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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3화 (12/556)

난 할 수 있어 13화

대찬은 웃으면서 마강국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 밥 먹는 애들 표정들 봐라. 너만 그런 거 아냐.”

대찬의 말을 들은 마강국이 주변을 바라봤다.

주변의 사람들은 수능을 보러 온 수험생들인지, 아니면 육개장을 떠먹는 문상객들인지 분간이 안 될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잘했으니까 남은 시험도 으쌰으쌰 잘해 보자.”

그건 비단 마강국을 격려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대찬 자신에게 거는 주문이기도 했다.

3교시 외국어 영역과 4교시 탐구 영역까지 모두 마친 대찬은 녹초가 되었다.

해가 짧아져서 모든 절차를 마치고 마침내 수능에서 해방되었을 땐 슬슬 해가 서쪽으로 숨으려는 참이었다.

수능 끝나자마자 피시방으로 진격하자던 최재한의 호기로운 선언은 수능이 끝나자 바로 폐기되었다.

한나절 사이 모든 정신력을 쏟아부은 최재한은 반송장이 되어 비틀비틀 걸었다.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시험을 끝낸 수험생들은 그 시간까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부모의 손을 잡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부모를 보자마자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는 학생들도 있었다.

대찬은 그들에 비하자면 덤덤한 편이었지만, 서럽게 우는 그들을 보면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들 정도는 아니지만 대찬도 정신력이 고갈되었다.

드디어 지독한 야간 자율 학습에서 해방됐단 기쁨보단 당장의 쪽잠이 급했다.

그는 한눈팔지 않고 곧바로 귀가했다.

“고생했다!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밥 먹고 푹 쉬어라.”

어머니는 대찬의 등을 두드리며 그렇게 말했다.

아무 생각 말라지만 수험생 마음이 그렇지 않았다.

그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수험표 뒷면에 적어 온 답안을 가채점했다.

결과는 400점 만점에 342점.

그러니까 100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85.5점에 해당하는 점수였다.

“수능 어려웠다더니… 많이 어렵긴 했나 보다.”

누나 조수진이 대찬의 점수를 보고 우려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는 쉬운 수능을 보고 대학에 들어갔으니 그럴 법했다.

고3에 이르러서는 전교 상위권을 유지하던 대찬이었다.

그것에 비하자면 난이도를 고려하더라도 낮은 점수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찬의 표정은 밝았다.

“누나, 이 점수면 어디 갈 거 같아?”

“글쎄… 서울 중위권까진 가겠는데 그 위로는 잘 모르겠네.”

“고원대는 갈 거 같아.”

그 말을 들은 조수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원대?”

으음……. 조수진은 말을 아꼈다.

고원대는 어림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당장 수능을 보고 온 동생에게 악담을 할 수는 없으니 침묵할 뿐이었다.

그런 누나의 모습을 보고 대찬은 웃음을 지었다.

“나랑 내기할래? 고원대 가나 못 가나.”

“고원대는 힘들 것 같은데.”

“그러니까 내기하자니까?”

조수진은 그다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 남동생의 마음을 생각해 주저했다.

그러나 거듭되는 대찬의 도발에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사리사욕을 도모하기로 했다.

“좋아! 내가 이기면 카메라 렌즈 사 줘. 네가 이기면 뭐 해 줄까?”

“음, 다른 건 됐고 밥이나 맛있는 거 사 줘라. 이왕 하는 내기니까 비싼 걸로 정하자. 백제호텔 칠선 어때?”

“미쳤어! 거기 1인분에 15만 원이야!”

“아이구, 카메라 렌즈는 300원쯤 하나 봐?”

“좋아. 어차피 내가 살 일은 없으니까!”

조수진은 그렇게 확신했다.

평소 무뚝뚝한 아버지는 잔뜩 달아오른 딸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쉽게 감추지 못했다.

물론 1인당 15만 원 하는 코스 요리의 맛이 유달리 좋기도 한 까닭이었다.

어머니도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값비싼 음식을 입안 가득 넣고 우물거렸다.

“어머, 딸 덕에 이렇게 비싼 음식도 다 먹어 보고! 아니, 아들 덕이라고 해야 하나?”

“누나, 이왕 가족한테 좋은 일 하는 거 인상 좀 펴지?”

“시끄러워!”

조수진은 카메라 렌즈는 고사하고 꼬박 모은 용돈을 한 끼에 탕진해 버렸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대찬은 그저 이 상황이 재밌을 뿐이었다.

