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뇌제가 돌아왔다. -3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Epilogue3
-사도님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머릿속을 스치고지나가는 세계가 보인다.
그건, 이미 메마를 대로 메마른, 지나간 세계의 기억.
행성 전체가 묘지로만 가득 찬 세계가 있었다.
가장 큰 무덤 위에서 한때 ‘전율하는 사성’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던 불사왕이 앉아 울고 있었다.
지구 전체가 잿빛으로 물든 세계도 있었다.
바스러진 모래보다도 곱게, 흩날리는 바람에 떠올라 세계를 뿌옇게 물들이던.
종말의 화룡은 그곳에서도 그저 파괴를 일삼을 뿐이었다.
피의 논리만이 남은 세계도,
악과 악마가 결탁하여 그저 영원한 밤을 맞이한 세계도 존재하였다.
다만, 나와 함께 시대를 유영하는 ‘빛’은.
그 세계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되감아 주었고.
당대 회귀자가 회귀를 시작하는 시점까지 돌아간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을 바꾸었다.
녹지가 사라지고 흙과 모래로 뒤덮인 세계에 한 ‘수검사’는 현자가 되었다.
절망하고 절명했던 ‘네크로맨서’에게는 희망을,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던 ‘대성녀’와의 인연을 선사하였으며,
본래 내가 살아왔던 시대에는 그 이름도, 흔적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존재 자체가 사라진 회기자들에게도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었다.
실족하지 않은 검은 녹슬지 않았고.
녹슬지 않은 검은 마땅히 베어야 할 ‘침략자’들을 꿰뚫었다.
그렇게, 나는 세계를 거슬러 오르고 또 올랐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탑을 오르는 것처럼.
끝없이, 계속해서.
-사도님!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체감하지 못하게 되었다.
오늘의 뒤에 어제가 오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며,
나는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 모든 ‘멸망한 세계’에 마땅한 해피엔딩을 선사하고자 필생의,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
그렇게 최초의 ‘드래곤 슬레이어’이자 태초의 회귀자에게 선택을 받은 첫 계승자. ‘제이슨 스트라우스’의 삶마저도 거슬러 오른 나는 마주했다.
-사도님...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바다였다.
모든 육지를 뒤덮은 경이로운 푸르름.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색 바다가 보인다.
오롯이 ‘물’에 잠긴 세계.
그곳에서, 나는 드디어 마주한다.
“사도님.”
늘, 귓가를 맴돌던 목소리였다.
고난과 역경이 나의 앞을 가로막을 때면, 당연하다는 듯이 내리던 비와 그 빗소리를 통해 어렴풋이 들려오던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
“정말... 오랜만이네. 주신님.”
눈앞에 선 물빛 소녀는 바로, 나의 주신.
‘수신’이었다.
“아니, 예전에 만났을 땐 공주님처럼 잠만 자고 있었으니, 서로 마주 보는 건 처음인가?”
나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물었고.
물빛으로 전신을 치장하고 있는 소녀는 답하였다.
“이제... 그만해도 돼요.”
수많은 갈등이 있었다.
수많은 전쟁이 있었고.
수많은 부상과 피와 비명이 잇따르는 세계도 더러 있었다.
“언제나, 늘 감사한... 나의 사도님...... 이젠, 정말 그만두셔도 됩니다. 당신은 이미 역대 회귀자들을 모두 구하셨어요. 너무도 많은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죠.”
그리 말하며 수신은 미소를 지었다.
무구하고 가녀린, 아주 작은 아이의 순박한 미소를.
“이제 사도님에겐, 이미 ‘후회’할 거리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제 그만, 빛을 따라 사도님께서 직접 구원하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말하는 수신의 말들은, 마치 무의식적으로도 진리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만일 다른 누군가가 지금 이 순간에 닿았다면 필시 이 순간 지금껏 지나온 길을 되짚어 돌아가게 되었으리란 사실마저도 짐작할 수 있었다.
허나, 나는.
그 어떤 차원의, 그 어떤 세계의 누구라도 내렸을 그 당연한 결정을...
오직 나만은 따르지 않는다.
“아니. 미안하지만 나의 주신님. 나는 되돌아가지 않는다.”
“더는 위험해요. 이 앞은... 이 너머는 가서는 안 되는 세계란 말이에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이 있어요. 심지어 그 시간을 헤메이고 또 헤메여도 결국. 구원해낼 수 있는 인간은 딱 한사람뿐이라니까요?!”
