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3화
최재한은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는 뒤로 주춤 물러나면서 해괴하게 바라봤다.
“뭐야, 갑자기?”
그에게는 대찬과의 만남이 어떤 감동도, 울림도 없었다.
학교에서 지겹도록 볼 텐데.
순국선열의 넋을 기리면서 방 안에 대 자로 누워 있어야 할 삼일절이다.
굳이 불러내는 심보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최재한은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걱정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너 괜찮냐?”
“어, 괜찮아…….”
대찬은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제까지만 해도 죽겠다고 징징거리더니 용케 빨리 정신 차렸네.”
“어? 아…….”
대찬은 바로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곰 인형.
대찬은 지금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어야 했다.
그는 어설프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그저께만 해도 바보같이 담배 찾더니, 이제 정신 좀 차린 모양이네.”
그러고 보니 대찬이 담배를 처음 배운 게 바로 이맘때였다.
부끄러워졌다.
“그래. 정신 좀 차렸다.”
“짜식, 철들었네! 그래, 원혜미 그 계집애 뭐 좋다고 질질 짜고 그랬어. 훌훌 털고 그냥 형이랑 알콩달콩 살자?”
‘애처럼 말하지 마, 좀.’
대찬은 그렇게 받아치려다가 꿀꺽 그 말을 삼켰다.
애처럼 말할 수밖에 없다.
최재한은 열여덟, 그리고 대찬 자신도 열여덟이었다.
애한테 어른처럼 말하라는 건 말도 안 됐다.
대찬 역시도 애처럼 말해야 했다.
그러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내가 왜 너랑 살아.”
최재한은 낄낄거리면서 대찬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대찬은 질겁하며 그의 팔을 밀쳤다.
그러면서 잊고 지냈던 그 여자 애의 이름을 상기했다.
‘맞아. 이름이 원혜미였지.’
악감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악감정은커녕 기억도 없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첫사랑은 아련할 뿐이었다.
“쯧, 불쌍한 친구 거둬 주려고 했더니 싸가지가 없네.”
“원혜미한테 차여도 너한테는 안 가.”
둘은 티격태격했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런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던 게 언제였나.
비로소 새천년의 희망으로 들떠 있었던 그때로 돌아왔단 것이 실감났다.
대찬은 이따금 격통이 뿜어져 나오던 가슴을 힘주어 눌러보았다.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짜 이때로 돌아왔구나.
웃음이 절로 났다.
대찬의 인생에 찌들대로 찌든 회사 생활이 지워졌다.
유백기가 지워졌다.
그리고 후회했던 것들을 훌훌 날리고 제대로 살아가게 되었다.
난데없이 미소를 짓는 대찬을 최재한은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다가 툭 던지듯 말했다.
“이왕 만난 거 밥이나 먹자.”
“좋지.”
최재한의 말에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자연스레 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어디로 가자는 약속도 없었다.
그들은 당연하단 듯 같은 곳을 생각하고 그곳으로 걸어갔다.
동네의 작은 돈가스 가게였다.
둘이 만나면 항시 그곳에서 끼니를 때웠다.
다른 선택지는 당연히 없었다.
이놈은 역시 내 막역지우인가 보다.
대찬은 슬며시 그를 보며 미소를 띠었다.
최재한은 과한 예의, 계산, 가식이 앞섰던 사회의 인연과는 달랐다.
흐뭇한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런 사소한 사건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는 스스로가 우습기도 했다.
“원진아파트 세트 메뉴들 왔나.”
돈가스 가게 사장인 아주머니가 푸근하게 웃으면서 대찬과 최재한을 반겼다.
진한 경상도 억양의 목소리가 대찬은 반가웠다.
원진아파트는 대찬과 최재한의 가족이 오래전부터 살고 있는 아파트였다.
동네 사람들이 원진아파트 세트 메뉴 하면 척! 하고 알아들을 정도로 둘은 정평이 나 있었다.
대찬은 다시 한 번 지금이 서기 2000년이라는 걸 느끼고 혼자서 경탄했다.
그는 괜히 뭉클해져 아련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아줌마, 오랜만이네요.”
“그제도 와 놓곤 참 오랜만이다. 그자?”
아차, 대찬은 뒤통수를 긁으면서 멋쩍게 웃었다.
