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9화
대찬은 속히 멱살을 쥔 손길을 쳐 내고 사나운 눈빛을 흘겼다.
그 얼굴을 보기 위해서 대찬은 시선을 위로 올려야 했다.
그보다 머리 2개는 더 큰 덩치였다.
그를 본 최재한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마강국……!”
마강국?
잘 아는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대찬도 기억해 냈다.
전교에서 제일가는 주먹, 그러니까 소위 일진이었다.
굳이 기억을 떠올리지 않아도 그가 한 주먹, 한 성깔 한다는 사실은 알아채기 쉬웠다.
저 롤런드고릴라 같은 얼굴과 덩치를 보자면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아, 하나 더 생각난다.’
마강국의 본래 이미지와 퍽 상반되는 기억이었다.
그래서 오래 뇌리에 남았다.
첫 번째 삶에서 고3 시절 대찬은 마강국과 같은 반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대찬의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돈독한 정이 쌓이지 않는 이상 친척의 죽음은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도리가 있기에 대찬은 학교를 빠지고 장례식에 다녀왔다.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유일하게 그에게 위로를 건넸던 게 마강국이었다.
사실 큰 슬픔에 빠지지 않았던 대찬으로서는 그의 위로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최재한이라면 모를까,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을 것 같은 롤런드고릴라가 별로 친하지도 않은 자신에게 위로를 건넸으니.
이미지와 상반된 경험은 인상 깊은 기억으로 남았다.
‘그걸 떠올리면 아주 나쁜 녀석은 아닌 듯한데 말이야.’
그럼에도 지금 이 상황에서 온정적으로 나갈 이유는 전혀 없었다.
온정적으로 나선다고 마강국이 뒤로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도 않았다.
대찬은 입술을 깨물었다.
“뭔데 멱살부터 잡아.”
“너 요즘 깝죽거리고 다닌단 소문이 자자하더라.”
“깝죽거린 적 없고, 설령 깝죽거린들 네가 무슨 상관이야.”
냉랭한 반응에 마강국은 이죽거렸다.
“내가 또 깝죽거리고 다니는 새끼들 못 봐 주는 성격이라.”
“못 봐 주면 어쩔 건데.”
계속 까칠한 반응에 마강국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이 새끼가 미쳤나. 말본새가 왜 이따위지?”
마강국은 성큼성큼 대찬에게로 가까워졌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험악하네.’
대찬은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혔다.
“집 가다가 멱살 잡혔는데 말본새가 예쁘겠냐?”
“이 새끼가 근데……!”
마강국은 눈을 부라리며 대찬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대찬의 얼굴만 한 주먹이 그를 향해 쇄도했다.
대찬은 그의 공격을 회피했다.
이래 봬도 특전사 출신이다.
물론 누구나 그렇듯 강제로 끌려간 군대였다.
더군다나 남들처럼 일반적인 병과도 아니었다.
특전사라니, 처음에는 좌절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주위에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누구는 수월하게 해낸다지만, 대찬에게는 벅찬 훈련들이 이어졌다.
적응하기까지의 시간이 녹록지는 않았지만 대가는 분명했다.
체력과 운동신경 모두 입대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멋이 아니라 쓸모가 있는 특공 무술도 제법 숙련된 폼으로 선보이게 되었다.
덕분에 어느 정도 자신감은 있었다.
지금이야 그런 체력이 갖춰지진 않았지만 기술은 그대로였다.
마강국이 전교 제일가는 주먹 운운하지만, 격을 갖춘 실전 무술 앞에서는 둔하고 조악했다.
대찬은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였다.
주먹을 피하고, 주먹을 먹였다.
대찬의 주먹은 정확히 마강국의 명치를 강타했다.
“읍!”
차돌같이 단단한 몸이라고 해도 급소들 맞으면 아팠다.
숨이 턱 막힌 마강국은 명치를 부여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깝죽거리는 거 못 봐 준다며? 뭐 해? 손 좀 봐주지 않고.”
“너 이 새끼……!”
대찬의 말은 의도적인 도발이었다.
이런 단순한 녀석은 말 몇 마디에 이성을 잃는다.
자연히 경계도 느슨해진다.
이성을 잃은 마강국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었다.
대찬은 몸을 숙이고 가볍게 발을 걸었다.
그러자 마강국의 거대한 몸이 일거에 균형을 잃고 쿵, 쓰러졌다.
벌목되는 고목 같았다.
