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8화
김산하는 대찬의 배를 툭 건드리고 주먹을 거둬들였다.
“착한 척하지 마. 선배들한테 평판 좋은 거 너도 알잖아.”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암튼 적당히 넘어갈 생각 하지 말고. 들어올 거지? 대외협력국.”
대찬은 빙글빙글 웃었다.
“글쎄요.”
“야, 선배가 들어오라면 들어올 것이지!”
강압적인 말이었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오히려 서먹서먹한 선후배 사이의 벽이 금방 허물어지는 느낌이었다.
“선배분들하고 더 친해진 다음에 결정할게요.”
“비싸게 굴기는!”
둘은 격의 없이 티격태격했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개입했다.
“여기서 뭐 하냐?”
대찬과 김산하와는 달리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였다.
둘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시시하게 웃던 김산하의 표정이 그를 보고 뻣뻣하게 굳었다.
또래로 보이는 남자였다.
인상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김산하에게 물었다.
“좋냐?”
“뭐, 뭐가…….”
김산하의 당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찬은 남자와 김산하의 얼굴을 잠깐 사이에 읽었다.
남자는 대찬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야, 너 뭐야?”
“뭐가?”
대찬은 반말로 받았다.
그러자 남자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이 새끼가 얻다 대고 반말이야?”
“넌 얻다 대고 반말이냐?”
“야! 쳐 돌았냐?”
남자가 흥분해서 대찬의 멱살을 쥐려고 하자 김산하가 뛰어들었다.
“그만해! 내가 먼저 말 건 거야. 괜히 싸움 걸지 마.”
김산하는 대찬을 돌아보며 말했다.
“미안해. 먼저 가.”
“…괜찮으세요?”
“신경 쓰지 마.”
김산하는 그렇게 말하고 남자의 팔을 대찬의 반대 방향으로 이끌었다.
남자는 대찬에게 눈을 부라리면서도 마지못해 김산하의 손에 이끌렸다.
“별 미친놈 다 보겠네.”
대찬은 쯧, 입술을 비틀었다.
이런 사소한 트러블이 있었지만 대학 생활은 대체로 즐거웠다.
삭막한 회사 생활, 그리고 공부에 매진했던 학교생활에 그의 심신은 지쳐 있었다.
그랬던 것이 일시에 해방되었다.
대찬은 강의에 있어 그다지 성실하지 않았다.
물론 새내기 대학생 때 공부에 매달리는 학생이 몇이나 되겠냐마는, 고등학생 시절 독한 각오로 공부에 열심이던 것을 지근거리에서 본 최재한은 의아하게 여겼다.
“야, 공부 안 해?”
“하긴 해. 딱 비 플러스 맞을 정도만.”
“이왕이면 열심히 해서 에이 플러스 받지 그러냐?”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에너지는 한정돼 있으니까.”
그 말대로 대찬은 한정된 에너지를 학점을 따는 데 소모할 생각은 없었다.
첫 번째 인생에서 쓴잔을 마셨던 건 학점 탓이 아니었다.
인맥 탓이었다.
따라서 그가 주력해야 하는 것도 역시 인맥, 인간관계였다.
에피니키온에 가입하라는 제의를 그 자리에서 넙죽 받아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단순히 선배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까닭이 아니었다.
혹은 거절하면 선배와의 관계가 틀어질까 봐 걱정한 까닭이 아니었다.
에피니키온이 지니고 있는 강력한 관계의 끈을 밑거름으로 삼아 도약할 작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백기처럼 살 생각은 없었다.
백지장 같은 능력과 변기통에 빠진 듯한 성품을 든든한 인맥의 동아줄로 은폐하여 성공할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에피니키온은 대찬의 능력과 성품을 과시할 무대로만 삼을 요량이었다.
고원대, 그리고 에피니키온의 인맥만 믿고 설치기에는 대찬이 받은 기회가 과분했다.
그리고 모처럼의 기회로 유백기처럼 살아 버린다면 못 견딜 일이었다.
나중에 몰려올 회한과 자괴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대찬은 에피니키온 활동에 열렬히 참여했다.
최재한은 활동에는 대찬보다 소극적이었고, 아낀 에너지를 학업에 쏟았다.
최재한이 웃으면서 대찬에게 말했다.
“야, 너랑 나랑 어쩐지 바뀐 거 같다.”
“그렇네. 고등학생 땐 네가 학생회에 올인 했고, 나는 공부에 올인 했으니까. 지금은 그 반대고.”
