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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5화 (5/556)

난 할 수 있어 5화

갑작스러운 선언에 최재한만 놀란 건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 역시 경악했다.

그들의 반응은 최재한의 것보다 훨씬 날것이었다.

“진짜 웃긴다, 조대찬이 공부를 다 하고.”

“구라도 작작 쳐야지.”

대찬이 대꾸하지 않자 그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말했다.

“저거 다 생쇼야, 생쇼.”

“괜히 질러놓고 존심 상하니까 하는 척만 하는 거지.”

“야, 내 말 맞지, 어? 맞지?”

개중에 한 놈이 대찬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깐족거렸다.

대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재미를 보지 못한 녀석은 볼펜으로 대찬이 풀던 문제집에 마구 낙서를 했다.

그 순간 대찬이 책상을 엎으며 벌떡 일어났다.

우당탕 들리는 소리에 분위기가 일순 싸해졌다.

대찬은 녀석에게 바짝 붙으며 눈빛을 쐈다.

“꺼져.”

그 두 글자에 녀석은 위압되었다.

대찬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책상을 일으키고 펜을 쥐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녀석의 말이 자꾸 귀에 맴돌았다.

자신의 각오를 시시하게 여기는 것이야 으레 그 나이 대 맞는 행동이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한두 사람도 아니고 대개의 친구들이, 그것도 한두 마디도 아니고 조대찬은 절대 공부 안 한다는 듯이 얘기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저들의 언행이 대찬의 경종을 울렸다.

하나는 자신이 지독히도 공부 안 하는 학생이었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도 넘은 장난을 주야장천 걸어올 만큼 자신이 만만한 친구였다는 것이었다.

‘물렁하게 보이지 말자.’

대찬은 짧은 숨을 토하고는 다시 잡념을 지웠다.

그는 아침부터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날 때까지 돌부처처럼 공부했다.

최재한은 대찬이 작심삼일은커녕 1시간도 못 버틸 거라 장담했다.

그런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이 가까워지도록 대찬은 최재한보다 책상과 더 가깝게 지냈다.

최재한의 얼굴은 당혹으로 물들어갔다.

“야, 야자 빼고 그냥 피시방 가자. 오늘은 특별히 스타 말고 너 좋아하는 포트리스 해 줄게. 응?”

최재한의 유혹에 대찬은 단호히 대처했다.

그는 일생일대 가장 엄격한 표정으로 양팔을 교차하면서 최재한을 향해 내밀었다.

“사탄아, 물러가라.”

“진짜 안 갈 거야?”

대찬은 단호했다.

“어, 진짜 안 가.”

“너 나한테 뭐 섭섭한 거 있냐? 지금 정 떼는 거야? 너 전학 가냐?”

“아니야, 그런 거.”

최재한은 머리를 박박 긁으며 통사정했다.

“그럼 대체 왜 그러는데? 엉? 나는 무슨 재미로 살라고 네가 이러는 건데!”

“다른 애들은 손가락 없냐? 아무나 골라잡아서 데리고 가면 되잖아.”

“안 되지, 그건 안 되지.”

대찬은 최재한을 흘끗 바라봤다.

역시 나는 친구 중에서도 대체 불가능한 죽마고우라 이건가?

대찬은 괜히 흐뭇해져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최재한의 말에 대찬의 입가는 다시 아래로 푹 꺼졌다.

“내가 두들겨 팰 수 있는 허접은 너밖에 없거든.”

“제발 꺼져.”

“진짜 안 가?”

최재한이 자꾸 보채자 대찬은 쥐고 있던 샤프펜슬을 참고서 한가운데에 팍! 박았다.

최재한은 어깨를 움찔하며 놀랐다.

대찬은 그를 노려봤다.

장난스럽지 않고 싸늘했다.

“한 번만 더 방해하면 친구고 뭐고 없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무섭게 왜 그러냐.”

결국 최재한은 슬금슬금 물러났다.

꿩 대신 닭으로 다른 애들을 거느리고 피시방으로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하필 그날, 야간 자율 학습 감독에 소홀하던 담임선생이 오랜만에 행차했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군데군데 빈자리를 바라봤다.

“뭐야, 왜 이렇게 이빨 빠진 자리가 많아?”

그는 청 테이프를 친친 감은 몽둥이를 탁탁, 손바닥에 부딪쳤다.

속칭 엑스칼리버.

육두문자를 쏟아 내며 게임에 열중하던 최재한 외 9명은 담임선생에 의해 연행되었다.

엑스칼리버의 처절한 심판이 이어졌다.

담임은 최재한의 엉덩이를 박살 낼 듯 내려치며 대찬을 바라봤다.

