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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8화 (7/556)

난 할 수 있어 8화

다음 최재한이 이어받아 연설을 했다.

“짧고 굵게. 목소리 크게. 말할 때 강약중강약 악센트 넣어 가면서. 어?”

대찬은 전날 종일 최재한을 코치했다.

이날만큼은 공부도 뒷전이었다.

그만큼 임유준이 회장이 되는 꼴은 절대 봐줄 수 없단 각오였다.

“연설 길어 봤자 하등 쓸모없어. 간결하게. 3분, 3분 안에 끝낸다. 알았지?”

“알았어.”

대찬은 회사에서의 프레젠테이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의 집중력은 경이로울 정도로 짧다.

더군다나 내키지 않는 자리에 끌려왔다면 사람의 집중력은 토끼의 정력에도 못 미치는 법.

연설은 단단익선, 짧으면 짧을수록 좋았다.

최재한은 단상에 올라가서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입을 열었다.

“기호 2번 최재한입니다!”

대찬이 흐뭇하게 웃었다.

“발성 좋고.”

그동안 대찬은 최재한의 발성을 뜯어고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이런 자리와는 별로 인연이 없던 최재한이었다.

아무래도 발성이 답답했다.

안으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였다.

대찬은 상당한 시간을 그의 목소리를 고치는 데 썼다.

답답한 이미지를 주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연설은 전교생에게 자신을 노출시키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리고 투표 직전에 이뤄지는 이벤트였다.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 줘야만 했다.

“폼 잡으려고 나온 게 아닙니다. 그럴싸한 경력 만들자고 나온 게 아닙니다.”

최재한은 대찬에게 지도받은 대로 눈에 힘 팍 주고 목소리에도 힘을 주었다.

떨지 않으면서 시선을 움직이는 여유까지 보였다.

“정말 제대로 해 보려고 나왔습니다.”

“의외로 무대 체질이네.”

대찬은 흡족하게 웃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약속드립니다. 학생회에 올인 할 것입니다. 공부도 뒷전으로 미루겠습니다. 임기 동안 전교생의 편안하고 보람찬 학교 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최재한의 눈빛이 대찬과 마주쳤다.

“좋아, 좋아.”

대찬은 엄지를 척 치켜세워 주었다.

최재한은 빙긋 웃으면서 목소리에 더 힘을 주었다.

“제가 이렇게 쉽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애초에 공부는 글러먹었기 때문입니다.”

최재한은 멋쩍게 웃으면서 첨언했다.

“전교 1등 후보를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쉽게 학업을 포기하고 학생회장 일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임유준을 살짝 긁었다.

전교 1등은 학생들의 호감을 사기에 별로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다.

최재한은 임유준을 띄워 주는 말을 하면서 실상은 까 내렸다.

그는 이어서 공약을 짧고 간단하게 설명하고 단상을 내려왔다.

우레 같은 박수는 아니었다.

그래도 임유준의 것보단 소리가 컸다.

투표는 금세 이뤄지고, 전임 학생회가 개표를 시작했다.

최재한과 대찬은 그 과정을 참관했다.

무효표 22표.

기호1번 임유준 394표.

기호2번 최재한 489표.

……

“투표 결과 최재한 후보가 총학생회장에, 그다음 다득표자인 임유준 후보가 총학생부회장에 당선되었음을 알립니다.”

이제 물러가는 학생회장이 그렇게 선포하고 최재한에게 다가갔다.

“열심히 잘해.”

“네, 고맙습니다.”

최재한은 꽤 큰 표 차이로 임유준을 눌렀다.

대찬은 최재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축하해.”

“다 네 덕분이지. 고맙다.”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임유준에게 다가가 빙긋 웃었다.

“축하해, 부회장 당선.”

“…어.”

임유준은 꼴에 자존심을 지켜보겠다고 입가를 올리며 웃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입술은 파들파들 떨리기만 했다.

억지웃음만 지어질 뿐이었다.

대찬은 고소한 웃음을 지어 주었다.

‘유준아, 이렇게 웃어야지. 그렇게 억지웃음 짓지 말고.’

이런 날은 맥주든 소주든 막걸리든 술로 축배를 들어야 하는데.

미성년자의 신분이 못 견디게 원망스러웠다.

대찬은 회장 나리가 된 최재한과 어깨동무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와 엇갈리며 원혜미가 안으로 들어왔다.

