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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4화 (13/556)

난 할 수 있어 14화

무색무취로 흘러갔던 첫 번째 고등학생 시절과는 달리 다사다난했다.

인생의 물줄기가 틀어졌다.

틀어진 물줄기는 앞으로도 대찬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이끌 것이다.

“심심하진 않겠네.”

옷장을 닫으니 겉면에 부착된 거울이 대찬의 얼굴을 비췄다.

그는 거울 속의 자신과 시선을 맞췄다.

그의 얼굴은 절정의 젊음을 뽐냈다.

고등학교에서의 생활을 공식적으로 끝내자마자 대학 분위기에 휩싸였다.

입학식 전부터 선배들로부터 연락이 쇄도했다.

이런저런 모임이 잦았다.

특히 개중에서도 백미는 바로 오리엔테이션, 우리말로 하자면 새내기 배움터, 그걸 또 줄이자면 새터였다.

강릉에 있는 리조트로 2박 3일간 진행된단 연락이 대찬에게도 왔다.

“너 새터 갈 거지?”

같은 학교 소속인 최재한은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대찬에게 물었다.

다른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됐단 설렘으로 어지간히 가슴이 뛰는 모양이었다.

다만, 대찬에게는 그런 설렘이 없어 돌아오는 대답은 덤덤했다.

사실 대단할 건 없는 자리란 걸 아는 까닭이었다.

선배는 알량한 권위를 확인받고 싶어 하고, 후배는 그 알량한 울타리 안에 들어가게 됐단 걸 기쁘게 여기는 자리였다.

구토하고 혼절하듯 잠들 때까지 술잔이 도는 자리일 뿐.

“가야지.”

“정장 입고 오라는 말도 있던데… 진짜야? 그래야 여자들한테 인기 많아진다고.”

“응, 맞아. 흰 장갑에 중절모 쓰는 거 잊지 말고.”

고원대학교 경영학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대운동장에 집합한 후 인원이 확인되자마자 버스로 강릉까지 이동했다.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최소 4년, 어쩌면 평생 이어질 인연이 만들어지는 자리였다.

어쩔 수 없이 대찬의 가슴도 살짝 빠르게 뛰었다.

자리 자체에 긴장한 건 아니었다.

새롭게 자신을 선보이는 자리에서 어떤 인상을 심어 줄 것인지, 조금이라도 나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했다.

“안녕하세요?”

대찬은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앳된 외모였는데 어딘가 허약해 보였다.

볼은 움푹 패 있었고, 피부는 희다 못해 창백했다.

눈빛에도 힘이 없었다.

초면에 외모만으로 동정심을 유발할 정도였다.

대찬의 인사에 옆자리의 그가 힘없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안녕하세요.”

“신입생이세요?”

“네. 서원웅이라고 합니다. 그쪽은……?”

“저도 신입생이에요. 조대찬이에요.”

대찬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그의 얼굴이 일순 확 밝아졌다.

“조대찬이었구나, 역시.”

“네?”

조대찬이었구나, 초면에 어울리지 않는 인사말에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원웅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대찬이 손을 쑥 내밀자 서원웅은 그의 손을 맞잡았다.

대찬은 그가 마음에 들어 씩 웃었다.

“잘 부탁드릴게요.”

“아, 저도…….”

강릉으로 가는 내내 대찬은 서원웅과 대화를 나눴다.

따분하기도 했고, 서원웅의 됨됨이가 마음에 들기도 했다.

활발하진 않지만 예의 바르고 인간적이었다.

서로 동갑인 걸 확인한 둘은 이내 말도 편하게 했다.

“형제는 있어?”

“아, 아니. 외동이라고 봐야지. 너는?”

대찬은 서원웅의 대꾸에 살짝 미간을 좁혔다.

‘외동이면 외동이지, 외동이라고 봐야지는 뭐야?’

대찬은 캐물으려다가 관두고 서원웅의 질문에만 대답했다.

“누나 하나 있는데 없으니만 못해. 아주 웬수라니까.”

“그래도 나는 형제 있는 친구들 보면 부럽더라. 집안에 또래가 있단 건 축복이야.”

대수롭지 않게 장난으로 웬수 운운했는데, 서원웅이 그렇게 말하니 대찬은 어쩐지 미안해졌다.

“뭐, 아주 가끔은 쓸모가 있긴 하지.”

