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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5화 (14/556)

난 할 수 있어 15화

유백기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 02학번 의리가 이따위냐?”

유백기의 일갈에도 동기들은 침묵했다.

그들 역시 알코올에는 내성이 없던 차였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와중에 서원웅까지 챙길 정신이 없었다.

동기라곤 하지만, 기실 냉정하게 따지고 보자면 오늘 처음 본 사이였다.

의리는 은박지만큼 얄팍했다.

에휴, 대찬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침묵 속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기.”

선배와 동기의 시선이 대찬에게 쏠렸다.

대찬은 덤덤하게 말했다.

“제가 마실게요.”

그렇게 말한 대찬은 종이컵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물론 그라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다.

마시자마자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도 주량에는 자신이 있었다.

회식이 끝나고 나서 뻗어 버린 유백기의 뒤치다꺼리는 항상 그의 몫이었다.

종종 작정하고 자기를 죽이려 드는 날에는 별수 없었지만, 보통의 경우라면 대찬은 맨정신을 유지했다.

그런 경험이 대찬 스스로가 유백기보다 주량이 강하단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시비 걸어 볼 배짱이 생겼다.

대찬은 호기롭게 술을 마셨다.

선배와 동기들은 놀랐다. 소주 한 잔으로 끝날 문제가 아님을 아는 까닭이었다.

이건 유백기가 의도한 상황이 아니었다.

한바탕 꾸지람 섞인 일장연설로 선후배의 위계질서를 확립하고, 동기 사이의 단결을 강조하는 내용을 더 이어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대찬이 일찌감치 나서서 산통을 깨 버렸다.

대찬은 병을 들어 공손하게 유백기를 향해 기울였다.

“선배, 제가 한 잔 드릴게요.”

“어, 어?”

유백기는 엉겁결에 잔을 내밀었다.

대찬은 유백기가 서원웅에게 그랬듯이 한 잔 가득 술을 따라 주었다.

유백기가 02학번 후배들에게 훈계하던 상황이, 대찬과 유백기가 일대일로 잔을 나누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유백기가 잔을 들고 멀뚱히 대찬을 봤다.

대찬은 슬그머니 자신의 빈 잔을 내려다봤다.

나도 마셨으니 너도 마시라는 제스처였다.

유백기는 잠깐 꾸물거리다가 휙, 대번에 술을 넘겼다.

“너도 마셔.”

오기가 발동한 유백기는 곧바로 대찬의 잔을 채웠다.

대찬은 잔이 채워지자마자 잔을 비웠다.

그러곤 유백기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그러면서 슬쩍 한마디 얹었다.

“혹시 술이 좀 취하실 거 같으면 말씀하세요. 무리하지 마시고.”

예의 바른 목소리에 담긴 말이 유백기의 속을 긁었다.

“무리하지 마시고?”

유백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것 봐라? 누굴 핫바지로 알고…….’

고의적인 도발이었다.

유백기는 대찬을 노려보며 대꾸했다.

“그럴 일 없어. 너나 무리하지 마.”

이제 유백기와 대찬만의 싸움터로 바뀌었다.

대찬이 제 안위만 생각했다면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서원웅 이하 불쌍한 동기들은 구제되었다.

대찬은 주량으로 유백기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주량을 겨룬단 건 얼마나 미련하고 한심스러운가.

대찬 스스로도 잘 알았다.

하지만 미련한 싸움을 해서라도 저렇게 뻗대는 유백기를 잠재우고 싶었다.

치사량의 알코올을 먹고 콱 죽어 버려도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저 미래의 유백기에게 당했던 수모의 만분의 일이라도 앙갚음 하고 싶었다.

“드시죠.”

미련한 자존심 싸움이 시작되었다.

둘은 안주도, 물도 없이 강소주만 마셨다.

그것도 쉼 없이.

순식간에 소주 7병이 동났다.

빳빳한 종이컵은 흥건하게 젖어 흐물흐물해졌다.

뽀드득.

대찬은 8병째의 소주 뚜껑을 땄다.

유백기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시게?”

“네.”

대찬은 싱겁게 대답했다.

유백기의 잔을 보니 바닥에 소주가 꽤 많이 남아 있었다.

슬슬 술을 꺼리기 시작했단 증거였다.

