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7화
“뭐야, 왜 이렇게 달라졌어?”
“옷이 날개라잖아.”
대찬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옷차림을 내려다보면서 멋쩍게 웃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건 날개 단 수준이 아닌데.”
“그렇게 많이 달라 보여? 나도 아직 어색해.”
“연극영화과 학생인 줄 알았어.”
“닭살 돋는다.”
“진짜야.”
몸이 배배 꼬이는 말에 대찬은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아, 나 지금 면접 보러 가는데.”
“면접? 무슨 면접.”
“교내 창업 동아리래. 에피니키온. 너는 동아리 어디 들어갈지 정했어?”
“난 아직.”
“그래?”
대찬은 웃음을 짓곤 최재한의 손목을 낚아챘다.
“너도 가자, 그럼.”
“뭐? 난 원서도 안 냈어!”
“원서 필요 없는 곳이야. 면접만 보면 돼. 잔말 말고.”
“난 창업 같은 거에 관심 없어.”
“대신 나한텐 관심 있잖아?”
“방금 그 말 소름 돋았어.”
“응, 너무 맞는 말이라 소름 돋았을 거야.”
대찬은 최재한의 말을 더 듣지 않았다.
반강제로 면접 장소까지 끌고 갔다.
서원웅은 벌써 도착해 있었다.
대찬은 그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선배들을 향해서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 조대찬.”
유백기는 여전히 겉으로는 냉랭했고, 민승기는 웃음으로 대찬을 반겼다.
“잘 왔어. 옆에 그 친구는?”
“아, 최재한이고, 국문과 신입생이에요. 저랑 초중고 같이 나오고, 어쩌다 보니 대학까지 같이 오게 됐어요.”
“와우, 천생연분.”
대찬은 떨떠름하게 웃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아무튼 이 친구도 에피니키온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면접 보러 오게 했어요.”
“내가 언제…….”
최재한이 눈치 없이 끼어들려고 하자 대찬은 그의 발등을 살포시 밟았다.
최재한은 꿀꺽 말을 삼켰다.
민승기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대찬이 친구면 받아 줘야지. 면접 편하게 봐요. 붙여 줄 테니까.”
“아, 말씀 감사합니다. 그래도 면접은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최재한의 싹싹한 말투에 민승기는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 학생회장으로서의 성과를 면접에서 조리 있게 설명했고, 무리 없이 면접을 통과했다.
이미 입이 맞춰져 있었으니 결과는 싱거웠다.
대찬, 최재한, 서원웅 모두 에피니키온의 신입 부원으로 낙점 받았다.
본래 집단의 새로운 일원이 된단 건 긴장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긴장은 대개 모르는 얼굴들 사이에 끼어들면서 오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대찬은 그런 긴장에서 해방된 상태였다.
최재한과 서원웅, 든든한 동기들이 있었다.
민승기와의 친분은 두텁지 않았지만, 일단 호감을 얻는 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유백기는 지금의 상황이 마냥 좋다고 볼 수도 없고, 그다지 좋아지고 싶지도 않았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임에는 분명했다.
따라서 모르는 얼굴들로 인한 긴장이 대찬에게는 없었다.
면접 결과는 신속하게 나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입 부원 환영회가 열렸다.
대학생들의 형편이야 으레 넉넉하지 않기 마련이었다.
만만한 치킨이 대령했고, 사람마다 맥주가 담긴 500cc 유리잔이 놓였다.
“25기 에피니키온 신입 부원들을 위하여!”
“위하여!”
대찬은 에피니키온의 역사가 25년이나 되었단 것에 놀라며 잔을 부딪쳤다.
“자, 그럼 회장의 환영사가 있겠습니다.”
“새로이 에피니키온의 일원이 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회장이 운을 떼자 주변의 동기들이 야유를 보냈다.
“야, 딱딱하게 굴지 말고 편하게 말해. 닭살 돋는다.”
“닭살 돋았어?”
민승기는 멋쩍게 웃었다.
그가 에피니키온의 회장이었다.
3학년부터는 슬슬 취업 전선에 뛰어드는 시기였기에 2학년이 주로 회장직을 맡았다.
물론 취업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에피니키온의 특성상 고학년들의 참여율이 높기는 했다.
민승기가 회장이었구나.
대찬의 눈에 그가 조금 달리 보였다.
이런 자리가 많았는지 민승기는 제법 능숙하게 에피니키온을 소개했다.
“에피니키온은 우리 학교에서 가장 권위 있는 동아리입니다. 창업 동아리로서 숱한 벤처 기업 창업주들을 비롯해서,”
“야야, 벤처 기업 얘기는 하지 마라. 반은 지금 한강에 들어가 있으니까.”
