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6화
“저기… 대찬이?”
“네?”
“혹시 동아리 어디 들어갈지 정했니?”
친절한 목소리에 대찬도 사근사근하게 대답했다.
“아뇨, 아직 못 정했는데요.”
“그럼 혹시 우리 동아리 들어오지 않을래?”
“무슨 동아리인데요?”
대찬이 관심을 보이자 선배의 눈빛이 돌변했다.
“잘 들어 봐. 2012년이 되면 지구 종말이 올 거야. 지구 종말까지 10년밖에 안 남은 거다, 10년! 그때를 대비해서 우리는 지하에 방공호를 구축하고, 장기 보관이 가능한 식량을 개발하면서…….”
갑자기 투사적으로 바뀐 목소리에 대찬은 잠시 당황했다.
무어라 입술을 떼지 못했다.
그사이, 그 선배를 밀쳐 내고 또 다른 누군가가 대찬에게 다가왔다.
그는 지구 종말 운운하는 녀석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곧장 대찬에게 말을 걸었다.
“조대찬, 나 01학번 민승기라고 하는데.”
“내가 먼저 대찬이에게 지대사에 대해 설파하고 있었어. 차례 지켜.”
발언권을 뺏긴 선배가 민승기를 향해 눈빛을 쐈다.
그 말에 대찬이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선배,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쪽에는 관심이…….”
“지금은 천하태평이지만 반드시 후회할 거다!”
2012년을 살아 본 입장으로서는 헛웃음만 나왔다.
“선배, 10년 뒤에도 지구는 이 모양 이 꼴로 계속 가요.”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최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전히 말귀를 알아먹지 못하는 그를 밀어낸 민승기가 발언권을 강제로 얻어냈다.
“하필 순서가 저 꼴통들 다음이라 짜증나긴 하는데, 나도 우리 동아리에 가입하라고 말하려고 왔다.”
“무슨 동아리인데요?”
“지구 종말 어쩌고 하는 놈들하곤 비교가 안 되는 동아리지. 에피니키온.”
“에피니키온?”
“그리스어야. 승리의 노래라는 뜻인데.”
“민중가요 동아리인가요?
그 말에 민승기는 풋 웃었다.
“아니, 창업 동아리.”
창업 동아리라.
“역사도 깊고 규모도 큰 동아리야. 우리 동아리에서 활동한 선배들 중에는 경험 살려서 실제로 창업해 성공한 분도 계시고, 대기업 입사할 때 큰 플러스 요인이 되기도 해. 대기업 임원 중에도 선배들이 많이 계셔.”
“그렇군요.”
구미가 당겼다.
취미를 찾자면 기타 동아리나 야구 동아리에 들어갔을 거다.
하지만 한가하게 취미에 쏟을 시간이 없었다.
창업 동아리라면, 사회에 나간 뒤에도 분명히 도움이 될 거다.
꺼리지 않는 대찬의 표정을 보고 민승기가 은근히 말했다.
“어때, 가입해 볼래? 사실 굳이 후배들 찾아다니면서 권유 안 해도 지원자는 충분해. 면접 경쟁률이 보통 4 대 1이니까.”
“그런데 저한테 왜……?”
민승기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건 비밀인데, 유백기가 너한테 권유해 보라고 하더라.”
“유백기 선배가요?”
희한한 일이었다.
오히려 자길 괴롭혀 주면 좋아하는 특이 성향이었나, 그 사람.
대찬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어제 유백기 엿 먹이긴 했어도 그놈 마음에 들었나 봐.”
“그렇군요.”
“어때, 들어올래? 아마 후회는 안 할걸.”
어떻게 하든 유백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인가.
대찬의 마음이 묘했다.
민승기의 제안에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네. 제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입할게요.”
“시원시원하네. 내 맘에도 들었어.”
민승기는 씩 웃으면서 대찬의 등을 두드렸다.
“근데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뭔데?”
“아까 선배보다 먼저 홍보하시던 선배가 말하던 지대사가 뭔가요?”
“지구 종말을 대비하는 사람들.”
“아.”
대찬은 짧은 탄성으로 감상을 표했다.
그러면서 제 옆의 서원웅에게도 말했다.
“원웅아, 생각해 둔 동아리 없으면 같이 들어갈래? 에피… 선배, 죄송한데 이름이 뭐라고 했었죠?”
