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화
유백기 차장은 진땀을 흘렸다.
“야, 야, 이 새끼야!”
“유백기는 대리 때 노조 내부 문건을 윗선에 갖다 바쳐서 승진했다!”
유백기 차장의 동기면서 이제 겨우 대리 딱지를 뗀 직원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는 유백기 차장의 멱살을 쥐었다.
“고 과장님 골로 보낸 거 네가 한 짓이었어?”
“그, 그게 오해가 좀……!”
대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
“유백기는 부회장이 회사 자금 횡령하는 걸…… 읍읍!”
유백기 차장은 다급하게 대찬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대찬의 입을 막은 채로 읍소했다.
“조 대리, 아, 아니지, 대찬아, 왜 이러냐! 제발 그냥 조용히 묻고 가자. 응? 그 망할 주둥아리 좀 닥쳐……!”
대찬은 거칠게 유백기 차장의 손을 뿌리쳤다.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영원한 잠을 유도하는 피로가 분명했다.
대찬은 끈질기게 입술을 움직였다.
“횡령하는 걸 도맡아했다……. 더러운 일은 나한테 다 떠넘겼다……. 하…….”
치부가 낱낱이 까발려진 유백기 차장이 대찬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이 개새끼……! 이따위로 나오면 곱게 못 죽어! 알아!”
유백기 차장의 외침이 소곤거리는 듯 작게 들렸다.
대찬은 숨을 토했다.
몸의 기력이 급격히 빠져나갔다.
“야! 내가 너 죽고도 괴롭힐 수 있어! 엉? 위에다 보고해서 네놈 산재 처리도 안 해 줄 거고, 남은 급여랑 퇴직금도 제대로 못 받게 할 거야! 알아!”
대찬은 힘겨운 시선으로 유백기 차장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유독 아련하고 슬퍼서 유백기 차장도 순간 당황했다.
“뭐, 뭐야!”
대찬은 피식 웃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오른팔을 들었다.
그리고 경련하는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그걸 기어코 유백기 차장의 면전에 들이댔다.
“엿이나 까 잡숴…….”
“이 새끼가……!”
유백기 차장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툭.
대찬의 팔이 무기력하게 떨어졌다.
그는 잠꼬대를 하듯 중얼거렸다.
“이러다 죽겠다…….”
삐―
바이탈 사인 모니터는 일정한 기계음과 함께 일직선을 그렸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밝은 빛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니 주변이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다만, 대찬의 앞으로 찬란한 한 줄기 빛이 뻗어 있었다.
대찬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뭐야, 정말 사후 세계라도 있는 거야?”
세상에. 엄마, 미안해요.
엄마가 말하던 천국이 진짜 있었나 봐.
내가 허무맹랑한 말 좀 그만하라고 그렇게 다그쳤는데, 진짜 있었나 봐.
그런데 착한 사람만 천국 간다는 말은 틀린 건가 봐.
난 불쌍한 사람이긴 해도 착한 사람은 아닌데…….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내가 먼저 보러 갈게.”
대찬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빛을 따라 걸어갔다.
걸어갈수록 무겁고 무기력한 몸이 가볍고 활발해졌다.
앞으로 쏠린 거북목이 올곧게 펴졌다.
만성피로로 짙게 깔린 다크서클이 옅어졌다.
회식으로 툭 튀어나온 배가 점점 판판해졌다.
빛의 끝에는 터널의 바깥처럼 밝은 빛이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쏟아졌다.
이대로 현실과의 인연이 끊기는 걸까.
저 빛을 통과하면 천국이든 지옥이든 극락이든 저승이든 또 다른 어딘가로 향하는 걸까.
“아, 거래처 서 대리하고 썸씽 있었던 것도 폭로했어야 했는데.”
유백기 그 빌어먹을 자식의 추악한 비밀을 더 까발렸어야 했는데.
대찬은 깊은 한숨으로 미련을 버리고 그 빛으로 걸어 나갔다.
