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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1화 (10/556)

난 할 수 있어 11화

“학생회실에 비치할 도서 목록 내가 짰어. 별 의견 없으면 이대로 넘기지.”

그냥 눈감아 줄 만한 일도 대찬은 꼬치꼬치 따지고 캐물었다.

“신청 도서는 1인당 5권까지야. 나도 신청할 거 있고, 최재한, 너도 있지?”

“응.”

대찬은 임유준이 작성한 목록을 다시 그의 앞으로 슥 밀며 말했다.

“이 중에서 5권만 추려서 다시 알려 줘.”

일부러 임유준의 성질을 긁으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임유준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대찬을 공격했다.

“너는 왜 내가 말하는 것마다 사사건건 시비냐? 진짜 나랑 한판 해 보자는 거냐?”

“그렇게 네 멋대로 할 거였음 회장 됐어야지. 월권 좀 작작해.”

대찬은 임유준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야! 조대찬 이 개새끼가……!”

화를 내며 버럭 소리를 질러도 대찬은 태연했다.

“사람은 할 말이 없으면 욕을 한다더라.”

이쯤 되니 임유준은 더 참지 못했다.

마강국의 주먹으로 대찬의 경망스러운 주둥이를 막아 버리길 원했다.

“야, 마강국, 너는 왜 가만히만 있냐?”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는 임유준을 보고 마강국은 픽 웃었다.

충견 노릇은 끝났다.

마강국은 목줄을 끊었다.

그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닥쳐.”

임유준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정신이 아득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마강국은 황림정밀을 그만두었다.

월급이 조금 줄어들기는 했지만 다른 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 * *

“고맙다.”

마강국은 대찬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그의 입장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돈 몇 푼에 묶여 임유준의 흥신소 노릇을 안 해도 되었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학업을 소홀히 했던 여동생도 편의점 포스기 대신 연필을 쥐었다.

철천지원수가 되었던 대찬에게, 마강국은 깊은 호감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그를 보는 대찬의 시선은 마냥 곱지 않았다.

“네가 좋아서 한 일은 아니야.”

대찬은 마강국에게 호의를 품지는 않았다.

“네 사정이 궁핍했다고 해서 네가 휘두른 주먹이 무죄가 되는 건 아니라고.”

“…….”

대찬의 말은 가감 없었다.

“내가 주먹이랑 성격이 조금만 물렀어도 학교 제대로 못 다녔을 거야.”

대찬의 꼿꼿한 시선에 마강국은 위축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지. 하지만 조금만 더 너를 돌아봤으면 좋겠다.”

우두망찰한 마강국의 귀에 대찬의 말이 맴돌았다.

대찬이 차갑게 쏘아붙인 건 희망사항이 반영된 행동이었다.

그는 마강국과 단순한 동류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번 일로 그가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와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비행기가 정면으로 부는 바람에 떠오르듯, 대찬의 차가운 말에 마강국의 인생도 위로 떠오르길 바랐다.

그래야만 마강국은 대찬의 인맥으로서 가치가 있다.

단순히 힘 좋은 마당쇠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임유준의 존재감은 완전히 지워졌다.

더 이상 마강국을 옭아맬 수단이 없었다.

호랑이 등에서 내려오니 신세가 초라하기만 했다.

학생회 회의에도 불참하는 일이 다반사가 됐다.

대찬도 임유준에게는 더 신경 쓰지 않았다.

“임유준, 원혜미랑 헤어졌다더라.”

이처럼 신경 쓰게 만드는 후문도 들려오긴 했다.

“그래?”

그런 소식에도 대찬은 싱거운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마강국은 변했다.

그는 더 이상 사소한 일에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다.

깨닫는 바가 많은 모양이었다.

대찬의 의도대로 되었다.

마강국은 그동안 주먹으로 핍박했던 학생 하나하나를 찾아가 사과했다.

진심이 느껴진 까닭 반, 주먹이 두려운 까닭 반으로 학생들은 사과를 받아 주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대찬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소식이었다.

마강국은 이제 대찬의 인맥이다.

“한동안 다른 데 정신 팔려 있다 했더니 다시 돌부처 모드네.”

누나 조수진은 혀를 내둘렀다.

대찬의 각오에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아깝다며 킥킥거리던 그였다.

