 한 가지만은 같았다.
그들은 모두 에피니키온 소속이거나 출신이었다.
대찬은 긴장한 표정으로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인원들이 모두 참석하자 회장인 민승기가 앞으로 나섰다.
옷차림에 상당히 힘을 준 모습이었다.
얼굴은 살짝 홍조를 띠었다.
저 기라성 같은 선배들 앞에 선단 게 긴장되면서 설렜다.
“자, 모두들 주목해 주십시오.”
잡담을 나누던 에피니키온의 선후배들이 정면을 주목했다.
민승기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오늘 기념일 사회를 맡은 24기 회장 민승기입니다.”
선후배들은 박수로 호응했다.
민승기는 가볍게 고개 숙여 화답했다.
“에피니키온에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오늘을 위해 많은 선후배님들께서 공사다망하심에도 이렇게 자리를 빛내 주셨습니다.”
‘잘하네.’
대찬은 똑 부러지는 민승기의 사회에 흡족하게 웃었다.
“졸업자 대표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NS 한국법인 사장이시자 에피니키온의 총동문회장님, 에피니키온 1기 안두홍 선배님을 소개합니다!”
안두홍, 이름 석 자가 불리자 민승기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열렬한 박수가 터졌다.
평양 한복판에 수령 동무가 등장한 듯했다.
졸업자 선배들의 입장에서 민승기는 베풀어 줘야 하는 후배고, 안두홍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선배인 까닭이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안두홍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친애하는 후배님들을 이렇게 뵙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1기 안두홍입니다.”
안두홍은 차분하게 축사를 이어 갔다.
“25년 전 에피니키온을 처음 만들었을 때만 해도 이런 눈부신 발전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후배님들, 정말 대단합니다. 알라라!”
“알라라!”
안두홍이 알라라를 외치자 자리한 선배들이 일제히 알라라를 외쳤다.
“뭐야, 무섭게…….”
대찬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들의 알라라는 광신도의 구호처럼 열렬했다.
그러자 옆에 자리한 서원웅이 웃으면서 설명해 줬다.
“에피니키온 공식 구호야. 고대 그리스군 경례 구호였대.”
“아…….”
구려.
대찬은 떨떠름하게 웃었다.
일관성은 있네.
에피니키온, 그리스어로 승리의 노래라는 뜻.
알라라, 고대 그리스의 경례 구호.
무슨 이름을 짓든 무슨 구호를 갖든 자유다.
하지만 대찬은 내심 거북했다.
그리스와 조금의 접점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왜 그리스어 이름을 지었을까.
우리는 아는데 너는 모르지. 오만한 지적 허영심이 개입하지 않았다곤 말하지 못할 거다.
그리고 이 우리만 아는 이름과 구호는 우리의 결속을 더 굳게 할 것이다.
울타리 밖의 너희에게는 한없이 배타적으로 만들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련다.
너희야 잘 살든지 말든지.
안두홍은 축사를 이어 갔다.
“저는 올해로 NS 한국법인 사장의 직함을 내려놓고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려 합니다.”
개인사로 파고드는 축사가 대찬은 슬슬 지루해졌다.
그러다가 그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번에 모든 경험과 역량을 동원해 첨단 IT기술 업체인 AKD테크라는 회사를 설립하고자 합니다.”
그때 대찬의 잠자던 기억이 깨어났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다 싶더니.’
첫 번째 삶, 고원대와는 인연이 없는 대찬이 안두홍의 이름을 들은 건 뉴스를 통해서였다.
페이퍼 컴퍼니를 세우고 상당한 금액을 횡령했다는 보도였다.
대찬이 기억할 정도니 제법 시끄러웠던 사건일 터였다.
시끄러운 사건이었다는 건 그가 착복한 금액이 적지 않았다는 걸 의미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괜히 싫더라.’
“우리 에피니키온 출신의 인재를 적극 등용할 생각이니, 후배님들의 많은 관심을 기다리겠습니다.”
큰 박수가 터졌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안두홍으로서는 충성도와 결속력이 높은 후배들을 쓰는 게 좋았다.
후배들로서도 끈끈한 유대의 상사가 있는 회사에 들어가는 걸 선호했다.