자리에는 사회에 진출한 선배들도 다수 참석해 있었다.
개중 하나가 농담을 던지자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씁쓸한 블랙 코미디였다.
IMF의 여파로 벤처 기업 신화가 붕괴된 시점, 농담 아닌 농담이었다.
민승기는 겸연쩍게 웃으면서 정정했다.
“아, 죄송합니다. 어쨌든 그런 선배들을 비롯해 국내외 유수의 기업에서 중역을 맡으신 훌륭한 분들을 다수 배출했습니다.”
신입 부원들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민승기의 말을 경청했다.
정장을 빼입고 말투에 여유가 넘쳐흐르는 저 선배들처럼 되기를 바랐다.
“후배 여러분들도 열심히 활동해서 훌륭한 선배들의 전통을 이어받으시길 바랍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할 거고요.”
후배들은 경외하는 만큼 큰 박수 소리로 화답했다.
이어서 사회에 진출한 선배들의 명함이 한바탕 돌았다.
대찬의 손에도 두툼한 명함 뭉치가 들렸다.
‘대단하긴 하네.’
삼라전자, 경선그룹, 양룡, 락희그룹, 대연자동차, 고골코리아, NS코리아.
민승기의 말 그대로 유수의 기업 소속 명함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국내 기업 말고도 삼척동자도 알 만한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선배들도 많았다.
최재한은 혀를 내두르며 대찬에게 말했다.
“와, 다른 세상에 온 거 같아.”
“그러게 말이야.”
“괜히 위축되네.”
“위축될 건 뭐야. 저분들도 처음에는 우리 같았을 텐데.”
“그건 그렇네.”
1차는 치킨과 맥주로 간단하게 진행되었다.
에피니키온 동아리 활동비로 값을 치렀기 때문에 약소했다.
그런데 자리를 옮기고부터는 격이 확 뛰었다. 슬슬 취기가 오르기 시작한 선배들이 나선 까닭이었다.
그들은 많은 돈을 내는 것을 명예로 여기는 듯했다.
경매하듯 지갑을 열었다.
덕분에 대찬은 값비싼 술과 안주로 자리를 즐겼다.
선배들은 남의 얘기는 안 듣고 자기 잘난 얘기만 주야장천 해댔다.
그들을 보고 대찬은 오랜만에 회식 자리에 앉은 기분이 들었다.
한심한 장면이었지만 반갑기도 했다.
대찬은 허영심 넘치는 선배들의 비위를 능숙하게 맞췄다.
이런 윗사람들을 상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경외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와, 대연 신차 라에다RX가 선배께서 만드신 거였어요?”
“내가 만든 것까진 아니고, 기여를 좀 많이 했단 거지.”
“그게 그거죠. 대단하네요. 이번에 반응이 엄청 열광적이던데요? 저희 아버지도 좀 무리해서 꼭 사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냐? 반응이 나쁘지는 않다고 하더라.”
“앞으로 밖에서 라에다 보면 뿌듯할 것 같습니다. 저희 선배 작품이니까요.”
“입에 발린 소리 한번 잘한다.”
“입에 발린 소리 아녜요.”
대찬은 깍듯하게 선배들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과하지 않고, 그렇다고 무심하지도 않게.
무수한 입사 선배들과 거래처 직원들을 상대했던 경험의 결과였다.
체면을 생각해 제 입으로 말하지 못하는 칭찬을 대찬이 대신 해 주었다.
가려운 곳만 골라서 긁어 주는 핀 포인트 칭찬이었다.
풋내기 대학생들은 따라는 해도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선배들의 마음이 대찬에게 쏠렸다.
“야, 회장.”
“네, 선배.”
“이번에 들어온 애들 중에 조대찬이가 싹싹하니 괜찮더라. 눈여겨봐 둬.”
“제가 직접 발탁했습니다. 잘했죠?”
“그래. 잘했다, 인마.”
민승기의 너스레에 선배는 픽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민승기는 헤헤 웃으면서 시선을 건너편의 대찬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선배들의 자랑을 능숙하게 받아 주면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대찬은 선배들의 예쁨을 독식하지 않았다.
최재한과 서원웅이 조금이라도 대화에서 소외될라 치면 그들의 공치사를 하며 다시 대화의 중심에 데려다 놨다.
“이 친구가 있잖아요, 저희 고등학교 다닐 때 회장이 돼 갖고…….”
그러면 최재한은 쑥스럽게 뒤통수를 긁으면서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다.
“꼭 선배가 고등학교 다니실 때 이랬을 거 같다니까요.”
