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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6화 (6/556)

난 할 수 있어 6화

대찬은 안주하지 않고 계속 펜을 쥐었다.

어차피 내신은 곁가지다.

입시는 수능 시험으로 판가름 난다.

모의고사는 말 그대로 모의일 뿐, 모든 건 수능에서 결정된다.

당장은 큰 욕심이 없었다.

이제 2학년일 뿐이다.

수능까지는 2년 가까운 시간이 남았다.

대번에 최상위권으로 도약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학교 시험이야 벼락치기가 가능했지만, 수능은 아니다.

고등학교 3년은 물론이고 초·중학교 6년,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습득해 온 지식과 습관이 총동원되는 시험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대찬은 모의고사만큼은 적당한 목표만 준수하자고 마음먹었다.

지금이야 어떻든 수능에서만 날개를 펴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중간고사 이후 치른 5월 모의고사 성적은 겉으로 보기에 썩 좋지만은 않았다.

아직 암기에 시간이 꽤 소요되는 사회탐구 과목들의 점수는 미완성이었다.

수학 점수는 이미 각오하고 있던 대찬도 눈 뜨고 보기 어려웠다.

코피 터져라 공부하던 중간고사 범위 내의 문제들만 선방했다.

“거봐, 내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

임유준은 대찬의 성적을 확인하곤 피식 웃으며 제 친구들에게 말했다.

별로 눈치 보지 않고 낸 목소리가 대찬의 귀에까지 들렸다.

“그렇네. 괜히 쫄았네.”

“후루꾸 한번 대단했다.”

그와 함께 있던 최재한도 그들의 모욕적인 대화를 들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우당탕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대찬이 얼른 최재한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조용히 말했다.

“가만있어.”

“아니, 그래도……!”

“뭘 일일이 반응해. 의리는 눈물 난다만.”

대찬은 그렇게 말하곤 임유준 쪽으로는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노골적인 도발에 넘어오지 않자, 임유준은 적개심 어린 눈빛으로 대찬을 한번 바라보곤 이내 시시껄렁하게 웃으면서 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눴다.

‘뭐야, 저놈은.’

대찬은 겉으로는 대응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구시렁거렸다.

서른여섯의 두뇌와 도량이었다.

표현해 봤자 득이 없을 분노를 감출 정도는 되었다.

대찬은 싸늘한 시선을 임유준을 향해 보내곤 이내 표정을 지웠다.

최재한의 결심은 오래갔다.

꼭 그의 각오가 남다른 건 아니었다.

다만 대찬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친구가 적지 않았지만 친구라고 다 같은 친구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오래 알고 지내 왔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였다.

이맘때의 애들은 같이 노는 사람과 속 터놓는 친구를 구분하지 않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최재한은 조숙한 구석이 있었다.

후자의 영역에 대찬이 유일했다.

그런 대찬이 갑자기 코피 터져라 공부하기 시작했다.

최재한으로서도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격으로 따라갔다.

그런데 결과물은 영 좋지 않았다.

“야, 난 왜 이렇게 안 오르냐?”

물론 쏟아부은 노력이 있기에 가시적인 성과는 있었다.

그저 그런 성적을 가진 중위권 그룹에서는 가장 두드러졌다.

하지만 비온 뒤 죽순처럼 쑥쑥 올라가는 대찬의 성적을 생각하면 최재한은 만족할 수 없었다.

대찬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다들 잘하는 분야가 달라.”

“뭐?”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게 있어. 기본적인 공부 머리가 있어야 한다고.”

“그럼 나는 공부 머리가 없단 소리냐?”

가뜩이나 성적이 안 올라서 짜증이 돋는 판이었다.

위로는 못할망정 속을 긁으니 열이 올랐다.

하지만 대찬은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 공부 머리 없어.”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최재한은 공부 머리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수능을 위한 입시 공부에 대한 요령이 없었다.

객관식 5개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골라내는 요령.

대찬은 과거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최재한은 나름대로 입시 공부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그 무능력은 수능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시험의 형태가 달라지는 대학에 들어가서는 전액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즉, 수능은 최재한에게 있어서 평가절하의 숙명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뭐?”

