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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9화 (18/556)

난 할 수 있어 19화

남자는 대찬을 노려봤다.

“너 뭐야?”

“다짜고짜 이게 무슨 짓입니까?”

첫 번째 시비가 붙었을 때야 술기운이 불콰하게 올라 욱했다.

하지만 불같은 사람에게 불처럼 달려들면 피만 본다.

대찬은 평정을 유지했다.

“너 뭐냐고.”

“산하 누나 후밴데요.”

둘의 목소리에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난감한 처지의 김산하가 급히 중간에 끼어들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아무 문제도 없어.”

“아무 문제가 없어? 지금 사내새끼랑 둘이 맥주 까고 있는데 문제가 없냐?”

“후배들 다 불렀는데 얘만 왔어. 고마워서 대찬이한테 치킨하고 맥주 사 준 거야. 뭐가 문젠데? 오빠, 지금은 내 애인 아니야. 나한테 뭐라 할 자격 없다고.”

“아주 정분 제대로 났네. 좀 있으면 애 갈겨 낳겠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근호는 단단히 미간에 주름을 잡으면서 주먹으로 벽을 쾅 쳤다.

“너는 처신을 왜 그따위로 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김산하의 말에 우근호는 어이없단 듯 허공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네 버르장머리 더럽게 안 고쳐진다. 역겨운 년.”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우근호는 이를 으드득 갈며 김산하의 손목을 낚아챘다.

낚싯대에 걸린 고기처럼 김산하는 그대로 우근호의 악력에 끌려갔다.

그러자 대찬이 우근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비켜.”

“그 손 놓으시죠.”

“비키라고.”

대찬은 우근호의 경고를 무시하고 김산하의 팔을 쥔 우근호의 손을 떨쳐 냈다.

김산하의 손목에 족쇄처럼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우근호는 눈이 뒤집혀서 당장이라도 대찬의 턱주가리에 주먹을 날릴 태세였다.

김산하가 급히 개입했다.

“조대찬, 끼어들지 마. 우리 둘 사이 일이니까. 시끄럽게 만든 건 미안해. 더 신경 쓰지 말아 줘.”

“진짜 괜찮겠어요?”

김산하는 그늘이 드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주 연놈이 쌍으로 생쇼를 하네.”

우근호는 코웃음을 쳤다.

“나가서 얘기해.”

김산하는 우근호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대찬은 부실에 혼자 남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박차고 나가 우근호와 한판 대거리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마냥 김산하에게 도움이 되리라곤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눌러앉아 있는 것도 떳떳하지는 않았다.

대찬은 남은 맥주를 죽 들이켜고 부실 밖으로 나갔다.

둘의 날카로운 대화가 귀에 전해졌다.

“짐승도 처맞으면 정신을 차리는데, 넌 처맞아도 왜 그 모양이냐?”

“…아무 일 없었다고 했잖아.”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냐? 사내새끼랑 단둘이 몰래 술 처마시고 있는 거 들켜 놓고 넌 뭐가 그렇게 당당하냐?”

“나는 오빠한테 헤어지자고 열 번도 넘게 말했어.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김산하는 애걸하듯이 말했다.

우근호는 기가 차단 듯 연신 헛웃음을 지었다.

“야, 네가 그럴 자격이 있냐? 결정은 내가 해. 난 아직 헤어질 생각 없어.”

“제발 그만하자. 나 이제 지쳐.”

“뭐? 지쳐? 이년이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완전히 꼭지가 돌아 버린 우근호가 김산하에게 손찌검을 하려고 했다.

그때 대찬이 우근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우근호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곤두섰다.

대찬은 김산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손찌검까지 하려고 드는데, 제가 끼어들어도 오지랖 아니죠?”

“대, 대찬아…….”

“뭐 저런 놈이랑 사귀고 그래요? 세상에 널린 게 남잔데.”

대찬은 우근호를 향해 불온한 눈빛을 보냈다.

우근호의 어깨가 움찔했다.

“너 뭐, 뭐야!”

“애인한테 힘자랑하는 거 안 쪽팔려요?”

“이 새끼가 진짜……!”

“하려면 나한테나 하든가.”

“하라면 못할 거 같냐? 이 새끼가!”

대찬은 씩 웃었다.

“못할 거 같은데, 새끼야.”

그 말이 간신히 유지되던 우근호의 이성을 완전히 끊어 버렸다.

우근호는 왁 소리를 지르며 대찬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대찬보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그랬기에 달려드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망설임이 없는 만큼 엉성했다.

대찬은 가볍게 우근호의 허점을 노렸다.

탁, 발을 걸어 그를 넘어뜨렸다.