대찬은 고원대 경영학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내기에서 대찬이 이겼다.

부모님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공부는 등한시하던 아들이 2년간 나 죽었소, 선언하고 공부에 매진했다.

그리고 성과를 거둬 냈다.

부모로서는 자식 농사 잘해냈단 말이 절로 나왔다.

대학 졸업장은 사실 벽돌 하나 놓는 일일 뿐이라고 여기는 대찬도, 진심으로 기뻐하는 부모님의 모습에는 뿌듯했다.

“대찬, 축하한다.”

“너도 축하해.”

최재한이 소주잔을 들면서 대찬에게 말하자 대찬도 잔을 들며 화답했다.

짠.

유리끼리 부딪치는 소리 다음으로 대찬이 사족을 붙였다.

“너는 축하받은 지 좀 되긴 했지만.”

최재한이 합격 통보를 받은 건 한 달 전이었다.

대찬이 응시한 정시 전형보다 수시 전형이 빨리 발표되는 까닭이었다.

그 역시 고원대학교에 합격했다.

법대와 더불어 높은 점수대를 형성하는 경영학과에 지원하지는 않았다. 최재한은 국어국문학과를 선택했다.

조금 더 안전한 선택이면서 그 분야에 대한 최재한의 관심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는 일찍이 대찬의 말을 듣고 준비했듯이 학생회장 경력을 십분 활용했다.

물론 학생회장은 전국의 학교 수만큼 많았다.

하지만 최재한처럼 학생회장으로서의 자격과 권리를 120퍼센트 활용한 사례는 없었다.

전형에서 요구하는 수능 최저 등급을 턱걸이로 넘긴 성적이었지만, 그의 경력이 제대로 위력을 발휘했다.

“축하해, 조대찬.”

마강국도 잔을 갖다 댔다.

마강국은 고원대보단 못하지만, 그래도 이름이 알려진 대학의 체육학과에 합격했다.

광화대학교 체육대학.

어렸을 때부터 특정 종목을 갈고닦은 건 아니었지만 원체 타고난 체격과 체력이 좋았다.

실기에서도 당당히 만점을 받고 무난히 합격했다.

“광화대도 좋은 학교야. 우리 열심히 하자.”

대찬이 굳이 그렇게 언급한 건, 첫 번째 수능을 보고 들어간 대학이 광화대인 까닭이었다.

“내 실력에 광화대면 교문까지 삼보일배 하면서 들어가야지.”

마강국도 적잖이 기분이 좋은지 평소 잘 하지 않던 너스레까지 떨었다.

짠.

다시 한 번 잔이 부딪쳤다.

대찬은 대번에 소주를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크, 좋다.”

그간 술을 마시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대찬이 술을 멀리한 것은 미성년자에게 음주를 금지하는 이 나라 법의 지엄함을 두려워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결기가 흐트러지는 까닭이었다.

한 번에 술을 마시는 대찬을 보고, 음주에 관한 한 선배라고 자부하는 마강국이 시답잖은 충고를 했다.

“맛있다고 넙죽넙죽 마시지 마. 그러다 너도 모르게 취한다.”

“어, 그래. 알았다.”

“술이란 게 참 무서운 녀석이거든…….”

폼을 잡는 마강국을 보고 대찬은 삐져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이 녀석아, 입사하고 매일 술 푸던 나날이었단다.

“그래그래. 조심할게.”

입으로는 마강국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짠, 짠, 짠, 짠.

이제 막 스물이 된 풋내기들의 술자리답게 말소리보다 술잔 부딪치는 소리가 더 잦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소리는 느려지고 잔은 빠르게 부딪쳤다.

“야, 조대찬… 내가 지짜 너 만나서 지짜…….”

얼굴이 시뻘게진 마강국이 풀린 눈으로 말했다.

“내가 지짜 지짜…….”

“지짜 뭐?”

“지짜… 너 덕분에 인생의 목표를 찾고…….”

대찬은 인생의 목표를 찾았단 말이 낯간지럽고 좀이 쑤셨다.

절로 몸이 배배 꼬였다.

손가락이 오그라들었다.

“얘가 왜 이래…….”

대찬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데, 마강국은 코를 훌쩍이기 시작했다.

대찬은 더욱 난감해져서 마강국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너 우냐?”

“울긴 누가 울어! 내가 지짜 너 아니었음 인생 개판으로 살고, 막 그러고…….”

마강국은 엉엉 울면서 빽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마강국의 목소리는 데크레센도로 사라졌다.