“에피니키온은 어때? 할 만해?”
“응, 할 만하긴 한데.”
“한데?”
“선배 하나가 마음에 걸리네.”
“유백기?”
“아니, 김산하…….”
“산하 선배? 왜?”
대찬은 피식 웃었다.
“그러게. 왜 신경 쓰일까.”
“조대찬 마음에도 슬슬 봄이 오나 보다.”
“그런 거 아냐.”
대찬은 멋쩍게 웃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김산하의 말대로 선배들은 눈여겨본 후배를 자기 부서에 들이려고 본격적인 영업에 들어갔다.
제법 좋은 인상을 남긴 대찬도 적극적인 구애를 받았다.
하지만 대찬은 모두 사양했다.
“선배, 저 대외협력국 들어갈게요.”
“진짜? 진짜지?”
김산하가 활짝 웃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나도 잘 부탁해.”
김산하는 대찬의 팔을 툭 건드리며 웃었다.
에피니키온은 단순한 동아리가 아니었다.
다수의 부원이 인생의 중요한 기회로 생각했다.
몇몇에게는 에피니키온 자체가 학교 생활의 전부였다.
그렇기에 간부들은 자신을 위하는 공명심과 공동체를 위하는 사명감으로 무장했다.
대외협력국은 에피니키온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선배들과의 소통과 학교 본부, 학생회와의 협의를 도맡았다.
대찬이 대외협력국을 선택한 건 그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에피니키온 내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 부서에 지원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좋은 선택이야! 솔직히 다른 데 갔으면 너도 후회했을걸?”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역시! 뭘 좀 아네.”
김산하는 맑게 웃으면서 대찬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그날로부터 대찬은 김산하와 자주 만났다.
대외협력국의 업무는 생각보다 많고 까다로웠다.
국원들끼리 협력할 일이 잦았다.
김산하는 좋은 선배였다.
많지 않은 용돈을 같은 국의 후배들을 위해 쓰고, 털털한 말에 세심한 배려를 섞을 줄 알았다.
“조대찬, 동아리 활동 할 만해?”
“네, 덕분에.”
대찬은 반농반진으로 공치사를 했다.
김산하는 피식 웃으면서 대찬의 팔을 툭 건드렸다.
이제 갓 고등학생 티를 벗은 후배들 중에서 대찬은 발군이었다.
유독 일머리가 좋고 인간관계에 적극적이었다.
그렇다 보니 김산하는 대부분의 후배들에게 호의적이지만 대찬을 더 기껍게, 편하게 여겼다.
둘 사이는 더욱 격의 없어졌다.
“선배들한테 전화 다 돌렸어?”
“…아뇨, 아직이요.”
“왜 여태 안 했어? 지금 내 말이 우습냐?”
말은 험악했지만 김산하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대찬도 쪼그라지지 않고 떳떳하게 응수했다.
“이제 1시간 됐어요. 1시간에 선배 200명한테 전화 돌리려면 안 쉬고 1분에 3.33명, 20초에 1명씩 해도 20명이 남아요. 한 명당 신호음만 10초 넘게 걸리거든요?”
“너 지금 나한테 대드는 거야?”
“1시간 만에 해내는 건 어렵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이게 진짜 입만 살아서!”
김산하의 눈은 대찬을 째려봤지만 입꼬리는 웃고 있었다.
짓궂은 장난에 짓궂은 대답으로 돌아오는 게 맘에 들었다.
다른 후배들은 김산하의 위세에 눌려 겸연쩍은 웃음으로 대꾸하기 일쑤였다.
김산하의 인상이 유독 표독스럽기 때문은 아니었다.
에피니키온 자체의 분위기가 수직적이었다.
그렇기에 가벼운 장난에도 후배들은 진지하게 반응했고, 장난을 건 김산하도 민망해졌다.
그러니 단순한 선후배 이상의 친분을 쌓기 어려웠다.
장난도 쿵짝이 맞아야 재밌는 법이다.
“자, 다들 지금은 이쯤 하고 각자 수업들 들어가. 오후 수업 끝나고 시간 되는 사람들은 부실로 오도록 해. 나머지 연락 돌려야지.”
“네.”
대외협력국원들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씩씩한 건 대답뿐이었다.
오후 6시, 부실에 온 사람은 대찬 하나뿐이었다.
김산하는 황당한 표정으로 허전한 부실을 바라봤다.