‘얼마 안 남았네, 돌아가시기까지.’

대찬은 속으로 웃으면서 다시 잔을 채웠다.

대찬이라고 속이 편하진 않았다.

알코올이 목구멍에서 꿀렁이는 듯했다.

대찬은 억지로 삼켰다.

그러면서 유백기를 압박했다.

“드시죠.”

대찬은 다시 소주를 죽 들이켰다.

유백기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대찬이 유백기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선배?”

“…….”

유백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었다.

그러다 숙인 고개가 점점 아래로 꺼졌다.

쿵.

마침내 그르르, 거품 끓는 소리를 냈다.

실은 속에서 알코올과 섞인 음식물이 끓는 소리일 터다.

그러더니 의식을 잃은 채 쿵, 옆으로 쓰러졌다.

이어서 욱욱, 소리를 냈다.

“야야, 저 새끼 여기다 토하겠다!”

선배들이 부리나케 일어나 질질 끌다시피 해 유백기를 화장실로 옮겼다.

곧이어 화장실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굳이 글자로 옮기자면 구웨에엑, 구웨에엑.

위장에 켜켜이 쌓인 소주를 토해 내는 소리였다.

‘무리하지 마시라니깐.’

대찬은 건방지게 들릴 수 있는 말은 속으로만 했다.

유백기가 꼴사납게 쓰러지자 자리는 유야무야 끝났다.

“자, 오늘은 다들 씻고 자자.”

다른 선배의 말에 일제히 해산했다.

대찬도 비틀비틀 일어났다.

서원웅이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괜찮아?”

“괜찮아.”

대찬은 서원웅의 부축을 사양했다.

그러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안 따라나와도 돼.”

“정말이야?”

“정말.”

대찬은 숙소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술이 세다는 건 남들보다 낫다는 것이다.

그게 무적을 의미하진 않았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속에 가득 찬 소주가 일렁이는 느낌이었다.

대찬은 최대한 숙소에서 멀리 떨어졌다.

야산 중턱에 있는 호스텔이었다.

몇 걸음 뒤는 암흑천지의 야산이었다.

대찬은 나무를 붙들고 직각으로 허리를 꺾었다. 수풀 위에 속에 있는 걸 온통 게워 냈다.

시큼한 위액이 올라왔다.

내장을 토하는 듯 고통스러웠다.

한참을 게워 낸 대찬은 입가를 손등으로 슥 닦으며 허리를 세웠다.

정신이 어지럽고 속이 부대끼는 와중에 유백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풋.”

정신 못 차리고 비틀거리다가 픽 쓰러지던 꼴.

친구들의 손에 질질 끌려가 변기통을 붙들고 토사물을 쏟아 내던 꼴.

“푸핫.”

대찬은 절로 웃음이 터졌다.

한번 터진 웃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푸하하하!”

허리를 젖히고 캄캄한 야산을 바라보며 맘껏 웃었다.

그의 웃음이 가까운 메아리로 돌아와 울렸다.

큭큭큭, 대찬은 남은 웃음까지 깨끗이 마저 웃었다.

야밤에 산을 마주하고 폭소하는 대찬을 누군가가 봤다면 미친놈이라고 했을 거다.

대찬은 응어리진 속을 웃음으로 비워 내고 후, 거센 날숨을 뱉었다.

속이 후련해졌다.

대찬은 가뿐한 걸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이미 거나한 취기 때문에 대부분 잠이 들거나 여기저기 멋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대찬은 수건을 목에 걸고 칫솔을 입에 물었다.

화장실로 향하는데 서원웅이 쪼르르 따라왔다.

“괜찮아?”

“괜찮을 리가. 핑핑 돈다.”

서원웅은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어지간히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아니야. 꼭 너 때문이라기보다도.”

대찬은 목소리를 죽여 서원웅의 귀에다 속닥거렸다.

“유 선배 나대는 게 너무 꼴 보기 싫었어.”

“그건 그래.”

서원웅도 킥킥거리며 작게 대답했다.

대찬은 칫솔에 치약을 묻혔다.

“빨리 양치해 버려야지. 올라오는 술 냄새 때문에 더 취하는 거 같아.”

대찬은 서둘러 이를 닦기 시작했다.

서원웅은 그런 대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고마워.”

“됐다니까 그러네.”

