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2화
대찬은 마강국을 보며 물었다.
“아는 애야?”
“어. 이 근방에서 싸움박질하고 다니는 놈들은 웬만하면 다 아니까.”
“역시 마강국.”
대찬은 경외심을 표했다.
황남수라고 불린 녀석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그의 시선은 곧 마강국의 험상궂은 표정과 맞닥뜨렸다.
“가, 강국아…….”
“누가 내 이름 물어봤냐? 뭐 하냐고, 지금.”
“그, 그게…….”
마강국은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황남수의 일행도 마강국을 보고 찔끔 놀랐다.
“한심한 새끼. 아직도 삥 뜯으면서 사냐?”
“네, 네가 알 바 아니잖아……!”
황남수는 자신만 바라보는 패거리를 의식했는지 제법 호기롭게 응수했다.
그러나 그의 호기는 일그러지는 마강국의 표정에 금방 사그라졌다.
“미안…….”
“내가 삥 뜯고 다니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마강국은 녀석에게 살벌한 눈빛을 뿜었다.
깨갱, 녀석은 꼬리를 내렸다.
‘일진인데 돈은 안 뜯는단 건가? 개똥철학이야, 아니면…….’
정말 의리파인 거야?
대찬은 마강국이 궁금해졌다.
마강국은 귀찮은 파리를 쫓듯 휘휘 손을 저었다.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웬만하면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말고.”
“…….”
마강국의 경고에 황남수는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의 패거리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마강국 덕분에 대찬은 주먹 한번 휘두르지 않고 황남수 패거리를 쫓아냈다.
대찬이 마강국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네 이름값이 대단하긴 한가 보다.”
“싸움박질만 하고 다녔는데 이 정도도 못하면 너무 슬프잖아.”
마강국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대찬은 돈을 갈취당할 뻔했던 학생에게 다가갔다.
그는 어리둥절했다.
이래저래 곤란하던 찰나에 갑자기 상황이 급변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대찬은 멋쩍게 말했다.
“괜히 들쑤신 거 같긴 한데, 나도 얽힌 일이 있어서 이렇게 됐어. 미안해.”
“아, 아니야. 솔직히…….”
“솔직히?”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이면서 피식 웃었다.
“기분 좋았어. 날 못살게 굴던 놈들이었으니까.”
“나중에 더 귀찮아질지도 몰라.”
만화 영화에서 악당들은 쫓겨 가면서 흔히 두고 보자라고 외친다.
만화에서는 번번이 패배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오늘 일의 앙갚음이 그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 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그는 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걱정 마. 나 다음 주에 전학 가거든.”
그는 후련하게 날숨을 뱉으며 말했다.
“그래도 덕분에 시원해졌어. 아마 가기 전까지 시달렸으면 마음이 많이 안 좋았을 텐데.”
그는 대찬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나 대신 싸워 줘서.”
“어, 그래…….”
꼭 그를 위해 싸운 건 아니었다.
아마 그도 그걸 알고 있을 터였다.
대찬은 고맙단 말이 안쓰러우면서도 도리어 고마웠다.
그가 대찬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름이 뭐야?”
“내 이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대찬이고, 이쪽은 마강국. 그리고 저 옆에 아무것도 안 한 친구는 최재한.”
“조대찬, 마강국… 고마워.”
그는 대찬과 마강국의 이름을 여러 번 중얼거렸다.
대찬은 멋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뭘,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대찬은 굳이 그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스쳐가는 인연이었다.
이름도 모르던 그를 대찬은 며칠 뒤 잊어버렸다.
대찬과 마강국, 최재한은 다시 가던 걸음을 옮겼다.
“어머, 대찬이한테 이렇게 듬직한 친구도 다 있었니?”
대찬의 어머니는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골렘처럼 거대한 마강국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안녕하세요. 마강국이라고 합니다.”
마강국의 낮은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엄마, 오늘부터 집에서 같이 공부하려고요.”
마강국의 뒤에 가려 보이지 않던 최재한도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재한이는 여자 친구도 없니? 어째 잠잘 때 빼곤 대찬이하고만 있는 거 같아.”
그 말에 최재한이 발끈했다.
“대찬이도 여자 친구가 없으니까 저랑 계속 어울리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도 대찬이는 사귀어 보긴 했잖니. 넌 계속 혼자잖아?”