“아유, 아프겠다.”
내내 그를 올려보던 대찬은 마침내 그를 내려다보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
“나도 남 깝죽거리는 거 잘 못 보거든. 조심해.”
대찬은 휘적휘적 가던 길을 재촉했다.
마강국에게는 견딜 수 없는 치욕이었다.
바닥에 고꾸라졌던 그는 벌떡 일어나 대찬의 뒤를 덮치려고 했다.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곁눈으로 그를 주시하던 대찬은 마강국이 자신의 뒤를 후리려는 찰나 몸을 틀었다.
“으윽……!”
갑자기 목표물이 사라지자 마강국의 몸이 휘청거렸다.
대찬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마강국의 배에 주먹을 꽂았다.
“큭!”
연달아 주먹을 허용한 마강국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휘청거렸다.
대찬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괜히 힘 빼지 말자.”
“이 개새끼가……! 오늘 끝장 봐!”
광분하는 마강국의 앞에 대찬은 침착했다.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공격을 적당히 회피하고 방어했다.
그러면서 대찬은 이를 악물고 마강국의 턱주가리에 일격을 가했다.
단단한 주먹이 단단한 턱뼈를 강타했다.
“크악……!”
턱을 붙들고 쓰러지는 모습이 유백기와 판박이였다.
골을 흔드는 충격에 마강국은 멍한 표정으로 대찬을 내려다봤다.
마강국과 대찬의 시선이 맞닥뜨렸다.
순간 마강국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수더분하던 대찬의 눈빛이 그 순간에는 냉기를 발하고 있었다.
대찬은 일말의 정리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랑 쓸데없이 얽히고 싶지 않아. 그런데 굳이 얽히고 싶다면 피하진 않아.”
마강국은 얼얼한 턱을 부여잡고 엉거주춤 선 채로 대찬의 말을 들었다.
“네가 왜 이따위로 나오는지는 모르겠어. 관심도 없고. 다만.”
대찬의 얼굴에 독기가 서렸다.
“계속 이따위로 나오면 후회할걸.”
그는 그렇게만 말하고 다시 마강국을 등졌다.
마강국은 다시 대찬의 뒤를 치지 못했다.
대찬과 마강국의 거리는 그렇게 계속 멀어졌다.
최재한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후다닥 대찬의 꽁무니에 붙었다.
“괜찮아?”
“괜찮아.”
“깜짝 놀랐어. 너 나 몰래 태권도 학원이라도 끊었냐?”
하기야 이 당시의 대찬은 뭣도 아니었다.
놀랄 만도 했다.
‘그래도 태권도 학원은 좀 아니잖아.’
대찬은 웃음으로 넘겼다.
“됐고, 갑자기 쟤가 왜 시비 거는 건지 따져 봐야 해.”
“그러게. 마강국이랑은 지금껏 얽힐 일이 없었는데.”
최재한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우리더러 깝죽거리고 다닌다고 했지.”
“응.”
“뭣 때문에 그러는 걸까? 내가 학생회장 돼서? 그저 그런 놈이 회장 돼서 그러는 걸까?”
“마강국이 맨 처음에 한 말이 뭔 줄 알아?”
최재한이 고개를 젓자 대찬은 마강국의 굵직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야, 조대찬.”
“맞아. 네 이름을 불렀지.”
“네가 회장 된 게 고까웠으면 네 이름을 불렀겠지.”
“그건 그렇네……. 그럼 왜 너를?”
“내가 깝죽거린다고 생각할 만한 사람은 전교에서 딱 하나뿐이지.”
“누구?”
대찬은 뭘 묻느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임유준.”
“아.”
“그리고 이런 치사한 공작을 벌일 녀석도 전교에 임유준이 하나뿐이지.”
대찬은 확신했다.
이런 확신은 다음 날 곧장 확인되었다.
임유준은 설마 마강국이 대찬에게 당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마강국의 주먹으로 참된 교육을 받아 고분고분해졌으리라고 믿었다.
대찬과 마주친 임유준은 일부러 헛기침을 했다.
대찬은 그를 흘끗 보고도 알은체하지 않았다.
그러자 임유준은 도리어 약이 올랐다.
“야.”
“왜?”
“왜 알은체 안 하냐?”
대찬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먼저 하면 되잖아. 너는 왜 알은체 안 하냐?”
“이 새끼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뭐?”