“사실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도 친구는 별로 없었어. 보다시피 몸이 그렇게 튼튼한 편은 아니라 자주 병원 신세를 졌거든. 그래서 애들 축구할 때 멀찍이 바라보기만 했어.”

“아…….”

“담배 연기에도 기침이 자주 나와서 피시방도 못 가 봤고.”

“그래도 대학은 또 다르니까. 굳이 축구 안 해도, 피시방 안 가도 친구 사귈 수 있잖아?”

“그럴 수 있을까? 사실 자신은 없어.”

대찬은 실없이 웃으며 말했다.

“뭐라도 된 듯이 말했지만 나도 뭐 다르지 않아.”

“그래? 너는 처음부터 자신감이 넘쳐 보였어.”

“가식이야. 다 처음 보는 얼굴이고 환경도 낯설어. 그래도 나는 좀 안심이 된다. 잠깐 사이에 좋은 친구 사귄 거 같아서.”

그 말에 서원웅은 눈을 크게 떴다.

“그 좋은 친구가 나야?”

“그럼 또 누구겠어?”

대찬의 말에 서원웅은 뭉클한 표정을 지었다.

대찬은 미소를 지어 방금 전의 말이 허황되지 않았음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버스는 강릉에 도착했다.

해 떠 있을 때의 일정은 얼렁뚱땅 넘어갔다.

의례적인 일들이었다.

교수가 나와서 학과 소개를 하고, 시답지 않은 레크리에이션을 했다.

“자, 이제는 조별로 모여서 움직이겠습니다!”

과대표가 큰 목청으로 말하자 대찬의 한 학번 위, 그러니까 01학번 선배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들은 같은 조에 배정된 후배들의 이름을 부르며 일사불란하게 조별로 뭉쳤다.

대찬과 서원웅은 같은 조로 묶였다.

“조대찬 학우! 서원웅 학우!”

“네!”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대찬은 큰 목소리로 즉각 대답했다.

목소리가 원체 작은 편인 데다 괜한 부끄럼이 많은 서원웅은, 저렇게 쩌렁쩌렁하고 군기 든 목소리로 대답할 수 있는 대찬이 부러우면서도 신기했다.

“아, 여기 있네.”

대찬의 목소리를 들은 선배가 이쪽을 바라봤다.

순간 대찬과 눈이 마주쳤다.

“…어?”

선배의 얼굴이 대찬의 시야에 뚜렷이 들어왔다.

대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얇은 눈썹, 삼백안, 도드라진 광대, 주걱턱.

‘뭐지, 어디서 봤더라…….’

낯이 익어도 너무 익었지만, 대찬은 곧바로 그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다.

속이 답답했다.

그 선배가 다가와 간단한 악수를 청할 때까지 그는 가물가물한 기억력을 원망했다.

“그쪽이 조대찬?”

“네. 제가 조대찬이고, 이쪽이 서원웅이에요.”

대찬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서원웅의 팔을 끌어당겨 제 앞으로 데려왔다.

이렇게 마음씨가 고우면서도 연약한 녀석들은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그것이 이들이 본능적으로 구사하는 비기인지도 모른다.

“아, 대찬이, 원웅이.”

선배는 그렇게 편하게 이름을 부르면서 자연스레 말을 낮췄다.

선배가 먼저 편하게 해 주는 쪽이 자신도 편해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01학번 유백기야. 앞으로 잘 지내보자.”

유백기.

대찬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대찬의 몸에 뻗친 혈관들에서 피가 급하게 돌았다.

분노가 치밀었다.

유백기.

대찬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다.

눈의 핏발이 곤두섰다.

눈에서 살의가 빛났다.

이렇게 재회할 줄은 몰랐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유백기도 고원대학교 경영학과를 나왔다.

대찬보다 2살 많았지만 재수를 해서 학번으로는 하나 위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새터에도 얼굴을 비치는 게 당연했다.

고등학생으로 2년을 보내면서 유백기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진 터였다.

대찬은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가까스로 표정을 단속했다.

그러고는 내키지 않는 손을 뻗었다.

유백기가 내민 손을 잡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

“그래. 너 말투 싹싹한 게 맘에 든다야.”

그 말에 대찬은 소름이 돋았다.

대찬이 유백기를 처음 본 건 필래유통에 입사하고 선후배 대면식 때였다.

그가 직각으로 허리를 꺾으며 인사를 했더니, 당시 유백기 주임은 특유의 껄렁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 태도 싹싹한 게 맘에 든다야.’

