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72화.
꿈을 꾸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태양의 그 오렌지빛 따스함 속에서도 ‘겁쟁이’는 끝내 자신의 오류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문득 돌이켜본 자신은 겁쟁이였다.
피를 뒤집어쓰면 두 팔이 덜덜 떨리고,
처절한 비명 한 번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악몽을 꾸며,
이젠, 썩어 수백 수천의 혼령들을 손가락 하나로 부리며, 숫자를 세는 것이 의미가 없을 만큼의 군단을 거느리게 되었음에도...
자신은 겁쟁이였던 것이다.
‘위령제’를 올리지 않아 정신이 피폐해지고,
‘성녀의 축복’마저 사라져 지난 천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긴 잠에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마치 눈을 뜨고 있음에도 계속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서.
‘악행’을 저지름에도 실감이 나질 않았고, 그토록 치를 떨었던 ‘피’와 ‘비명’에도 점점 더 둔감해져 갔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이도,
원망을 내뱉는 이도,
고문을 피하고자 있지도 않은 죄를 스스로 만들어 고하며 처절하게 용서를 비는 이마저도 죽이고 또 죽였다.
자신의 머리로 사고하는 인류는 결국, 인류의 절멸을 꿈꾸는 자신을 반대할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처참하게 또한 잔혹하게.
자신은 ‘악’을 꿈꾸었다.
‘악’이 존재하는 ‘성녀’는 사명을 다 이룰 수 없고, 끝내 그녀는 죽지 않는다.
아니, 도리어 아무리 그 육신이 늙고 병들지라도 죽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아름다운 애정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도,
이미 포기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살리고 싶었다.
허나, 그러면서도 인류 전체를 권속화하여 세계를 구하고도 싶었다.
다만, 그러면서도 이러한 비극을 야기시킨 그 근원, 재앙들을 도륙 내고 싶었으며.
동시에...
이제 그만하고 싶기도 했다.
총 백번 하고도 여섯 번의 삶은 수많은 프리드리히 파울라스를 낳았기에.
그 모든 소망과 꿈에 실제로 프리드리히 파울라스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진심이었기에.
그는 찾았다.
비참할 정도로 겁쟁이였던,
‘다나 메이어’가 아니었다면 진작 그의 고향 함부르크에서 ‘화형’을 당했을 그였기에.
자신이 어그러뜨리고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뒤틀어버린 이 수많은 ‘꿈’을 올바른 형태로 계승해줄 존재를 찾았던 것이다.
-나는 다만, ‘악’이었기에.
악이 아니고서는 더는 스스로에게서 그 어떠한 가치도 찾아내지 못할 머저리였기에.
-내가 ‘악’으로 존재하는 한, 이 세계에 ‘회귀자’가 존재하는 한! 언젠가, 이 ‘절대적인 악’을 극복해낼 ‘선’은 나타날 것이기에!
그는 ‘어째서인지’ 끝까지 자신의 품에서 떠나가지 않던 ‘이어져 온 꿈’을 제 손으로 떠나보냈다.
이윽고, 불사왕은 더한 ‘악’이 되었다.
더없이 잔혹하고 끔찍하게, 자신을 신뢰하다 못해 신앙하던 인류를 배반하고 끝도 없는 ‘죄’와 ‘우’를 범하며 살았다.
‘회귀’를 품에서 놓아준 후,
자신은 그저 살아갈 뿐이었다.
세계가 얼마나 반복되고 있는 것인지.
세상이 어떤 형태로 종말을 맞이하고 누가 ‘이어져 온 꿈’의 계승자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그러다.
‘절대악’을 자칭하던 자신은, 기어코 마주하고야 만다.
-콰직! 콰지지직!
시리도록 아름다운, 푸른 뇌광의 소유자를.
***
문득, 올려다본 세계는 푸르렀다.
빛과 비와 피와 번개가 얼기설기 엮여 만들어낸, 나의 모든 것이 담긴 ‘닫힌 세계’.
그리고 그 속에서, 죄악과 폭력은 폭풍우 속 빗방울의 개수보다 더 많이 쏟아져 내린다.
“크윽...?!”
하나의 재앙이 흡사 핏덩어리와 같은 사념체가 되어서까지 나의 양다리를 붙들어 잡는다.
칠흑의 날개를 펄럭이는 대악마는 아무리 베어도 베어도 증식하며 나의 피부에 들러붙었고,
벌레는, 풀은, 들판은, 산은, 거인은, 바람은, 구름은, 하늘은, 땅은, 대기는, 짐승은,
오러와 마력과 수많은 무장과 병력과 지형과 전략과 전술을 교차시키며...!
오롯이 ‘나’만을 말소시키기 위한 ‘세계’가 되어 들이닥치고 있던 것이다.
“으으으으윽!”
아무리 많은 번개를 쏘아 올려도,
아무리 헤아릴 수 없는 수의 비명검을 휘둘러도,
아무리 많은 전우를 ‘제어력’으로 틀어쥔 무구를 통해 현실에 불러일으켜도,
“아아아아악!!”
잿빛으로 물든.
죽여도 죽지 않는, 살아도 살아있지 않은 괴물들은 멈추질 않았다.
또한, 나의 비명 또한 멈출 줄을 몰랐다.
뜯긴 어깨가 기괴하게 움직여 다시 복원된다.