대찬은 한참 최재한의 얘기를 하다가 다시 공을 선배들에게로 넘겼다.
남의 얘기에 슬슬 따분해지려던 선배는 다시 그 말을 듣고 열심히 자기 얘기를 했다.
대찬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단 격언의 무서움을 잘 알았다.
경험으로 알았다.
첫 번째 삶, 대찬은 업무 능력만 믿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뒤를 돌아보았을 때, 뒤처진 동료들의 원망 섞인 눈빛을 의식하게 됐다.
그는 동기들 모임에서 소외되고, 뒷공론의 대상이 되었다.
대찬이 유백기의 사노비 신세로 전락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잡을 동아줄이 유백기뿐이었기에 그는 속수무책으로 당해 버렸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조직이란 다함께 있어야 그 진가를 발휘한다.
독보적인 개인기를 선보이는 녀석은 도리어 도태된다.
대찬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체감했다.
그래서 걸음을 조금 늦춰 남을 도와주는 것이 결국 빠르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방법임을 대찬은 알았다.
“조대찬이, 꼭 다음에 연락해라. 술 사 줄 테니까. 사회생활 팁도 좀 알려 주고.”
선배들은 자리가 파할 때 대찬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한 마디씩 보탰다.
개중 기분파는 지갑을 열어 1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 쥐여 주었다.
“용돈 해라.”
대찬은 서른여섯, 그리고 고2로 돌아와 2년을 더 살아 38년을 생활인으로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선배들은 풋내기들에 불과했다.
후배들을 상대로 알량한 권위를 내세우는 모습이 귀여웠다.
하지만 대학 새내기라는 본분에 충실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는 직각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민승기에게 다가갔다.
“선배, 제가 챙길 돈은 아닌 거 같아서요. 이거 동아리 회비로 쓰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철두철미하네.”
민승기는 픽 웃으면서 대찬이 내민 돈을 접수했다.
“네?”
“칭찬이야. 빈틈이 없다고. 그리고 너, 취하지도 않냐?”
“괜찮아요.”
“어째 술 마시기 전보다 정신이 더 맑아진 거 같아.”
“제가 간은 좀 튼튼하잖아요?”
대찬은 윗배를 두드리면서 웃곤 민승기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어, 그래. 또 보자.”
대찬은 민승기와 헤어지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대찬?”
“네?”
누군가의 목소리가 대찬의 걸음을 붙들었다.
대찬이 돌아보니 머리를 길게 내린 여자가 서 있었다.
‘예쁘다.’
직관적인 감상이 머리에 떠오를 정도로 예뻤다.
대찬은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했다.
특히 눈빛이 깊고 맑았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걸어오는 목소리는 발랄하면서도 당당했다.
‘이럴 때 확실히 젊어진 보람이 있네.’
따지자면 대찬이 숨 쉬고 산 건 첫 번째 삶과 두 번째 삶을 합해 40년이 넘었다.
마흔 넘은 아저씨가 스물한 살 먹은 아가씨를 보고 얼굴을 붉히면 높은 확률로 그 아가씨는 불쾌할 것이다.
하지만 정신은 마흔이 넘었되, 몸은 이제 갓 스물이다.
뺨에 홍조를 띠어도 추태가 아니라 낭만으로 인정받는 나이.
대찬의 얼굴에 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대찬은 그가 자리에 있던 선배들 중 하나라는 걸 얼른 생각해 냈다.
그리고 이름까지도.
“나 알아?”
“아, 김산하 선배님.”
대찬이 이름을 맞히자 김산하는 환하게 웃었다.
“용케 아네.”
“네, 그럼요. 근데 무슨 일로…….”
“영업하려고.”
“영업이요?”
김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피니키온 부원들 엄청 많잖아.”
“네.”
“그래서 부서 안에서도 경쟁이 치열해. 새내기들 들어오면 자기 부서로 데려오려고.”
대찬은 의아한 듯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부서요? 딱히 경쟁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팀을 꾸릴 일이 많거든. 동아리 치고 부서별로 일도 많고. 그래서 다들 똘똘한 새내기들 데려오려고 하지.”
“그렇군요.”
대찬은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서 선빵 때리려고. 나 대외협력국장이거든. 들어와.”
“새내기들 많은데 왜 굳이 저를…….”
대찬이 겸손한 투로 말하자 김산하는 그를 찌릿 째려봤다.
그러더니 그의 배를 향해 가볍게 주먹을 뻗었다.
‘초면부터 뭐 이렇게 과감해.’
대찬은 김산하의 막힘없는 성격에 약간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