자신의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일까.
수신은 아주 완강한 태도로 ‘빛’이 열어준 길을 막아섰다.
그 눈은 선명한 물빛으로 반짝였고.
그 바다의 신수를 닮은 눈빛까지도 너무나 숭고했다.
“고작 한 인간을 위해서, 저는 저의 사도님이 끝도 없기 고통받는 모습은 차마 지켜볼 수 없습니다. 이건 당신께 권능을 하사한 주신으로서의 명이에요.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당신의 세계에서 사세요.”
하지만, 그럼에도.
“안된다.”
나의 대답은 변하지 않음에.
수신은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왜죠!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요. 지금까지와는 달라요. 고작 한 사람이잖아요. 저 아이만 불행을 참으면, 그럼 다 해결되는 일이잖아요!”
“그래. 해결되었지. 굳이 소리 지를 것도 없다... 다 알지. 내가 바로 그 희생이 빚어낸 세계에서 태어난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이건우의 첫 수긍에 물빛 소녀는 환희를 번뜩이며 다시 소리를 지르듯 말을 꺼냈으나... 직후, 뇌제는 같은 말로 처음 수신의 말을 끊었다.
“그렇지만!”
처음 있는 일에 당황하며 큰 눈동자를 깜빡이는 수신.
허나, 그런 당혹감마저 아랑곳하지 않고 뇌제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말이다... 그 영원히 고통을 감내했고 또 아직도 감내하고 있는 소녀가... 태초의 회귀자이자 이 시스템의 창조주인 반신 노을이...... 바로 너잖아.”
“...?!”
당혹감을 넘어 경악하듯 두 눈과 입을 크게 벌리고야마는 수신. 아니, 태초의 회귀자이자 태고의 각성자인 노을.
시스템은 만인을 위해 만들어졌다.
노을은 그 시스템을 만들어내기 위해 세계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그 압도적인 마나감응력을 포기하였고.
끝내 소녀의 육신은 시스템을 만들어내기 위한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소녀의 혼은...
“너는, 나를 이끌었듯. 다른 회귀자들도 이끌어주었지. 많은 이들이 네 목소리를 듣지 못했어. 네가 그토록 갈망하던 꿈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지.”
지금 이렇게, ‘신’이 되어서까지 인류를 위했다.
“어,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았다는 사실에 한참을 경악하던 소녀.
물빛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으나 나는 구태여 답하지 않았다.
도리어 몸을 낮춘다.
언젠가, 내가 2대 성녀도, 빛의 후계자도 아닌 앤젤라 엘런을 구원해냈던 것과 똑같이.
몸을 낮추고, 눈을 맞추고 지그시 바라본다.
마주 본 소녀의 눈은 정녕, 이것이 신의 일부인가 싶을 만큼 애처롭게 떨려오고 있었으나, 나는 그저 담담히 말한다.
“노을아.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내가 너를 구한다는 거지.”
천년이 우습게 여겨질 정도였다.
만년마저도 비할 바가 안 되며, 그 이상의 ‘영원’을 거쳐야만 비로소 닿을 수 있는 비원.
허나, 나는 일말의 주저 없이 확신하듯 말하였다.
“나는, 너를 구한다. 네가 세계를 구원했듯. 과거를, 미래를, 현재를 걷는 그 모든 회귀자들의 앞에 비를 내려주었듯이.”
소녀는 언제나 희생하는 자였다.
그러나 그 소녀의 눈앞에 나타난 나는, 그런 소녀를 위해 희생을 감내하겠다 말하였고.
소녀는 생에 처음으로 일어난 일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그 자리에 굳어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나는 걸었다.
찬란한 금빛이 만들어준 기나긴 다리를 걸어 차원을 넘었다.
이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 있던 소녀, 노을.
그리고 그런 소녀의 옆에서 목소리는 들려오는 것이다.
“노을아...!!!”
소녀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은 이미 서울이다.
저물어가는 태양의 몽환적인 오렌지빛이 가득한 세계.
아무런 재앙도, 그 어떤 이능도 발현되지 않은 세계.
정겨운 담벼락이 보인다.
마력이 아닌 석유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구른다.
재개발 구역 인근의 공사설비들이 큰 소음을 내고 있다.
그런,
아무것도 아닌 풍경 속에.