대찬은 칫솔을 문 채로 서원웅을 돌아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이 은혜는 내가 나중에 꼭 갚을게.”

대찬은 물로 입안을 헹궈 내면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것 때문에 나중에 간암 걸리면 간이나 이식해 줘라.”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내 도움 필요할 일 있으면 꼭 말해 줘. 진짜 내 일처럼 도울 테니까.”

“말만으로도 고맙다.”

대찬은 서원웅의 등을 툭툭 건드리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곧 혼곤한 잠에 빠졌다.

2박 3일의 새터 일정 중에 겨우 하룻밤이 지났을 뿐이었다.

아직 강릉에서의 하룻밤이 더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전날의 여파로 유백기는 종일 방에서 앓아누웠다.

새벽 내내 토하고 앓는 소리를 내던 그였다.

대찬의 상태 역시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안주 없이, 물 없이 단시간에 술을 마시니 내장이 제멋대로 노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유백기보다 상태는 좋았다.

일정을 소화할 정도는 되었다.

콩나물 몇 가닥 들어 있는 미지근한 국물이 아침으로 나왔다.

대찬은 아쉬운 대로 그걸 떠먹으며 속을 다스렸다.

둘째 날 일정 역시 지루한 절차들일 뿐이었다.

대찬은 따분한 표정으로 학과 내에 설치된 동아리 소개, 성 평등 강의, 학과장 교수의 애교심에 찬 화려한 역대 동문에 대한 소개를 들었다.

비단 대찬의 표정뿐만이 아니라 동기들의 표정도 매한가지였다.

따분하기도 하거니와 어제 들이부은 술의 여파가 적지 않았다.

그들은 앞에서 누가 떠들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었다.

구부정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죄다 20살답지 않은 푸석푸석한 피부와 퀭한 눈빛이었다.

“우리 고원대학교 경영학과 출신 선배들 중에서는 이 사회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이를 테면…….”

학과장 교수의 장광설에 대찬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 시각.

유백기는 내장마저 게워 내듯 변기를 붙들고 요란하게 구토를 하고 신음을 흘렸다.

“으어…….”

기진맥진한 그는 넋 나간 눈빛으로 화장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개 같은 놈…….”

후배 하나 군기 잡으려다가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말았다.

“그놈 하나 때문에…….”

유백기는 과음으로 정신을 잃으면서 마지막으로 목격한 대찬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이를 갈았다.

그는 실실 웃음을 짓고 있었다.

눈에 힘이 들어가다가 이내 힘이 탁 풀려 버렸다.

호되게 당했다.

“야, 너 괜찮아?”

대찬에게는 선배이고, 유백기에게는 동기인 남학생 하나가 중간에 올라와 유백기의 상태를 살폈다.

어지간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유백기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죽다 살았다.”

“그러게 작작 마시지 그랬냐.”

“야! 이렇게 된 게 내 탓이냐? 조대찬인지 뭔지 하는 개새끼만 아니었어도 이럴 일 없었어!”

“네가 비실비실해 보이는 녀석한테 술만 안 먹였어도 이런 일 없었지.”

맞는 말이지만 기분이 나빴다.

“시비 걸러 온 거냐?”

“걱정돼서 왔다. 속 괜찮아? 뭐 먹을 거라도 갖다줘?”

“그건 됐고, 조대찬 말이야.”

유백기가 대찬을 언급하자 그의 동기는 웃음을 지었다.

“응, 오늘 밤 너 대신 복수라도 해 주랴? 자신은 없다만.”

“그게 아니라 우리 동아리에 가입하라고 권유해 봐.”

친구는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왜? 뭐가 예쁘다고?”

“이렇게 엿 먹었는데 가만둘 수 없지. 데려와서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똑똑히 알려 줄 거야.”

“그러다 또 당하면 어쩌려고?”

조롱조의 물음에 유백기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무튼 권유해 봐.”

“뭐, 네가 추천한다면야 가입 권유는 해 볼게.”

친구는 유백기의 곁에 숙취 해소 음료를 놓곤 자리를 떴다.

유백기는 친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부리나케 음료의 뚜껑을 따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모든 걸 게워 낸 내장이 짜릿했다.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동아리를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한 선배가 대찬에게 접근했다.

그는 대찬이 목에 건 이름표를 보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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