아주머니는 피식 웃으면서 돈가스 두 접시를 내오며 대찬에게 물었다.
“니 말투는 와 그래 늙었노. 영감재이맨치로…….”
최재한이 호응했다.
“그죠? 갑자기 아저씨 됐다니까.”
“역시 돈가스는 아줌마가 최고네요.”
대찬이 할 수 있는 건 화제 전환을 위한 진정성 없는 칭찬뿐이었다.
애처럼 말하겠다고 결심했지만 36년을 쌓아 온 화법이 일순간에 바뀌진 않았다.
최재한은 대찬을 노려보면서 주절거렸다.
“봤지? 아줌마도 그러시잖아. 너 진짜 이상해.”
그래도 마흔도 안 돼서 돌아왔는데 영감쟁이는 너무하잖아요.
대찬은 속으로만 원망하곤 말없이 돈가스를 썰었다.
둘은 말없이 배를 채웠다.
대찬은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 기뻤다.
거래처 직원들과 함께 식사할 때면 이 침묵을 견딜 수가 없었다.
침묵은 곧 평판을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 녀석은 대찬이 말을 하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었다.
입가에 돈가스 소스를 묻혀 가며 제 배를 채우는 데만 급급했다.
그게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어… 돈이…….”
다 먹고 계산을 하려는데 주머니를 뒤지던 최재한이 난색을 표했다.
대찬은 그를 흘끔 바라봤다.
지갑을 깜빡한 모양.
최재한은 어색하게 웃으며 아주머니를 바라봤다.
“아줌마, 저…….”
“으이구, 또 외상 하게?”
아주머니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쯧쯧 혀를 찼다.
그 순간 대찬은 당황했다.
‘나한테 부탁하면 되는데.’
아주머니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느니, 매일 붙어 다니는 자신에게 네가 한 번 사라 말하는 쪽이 좋았다.
“야, 내가 살게. 무슨 외상이야.”
대찬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주머니에게 돈을 건넸다.
그러자 최재한과 아주머니의 표정이 볼만했다.
“뭐야, 왜 그래?”
“대찬이가 친구 대신 돈을 다 내네?”
“…돈가스 한 번쯤 살 수도 있지, 왜 그래요?”
대찬은 그렇게 말해 놓고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옛날의 자신은 수전노, 짠돌이 소리를 들어도 쌌다.
100원, 200원에 연연하고, 통 크게 사는 일은 극히 드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었다.
물론 평범한 고등학생의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은 탓이긴 했다.
그러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짠돌이란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그는 인색했다.
학벌, 인맥 탓만 할 게 아니었다.
인색한 성품은 주위 사람들을 제초제처럼 박멸했다.
‘그래, 이것도 문제야…….’
대찬은 어색하게 웃었다.
“어쨌든 내가 살게.”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최재한은 대찬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야, 잘 먹었다?”
“잘 먹었음 됐다.”
“다음엔 내가 살게. 영감 조대찬도 쓸 만한데?”
대찬은 웃음으로 답했지만 속은 복잡했다.
대찬은 자신의 첫 번째 인생이 왜 그토록 꼬였는지 반추했다.
유백기 차장의 탓만 할 건 아니었다.
그가 몰락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이었다.
사람을 얻지 못했다.
‘왜 사람을 얻지 못했지?’
첫째, 학벌.
대찬의 학벌은 변변찮았다.
학벌은 계급이다.
물론 날이 갈수록 학벌의 견고함이 사라지긴 했지만, 2000년으로 거슬러 온 만큼 학벌의 영향력이 건재했다.
올더스 헉슬리는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인간을 알파·베타·감마·델타·입실론 계급으로 나누었다.
그것처럼, 혹은 신라의 골품제처럼 학벌에 따라 등급이 나뉘었다.
고만고만한 4년제를 나온 대찬은 굳이 따지자면 감마 계급이요, 6두품이었다.
명문 대학 고원대를 나온 유백기 차장은 알파는 못 돼도 베타는 되었다.
회사 내에서 성과가 변변찮았지만 출세 가도를 달렸다.
물론 학벌은 경쟁에서 승리한 자들의 전리품이다.