하지만 곡절을 모르는 최재한으로서는 불쾌할 뿐이었다.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멍청하다고 쏘아붙이는 친구라니.

대찬은 살짝 달아오른 최재한의 얼굴이 귀여워서 잠깐 웃었다.

나이 먹고 보니 어린 친구가 더 귀여워 보였다.

오해가 더 심해지기 전에 대찬은 얼른 해명했다.

“대신 다른 쪽으로 강점이 있어, 너는.”

“다른 쪽이라니?”

“대학은 수능만으로 가는 게 아니잖아.”

“그럼 뭐로 가?”

최재한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방법은 많지. 네 경우는 공부 열심히 안 해도 돼. 성적은 받쳐 주는 정도면 충분하거든.”

대찬은 그에게 바투 앉았다.

“너, 지금까지 봉사 활동 엄청 했지.”

“어.”

최재한의 가훈은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주자’는 것이었다.

그런 가훈 아래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주에 한 번꼴로 봉사를 해 왔다.

작년 명절에는 연휴 내내 독거노인들을 모아 놓고 국 끓이고 전 부쳐서 대접했다고 했다.

“일단 그게 기본 재료야.”

“뭐?”

봉사 활동이 입시랑 무슨 관계야.

최재한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정시는 수능 하나로 퉁 치지만, 수시에는 길이 많아. 최재한 맞춤도 찾아보면 있다니까.”

그 말에 최재한의 귀가 쫑긋 섰다.

“그래?”

“응.”

이건 대찬의 생각이 아니라 최재한의 생각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대학 합격 결과가 나온 그날.

20살의 최재한은 대찬과 만나 소주를 마시면서 울었다.

‘수능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어, 멍청하게.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는데…….’

당시는 대학들이 서서히 정시를 축소하고 수시를 늘리던 시점이었다.

성적이 빼어나지 않아도 수시에는 노려 볼 만한 전형들이 많았다.

단순히 성적이 아니라, 인생의 궤적이 남들과는 조금 달라도 열심히 살아온 학생들을 위한 전형들이었다.

다만 안타까운 건, 수능이 대입의 유일한 관문이라 여기는 학생이 대다수라는 것이었다.

‘진즉 눈여겨봤다면 더 나은 대학에 들어갔을 텐데.’

대찬은 소주를 마시며 한탄하던 최재한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지금 이렇게 조언하는 것도 다 그때의 경험이 뇌리에 생생한 까닭이었다.

“그럼 나 오늘부로 공부 때려치워도 되냐?”

“되겠냐? 으이그.”

대찬은 혀를 차면서 펜으로 최재한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아파!”

“그런데 봉사 활동만으로는 어려울 거야. 다른 경력들을 좀 추가해야 돼.”

“다른 경력이라니?”

“차차 생각해 보자. 일단 봉사랑 공부에만 신경 쓰시고.”

“대학 가려면 봉사하라는 소리는 태어나서 너한테 처음 들어 본다.”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네가 네 자신에게 하는 소리야.

대찬은 씁쓸하게 웃었다.

대찬의 생활은 5월이 다 끝나도록 아주 단순한 패턴을 유지했다.

6시 30분 기상, 8시 등교, 23시 하교, 2시 30분 취침.

주말에도 공부하는 시간을 12시간 이상 유지했다.

“죽겠다.”

대찬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탄식했다.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흘에 한 번 코피가 났다.

벌겋게 충혈 된 눈, 쑤시는 삭신, 욱신거리는 손목은 이제 아예 고질병이 되었다.

그럼에도 대찬은 쉬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열린 문틈으로 어머니가 방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대찬아, 쉬엄쉬엄해. 그러다 죽겠다.”

오죽하면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다 하실까.

“그래! 야, 그런다고 네가 무슨 연고대 갈 줄 아냐?”

누나 조수진도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톡 쏘았다.

그 말에 어머니는 눈을 부라리며 누나의 등을 찰싹 내리쳤다.

“아예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 이년아!”

“아! 아파!”

“아프라고 때린 거야, 이년아!”

조수진은 바득바득 대들었다.

“엄마 딸 이름 조수진이거든? 이년 아니거든?”

“에휴! 너는 주말에도 왜 꼭 집에만 붙어 있니. 나가서 남자도 좀 만나고 그래!”

