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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4화 (4/556)

난 할 수 있어 4화

아들에게 안긴 어머니의 동공이 커졌다.

“얘, 얘가 왜 이래, 갑자기?”

“보고 싶었어요.”

“닭살 돋는다. 그런 말은 가급적 자제해라.”

대찬은 어머니의 어깨를 살짝 잡은 채로 웃었다.

“달라질 거예요, 이제.”

“너 뭐 잘못 먹었니? 뜬금없이…….”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대찬의 누나, 조수진도 황당했다.

“쟤 왜 저런데?”

“암튼 달라진다고요.”

진짜 달라질 거라니까.

마법 같은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다.

마냥 마법에 취해 허송세월할 수 없었다.

대찬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렇게 굳은 각오를 다지고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대찬의 등 뒤로 아버지의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동림이앤씨 이거 내다 팔아야겠어.”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다 시킨다더니, 다른 게 오르면 뭐해. 동림 때문에 다 날리네요.”

어머니도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역성을 들었다.

그러자 대찬은 휙 몸을 돌리며 다급하게 외쳤다.

“팔면 안 돼요!”

“으, 으응?”

부모님은 멍한 시선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대찬은 다시 한 번 강변했다.

“절대, 절대 팔지 말아요, 동림이앤씨!”

“갑자기 왜 그러냐?”

첫 번째 삶에서 끝 모르고 추락하는 동림이앤씨 주식을 아버지는 인내 끝에 팔아치웠다.

그리고 주식을 팔아치우자마자 거짓말처럼 동림이앤씨는 반등에 반등을 반복해서 본전을 회복함은 물론이요, 그 해 주식시장 최고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덕분에 잔뜩 손해만 본 아버지는 쓰린 속을 연일 소주로 달래다가 간염에 걸리고 만다.

그때의 선택이 커다란 후폭풍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 대찬은 아버지를 극구 만류했다.

하지만 사실대로 얘기했다가는 허무맹랑한 소설 취급이나 받을 터.

궁색하나마 구실을 들이대는 수밖에 없었다.

“교무실에서 엿들었는데, 선생님 한 분의 지인이 어디 큰 증권사 애널리스트래요. 그 사람이 동림이앤씨 꼭 반등한다고 쥐고 있으라고 했다는데요.”

“그, 그러냐?”

“네. 어차피 본전도 못 건질 거, 일단 갖고 계셔 보세요.”

“음, 그럴까…….”

그 말에 팔랑귀 아버지는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

참 가족들 속을 많이도 썩였던 팔랑귀였는데.

이럴 땐 효험이 있다고 생각하며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기적 체험하는 의미가 있지.”

대찬은 속으로 이 기회를 잘만 이용하면 떼돈을 벌 수도 있겠단 달콤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그 상상이 망상이었음이 증명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대찬이 학교에서 돌아오자 아버지가 다짜고짜 빽 소리를 질렀다.

“야! 그 돌팔이 애널리스트 면상 좀 보자고 해!”

“……네?”

아버지는 벙어리 냉가슴만 앓으며 분통을 터트렸다.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 어머니가 끌끌 혀를 찼다.

“오늘 동림이앤씨 상장 폐지했단다. 아예 휴지 조각 돼 버렸어.”

“뭐, 뭐라고요?”

대찬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이럴 리가 없는데.

대찬의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가정 경제에 치명타를 입혔던 동림이앤씨의 급반등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알량한 기억으로 일확천금을 버는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렇게 간단한 방법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건가.

대찬은 무기력하게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사지에 힘이 쭉 빠져 연체동물처럼 자리에 주저앉았다.

대찬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주식을 해도 좋았다.

땅을 사도 좋았다.

하다못해 스포츠 도박을 해도 좋았다.

미래를 아는 자가 돈을 벌기란 땅 짚고 헤엄치기보다도 쉬웠다.

그런데 휴지 조각이 된 동림이앤씨의 주식처럼, 대찬의 꿈도 휴지 조각이 되었다.

지금부터 펼쳐질 미래는 대찬이 겪은 과거가 아니다.

즉, 그런 요행에 의지한 성공은 불가능하다.

“결국 뭣 빠지게 굴러서 성공하란 뜻이네.”