그런데 꽃샘추위 만연한 새 학기를 지나 후텁지근해지는 학기 말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각오는 여전히 유효했다.

대찬은 방학 전 마지막으로 치른 7월 모의고사에서 다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모의고사보다도 단기간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기말고사에서 주요 과목에서 모두 전교권의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이 페이스로 쭉 가면 수능 때 일낼 수 있겠다. 지금처럼만 해.”

담임은 대찬의 성적에 흡족해하면서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감사합니다.”

“내년에는 3학년 담임 맡기로 했는데, 너는 내가 데려가야겠다.”

“…….”

“표정이 왜 그러냐?”

“기분이 너무 좋아서 입술이 다 떨리네요.”

3학년도 저 엑스칼리버의 압제 아래서 지내야 한다니.

최재한은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전교생에게 약속한 대로 학생회 일에 몰두했다.

내실 있게 공약을 이행하고, 이행 사실을 게시판에 부착해 알렸다.

대단한 변화는 아니었지만, 전교생은 학생회가 열심히 일한 결과 자신들의 생활이 조금이나마 더 편해지고 있단 걸 체감했다.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최재한을 대찬은 성심껏 도왔다.

그렇게 서로 도우면서도 각자의 일에 열중하며 보낸 1학기가 모두 지나갔다.

“방학 기간 동안 어영부영 보낼 생각 하지 마라. 학기 중이야 어차피 다들 야자를 하니까 고만고만하다만, 차이는 방학에서 발생하는 거다. 계곡이며 바다며 놀러갈 궁리는 관두고 뒤통수 시릴 정도로 에어컨 틀어 놓고 공부나 해라, 공부나. 알아들었어!”

담임의 뻔한 충고에 학생들은 건성으로 대꾸했다.

“에에.”

대답이 맘에 들지 않은 담임은 쯧쯧 혀를 차며 교실을 나섰다.

그를 일본 순사 보듯 하던 학생들은 그가 나가자마자 환호성을 질렀다.

“오예! 방학이다!”

대찬은 두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리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반 아이들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저래야 이맘때 학생들이지.

어떻게 공부만 하고 사나.

“나는 정신이 늙고 늙어서 놀지도 못하겠다. 공부나 해야지.”

대찬은 가방을 싸고 일어났다.

“대찬, 설마 방학 첫날부터 공부할 생각은 아니지? 비인간적으로.”

최재한의 물음에 대찬은 시답잖은 기계음으로 대꾸했다.

“인간 안 할란다.”

“미친놈! 안 돼. 오늘은 포트리스 데이야.”

“또 내 빨콩에 얻어맞고 눈물 질질 짜려고 이러네.”

“즐.”

즐이라니.

한물간 것으로도 모자라 풍화 작용으로 흔적조차 남지 않은 유행어였다.

그에 대찬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시답잖은 수다를 주고받으며 피시방으로 향하는데, 커다란 덩치가 앞을 가로막았다.

“어, 마강국, 왜.”

대찬은 더 이상 그와 대적할 일이 없단 걸 알면서도 마주할 때마다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할 말 있는데.”

“시간 좀 걸리는 말이야?”

마강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대찬은 최재한을 돌아보며 웃었다.

“강국이가 그렇다는데. 피시방은 못 가겠다. 그지?”

“…….”

마강국과 잠깐 눈이 마주친 최재한은 빠르게 승복했다.

이제는 저 거대한 주먹이 마구잡이로 휘둘러지지 않는단 걸 알긴 하지만, 여전히 최재한은 두려웠다.

휴화산은 언제든 활화산이 될 수 있는 법이니.

대찬은 학생들이 다 빠지고 없는 학교 뒤편에서 마강국과 단둘이 얘기를 나눴다.

자판기에서 음료수 한 캔을 뽑아 마강국에게 건네며 대찬이 물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뭐야?”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게 무슨 말이지?

갈피를 잡지 못한 대찬이 멀뚱히 그를 바라보기만 하자 마강국이 말을 이어 나갔다.

“나 지금까지 막살았잖아. 낮에는 주먹질하고, 밤 되면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여자애들 끼고 그러고만 살았어.”

그래, 네가 막산 건 잘 알고 있구나.

대찬은 뻣뻣하게 웃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것들 관두고 나니까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도무지 모르겠어.”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물론 술하고 담배는 아직 끼고 있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술, 담배야 내후년부터는 합법이니 조기교육이라고 치고.”