“으윽!”

“하체가 너무 부실하다. 운동 좀 해야겠는데.”

우근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분노 반, 수치 반.

옷에 흙이 묻은 채로 대찬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시원하게 몽둥이찜질만 당하고 널브러졌다.

김산하는 놀란 얼굴로 우근호와 대찬을 번갈아봤다.

“어디서 굴러먹던 새낀지는 모르겠는데 인생 똑바로 살아. 애인 패고 다니는 건 너무 추잡하잖아.”

대찬은 그렇게 쏘아붙이곤 김산하의 손목을 잡았다.

여전히 우근호의 악력이 남긴 붉은 자국을 보고 대찬은 가볍게 손목을 붙들었다.

“가요. 맥주 김 다 빠지겠다.”

김산하의 시선이 다시 우근호 쪽으로 향하려고 했다.

대찬은 손목 쥔 손에 살짝 힘을 주어 그러지 못하도록 했다.

다시 부실에 마주앉은 대찬은 말없이 김빠진 맥주를 들이켰다.

맛없었다.

관우가 술이 식기 전에 적장을 베고 돌아온 건 식은 술이 무지하게 맛없는 걸 아는 까닭일지도 모른다.

대찬은 먼저 입술을 열지 않았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도 할 말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김산하의 마음이 내켜야만 발음될 수 있었다.

대찬은 마음이 내켜질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김산하에게 제공했다.

“이미 알겠지만 우근호랑 나는 사귀던 사이야.”

“네, 그건 알아요.”

어렵게 꺼낸 얘기에 대찬은 덤덤히 대답했다.

대찬은 김산하의 얼굴에 난 상처를 흘끗 봤다.

“그것도 그 자식이 낸 거예요?”

“아, 이거?”

김산하는 얼굴을 붉히며 상처를 매만졌다.

그러곤 한 박자 늦게 대답을 내놓았다.

“응.”

“나쁜 새끼네요. 조폭도 웬만하면 보이는 곳에는 상처 잘 안 낸다던데.”

“나쁜 사람이지…….”

오래 사귄 사람이라고 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우근호를 만났다고 했다.

4살 연상의 우근호는 당시 재수생이었다.

어른들 말은 죽어라 안 들으면서 4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단 소리는 덥석 믿었다.

“그때 우근호는 좋은 사람이었어. 존경심까지 들었거든.”

그런 그가 시간이 갈수록 변했다.

삼수에도 실패하고 사수, 오수까지 하다가 도망가듯 입대했다.

“아마 자격지심이 있었나 봐. 불안하기도 하고.”

멀리 철원까지 면회를 온 고3의 김산하에게 우근호는 짜증을 냈다.

군대라는 조직에서 스트레스는 필연이었다.

게다가 대학 문턱을 넘지 못한 데서 온 자괴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버무려졌다.

“그런 데다 내가 대학 들어가니까 더 심해지더라.”

우근호는 김산하를 의심했다.

대학 들어가서 누구랑 밥을 먹었느냐까지 캐물었다.

진실을 얘기해도 거짓말하지 말라 윽박질렀다.

“제대하고 나서는 거의 매일 학교에 왔어.”

“그 사람 수능은……?”

“대학에 들어가긴 했는데 목표하던 곳은 아니었어. 나한테 열등감이나 시기심도 들었을 거야.”

매일 찾아와서는 훼방을 놓았다.

김산하도 성격이 있어서 어느 날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눈물을 흘리면서 제발 그만하라고 했다.

“그러니까 때리더라.”

김산하는 울먹거렸다.

처음이 어려웠지, 그다음부터는 수월했다.

김산하의 몸에 멍과 상처가 늘었다.

“왜 진즉 헤어지지 않고요.”

“불쌍하잖아, 그 사람이.”

“불쌍하다고요……?”

김산하와 어울리지 않는 말에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사람, 나 고등학생 때 공짜로 과외도 해 줬어. 공부 하나만큼은 자신 있던 사람인데 그렇게 꼬여 버리고… 이 지경까지 된 거야.”

김산하는 두 손을 모으고 꼭 힘을 주었다.

“그 사람이 망가지는 모습을 옆에서 다 지켜보고 나니까 너무 불쌍해. 그렇게 될 때까지 내가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거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누나 잘못 아니에요.”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나까지 떠나 버리면 그 사람 완전히 미쳐 버릴지도 몰라.”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 그 사람은 누나한테 독만 될 뿐이에요.”

“제3자가 보면 그렇지. 그게 맞는 판단이기도 하고. 근데 당사자의 마음이 또 안 그래.”