“좋단 남자가 있어야 만나지!”

“선머슴처럼 화장도 안 하고, 옷도 거지같은 것만 입고 다니니까 사내들이 싫어하지.”

“그럼 용돈 좀 올려 주든가!”

“알바 해서 에미 내복 한 벌 사 줄 생각을 해야지. 이년은 심보가 못돼 처먹었어, 아주.”

대찬은 시끌벅적 단란한 모습을 보고 픽 웃으면서 방문을 닫았다.

그런데 닫힌 방문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열렸다.

“어, 아버지.”

“아버지 소리 듣기 낯간지럽다.”

대찬의 어른스러운 모습이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아버지였다.

대찬은 웃으면서 정정했다.

“아빠.”

아버지는 대찬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열심히 하는 모습 보기 좋다.”

“열심히 해야죠.”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꼭 공부라서 그런 게 아니다. 공부든, 용접이든, 만화든, 축구든, 피아노든 뭐든 다 좋다. 절실한 목표를 세워 놓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이 보기 좋아.”

“좋은 결과 있도록 노력할게요.”

대찬의 말에 아버지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거야 어찌 되었든 좋다. 나는 네가 열심인 모습만으로 충분히 감동했다.”

아버지는 그의 어깨를 한 번 꾹 누르곤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얹었다.

“그래도 이왕 하는 거 결과까지 좋으면 금상첨화겠지?”

대찬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도 대찬과 닮은 웃음을 지으면서 문을 닫고 나갔다.

대찬은 닫힌 문을 한참 바라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다시 사각사각, 연필을 움직였다.

“내가 열심히 살아서 다들 호강시켜 줄게요.”

이때로 다시 돌아오기 전의 대찬은 가족에게 소홀했다.

소홀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평일 내내 야근에 시달리다 보면 주말은 잠으로 보내기 일쑤였다.

그래서 언제 한번 집으로 내려오라는 부모님의 말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에게도 그랬고, 누나인 조수진에게도 대찬은 그리 좋은 남동생은 아니었다.

웬 잡놈을 남편으로 들여 생고생을 하는 누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

남편에게 두들겨 맞아 병원에 실려 갔다고 하던 그날도, 대찬은 밀린 업무를 하느라 전화상으로 건조한 위로만 건넸다.

그때의 후회스러운 기억이 대찬의 마음에 사무쳤다.

그는 한참 동안 눈을 감았다 떴다.

“열심히 하자, 열심히.”

대찬은 수도 없이 했던 그 말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자전거도 이따금씩 기름칠을 해 줘야 잘 나간다.

하루 온종일 공부만 하는 것도 영리한 방법은 아니었다.

“야, 공부 잘되냐?”

“죽지 못해 산다.”

예상 범위 안의 대답이었다.

대찬은 큭큭 웃었다.

“나와. 밥이나 먹자.”

“어?”

최재한은 당황했다.

사실 이게 대찬의 원래 모습이었다.

몇 달 새의 대찬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최재한은 그를 숫제 모범생으로 인식하던 참이었다.

“천하의 조대찬이 웬일이세요? 먼저 나가자는 말씀을 다 해 주시고.”

“왜, 싫어?”

“싫기는! 바로 나간다.”

딸깍.

끊긴 전화기를 들고 대찬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는 추리닝 차림 그대로 위에 얇은 외투만 걸친 채로 대문을 나섰다.

둘은 밥을 먹고 시시하게 티격태격하며 거리를 걸어갔다.

번화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큰 대로를 건너가야 했다.

대찬과 최재한은 나란히 서서 신호를 기다렸다.

덤덤한 시선으로 건너편을 바라보던 최재한이 누군가를 발견했다.

“쟤, 임유준 아니냐?”

최재한의 시선을 따라가니 임유준이 있었다.

“어, 그 옆에는…….”

“쟤…….”

둘은 동시에 말했다.

“원혜미 아니냐?”

원혜미였다.

대찬의 첫사랑.

고2는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라며 이별을 통보했던 첫사랑.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최재한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쟤 왜 임유준이랑 팔짱을 끼고 있냐?”

“내가 아냐.”

“…….”

그때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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