표정 하나 안 바뀐 채 어머니는 최재한의 정신을 폭격했다.
대찬은 붉게 달아오르는 최재한의 얼굴을 보고 큭큭 웃음을 참았다.
어머니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최재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빙긋 웃었다.
“다 같이 공부한다고? 기특해라. 공부하고 있으면 간식 갖다 주마.”
“고맙습니다.”
마강국과 최재한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아들을 어머니는 뿌듯하게 바라봤다.
“날이 갈수록 의젓해지네.”
조대찬, 최재한, 마강국.
셋은 진지한 태도로 공부에 임했다.
사과를 깎아 방으로 들어간 어머니의 눈에는 이보다 더 사랑스러울 수 없는 풍경이었다.
마강국은 정말 죽을 동 살 동 공부했다.
그의 변화는 대찬보다 더 극적이었다.
그를 조금이라도 알던 이들은 마강국의 변화에 한 마디씩 쑤군거렸다.
그의 여동생인 마강설은 대찬을 직접 찾아와 고개를 숙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오빠 덕분에 저희 오빠가 진짜 사람 구실 하게 됐어요.”
“아, 아뇨. 제가 계기는 됐을지 몰라도 바뀐 건 마강국 본인이니까요. 감사는 제가 아니라 그쪽 오빠한테 하세요.”
“그래도 오빠가 아니었으면 저희 오빠가 어떻게 바뀌었겠어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죠?”
“은혜라니, 그렇게 거창한 말 들을 것까진 없는데.”
마강설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정말 고마워요, 오빠.”
“그렇게까지 인사하신다면야… 저도 감사히 받을게요.”
마강설은 웃으면서 대찬에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제가 직접 만든 수제 초콜릿이에요. 맛없을지도 모르는데, 제 성의를 봐서 맛있게 드셔 주세요.”
“뭐 이런 걸 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마강설은 얼굴에 옅은 홍조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의 방학은, 그리고 2000년은 그렇게 흘러갔다.
방학이 끝나고 대찬과 친구들은 고3이 되었다.
당시에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마련.
고3으로서의 첫 등굣길, 전쟁을 예비한 군인처럼 엄숙하고 긴장한 표정들이었다.
대찬도 그 틈바구니에 섞였지만 표정은 그다지 비장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고난을 짊어진 것처럼 언급되는 시기였지만, 또 지나고 보면 견딜 만했단 감상도 더러 나온다.
“유백기 사노비 시절보다야 고3이 훨씬 좋지.”
필래유통 시절을 잠깐 회상한 대찬은 교문을 넘으며 해방감마저 느꼈다.
교실에 들어가니 대부분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방학 내내 함께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같은 반에 배정받았다.
그들의 눈빛도 생생하게 빛났다.
“마강국, 너도 이번엔 같은 반이네.”
대찬은 대강 훑어봐도 눈에 띄는 마강국을 발견하곤 알은체를 했다.
마강국이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잘해 보자.”
“야, 이제 나는 안중에도 없냐?”
대찬이 마강국에게만 인사를 건네자 최재한이 툴툴거렸다.
그러자 대찬은 곧바로 최재한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질투하긴. 너는 당연한 거고.”
왁자지껄한 사이, 교실 앞문이 드르륵 열렸다.
3년 연속 담임으로 엑스칼리버가 등장했다.
‘이변은 없었구나.’
대찬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다른 친구들도 동시에 들릴 듯 말 듯 한 한숨을 쉬었다.
“오늘부터 고3이다. 죽어라 해라.”
담임은 짧고 굵게 선언했다.
처음 고3이 된 학생들은 일동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꼴에 수능 한 번 치러 봤다고 대찬은 그들보단 한결 여유로웠다.
고3은 다른 일을 벌일 여유도, 의지도 없었다.
오직 공부뿐이었다.
“내 인생에 올해는 없어.”
대찬은 짧게 독백했다.
짧은 독백으로 두 번째 2001년은 설명되었다.
6월 모의고사, 그리고 뜨거운 여름방학을 지나 다시 9월 모의고사.
대찬의 성적은 단 한 번의 내리막 없이 순탄하게 올라갔다.
9월 모의고사에서는 학교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임유준과 동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임유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작년만 해도 자신의 발끝에조차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으니까.
물론 임유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찬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이대로만 가면 수능에서 좋은 결과 있을 거다.”