“에피니키온.”
“아, 맞다. 에피니키온.”
민승기는 서원웅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사실 얘는 우리가 너보다도 먼저 점찍었던 친구야.”
그 말에 대찬은 눈을 크게 떴다.
“네? 원웅이를요?”
“응.”
“왜요?”
“그런 이유가 있어. 우리가 관심 있게 보던 둘이 친해 보이니 좋네. 서원웅, 너도 들어올 거지?”
대찬과 선배가 동시에 권유하니 서원웅으로서는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생각했어.”
민승기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자리를 떴다.
“엉겁결에 동아리 가입까지 해치워 버렸네.”
“그러게.”
대찬의 말에 서원웅도 미소를 지었다.
대찬은 서원웅을 바라보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서원웅을 점찍어 놨었다고? 왜?
애초에 한 줌 쥔 정보만으로는 알아내기 어려웠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대찬은 유백기와 마주쳤다.
유백기는 대찬에게 퉁명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승기한테 얘기 들었지?”
“예, 들었습니다.”
“가입할 거지?”
“네, 물론이죠.”
유백기는 대찬을 아래위로 훑어보곤 말했다.
“잘해라.”
“네. 좋은 기회 주신 만큼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대찬은 웃으면서 유백기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저께 무례하게 군 거, 사과드릴게요. 죄송합니다.”
한솥밥을 먹게 된 이상 유백기의 눈 밖에 날 필요는 없었다.
해프닝이 있기도 했지만 유백기는 대찬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풀 건 풀고 가는 게 좋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찬이 유백기에게 호감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이성적인 판단에 의한 행동일 뿐이었다.
대찬이 물렁하게 나오자 유백기는 당황하면서도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어? 그,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대찬이 머리를 푹 숙이자 유백기는 인자한 미소마저 머금었다.
대찬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지금은 좋아해 둬라. 나중에 오장육부 다 뽑아서 하나하나 씹어 먹어 줄 테니까.’
대학의 새 학기는 고등학교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우선 칙칙한 교복 대신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는 옷차림부터 그랬다.
대찬도 한껏 멋을 부렸다.
사실 외모 꾸미는 데는 크게 관심도 없고 감각도 영 없었다.
하지만 달라지기로 결심했다.
인맥은 평판이 좌우하고, 평판에는 외모가 주효한 역할을 한단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외모는 결정적으로 타고나는 것이지만 후천적인 노력도 필요했다.
마침 그럴 계기가 생겼다.
어느 날, 서원웅이 제안했다.
“대찬아, 나랑 옷 사러 안 갈래?”
“그래, 가자. 학교 옆에 옷가게 하나 생겼더라. 거기 가 볼까?”
“음… 아니?”
너무나도 간단히 거절하는 서원웅을 보고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원웅의 성격은 물에 물 탄 듯하단 표현이 가장 적절할 정도로 부드러웠으니.
“그럼 어디?”
“내가 자주 가는 곳 있어. 맘에 들 거야. 같이 가자.”
서원웅이 앞장서 향한 곳은 강남의 한 쇼핑몰이었다.
대찬의 집안은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가격표에 0이 많이 붙은 옷을 스스럼없이 살 정도로 유복하진 않았다.
머뭇거리는 대찬과는 달리 서원웅은 시원시원하게 걸음을 내디디며 대찬을 이끌었다.
이 상황만 떼고 보면 대찬과 서원웅의 영혼이 바뀐 듯했다.
“이거, 이거, 이거.”
서원웅은 거침없이 옷을 담았다.
대찬은 아연실색했다.
“야, 입어는 보고 담아야지.”
“안 맞으면 다른 친구들 주면 되잖아.”
“…어어?”
서원웅은 피식 웃고 다시 무식한 쇼핑 방법을 고수했다.
대찬이 든 쇼핑 바구니에 무서운 속도로 옷이 차곡차곡 쌓였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거 다 살 거야?”
“응.”
“…다 네 거지? 난 이거 다 감당 못해.”
대찬은 얇은 지갑을 떠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예산이 빠듯했다.
바구니에 담긴 것 중에 2벌이나 겨우 살까 싶었다.
서원웅은 씩 웃으면서 말했다.
“내 거 반, 네 거 반. 걱정하지 마. 내가 살 테니까.”
“어? 아, 아니야. 무리할 거 없어. 난 괜찮아.”