소녀가 있다.
그리고.
“노을아!!!”
“노을아!? 대체 온종일 어디가 있던 거니!”
그 풍경 속에는 노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다.
늘 비를 내렸다.
비는 노을이 눈물을 흘릴 때마다 내렸다.
그 눈물이 차오르고 차올라 끝내 세계를 ‘물’에 잠기게 만든 세상에서, 소녀는 신이 되었던 것이다.
“어, 엄마...! 아빠!”
꿈이란,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가장 짙은 갈망.
나는, 역대 회귀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노을의 꿈’을 이해한 헌터였다.
소녀의 꿈은 단순했다.
다시, 아무 이능도 없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 부모님의 품에 안겨 잠을 자고 싶다.
고작, 그것뿐이었단 말이다.
나는 이를 이루어주기 위해 굳이 고행의 길을 걸었고.
시간도, 공간도 초월하여 아이러니를 넘어 끝내 소녀를 구했다.
그렇게 돌아간 세계에서...
나는 더 이상 전과 같은 삶을 살 순 없기에 홀로. 끝을 맞이하고자 했다.
-샤아아아아!
환한 빛무리가 시야를 뒤덮는다.
이미 1451번이나 해왔던 일이다. 당황하지 않는다.
생각의 방식도, 사소한 행동들에서 묻어나는 작은 버릇도 모두 뒤바뀐.
나는 그렇게 돌아왔다.
나는 늘 내가 사라진 후에도 1452회차의 세계가 제대로 기능하길 염두에 두며 살았고.
내가 살아온 발자취.
백귀야행이, 검성이, 검희가, 대마법사가 그리고 숱한 축복과 행복을 기약하는 두 성녀가 남아 있는 세계는.
필시 나의 부재에도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완성된 세계에서 홀로 안식을 맞이하고자...
“아. 왔어요!”
“계시로 봤다는 것보다 이틀이나 늦었네. 수신의 성녀도 약발 다됐나 봐?”
“...대대장님 제가 예지몽을 얼마나 많이 꿨는데 하루 이틀 가지고 그러세요.”
“그만! 언니들 그만 싸우고 앞 좀 봐줘요. 아저씨가! 아저씨가 왔다구요!”
돌연, 들려오는 목소리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은 상황에 황금색 빛무리에 휘감긴 나의 귓가에는, 언젠가 들었던 그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제 잊지 않도록 해라. 가장 숭고한 자여. 그대가 세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길 주저하지 않았듯... 이 세계에는 오직 그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길 주저하지 않는 이들이 있음을.”
그리고 아득하고 또한 찬란했던 빛무리가 걷히면, 눈앞에 보이는 건 세 사람이었다.
어림잡아 보아도 키가 10cm는 더 큰 듯한 빛의 소녀 앤젤라 엘런.
그토록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 아주 조금도 키가 크지 않은 검희 이서영.
그리고... 오직 나만을 위해 몇 번이고 목숨을 걸어주었던 나의 이해자. 수신의 성녀 남궁연.
들려오는 빛과 함께.
내 머릿속에 스미는 기억.
그건, 눈앞의 세 사람이 갖은 시련과 역경을 모두 돌파하고서 반강제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있는 곳까지 쳐들어왔던 그 반신의 기억이었다.
눈앞의 세 사람은 말했다.
다름 아닌 내가, 뇌제도, 사상 최강의 헌터도 아닌 이건우가 이 세계로 돌아오는 그 날까지 자신들의 수명을 고정시켜달라고.
그리고...
내가 오는 그날, 그 순간부터 다시 멈춰버린 시간을 흐르게 해달라고 말이다......
참,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저런 무리한 요구를...
다만, 그런 생각을 홀로 떠올리면서도 나는 깨닫는다.
내가 눈앞의 세 사람을 바라보는 그 시선이 바로 ‘노을’과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나를 바라보던 바로 그 시선이었다는 걸...
하.
웃음이 나온다.
이 세계에는 나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길 주저하지 않는 자들도 있다는 말.
귓가를 스치고 날아간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었기에.
-터벅.
나는 웃으며 드디어 땅을 딛고 선다.
동시에 모이는 세 쌍의 시선.
내가 과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의문은 떠올랐으나, 고민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말해야겠지.
“돌아왔습니다.”
이젠 정말로, 돌아왔다고.
뇌제가 돌아왔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