학벌은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고용자의 입장에서 학벌이 좋은 사람을 뽑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학벌은 학력 이상으로 빛을 발했다.
수능 이후의 노력과 성과가 학벌이라는 그늘에 가려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둘째, 인맥.
회사 생활에서 능력보다 중요한 건 사내 정치였다.
능력만으로 정글 같은 회사 생활을 돌파해 내는 건 한계가 있었다.
무능하면서도 승진 가도를 달리는 게 도리어 쉬웠다.
열심히 손바닥을 비비고 술 상대를 해 주면 고의적인 잘못은 실수로 둔갑했다.
실수였다면 애초에 없던 일이 됐다.
대찬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살아왔다.
제 할 일만 하고 주변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니 위아래, 옆 할 것 없이 사람이 남지 않았다.
사내 정치까지 갈 것도 없이 기본적인 사회성이 부족했다.
돈가스를 얻어먹은 최재한의 표정이 그걸 상징했다.
‘인맥은 인심이고, 인심은 곳간에서 나오는데.’
그 곳간을 꽁꽁 닫아만 두고 있었다니.
‘돈가스 한 접시의 문제가 아니야.’
동네 돈가스 가게 사장님마저 알고 있었다.
대찬의 지갑이 비틀어 짜도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메마른 걸레 같단 걸.
대찬은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곰곰이 되돌아봤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과 회사에서도 그의 이런 기질은 변하지 않았다.
‘조 대리님은 다 좋은데 쩐을 너무 안 풀어요.’
회사 후배가 웃으며 농담조로 하던 말이 떠올랐다.
살아온 과거는 이제 살아갈 미래가 될 터.
“달라지자.”
대찬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입술을 앙다물며 중얼거렸다.
인심을 사려면 먼저 인심을 베풀어야 한다.
인심을 베푸는 가장 쉽고도 직관적인 방법은 바로 돈이다.
그걸 지금껏 외면하고 살았다니.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집으로 돌아오자 텅 비었던 현관이 여러 켤레의 신발로 복작거렸다.
부모님이 돌아오셨구나.
18년 전의 부모님과 마주하게 된다.
대찬의 가슴이 콩콩 뛰었다.
신발을 벗고도 현관 안으로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안에는 정말 18년 전의 가족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가 있는 걸까.
지금까지 지나치게 현실적인 꿈이었던 건 아닐까.
현관 안으로 들어서면 그 꿈이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사라지고, 다시 고통에 사무친 현실에 눈 뜨는 건 아닐까.
대찬은 두려워졌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지 않자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들어오고 뭐 하니?”
대찬은 떨리는 가슴을 안고 안으로 걸음을 들였다.
침을 삼키고 거실로 시선을 돌렸다.
부모님과 누나가 있었다.
기억 속에서도 희미해져 가던 젊은 가족들이었다.
대찬은 가슴이 쿵쿵 뛰고 울음이 솟구치려 했다.
그는 감정을 꾹 억누르고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너 뭐라고 했냐?”
반백의 머리가 아닌, 검고 풍성한 모발을 지닌 젊은 아버지는 놀라 물었다.
대찬은 뭉클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녀왔다고 했는데요?”
“아니, 왜 존댓말을 쓰느냐고, 갑자기.”
대찬이 부모님에게 존대를 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취업을 하고 맞은 명절, 오랜만에 일가친척이 다 모인 자리에 나갔는데, 반말로 아버지를 불렀다가 집안 어른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한 뒤로 교정했다.
대찬은 마땅한 핑곗거리를 찾지 못해 대충 둘러댔다.
“이제 고2도 되고 했으니까요.”
“그러냐.”
거참, 말해 놓고도 궁색하다.
대찬은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달라질 거예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죠.”
어머니도 얼떨떨한 반응이었다.
“대학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고1에서 고2 되는 건데 새 부대씩이나…….”
“어쨌든 결심한 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대찬은 웃으면서 어머니를 바라봤다.
이곳에서 다시 눈을 뜨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수술을 마치고 혼수상태로 병상에 누워 있던 어머니였다.
그런데 지금은 멀쩡히, 웃음을 지어도 무표정할 때보다 주름이 덜 잡히는 얼굴로 대찬을 맞이하고 있었다.
대찬은 뭉클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그대로 어머니를 꽉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