“붕어 대가리도 아니고, 두들겨 처맞은 거 그새 까먹었냐?”
임유준의 말에 대찬은 빙긋 웃었다.
“내가 두들겨 처맞은 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 그거야 소문이 파다하니까……!”
“그래? 헛소문이 도는 모양인데.”
대찬은 임유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임유준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그는 기세에 눌린 얼굴로 대찬을 올려다봤다.
“누, 눈깔 제대로 안 떠!”
“내 눈깔이 뭐가 어때서.”
“……뭐?”
대찬은 검지와 중지를 들고 그대로 임유준의 안경을 콕 찔렀다.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은 안경에 대찬의 지문이 선명하게 묻었다.
황당한 임유준은 바로 받아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너나 눈깔 똑바로 뜨고 살아.”
대찬이 한마디 쏘아붙이자 쭉정이 임유준은 그대로 찌그러졌다.
그는 이 상황이 당혹스러웠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대찬은 그에게 더 관심을 주지 않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하굣길, 대찬은 어김없이 최재한과 동행했다.
“그런데 왜 마강국이 나섰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최재한은 도저히 답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찬에게도 의문이었다.
마강국과 임유준 사이에는 뚜렷한 접점이 없었다.
마강국이 남을 두들겨 패고 다니는 걸 즐기는 악한이라고 가정해도 지금의 상황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강국이 임유준의 청탁을 들어줄 만한 이유가 있단 뜻이었다.
“알아봐야겠어. 왜 마강국이 임유준의 수족 노릇을 하는지.”
“어떻게 알아보게?”
“별수 있나. 어떻게든 알아봐야지.”
대찬의 말에 최재한은 풋 웃었다.
“그렇게까지 공을 들여야 돼?”
“공을 들여야지. 초장에 제대로 해결 못하면 골치 아파지거든.”
상상만으로도 지끈지끈 두통이 올라왔다.
주먹을 무기로 하는 놈이 주먹에 당했다.
마강국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을 거다.
어떻게든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할 게 분명했다.
대찬에게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오늘처럼 대뜸 주먹을 휘두를 수도, 제 패거리를 끌고 와 린치를 놓을 수도 있다.
마강국이 대찬의 생각 이상으로 악랄하다면 그의 주변인들을 귀찮게 할 가능성도 있다.
예상한 범위 외의 돌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대찬은 그런 상황을 가정해 내내 불안해하느니 먼저 나서는 편을 택했다.
예상 범위 외의 상황을 맞는 것보다 예상 범위 안에서 상황을 만드는 편이 더 안전했다.
대찬은 혼자 학생회실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학생들의 정보가 담긴 서류 뭉치가 들려 있었다.
학생회가 주관하는 모든 사업은 기획총무부장의 손끝에서 이뤄졌다.
그걸 명목으로 학생의 신상을 열람할 수 있었다.
“마강국, 마강국…….”
그는 마강국의 정보를 찾았다.
험악한 증명사진만 봐도 어제 맞은 구석구석이 아파 왔다.
그는 상처를 조심스레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남의 신상을 함부로 보는 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이어서 멋대로 합리화 했다.
“그놈한테 당한 게 있잖아. 깜짝 놀라게 한 값으로 이 정도면 싸지.”
그러면서 꼼꼼히 그의 정보를 파악했다.
“양친 안 계시고… 집은 달동네 단칸방… 중3 여동생이 있고… 이름은 마강설……. 기초생활 수급에 급식비 지원 기타 등등. 쩐이 급하네.”
읽어 내려갈수록 마강국은 한 푼이 급했다.
지폐 몇 장이면 대신 주먹을 휘둘러 줄 만했다.
하지만 돈푼 조금 받고 주먹을 휘둘렀다고 덜컥 믿기에는 아직 증거가 부족했다.
다만, 직접적인 매수가 아니더라도 돈이 끼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좋았어.”
대찬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서류를 탁 접고 학생회실을 떴다.
대찬은 마강국과 알고 지내던 친구를 매점으로 데려갔다.
대찬은 지갑을 탈탈 털어 친구를 잔뜩 먹였다.
“야, 많이 먹어라.”
“갑자기 웬 선심.”
“뭣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친구는 밥맛 떨어졌단 표정으로 먹던 빵을 집어 던졌다.
“역시 조대찬. 맨입으로 사 줄 리가 없지. 뭔데.”
“마강국 말이야…….”
대찬이 선심을 베푼 친구는 중학교 동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