순간 대찬은 눈을 떴다.
“헉.”
깊은 잠에서 깬 느낌이었다.
대찬은 눈을 깜빡였다.
퀴퀴한 원룸 자취방이 아니었다.
바닥은 누런 장판이었다.
“…….”
이 방의 모든 것이 그렇듯 낯설면서 익숙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다.
이런 아늑한 공간이 저승일 리는 없다.
대찬은 앉은 채로 한참을 멍하니 주변을 바라봤다.
그는 제 몸을 덮은 이불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사 가면서 잃어버렸던 건데.”
이게 왜 여기 있지.
대찬은 앉은 채로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어리둥절했다.
착각이라거나 꿈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한 기억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해하려 해도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대찬은 편한 길을 택했다.
“이해하질 말자.”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제집이 빽빽이 들어찬 책장.
구형 라디오와 시든 화분.
그리고 커다란 곰 인형.
대찬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저건 갖다 버린 게 언젠데 여기 있는 거야.”
고등학교 2학년으로 진급할 즈음이었다.
1년간 사귀던 여자애에게 공부에 전념하겠단 명분으로 차였다.
그러면서 선물로 줬던 걸 돌려받은 곰 인형이었다.
당시의 대찬은 여자애가 돌아오리라 믿었다.
그 때문에 한 달 넘게 곰 인형을 방에 고이 모셔 뒀다.
한 달이나 지나서야 그게 헛된 믿음인 걸 깨닫고 내다버렸다.
그러니까 저건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곰 인형과 한참 눈을 마주치던 대찬은 찜찜한 얼굴을 천천히 굳혔다.
안면 근육이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설마…….”
그때로 돌아간 거야?
아닐 거야.
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허무맹랑한 가설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생물학적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정신을 차려 보니 멀쩡히 집에 누워 있다.
또 다른 허무맹랑한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었다.
대찬은 혓바닥으로 입술을 쓸어 봤다.
“어?”
대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바삭한 낙엽처럼 부르텄어야 할 입술이다.
그런데 매끈했다.
“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진짜 일어난 거야?”
그럴 리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책상에 놓인 달력을 봤다.
2000년 3월.
“2000년……?”
대찬이 18살이던 때다.
그러자 낯설던 풍경이 한 점의 이질감 없이 익숙해졌다.
18살, 그때 살던 방이다.
대찬은 곰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빙긋 웃는 입의 인형을 대찬은 멍하니 한참 지켜봤다.
꿀꺽.
대찬은 침을 삼키곤 천천히 방에 걸린 거울로 걸어갔다.
다르다.
당시 삼손의 머리처럼 결사 옹위하던 기다란 구레나룻이 있었다.
야근 때문에 볼까지 드리워졌던 다크서클도 없었다.
두툼하고 하얀 눈두덩에서 젊음에서 오는 탄력이 느껴졌다.
부르트고 거무튀튀한 입술 대신 붉고 윤기 나는 입술.
술에 찌들어 거친 피부 대신 옅은 홍조가 뜨고 여드름이 잦아드는 피부가 있었다.
“아…….”
대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잦은 회식으로 생긴 올챙이배는 균형 있게 탄탄했다.
매일 컴퓨터로 하던 업무 때문에 굽은 목과 허리는 반듯했다.
대찬은 울면서 웃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해 보는 상투적인 행동을 취했다.
한 손으로 볼을 잡고 쭉 늘어뜨렸다.
탄력 있는 피부가 팽팽하게 늘어났다.
약한 고통이 따라왔다.
“아니야. 아직 몰라.”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방문을 바라봤다.
저 문을 열면 다시 끔찍한 현실로 돌아올지도 몰라.
그러나 영영 열지 않을 순 없다.
확인해야지.
그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익숙한 거실의 풍경이 보였지만 아무도 없었다.
냉장고에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아빠랑 양평 드라이브 다녀올게. 국 끓여 놨어.