“어, 뭐냐?”

얌전히 연필을 쥐고 있던 대찬이 담임과 눈이 맞았다.

“네? 왜요?”

“조대찬이 넌 왜 거기 가 있어? 최재한이가 여기 있는데 왜 짝 불알로 거기 가 있느냐고.”

담임은 1학년에 이어 2학년에도 대찬, 최재한의 담임이 되었다.

그는 항시 짝꿍으로 붙어 다니는 둘을 보고 쌍방울이라고 불렀다.

하나만 있을 땐 짝 불알이라는 영 내키지 않는 호칭으로 불렀다.

“저는 남아서 공부했습니다.”

“별일이 다 있군. 쌍방울 레이더스가 해체하니까 우리 학교 쌍방울도 해체하는 거냐?”

아, 저 양반 쌍방울 팬이었지.

대찬은 오래된 기억을 그제야 떠올렸다.

전주가 고향인 그는 프로야구팀 쌍방울 레이더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리고 쌍방울 레이더스는 2000년 올해,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해체되고 만다.

대찬은 또 다른 기억을 한 가지 더 떠올렸다.

그건 담임에게 쌍방울 레이더스는 일종의 역린이란 사실이었다.

용의 비늘 중에 거꾸로 난, 그걸 건드리면 용이 미쳐 날뛴단 비늘.

“아아, 쌍방울…….”

엑스칼리버를 쥔 담임의 손에 힘이 팍 들어갔다.

그는 허공에 울부짖으며 최재한의 궁둥이를 자리에 앉지 못할 정도로 무진장 두들겨 팼다.

김기태야! 박경완아! 조규제야! 김원형아!

이제는 뿔뿔이 흩어진 슈퍼스타들의 이름을 외치면서 담임의 팔에 힘줄이 돋았다.

자율 학습이 끝날 때까지도 최재한은 엉덩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최재한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대찬의 부축을 받으면서 귀가했다.

그는 잔뜩 심통이 나서 외쳤다.

“이 배신자!”

“그러게 누가 야자 빼고 피시방 가래?”

“너도 같이 맞았어야지! 그랬으면 담임 쌍방울 우울증이 안 도져서 덜 맞았을 텐데…….”

“앞으로 갈 일 없다고 누누이 얘기했다.”

최재한은 거푸 복장이 터질 뿐이었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대찬은 다시 책상에 달라붙었다.

문제집을 펴고 죽어라 파기 시작했다.

새벽까지 꺼지지 않는 아들 방의 빛을 보고 어머니는 혀를 끌끌 찼다.

“또, 또 불 안 끄고 자지.”

그렇게 툴툴거리며 불을 꺼 주려고 방에 들어갔다.

그러다 여전히 정자세로 공부에 열중하는 대찬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 뭐 하니?”

“공부해요.”

“지금 새벽 2시야. 또 늦잠 자려고 그런다.”

“조금만 더 하다 잘게요.”

어머니의 눈이 흔들렸다.

“…혹시 뭐 갖고 싶은 거 있니? 말해. 사 줄게. 괜히 그렇게 희한하게 시위하지 말고.”

어지간히도 불신이 깊구나.

대찬은 자조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진짜 공부하려고 이러는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연필을 움직였다.

사각사각, 종이 위에서 분주히 나는 소리가 방 안의 적막을 깼다.

“허, 참…….”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문을 닫았다.

지금의 각오는 달랐다.

시시하게 선언하고 아무렇지 않게 폐기하던 것들과는 달랐다.

서른여섯의 지식을 가진 그는 열여덟 당시보다 입시에 유리했다.

물론 근의 공식이 가물거리고, 침식분지의 정의가 헷갈리긴 했다.

다만, 그것은 단기간의 학습으로 충분히 획득할 수 있었다.

30대의 두뇌는 그런 단점을 덮고도 남았다.

독해력과 직관, 요령이 고교생의 그것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각오가 남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나마 좀 더 굵은 머리뿐이었다.

그 외에는 달라진 게 없었다.

빌어먹을 수학 앞에서 몸부림치는 것, 새벽이 되면 졸음이 쏟아지는 것, 자꾸 공부 아닌 다른 것으로 시선이 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그것을 피 나는 노력과 굳은 각오로 애써 억누를 뿐이었다.

졸음이 오면 커피를 마셨다.

커피로 안 되면 세수를 했다.

세수로 안 되면 허벅지를 꼬집었다.

책상 위에는 책과 필기구를 빼고 모조리 서랍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곤 자물쇠를 걸었다.