김산하는 힘겹게 웃었다.

대찬도 김산하의 마음을 이해했다.

오랜 세월 얽힌 둘의 마음을 잠깐의 이야기만 듣고 쉽게 얘기할 수는 없었다.

김산하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그래도 끝내야겠지? 너무 힘들다.”

“네, 끝내세요.”

김산하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 갈등하다가 결심한 듯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웠어, 오늘.”

“뭘요.”

“결심이 섰어.”

“네, 결심대로 하세요. 흔들리지 말고.”

김산하는 우근호를 찾아갔다.

울지 않고 차근차근 사랑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말했다.

첫 만남부터 짚어 가던 김산하의 말은 그만하자로 끝났다.

우근호는 멍한 시선으로 김산하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그대로 김산하를 등지고 떠나갔다.

김산하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한참 울었다.

혹여 나쁜 일이 생길까 먼발치에서 둘을 지켜보던 대찬은 조용히 돌아갔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대찬은 김산하와 가까운 남자 선배, 동기들이 가능한 범위 안에서 김산하와 동행하도록 했다.

물론 큰 결례가 될 수 있는 일이기에 김산하의 의중을 먼저 파악한 뒤에 결정했다.

대찬이 김산하를 데려다주는 길에서 김산하는 수줍게 말했다.

“고마워.”

“그래도 대외협력국으로 저 데려온 보람이 있어야죠. 이렇게라도.”

대찬과 김산하는 마주보며 웃었다.

4월.

고원대 캠퍼스에도 벚꽃이 흐드러졌다.

대학생들에게 단풍놀이는 있어도 벚꽃놀이는 생소했다.

벚꽃의 꽃말이 중간고사라는 말이 캠퍼스에 퍼져 나갔다.

대학생들은 저마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피로 회복제며 커피며 한가득 쌓아놓고 머리를 싸쥐는 때였다.

대찬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남들처럼 도서관에만 틀어박혀 있지는 않았다.

최재한에게도 밝혔듯 학점만이 대학 생활의 목표가 아니었다.

물론 공부에는 도가 텄단 학생들이 입학한 학교이기에 최소한의 노력은 필수였다.

그렇지 않으면 학사 경고의 낭떠러지로 밀려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대찬의 주안점은 동아리에 있었다.

그는 에피니키온에 사활을 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럴 가치가 있는 조직이라는 걸 체감했다.

상상 이상으로 비대하고 끈끈했다.

대찬은 그럭저럭 중간고사를 치르고 난 뒤,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느끼게 되었다.

중간고사 기간 직후에 에피니키온의 기념행사가 있었다.

2000년은 에피니키온에 중요한 해였다.

그 해 에피니키온 소속의 졸업생들 전원이 기라성 같은 국내외 기업들에 들어가 에피니키온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선후배는 발군의 성과를 보여 준 2000년 졸업생들을 귀감으로 삼고 기념하는 날을 만들었다.

유일하게 미취업 상태로 남아 자타의 속을 끓이던 졸업생이 취업문을 넘은 그날을 기념일로 정했다.

그 졸업생은 가히 전설로 남았다고, 현임 회장 민승기는 말했다.

“그 선배, 벤처 기업에 들어갔거든. 울며 겨자 먹기로.”

2000년은 IMF의 여파가 현재 진행형인 때였다.

벤처 기업은 줄도산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흙 속에서 연꽃이 핀 거지. 그 선배가 입사할 때 받았던 스톡옵션이 지금 기준으로 한 40억 되려나.”

겨우 입사 2년 차에?

대찬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슨 회사인데요?”

“눈 소프트. 알지?”

“알다마다요, 온라인 게임 회사잖아요.”

눈 소프트는 당시 막 태동하던 온라인 게임의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그 뒤로도 승승장구해서 대찬이 서른여섯일 때에도 견실한 규모를 유지했다.

그 선배는 눈 소프트의 개국 공신 대우를 받으며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이사 직함을 꿰찼다고 했다.

늦깎이 취업자가 제대로 일을 터트리자, 그날이 에피니키온의 창립 기념일과 함께 양대 기념일로 취급되었다.

2000년도 졸업생을 기린다고 해서 밀레니엄 키즈의 날이라고 붙였다.

“네, 선배님, 저 에피니키온 25기 조대찬이라고 합니다!”

“어, 대찬이, 그때 신입 환영회에서 봤지.”

“예, 기억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래, 무슨 일이야?”

“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밀레니엄 키즈의 날을 맞아서 선배님께서 와 주십사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밀레니엄 키즈의 날이라니.

손발이 오그라드는 고유명사를 발음할 때마다 낯이 화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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