대찬은 흐흐, 무력하게 웃었다.

하기야, 이게 옳기야 하다.

그럼에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달콤한 상상이 허깨비처럼 까무룩 사라져 버린 것이 아깝지 않을 리는 없었다.

대찬은 자신이 가진 미래의 지식으로 돈을 벌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

2000년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이 동메달을 딴다는 데 돈을 걸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야구 대표팀은 은메달을 땄다.

돈을 날렸다.

대찬의 기억과 달랐다.

훗날 인터넷 제국을 건설하는 포털 사이트 네빌론의 주식을 푼돈 주고 샀다가 또 날렸다.

네빌론은 한 번의 경영 위기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주식은 휴지 조각이 돼 버렸다.

그러고 나서야 대찬은 미련을 버렸다.

‘식견은 활용해도 지식은 활용하지 말라는 건가.’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확천금의 꿈이 날아가 버려 실망한 마음을 다잡는 데 며칠이 소요되었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다.

한번 대차게 소나기가 내린 뒤로 대찬의 각오는 더 굳어졌다.

“어물쩍 시간 낭비할 순 없어.”

천금 같은 기회다.

시간은 눈 깜짝하는 사이 흘러간다.

어영부영 지나가면 또다시 고통에 사무친 운명이 그를 기다릴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계획을 세워야 해.”

대찬은 한참을 책상에 들러붙어 펜을 움직였다.

그의 계획은 멀리까지 내다봤다.

물론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계획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마음가짐부터 다르다.

대찬은 두 번째 삶을 살기 전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곰곰이 곱씹었다.

초, 중, 고 학창 시절은 게임과 노래방, 이따금 가는 당구장에서 어영부영 보냈다.

꼭 공부에 열심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당장의 즐거움에만 탐닉한 것은 문제였다.

덕분에 원하지 않는 학교의 원하지 않는 전공을 택했다.

대학 시절에는 여자 꽁무니 따라잡기 바빴다.

군대를 다녀오고서는 어떻게든 먹고살 대책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리라 믿었다.

물론 캠퍼스의 낭만을 따르는 것도 옳은 일이긴 하다.

그러나 역시 미래에 대한 대비가 수반돼야만 했다.

그렇게 덜컥 사회에 나가게 되었다.

내내 학생 신분으로 살던 그는 백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필래유통에 입사했다.

번듯한 회사라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깐이었다.

입사 후의 생활은 지옥을 방불케 했다.

회사 안에서 대찬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대단치 않았다.

그 와중에 유백기의 전속 노예가 됐다.

이리 구르고 저리 굴렀다.

그렇게 타의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생활이었다.

대찬은 하루하루 버티기에 급급했고, 거창한 청사진은 갖추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다.

대찬은 그 끔찍한 경험에 진저리를 쳤다.

“역시 계획을 세워야 해.”

앞으로 2년간은 고등학생으로 살아야 한다.

“차라리 초등학생이었다면 축구 선수라도, 프로게이머라도, 소설가라도 꿈꿔 봤겠지만.”

그러기엔 18살은 너무 많은 나이였다.

이리 따지고 저리 따져 봐도 결론은 공부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거 이 악물고 하는 수밖에.”

앞으로 2년간의 계획을 쓰는 데는 단 두 글자면 충분했다.

공부.

그다음은 대학이었다.

그저 그런 학생으로 자라 온 대찬에게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법대에 진학할 수도 있다.

행정고시를 봐도 좋다.

하지만 대찬은 자신이 가진 샐러리맨으로서의 경험을 활용하고 싶었다.

단순히 인생을 다시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이 밟아 온 궤도에서 성공하고 싶었다.

철저하게 깔아뭉개진 샐러리맨의 삶을 보란 듯이 청산하고 싶었다.

보무도 당당히 주체적으로 목적을 설정하고, 끝내 쟁취하는 샐러리맨이 되고 싶었다.

다시 넥타이를 질끈 매겠다고 결심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대찬은 다시 괴물의 아가리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때는 빈손으로 들어갔지만 이제는 다르다.

양손에 칼과 방패를 들고,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몸에는 갑옷 두르고, 허리춤엔 권총 한 자루, 가슴팍에 은장도 한 자루 품고 들어가면 결과는 그때와 다를 것이다.