대찬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원혜미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최재한은 교문 밖으로 몇 걸음 못 걷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엉덩이를 댈 만한 곳이 보이자마자 주저앉았다.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진짜 이길 줄 몰랐어.”

“네가 잘하기도 했고, 임유준이 개판 친 덕분이기도 하지. 질 수가 없었어.”

최재한은 그럼에도 실감이 나지 않는 기색이었다.

자신이 회장으로 당선됐단 것보다 임유준을 이겼단 사실이 더 놀라웠다.

얼굴도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집안에 돈도 많은 그를 평범한 자신이 보란 듯이 이겼단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최재한은 멀뚱히 대찬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에 대찬도 전염됐다.

둘은 동시에 킥킥거리고 웃었다.

“임유준 표정 봤냐? 거의 울려고 하던데.”

“우리 나가자마자 질질 짜더라. 못난 놈.”

“아, 속이 뻥 뚫리긴 하네! 제대로 엿 먹였어.”

“앞으로도 먹일 일 많을 거다.”

대찬은 큭큭 웃었다.

머리가 아무리 굵었다지만 남 약 올리는 일은 여전히 재밌었다.

웃음은 쉽게 멎지 않았다.

“그런데 너 다시 봤어. 이런 쪽에 수완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수완이랄 것까지야.”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회사에서 몇 년 구르다 보니 자연스레 체득한 경험적 지식일 뿐이었다.

어른들의 판에선 안 통할지 몰라도 미성년자들의 리그에서는 그 위력이 톡톡히 발휘되었다.

“암튼 잘해. 다른 회장들처럼 유야무야 뭉개지 말고. 학교에도 좋고 너한테도 좋으니까.”

대찬의 당부에 최재한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반에서 회장, 부회장이 동시에 탄생했다. 담임으로서 아주 흡족하다. 다들 박수.”

담임의 말에 반 아이들은 박수를 쳤다.

그런데 박수라고 다 같은 박수가 아니었다.

최재한의 친구들은 진심이었지만, 임유준을 위시한 쪽은 건성이었다.

대찬이 보기엔 그 모습이 우습기만 했다.

담임은 최재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이, 회장 양반.”

“네!”

“학생부장 선생님이 학생회 임원 빨리 뽑으시란다. 명단 작성해서 내일 중으로 갖다 드려.”

“네. 알았어요.”

조례가 끝나자마자 임유준이 최재한에게 다가갔다.

“최재한.”

“왜?”

“이따 점심시간에 따로 보자.”

“왜?”

최재한이 순진한 표정으로 자꾸 왜, 왜, 물으니 임유준은 짜증이 돋은 표정이었다.

“왜는 왜야. 학생회 임원 논의해야 하니까 그러지.”

“논의……?”

“기획총무부장, 동아리부장은 내가 정할게. 학습부장, 소통부장, 체육부장은 네가 정해.”

그 말에 최재한은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임유준만 바라봤다.

그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은 임유준은 팔짱을 끼고 대답을 재촉했다.

“왜 말이 없어. 설마 너 혼자 독단적으로 처리하려던 건 아니겠지.”

“그, 그게…….”

최재한이 우물쭈물하자 옆에 있던 대찬이 나섰다.

“학생부장이 최재한 보고 선발하랬는데 네가 뭔 상관이야?”

“뭐야? 넌 빠져.”

임유준은 살벌한 눈빛을 대찬에게 쐈다.

대찬은 빠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임원 선발은 회장 고유 권한이야. 부회장한테는 개입할 권한이 없을 텐데?”

“뭐, 뭐라고……?”

“몇 살이나 됐다고 벌써 구린내 나게 썩냐.”

“너……!”

대찬은 임유준의 말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눠 먹기를 하려고 해도 양심이 있어야지. 알토란같 은 건 쏙쏙 빼 먹고 회장한테는 쭉정이만 넘겨주냐?”

학습부장, 소통부장은 실상 있으나 마나 한 자리였다.

체육부장은 체육대회 때 잔심부름이나 하는 자리.

임유준은 그런 자리만 최재한에게 넘겨줄 심산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학생회 예산을 주무르는 기획총무부장, 동아리 예산 편성과 활동 일정을 통제하는 동아리부장 자리를 가져가려고 했다.