그것이 에피니키온이 지금까지 잡음 없이 굴러오게 만든 주요한 힘이었다.
대찬의 시선이 자연스레 근처에 앉은 유백기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빛은 전례 없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아무렴.
“너무 개인적인 얘기를 많이 했군요. 일단 축사는 이쯤 해 두고, 우리 재학생 후배님들은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찬은 주목해 달라니 주목했다.
“오늘은 눈부신 성과를 낸 2000년도 졸업생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기념일이 천년만년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안두홍은 물로 목을 축이고 말을 이어 나갔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이 선배들보다 더 빛나야 합니다. 그래서 저를 비롯한 선배들이 작은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작은 발전의 계기?’
“선배들은 재학생 후배님들을 위해 수시로 에피니키온 창업 경진 대회, 일명 포스트 밀레니엄 키즈 콘테스트를 주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자 재학생 후배들이 술렁였다.
“경진 대회에서 우승한 후배에겐 거액의 장학금을 지급하겠습니다. 그 액수는…….”
좌중은 침을 꼴깍 삼켰다.
안두홍은 씩 웃었다.
“여러분이 결정할 겁니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대찬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다른 이들의 마음 역시 대찬과 다르지 않았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부원 한 사람당 100만 원씩 지급하겠습니다. 그걸 자본으로 돈을 버십시오.”
후배들은 잽싸게 수첩과 필기구를 꺼내 적기 시작했다.
대찬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간이 끝나면 자본을 포함한 모든 액수를 우승자가 독식합니다. 여러분의 말로 하자면 몰빵이죠.”
그러자 좌중이 술렁였다.
에피니키온에 소속된 재학생은 100명을 헤아렸다.
100만 원씩 지급하면 기본 자본만 총액 1억.
그런데 깡통깨나 굴리는 고원대 학생 중에서도 골라 뽑은 에피니키온의 부원들이다.
몇몇은 실패를 하겠지만 총액을 더하면 손실을 입지는 않을 터.
일확천금을 노릴 만한 기회였다.
벌써부터 김칫국을 시원하게 들이켠 부원들의 가슴이 뛰었다.
안두홍은 여기까지 말하고 미소를 지었다.
“자세한 내용은 우리 재학생 회장 민승기 후배님이 설명해 주시겠습니다.”
안두홍은 그렇게 축사를 마무리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민승기가 잽싸게 단상으로 올라와 설명했다.
대찬은 빠르게 손을 놀려 그의 말을 받아 적었다.
그의 수첩에는 민승기의 말이 요약되어 빼곡히 들어찼다.
-기간 4월 25일~5월25일(1달 간).
-1인당 100만 원의 자본 지급.
-자본을 활용해 수익 창출.(스포츠 도박, 아르바이트 등 금지)
-기간 내 가장 많은 수익을 창출한 부원이 우승.
-우승자는 수익 창출 방법과 이를 증명하는 자료를 첨부하여 보고서 작성.
-우승자는 모든 학생이 보유한 자산(자본+수익)을 독식.
여기까지는 안두홍이 설명한 것의 반복이었다.
-여럿이 팀 구성 가능, 개인도 가능.
-팀 구성은 자율.
-팀장 선출.
-팀장 절대적 권한 : 임의로 팀원 방출, 우승 시 임의로 상금 배분.(팀장 독식 가능)
-방출당한 팀원은 다른 팀에 새로 가입 불가.
‘팀장이 전두환 수준이네.’
대찬은 혀를 내둘렀다.
이 대회의 의도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선배들은 이 대회를 통해 에피니키온의 든든한 대들보를 뽑고자 하는 것이라고 그는 예상했다.
자본을 창의적인 방식으로 남들보다 더 많이 불릴 수 있는 대들보.
팀장의 절대 권력을 쥐고 카리스마 있게 군림할 수 있는 대들보.
아마 대회를 기획한 선배는 물렁한 인도주의자보다 냉혹하고 합리적인 우두머리가 탄생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 재목을 가려내기 위해 이런 퍽 잔인한 대회를 기획했을 것이다.
‘무서운 집단이야.’
사자가 새끼를 강하게 키우려고 낭떠러지에서 떠민다는 설은 거짓이라고 한다.
도리어 그런 습성을 가진 존재는 사람이라고 대찬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