그때의 기억이 두통을 동반해 몰려왔다.

첫인상은 그때와 같겠지만, 같은 건 그것뿐이야.

대찬은 유백기와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여기서 만나는구나, 개새끼…….’

손아귀를 옥죄는 힘에 유백기는 당황했다.

“뭐, 뭐야, 너! 왜 힘주고 난리야!”

“아,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나 봐요.”

유백기는 대찬의 손을 뿌리치고 벌겋게 손자국이 난 제 손을 주물렀다.

그러면서 황당하다는 듯 대찬을 바라봤다.

대찬은 화가 난 듯하면서도 웃고 있었다.

“자, 이제 각자 조별로 돌아가서 휴식 후 취침하시면 되겠습니다.”

휴식 후 취침이라고 말하는 저 과대표도 밤새 술을 풀 것이다.

대찬도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걸 알고 더 힘을 냈다.

대찬은 말끔하게 세수를 하고 나왔다.

그의 복장은 이미 편한 트레이닝복이었다.

술 마시기에 최적화된 복장이었다.

대찬은 서원웅에게 물었다.

“술 잘 마셔?”

“술? 아니, 잘…….”

체형부터가 술하곤 거리가 멀었다.

대찬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요령껏 잘 피해. 술 먹이려고 혈안들이 돼 있을 테니까.”

서원웅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술 좀 마시는 걸 갖고 그러느냐 할 수 있겠지만, 이맘때 오리엔테이션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기도 했다.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사망이었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베란다에서 바람을 쐬다가 추락사를 하는가 하면, 치사량의 알코올로 사망하는 일이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 있었다.

새터는 소주잔을 주지 않는다.

종이컵에 술을 따라 마신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양이 가늠이 안 된다.

하지만 요령 좀 피울 줄 아는 사람에게는 도리어 좋다.

소주잔은 투명하지만 종이컵은 불투명하다.

술 권하는 악마의 레이더에 적발될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진다.

다만, 서원웅은 종이컵의 이점을 활용하지 못하는 초짜라는 것이 문제.

“마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는 유백기의 사정권에 들어가 있었다.

대찬이 아는 유백기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실천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예수가 바구니에서 무한대로 떡 5개를 꺼냈듯, 취한 후배로 하여금 바닥에 무한대의 토사물 파전을 부치게 하는 데서 유래했다.

“마셔.”

서원웅의 종이컵에 한가득 소주를 따르는 폼을 보아하니 대찬이 아는 유백기와 지금의 유백기가 크게 다르지는 않은 듯했다.

“마셔.”

정신없이 쏟아지는 ‘마셔.’의 향연에 이미 서원웅의 정신은 반쯤 빠져나갔다.

저 순진한 녀석은 선배의 요구가 떨어지기 무섭게 종이컵 안의 소주를 전부 들이켰다.

대찬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서원웅은 눈이 풀린 채로 고통에 몸부림쳤다.

“으으…….”

“뭐야, 설마 벌써 뻗으려는 건 아니지?”

유백기는 냉소를 지으며 사정없이 서원웅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대찬이 보기에 서원웅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은 듯했다.

유백기의 동기인 동시에 서원웅의 선배란 작자들은 그런 그를 말리지 않았다.

일종의 기선 제압이리라.

물렁하게 굴면 아마 선배의 권위가 무너진다고 생각한 듯하다.

대찬이 보기에는 유치하고 한심할 뿐이었다.

“선배… 더, 더는 못 마시겠어요.”

“뭐야, 이제 시작인데. 너 그러면 대학 생활 못한다?”

유백기의 말에 주위의 선배들은 간헐적인 웃음으로 호응했다.

‘유백기 네놈 성격은 대학 때부터 막돼먹었구나.’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유백기는 다시 서원웅에게 강권했다.

“마셔. 안 그러면 너 선배들한테 첫인상 안 좋게 남는다.”

유백기의 압력에 서원웅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잔을 들었다.

그러나 종이컵에서 물씬 올라오는 화학 약품 비슷한 소주 냄새만으로도 서원웅은 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가 헛구역질을 하자 유백기는 질색을 하면서 자신의 후배들이자 서원웅의 동기들을 향해 눈을 흘겼다.

물론 그 대상에는 대찬도 포함되었다.

“너희는 의리도 없냐? 동기가 죽어 가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어? 전장에서 피 철철 흘리는 동료 그냥 내버려둘 거야?”

대찬은 꽁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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