9월 모의고사 성적표를 나눠 주며 담임은 대찬에게 그렇게 장담했다.
두 달 후, 대찬은 담임의 그 말을 떠올렸다.
‘좋은 결과 없으면 다 선생님 때문이에요.’
수능.
어김없이 이른 한파가 몰아치는 날.
아침에 비행기가 뜨지 않는 날.
교문에 엿이 붙는 날.
도시락 싸는 부모님이 가장 오랫동안 반찬을 고민하는 날.
사소한 듯 사소하지 않은 이유로 경찰차가 오가는 날.
생전 존댓말 한 번 쓰지 않던 녀석이 대뜸 큰절을 올리는 날.
대찬은 두 번째로 그날의 주인공이 되었다.
전통이랍시고 학생회의 후배들이 나와서 대찬을 응원했다.
“선배! 파이팅 하세요!”
“고맙다!”
대찬은 그들이 대접해 주는 율무차 한 잔을 얻어 마시고 웃으며 화답했다.
그리고 그들을 등진 채 수험장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는 저런 환대도 못 받고 들어가겠네.”
첫 번째로 수능 치르던 그때의 나처럼.
대찬은 씁쓸하게 웃었다.
“잘 봐라, 잘 보자.”
대찬은 그들에게도 무운을 빌면서 자신의 무운도 빌었다.
대찬이 임하는 2002학년도 수능은 사상 초유의 고난도로 악명이 높았다.
소위 ‘불수능’이라는 말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해였다.
대찬은 그때의 충격이 너무나도 컸다.
18년이 지나고 나서도 이때의 기억이 또렷했다.
당시 어중간한 성적의 대찬은 고난도 수능의 직격탄을 맞았다.
수능 다음 날의 등굣길은 흡사 문상 행렬을 방불케 했다.
그래서 대찬은 누누이 주변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두라고 일렀다.
자신의 마음도 연신 단속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특히나 언어 영역과 수리 영역은 악마가 출제한 것 아니냐는 말이 떠돌 정도로 심했다.
언어 영역에서는 강세를 보였으니 높은 난도가 반가웠지만, 반대로 취약한 수리 영역에는 근심이 들었다.
일장일단이었다.
그 탓으로 대찬은 버거운 초고난도 수학 문제를 일부러 많이 접하고 많이 이해했다.
이해가 안 되면 아예 통으로 풀이법을 외워 버렸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로 대찬은 시험에 임했다.
“자, 지금부터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시험지를 펴고 문제를 푸시면 되겠습니다.”
시험 감독의 무미건조한 선언과 함께 수능 시험, 1교시 언어 영역이 시작되었다.
대찬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샤프펜슬을 바짝 쥐었다.
두 번째라고 해서 긴장감이 무뎌지지는 않았다.
1교시 언어 영역이 끝날 때에는 어찌나 긴장했는지 목 근육이 뻣뻣해졌다.
그럼에도 본래 자신 있던 과목이기에 침착하게만 임하자고 다짐했다.
확실히 만만한 난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못 풀 정도도 아니었다.
대찬의 시선은 시험지와 시계에만 번갈아 움직였고, 그 외 주변의 다른 것에는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2교시 수리 영역은 대찬의 취약 과목이었다.
‘하… 죽을 맛이네.’
어렵다, 어렵다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어려울 줄이야.
첫 번째 수능에서는 애초에 수학을 포기하다시피 했으니 어려운 줄도 몰랐다.
그런데 마음잡고 달려왔던 두 번째 수능에 이르러서는 그 최악의 난도를 피부로 느꼈다.
샤프펜슬을 집어 던지고 싶은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내가 어려우면 남들도 어렵겠지.’
특히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던 쪽이 더 힘들 것이다.
직전년도 수능이 아주 평이한 수준으로 출제됐던 터라 충격은 더할 것이다.
“진짜 네 말대로 난이도 미쳤더라.”
“조대찬, 나 대학 갈 수 있을까…….”
수리 영역이 끝나고 다 같이 점심 도시락을 먹는 자리에서 최재한은 혀를 내둘렀다.
마강국의 표정도 가관이었다.
그는 대찬의 추천에 따라 서울 소재의 체육대학에 지원했다.
그의 신체 능력을 십분 활용해서 부족한 수능 점수를 보완하도록 한 포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