대찬은 웃으면서 마강국의 장단을 맞춰 줬다.

“어떡해야 할까?”

“해야 하는 건 없어. 하지만 하고 싶은 건 있어야지. 없다면 찾아야 하고.”

진지하게 상담을 청해 온 만큼 대찬도 내뱉는 말에 신중을 기했다.

그렇기에 그의 말은 느렸지만 분명했다.

“공부에만 매달릴 필요는 없어. 다들 대학이 인생의 종점으로 알고 사는데, 분명히 틀린 생각이니까. 살아가는 길은 여러 가지야.”

“너는 꼭 고딩 아닌 것처럼 얘기한다.”

대찬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말이 그렇단 거지.”

대찬은 음료수로 목을 적시고 말했다.

“그런데 방향을 못 정한 사람한테 공부만큼 나은 것도 없어. 당장 2년 뒤까지는 유효한 목표가 생기니까.”

“그럼 나도 공부나 해 볼까. 하고 싶은 걸 찾을 때까지.”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혹시 알아? 또 공부가 체질에 맞을지.”

“그럴 리가.”

“원래 체력 좋은 놈이 공부도 끈질기게 잘하거든. 그래, 이왕 해 보기로 한 거니까 열심히 해 봐.”

“…도와줄 거야?”

남에게 윽박질렀으면 질렀지, 고분고분하게 부탁이란 걸 해 본 적이 없는 마강국이었다.

전례 없이 부드러운 말투로 청하는 마강국의 말은 어색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줄게.”

“진짜야?”

“진짜.”

마강국을 도와주는 데 적잖은 노력이 들 것은 분명했다.

주먹 쓴 시간만큼 공부에는 소홀했을 테니까.

그럼에도 대찬은 기꺼이 마강국을 돕겠다고 나섰다.

‘인맥. 사람 찾아 일부러 품 파는 게 인맥인데, 오는 사람 물리치는 건 이치에 안 맞잖아.’

대찬은 마강국과 최재한을 집으로 데려갔다.

같이 공부할 요량이었다.

그렇게 잡담을 나누면서 걸어가는 중이었다. 마강국이 갑자기 다리를 오므리며 말했다.

“야, 나 화장실 좀.”

“집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급해, 급해.”

마강국은 그렇게 말하고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최재한은 정말 급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내내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왜 저런데.”

“저렇게 몰아칠 때가 있지, 가끔씩.”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골목 어귀만 돌아 자리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때 예사롭지 않은 광경이 목격되었다. 힘센 녀석 여럿이 약한 녀석 하나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척 보아하니 힘으로 돈을 갈취하려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옆 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대찬은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 생각은 없었다.

당장의 급한 불은 꺼 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저 녀석에게 도움이 될까?

섣불리 판단하지 못했다.

돈만 뺏기고 끝날 일에 구타와 폭행이 더해질지도 모른다.

대찬은 나서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며 일단은 관망했다.

최재한은 편한 길을 권했다.

“신경 끄자. 저런 일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런데 의중과는 관계없이 대찬은 이 상황에 휘말렸다.

불쌍한 녀석의 돈을 갈취하려던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자신이 나쁜 짓을 저지른다는 인식은 있는지 녀석이 대찬을 보자마자 빽 소리를 질렀다.

“야! 뭘 꼬나봐! 구경났어?”

“응? 안 났는데.”

“근데 뭘 처꼬나보냐고.”

대찬의 심기를 건드리는 시비조였다.

대찬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게 녀석을 더 자극했다.

“웃어? 내가 웃기냐?”

“웃기긴 하네. 오죽 궁하면 떼로 몰려가서 한 사람 돈을 뺏나 싶어서.”

대찬도 더 이상 얌전히 있지 않았다.

“뭐? 말 다 했냐?”

“응, 다 했어. 너도 더 할 말 없으면 피차 신경 끄자.”

“근데 이 새끼가……!”

녀석은 대찬에게로 육박해 왔다.

그의 표적이 불쌍한 친구에서 대찬에게로 옮겨 갔다.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녀석은 경고도 없이 대찬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대찬이 피하는 동시에 응수하려는 찰나, 그와 녀석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황남수, 너 뭐 하냐?”

마강국의 굵직한 목소리가 아래로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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