대찬은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을 그 무기를 갖추는 시간에 오롯이 쏟기로 결심했다.

“국문과 대신 경영학과.”

그러기에 대찬은 대학 간판을 위해 선택한 전공 대신 상경 계열의 전공을 택하기로 했다.

“군대는 다녀온 정도로만 해도 괜찮겠지.”

대찬은 특전사를 나왔다.

원해서 간 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다시 18살이 된 마당에 유일하게 꺼려지는 건 다시 군대에 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입대의 1차 목표는 건강히 제대하는 것이다.

우선 그것만 염두에 두기로 했다.

군대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골이 아파 왔다.

“실력은 확실히.”

영어는 기본이요, 중국어, 일본어 능력자도 숱한 시대다.

그런 시대에서 대찬은 가, 갸, 거, 겨만 간신히 읊었다.

어학은 필수였다.

그밖에도 필요한 자격증이나 교양을 갖춰야만 한다.

“경험을 많이 할 것. 그냥 경험이 아니라 유익한 경험.”

첫 번째 삶의 대찬에게도 경험은 많았다.

다만, 미래를 위해 유익한 경험이 아니란 게 문제였다.

당장은 즐거웠지만 미래에 보탬이 되지는 않았다.

동아리 하나를 하더라도 유익하게.

팍팍하고 낭만 없는 궁리였다.

이미 낭만은 첫 번째 삶에서 누렸다.

두 번째에서는 영달만을 꾀해도 좋으리라.

대찬은 그렇게 합리화했다.

“그래도 연애는 하고 싶은걸.”

대찬은 그렇게 혼잣말을 하고는 멋쩍게 웃었다.

“입사 후에는 사내 정치에 휘둘리지 말 것.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구성원이 될 것.”

대찬은 그렇게 쓴 문장에 밑줄을 긋고 별표를 쳤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야말로 만악의 근원이었다.

사내 정치에만 골몰하는 능수능란한 여우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영리함과 기민함을 무기로 남들에게 부당한 피해를 안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피해자가 되는 건 더더욱 사양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착한 여우가 돼야 했다.

도박판에서 멍청이가 없다면 자기가 멍청이란 말을 유념했다.

마키아벨리는 저서 ‘군주론’에서 지겹도록 외쳤다.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지혜를 갖춰라.

대찬에게는 비교할 수 없는 최상위의 미덕이었다.

“여기까지만 온다면.”

대찬은 자신의 윗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최소한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는 안 하겠지.”

그가 세운 대강의 계획 아래 수많은 각론이 달렸다.

대찬은 그만큼 절박했다.

절박한 만큼 치밀했다.

대찬은 친구들 앞에서 공부에 매달리겠노라 선언했다.

“공부를 한다고? 네가?”

“응. 그냥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죽을 동 살 동.”

최재한은 대찬의 이마에 손을 얹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조대찬, 진짜 어디 아파? 왜 그러는 거야, 무섭게…….”

“왜 이래? 학생이 공부하겠다는데 무섭긴 뭐가 무서워.”

“그냥 학생이 아니라 조대찬이잖아. 조대찬은 공부 따윈 안 하거든.”

대찬은 그런 그의 반응이 놀랍지 않았다.

공부와는 영 친하지 않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새로 태어났으니 정말 최선을 다해 볼 작정이었다.

어쩌면 서른여섯의 대찬이 그렇게까지 코너에 몰렸던 건 다 학업에 소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악물고, 눈에 힘주고, 연필 꽉 쥐고.

‘그래서 이 더러운 판에서 살아남는다.’

이런 각오가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지금을 두 번째 인생이라고 한다면, 첫 번째 인생의 고교 시절에도 이런 각오는 수도 없이 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각오의 질이 달랐다.

그때는 친구들의 피시방 가자는, 노래방 가자는 유혹에 대번에 무너졌다.

지금은 달랐다.

그는 열여덟 해만큼 성숙해져 있었다.

지금 흘리지 않은 땀이 훗날 피눈물로 돌아온다.

이 시절의 흔한 격언을, 대찬은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피눈물을 흘려 봤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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