어머니의 필체가 분명했다.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과연 말대로 가스레인지 위에는 우거지된장국이 냄비 가득 끓여져 있었다.
민물새우를 넉넉히 넣어 맛있어 보였다.
어머니 솜씨가 분명했다.
“아니야. 아직 몰라.”
대찬은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믿고 싶어서 더욱 의심했다.
그는 휴대폰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뒤졌다.
그러다가 당시의 자신에게는 휴대폰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대신 중요한 잡동사니를 모아 놓은 책상의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서 친한 지인들의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꺼냈다.
거실로 나와 전화기를 들었다.
수화기와 몸체가 돼지꼬리처럼 꼬인 전선으로 연결된 아날로그 전화기.
오랜만이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름이 있었다.
최재한.
초·중·고를 같이 나온 친구였다.
점잖은 말로는 죽마고우였고, 속되게 말하면 불알친구였다.
예전 여자 친구가 자기랑 최재한 중에 고르라고 할 정도였다.
삭막한 세상에서 피붙이를 제외하곤 유일하게 의지하는 존재였다.
민감한 부탁에도 이유를 묻지 않는 친구였다.
신호음이 들리는 동안 대찬은 최재한과의 추억을 떠올렸다.
가족들이 집을 비운 사이, 대찬이 혼자서 심하게 앓을 때 최재한은 밤새 그를 간호해 주었다.
어머니가 갑자기 입원했을 때, 최재한은 초임 공무원 월급의 반을 뚝 떼서 급전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대찬이 연이은 취업 낙방으로 상실감에 젖어 있을 때, 온갖 눈치 봐 가며 연차를 써서 그와 여행을 가 주었다.
그저 친구라고 부르기엔, 친구라는 낱말이 터무니없이 싱겁고 가벼웠다.
대찬에게 최재한은 다른 말로는 대체 불가능했다.
그저 최재한이었다.
물론 최재한에게 대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였기에 막다른 길과 마주한 대찬은 최재한부터 찾았다.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하되 앳된 목소리였다.
변성기가 갓 지난 소년의 목소리에 대찬은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대찬은 입술을 꾹 깨물며 말했다.
“재한이냐?”
“어. 왜.”
생략된 인사는 친근감의 증거였다.
대찬의 기분을 알 리 없는 최재한의 대답은 감흥 없이 건조했다.
대찬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부터 꺼냈다.
“만나자.”
“만나? 어차피 내일 볼 텐데.”
내일은 3월 2일, 새 학기 첫날이다.
최재한이 난색을 표해도 대찬은 막무가내였다.
“만나자고.”
당장 만나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내막을 알 리 없는 최재한은 귀찮을 뿐이었다.
“만나서 뭐 할 건데.”
“몰라. 뭘 하든 일단 만나.”
최재한은 뭐라 구시렁거리긴 했지만 대찬의 제안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약속을 잡은 대찬은 옷장을 열었다.
“내가 이런 옷을 입고 다녔다고?”
흘러간 유행이 어찌나 촌스러운지.
대찬은 심호흡을 하고 내키지 않는 옷을 꺼내 입었다.
팔랑거리는 넓은 바짓단이 못 견딜 정도로 부끄러웠다.
헐렁한 바지의 버클을 채웠다.
그는 나가기 전에 냄비를 열어 오랜만에 맡는 어머니의 된장국 냄새를 음미했다.
대찬은 설레는 마음으로 서둘러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렇지 않은 최재한은 느긋하게 저 멀리서 걸어왔다.
가까워져 오는 어린 친구를 본 대찬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최재한의 심드렁한 표정이 선명히 보였다.
대찬은 참지 못하고 그를 와락 안았다.
20여 년 만에 보는 친구의 어린 얼굴은 대찬에게 심장이 터질 듯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재한아!”
대찬은 최재한의 팔을 꽉 붙들었다.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입술을 깨물어 겨우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