이내 그는 쾅, 식탁에 머리를 박았다.

대찬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맛이 갔군.”

그는 낑낑거리며 마강국의 무너진 몸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최재한과 함께 둘이서 드는데도 녹록지 않았다.

“술 못 마시면 몸이라도 가볍든가!”

적당히 술을 마셔서 그렇지 않아도 피가 빨리 돌았다.

마강국을 옮기느라 힘까지 쓰니 머리에 피가 쏠렸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대찬과 최재한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마강국을 식당 밖으로 끌고 나와 택시에 태웠다.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바로 집 앞까지 가도 제 발로 걸어 들어갈 것 같진 않았다.

결국 대찬과 최재한도 택시를 타고 마강국의 집까지 가서 그 덩치를 던져 놨다.

대찬은 덩치를 옮기느라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그러고는 최재한에게 슬며시 말했다.

“이대로 집에 가긴 아쉬운데, 가볍게 한 잔만 더 하고 갈까?”

“너는 오늘 술 처음 마신단 놈이 뭐 그렇게 잘 마시냐? 말하는 것도 무슨 회사 10년은 다닌 아저씨처럼.”

회사 10년 다닌 아저씨 맞아.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대찬은 웃음을 지었다.

“한 잔만 더 하자. 응?”

“싫어!”

최재한은 매몰차게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10년 치 놀림거리를 제공한 마강국은 닷새간 칩거했다.

대찬과 최재한의 끈질긴 연락에도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둘은 따끈따끈한 건수를 써먹지 못한 것에 아쉬운 한숨을 푹푹 쉬었다.

마강국은 앞으로 술은 일절 입에 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찬은 그것이 절대 지켜지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참을 수 없는 선언의 가벼움이란.

아니나 다를까, 마강국은 닷새간의 칩거를 해제하자마자 술을 마시자고 대찬과 최재한을 졸랐다.

대찬은 그런 마강국에게 따끔하게 쏴 주었다.

“그럴 거면 금주 선언은 왜 했어?”

“진짜 올해 마지막 술자리야.”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대학 신입생 시절이야말로 술을 들이붓기에 가장 좋은 때란 걸 대찬은 알았다.

성년이 되었단 설렘, 아직까진 희미한 미래에 대한 계획, 새 친구들과의 만남, 대학의 자유로운 분위기.

대학 3학년만 되어도 슬슬 취직에 대한 압박이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사회 초년생은 야근에 몸이 갈려 나가기 일쑤였다.

불편한 상사들과의 회식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이후로도 팍팍한 살림살이를 걱정해서 마냥 술만 마시기도 어려워지기 마련이고, 나이가 들면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신입생 시절이 술 마시기 가장 좋은 때다.

그런데 마강국이 올해는 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하니, 믿어 주려고 해도 믿어 줄 수가 없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굳이 대답조차 안 하는 대찬에게 마강국이 말했다.

“나, 수능 다시 볼 거야.”

“뭐?”

“올해 다시 준비해 보려고.”

왜? 이미 소기의 성과는 거뒀잖아. 그 정도면 충분히 잘 갔는데, 왜?

차라리 대학 들어가서 다른 진로를 알아보든가, 순경이나 직업 군인 쪽을 고민해 보면 어떨까?

대찬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남의 인생을 함부로 재단하고 참견하는 게 얼마나 꼴사나운 짓인지 뒤늦게 떠올렸다.

‘나도 나이 좀 먹었다고 꼰대 기질이 슬금슬금 고개를 쳐드는구나.’

대찬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공부하면서 내가 살아 있음을 느꼈어.”

“너 되게 낯 뜨거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말이 그렇단 거야.”

대찬은 만화 대사 같은 말에 질색하면서도 그의 태도는 흐뭇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목표가 뭔데?”

“너랑 같은 대학에 들어가는 거.”

“고원대?”

마강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을 것이다.

대찬은 직관적으로 그렇게 판단했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열심히 해. 응원할게. 혹시 내가 도울 일 있으면 말해 주고.”

그렇게만 말했다.

마강국이 재수를 하다니.

인생이 저렇게 바뀔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대찬이지만 정작 가장 많이 바뀐 건 자신이었다.

2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찬은 18년 전으로 돌아와 2년간 입었던 교복을 벗어 옷장에 집어넣었다.

“다시는 입을 일 없겠지.”

남자친구한테 이런저런 옷을 입혀 보는 특이취향의 여자를 만나지만 않는다면.

어두운 옷장 속에 걸린 교복을 보고 대찬은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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