대찬은 그렇게 이 악물고 늦은 시간까지 공부했다.

째깍째깍.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대찬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대찬은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

그럼에도 졸음이 가시지 않았다.

대찬은 이를 악물고 공책 한 장을 북 찢었다.

찍, 찌익.

유성매직으로 찢은 공책에 세 글자를 썼다.

거친 필치였다.

유백기.

“무조건 유백기는 뛰어넘어야 해.”

대찬은 유백기의 이름을 쓴 종이를 정면으로 보이는 벽에 붙였다.

그걸 보니 온몸에 열이 올랐다.

졸음이 가셨다.

자린고비는 배고프면 천장에 매달아 놓은 굴비를 보며 허기를 참는다.

그것처럼 대찬은 벽에 붙인 유백기의 이름을 보며 졸음을 쫓았다.

고통에 사무치던 나날을 떠올리면서 볼펜을 쥔 손에 힘을 주고 공부에 열중했다.

대찬은 그러다 새벽 3시가 넘어갈 즈음, 저도 모르게 책상에 엎어져 잠이 들었다.

최재한은 퀭한 눈에 볼이 움푹 팬 대찬을 걱정했다.

“…대찬아, 너 괜찮냐?”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실은 안 괜찮았다.

어떻게 괜찮겠나.

“공부는 마라톤이래. 처음부터 그렇게 뛰면 나중에 질린다.”

지겨운 소리.

세어 보진 않았어도 골백번은 더 들었다.

대찬도 모르지 않았다.

다만, 상황이 녹록지 않아 부득이 강행군을 자처했다.

단거리 달리기의 기세로 마라톤 트랙을 뛰어야 했다.

‘아무리 못해도 유백기가 나온 고원대는 간다.’

기껏 얻은 기회다.

유백기를 뛰어넘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책상에 머리를 박고 신음을 흘리던 대찬은 다시 머리를 들고 볼펜을 쥐었다.

그런 대찬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최재한도 마음 한구석에서 묘한 생각이 꿈틀거렸다.

‘나도 해 볼까, 공부…….’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난다.

한 사람이 변하면 주변의 여럿이 변한다.

대찬은 지금 적어도 한 사람만큼은 변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약 한 달 후, 더 급격하게 이루어졌다.

중간고사에서 괄목할 만한 성적이 나왔다.

고만고만한 이름들 사이에서 쑥 고개를 쳐든 대찬의 성적을 본 담임이 놀랐다.

“컨닝 한 거 아니냐?”

칭찬은커녕 의심부터 하고 든다.

‘선생이란 작자가 사기를 북돋워 주지는 못할망정.’

대찬은 입술을 비틀었다.

서른여섯의 굵은 머리로도 기분이 배배 꼬이는데 열여덟의 덜 자란 머리는 오죽하겠나.

대찬은 첫 번째 삶의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선생을 흘끔 보고는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해요.”

대찬의 급상승한 성적은 최재한 말고 다른 이들도 주목했다.

그들은 대찬의 중간고사 성적이 반에서 5등이라는 말에 귀가 쫑긋 올라갔다.

반에서 5등 안에 드는 녀석들이었다.

잠깐 쉬는 시간에 그들은 둘러앉아 수군거렸다.

대찬의 얘기였다.

“그 새끼 컨닝 한 거 백 프론데.”

“조대찬 옆자리가 반장이었잖아. 반장 거 대충 베낀 거지, 뭐.”

“걔 요즘 그래도 열심히 하긴 한 거 같은데?”

“야, 열심히만 한다고 되냐? 기본이 안 돼 있으면 열심히 해도 성적 안 올라. 컨닝이라니까.”

“그런가? 반장, 너는 어떤 거 같아?”

반장이라고 불린 학생은 자신에게 질문이 돌아오자 어깨를 으쓱이고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됐어. 신경 쓰지 마.”

그는 그렇게 말하고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학교를 등지고 나가면서 그가 피식 웃었다.

‘조대찬인지 뭔지 알 게 뭐야. 나 대학 가는 데 아무 상관도 없는 새낀데.’

“유준아!”

그렇게 걸어 나가는 반장을 여자 목소리가 불렀다.

임유준, 그의 이름이었다.

그 목소리에 반장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오래 기다렸지?”

친구들과 있을 때와는 다르게 임유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에게 다가온 여자는 살갑게 웃으면서 익숙하게 팔짱을 꼈다.

“응, 오래 기다렸어. 그러니까 맛있는 거 사 줘야 돼.”

“말만 해. 먹고 싶단 건 다 사 드려야지.”

둘은 시시한 농담에도 소리 내어 웃으면서 교문 밖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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