“줄 때 받아. 나 돈 많아.”
그렇게 말하는 서원웅의 뒤로 금빛 후광이 번쩍이는 듯했다.
역시 곳간에서 인심 나는 모양이었다.
“됐어. 괜찮아.”
대찬은 거푸 사양했다.
그럼에도 서원웅은 기어코 한 무더기의 명품을 대찬에게 안겨 주었다.
얼떨떨했다.
“진짜 받아도 돼?”
“안 받으면 화 낼 거야.”
대찬은 멍한 표정으로 한아름 안긴 옷과 신발을 내려다봤다.
이게 무슨 일이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싼 것들로 치장했다.
지금 몸에 걸친 옷들이면 대찬의 옷장을 통째로 사고도 남았다.
살 돈은 있되, 꾸밀 감각은 없는 것이 졸부들이다.
그런데 서원웅의 감각은 졸부의 것도 아니었다.
상하의와 신발이 어느 한 군데 심하게 튀지 않고 적절하게 어울렸다.
아마 대찬이 코디했다면 우스꽝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자주 쇼핑하나 봐?”
“가끔.”
서원웅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그는 대찬의 머리를 잠깐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도 좀 만지자.”
말하면 이루어졌다.
서원웅은 대찬을 미용실로 데려가 패션에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을 선사했다.
전신 거울로 스스로의 모습을 보니 완전히 탈바꿈한 것을 한눈에 알 정도였다.
대찬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서원웅에게 물었다.
“이렇게 해 준 건 고마운데… 대체 왜?”
“친구잖아.”
그렇게 간단한 말이 이런 대단한 호의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대찬은 생각했다.
“물론 나도 원웅이 네가 좋은 친구라곤 생각하는데, 그래도 이렇게까지…….”
“각자의 방식으로 도와주는 거지. 나는 성격이 그렇게 싹싹하지도 않고 매사에 서투르거든. 대신 돈은 남들보다 좀 있지. 그걸로 도와줄 뿐이야.”
“뭣도 없는 내가 술 대신 마셔 주는 걸로 도와줬던 것처럼?”
“그래.”
“그래도 그렇지…….”
서원웅은 호의 섞인 눈짓을 보내며 대찬의 등을 툭 두드렸다.
“너, 동하고등학교 나왔지?”
“어? 네가 그걸 어떻게…….”
“나 기억 안 나?”
“기억은 무슨…….”
대찬은 눈을 깜빡거리면서 서원웅을 응시했다.
그때 2년 전의 기억이 대찬의 뇌리를 스쳤다.
골목 어귀에서 돈을 뜯기던 학생.
우연찮게 대찬과 마강국이 나서서 구해 줬던 학생.
대찬의 이름을 물어보고 여러 번 중얼거렸던 학생.
대찬은 스쳐가는 인연이라며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던 학생.
그 후로 까먹어 버렸던 학생.
“고마워, 나 대신 싸워 줘서.”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던 학생.
“아……!”
“이제 기억났어?”
“그때 이름도 못 물어봤어. 미안.”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이름이었는데, 뭘.”
대찬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서원웅은 대찬을 바로 알아봤는데 대찬은 몇 밤을 같이 지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다.
서원웅이 섭섭했을까,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나 그때, 네가 나설 때 위로도 받았고 자신감도 얻었어. 앞으로의 인생은 너처럼 살겠다고 결심했어.”
“그렇게까지 말해 주니까 낯간지럽네.”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야. 사실이니까.”
대찬은 옅은 웃음만 짓고 말았다.
대찬은 부끄러웠다.
인연을 함부로 재단하는 일은 얼마나 섣부른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했던 게 다시 여기로 돌아왔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만 하죠.”
교수가 강의를 마치고 자리를 뜨자마자 대찬은 가방을 챙겨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에피니키온의 면접 날이었다.
캠퍼스를 걸어가던 와중에 대찬은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한달음에 달려가 그의 등을 툭 건드렸다.
“최재한! 대학 생활 할 만해?”
대찬의 알은체에 최재한은 멀뚱한 시선만 보냈다.
그러고는 황당한 소리를 했다.
“…누구세요?”
“와, 이제 대학 가서 새 친구 사귀었다고 나 팽하는 거야?”
“설마 조대찬……?”
“그럼 누구겠어.”
그 말에 최재한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