“엥, 너 하나냐?”
“다들 바쁘다던데요. 과제에 퀴즈에.”
대찬도 민망하게 웃었다.
“이놈의 새끼들을 그냥……!”
“참으세요. 다 각자 사정이 있겠죠. 다들 학점에 매달릴 시기잖아요.”
“그럼 넌 학점에 안 매달려서 지금 여기 있는 거냐?”
대찬은 김산하를 흘끗 보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뭐?”
김산하의 당황한 얼굴에 대찬은 픽, 웃곤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어차피 선배 몇 분 안 남았어요. 우르르 몰려와 봤자 일은 안 하고 이따 술 마실 궁리나 하겠죠. 제가 얼른 끝낼게요.”
“든든하네. 일당백이야.”
“그러니까 선배가 저더러 대외협력국 들어오라고 하신 거 아녜요?”
김산하는 말없이 빙긋 웃었다.
대찬은 웃음으로 화답하고 자리에 앉아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곤 오전에 그랬듯이 열심히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에피니키온 25기 조대찬이라고 합니다. 예, 지난번 자리에서 뵈었습니다. 네, 다름이 아니고 이번 행사에…….”
싹싹한 투로 할 말만 하는 대찬의 모습을 김산하는 흡족하게 바라봤다.
김산하는 대찬의 옆에 앉아 자신도 할 일을 했다.
야무진 둘이 일을 하니 금방 끝났다.
대찬은 숨도 돌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 그럼 저 먼저 들어갈게요.”
“뭐? 벌써 가게?”
“할 일 남았어요?”
“아,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왜요?”
김산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뜸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배고파! 밥이나 먹고 가자.”
“그, 그래요…….”
“치킨하고 생맥 시켰어. 괜찮지?”
“맥주까지요?”
김산하는 눈을 흘겼다.
“너 술 잘 마시는 거 다 알아. 뺄 생각 하지 마.”
“안 빼요.”
대찬은 피식 웃었다.
넓은 부실에서 단둘이 치킨을 뜯고 맥주를 마셨다.
선망의 대상인 예쁜 선배와 단둘이서 술을 마신다니.
그것도 선배가 먼저 제의해 주다니.
아마 20살의 대찬이었다면 이 상황이 황홀하기만 했을 거다.
그러나 아쉽게도 껍데기만 스물이었다.
알맹이는 마흔이었다.
닳은 마음에 봄바람이 전처럼 거세게 일지 못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적잖이 맥주를 마셔 볼이 발개진 김산하가 대뜸 말했다.
“앞으로는 선배라고 부르지 마. 딱딱해.”
“그럼 뭐라고 할까요?”
“누나. 좋은 말 놔두고 선배가 뭐야, 선배가.”
대찬은 속으로 웃었다.
이제 갓 신출내기 대학생 티를 벗은 녀석을 누나로 부른단 게 낯간지러웠다.
‘징그러워.’
대찬은 스스로에게 진저리를 쳤다.
그가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그 상처는 뭐예요?”
“어, 어? 상처는 무슨 상처!”
“그 눈썹 쪽에…….”
김산하는 당황한 투로 급히 상처를 감췄다.
“야! 내 얼굴을 언제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었어?”
“뚫어져라 본 적은 없는데요.”
김산하는 대뜸 소리를 질렀다.
“닥쳐! 술이나 마셔!”
“…네.”
둘은 말없이 술만 홀짝였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대찬은 흘끗 곁눈질로 김산하의 낯빛을 살폈다.
다시 그때의 그 불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대찬은 이유를 물을까 하다가 관뒀다.
때론 오지랖보다 외면이 나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
흐르던 침묵을 김산하가 먼저 깼다.
“나 할 말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대찬이 대답하는 그때, 부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대찬과 김산하는 흠칫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너 여기서 뭐 하냐?”
“그, 근호 오빠…….”
김산하는 부리나케 일어났다.
대찬은 근호라고 불린 남자를 봤다.
구면이었다.
지난번 다짜고짜 반말로 시비를 걸어왔던 녀석이었다.
대찬의 눈빛에 자연스레 적개심이 어렸다.
“여기서 뭐 하냐고.”
“오빠가 여길 왜 와. 내가 뭘 하든 오빠가 알 거 없잖아. 우리 진즉에 끝났다고.”
“닥쳐!”
남자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목소리가 부실에 쩌렁쩌렁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