대찬이 보기에 도둑놈도 이런 도둑놈이 없었다.

그가 바로 이의를 제기하니 임유준의 눈이 돌아 버렸다.

“야!”

“귀 안 먹었어. 살살 말해.”

“빠지라고, 조대찬. 너한테 이러쿵저러쿵 가르침 받을 생각 없으니까. 이건 학생회 일이야. 일반인은 빠져.”

“연설할 땐 존경하는 동기님이라더니 이제는 그냥 일반인인 거야?”

“좀 닥치고 빠지라고!”

일촉즉발의 상황에 최재한이 개입했다.

“둘 다 진정해.”

그러나 한번 불붙은 임유준의 성질머리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최재한, 밖으로 나와. 둘이 얘기해. 조대찬 저 새끼야말로 훈수 둘 권한 없으니까.”

“아니, 권한 있어.”

최재한은 임유준에게 눈빛을 쐈다.

“뭐?”

“대찬이를 기획총무부장에 앉힐 거야.”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 그리고 나머지 임원도 내가 선발할 거니까 너는 빠져.”

그렇게 쏘아붙이고 최재한은 임유준을 더 상대하지 않았다.

한몫 챙겨 보려다 도리어 망신살만 뻗친 임유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장면을 숨죽이며 지켜본 반 아이들은 쿡쿡 몰래 웃었다.

임유준은 수치심으로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최재한은 대찬을 기획총무부장에 앉혔다.

날림으로 임기를 지낼 게 아니라면 소위 ‘믿을맨’이 있어야 했다.

“나 좀 도와주라. 안 그러면 임유준이 등쌀에 못 이길 거 같다니까.”

“알았어.”

대찬이 부추겨 생긴 일이었다.

결자해지.

그의 책임 역시 작지 않았다.

게다가 임유준을 제대로 골려 주려면 학생회 요직을 꿰차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여러 차례 치욕을 당한 임유준은 밤잠을 설쳤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뜬금없이 웬 쪼다 같은 녀석한테 회장 자리를 뺏겼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망신살이 뻗쳤다.

당연히 회장에 당선될 줄 알았던 친구들은 임유준을 은근히 비웃었다.

폼 잡더니 꼴좋단 말까지 주절거렸다.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선거한다고 한두 푼 부은 것도 아닌데 부회장이 뭐니. 차라리 떨어지지.”

꾸지람이란 걸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임유준으로서는 충격이었다.

성질이 뻗쳐서 이불을 뻥뻥 걷어찼다.

“조대찬 이 개새끼…….”

임유준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임원을 선발하는 일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학생부장은 아무렇게나 빨리 구성해 주기를 바랐지만 최재한은 신중을 기했다.

단순히 친한 학생들로만 뽑는 게 아니라 의욕 있는 학생들은 선발하고 싶었다.

때문에 그는 학생부장에게 사흘의 말미를 더 얻어냈다.

“체육부장 하나 남았어.”

“대충대충 뽑아. 적당히 둥글둥글한 애로.”

대찬도 최재한의 신중함과 열정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열심히 하랬더니 이 정도일 줄이야.

“아니야. 좀 더 고민을 해 봐야겠어.”

“그래라. 나한테 더 묻지 말고.”

대찬은 그렇게 대화를 맺고 다시 공부에 몰두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깜깜한 밤에 대찬과 최재한을 비롯한 친구들이 나란히 걸어갔다.

중간중간 길이 갈려, 결국 원진아파트에 이르러서 남는 최후의 둘은 대찬과 최재한이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해. 그러다 수능 전에 네 장례식 먼저 치르겠다.”

“알았어, 알았어.”

대찬은 건성건성 대답으로 화답했다.

그렇게 각자의 집을 향해 헤어질 참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평온하게 하루를 마무리하려 했다.

그때 누군가가 둘을 방해했다.

“야, 조대찬.”

묵직하게 깔리는 목소리.

“응?”

이름이 불린 대찬은 그쪽을 바라봤다.

깜깜한 밤보다 더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몸을 덮었다.

“뭔데…….”

어둠 속에서 쑥 뻗어진 주먹이 대찬의 멱살을 쥐었다.

딴에는 운동신경이 나쁘지 않다고 여기는 대찬이었지만 급작스러운 손길을 피하지 못했다.

“윽, 뭐야!”

손길 다음으로 어둠 속에서 얼굴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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