막대한 빛이 나를 감싸 치유하며 또한 다가오는 악을 불태우지만,
두 발을 딛는 곳,
눈동자를 굴려 응시하는 그 모든 곳에 존재하는 그 모든 ‘악’은 그럼에도 내게 달려들고 있는 것이었다.
쉬운 길이라면 있었다.
하나, 하나, 차근차근 베어나가면 되었다.
세계 곳곳에 ‘악’이 퍼져 나아가고 또한 그 수를 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인류가 죽어 나갈지라도...
이 비극을 불러일으킨 장본인.
네크로맨서 프리드리히 파울라스를 먼저 심판하고 나머지는 차차 정리하면 될 일이었다.
그럼 나의 신뢰할 수 있는 동료들은 나와 함께, 단숨에 10분의 1로 줄어든 인류를 이끌고 드디어 평화를 이룩한 세계를 맞이하면 되는 이야기였단 말이다.
허나, 나는 택하지 않았다.
다른 회귀자라면 몰라도, 오직 나만은.
초대 회귀자이자 전능했던 ‘반신’, ‘노을의 꿈’을 아는 나만은 그런 선택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씹어뱉듯.
나는 말한다.
이미 몇 번이고 피를 토하고, 쉴 새 없이 비명을 내지르던 입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차가울 정도로 차분하게.
“두 번째 생을 시작하며 다짐했던 자신과의 맹세에도 어긋나는 일이니!”
검도,
오러도,
마력도 아닌, ‘맹세’를 논하자 나의 눈동자에는 다시금 푸른 섬광이 번뜩인다.
동시에 떠오르는 건, 먼 과거 경이로운 종소리가 울려 퍼지던 그 푸른 언덕에서의 문답이었다.
-그 길이 영원토록, 고통에 찬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그래.
-언제 끝날지 모를 모래 폭풍이 너의 눈과 귀와 코와 입을 막고 때로는 그대의 육체마저 집어삼키려 들지라도?
-그래... 내 동료들의 죽음, 그 가치를 증명해낼 그 날까지.
그 전지했던 반신,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었던 것인가.
기억 속의 ‘물음’과 ‘지금’은 엄청난 속도로 오버랩되며, 나의 발밑에서는 실제로 흉측한 피가시가 쉴 새 없이 솟아올랐다!
믿을 수 없는 고통이 또다시 나의 뇌를 불태운다.
다만, 이번에는 비명을 토해내지 않는다.
도리어, 뼛속까지 깃들어 있던 그 막대한 뇌광을 터트리며 절망에 대항한다.
그러자 분열하는 악마가 새카만 모래 폭풍처럼 밀어닥친다.
그것은 눈과 귀와 코와 입을 틀어막았고 오감을 마비시키기 시작했으며 심지어는 나의 육신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려 들기까지 했다.
다만,
아니, 도리어 그 ‘십자가에 못 막힌 자’와의 문답이 이렇게 선명히 떠오르기에.
기억 속의 내게 담담히 담아냈던 ‘대항군’의 유지는 바로 ‘지금’ 더없이 선명하게 현실에 새겨진다.
-파직!
번개가 튄다.
숱한 신력 또한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며 막대한 양의 제어력은 제멋대로 움직여 이 닫힌 세계를 짙게 물들이던 ‘뇌광’을 한곳에 응집시킨다.
-파지지지직!
빛이 솟아오른다.
스스로 발현해내지 않은 힘의 움직임이, 나의 한계를 벗어난 초자연적인 의지를 따라 흐른다.
-슉! 슈슈슈슉!
그렇게 허공에 맺힌 수많은 ‘뇌광’은 이내 어째서인지 친숙한, 묘하게 낯이 익는 형태로 그 모습을 탈바꿈했고.
허공에서 맺힌 번개의 무구들은 이내 ‘어떤 이들’의 손에 쥐어져 유성우처럼 내린다.
대검, 시미터, 양손 검, 한 손 둔기, 돌격 소총, 롱 스테프, 여섯 자루의 단검, 긴 길이의 장검, 그리고 현생의 것이 아닌... 전생의 검희 이서영이 휘두르던 끝이 부러진 월광찬천검까지.
-샤아아아아아아아아!
순백의 형상들은 푸른 뇌광의 무구를 쥔다.
그렇게 대지에 발을 디딘 이들은 현생의 동료들이 아니었다.
‘대항군’.
나와 함께 인류의 승리를 위해 필생의 노력을 다하던, 바로 그들.
지금껏 내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그 이백스물여섯 명의 대항군 맴버들이었다.
“?!”
새하얀 형상으로 돌연 나타난 그들은, 아무런 말도 없다.
다만, 그 순백의 광휘를 통해 느껴지는 덧없이 깨끗한 감정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무한한 ‘신뢰’였고.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번개를 손에 쥔 그들은 일순간에 길을 만든다.
그렇게 생겨난 직선의 맞은편 끝에 선 자는 당연히 이 사태의 주범. 프리드리히 파울라스였고.
나는 ‘인류의 창’이라 불리던 바로 그 시절처럼, 나 자신을 불사르며 발을 박찼다.
푸른 뇌광은 이젠 비산하지 않는다.
모인다.
모여들어 불꽃이 된다.
새파란 불꽃은 지금 현재에서 타오른다.
이글거리는 청색 광휘는 마치, 선명하게 일렁이는 봉화를 닮아서. 잿빛의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떨린다.
***
호흡한다.
쓰읍─────────────────
더는 심장이 움직이지 않아, 호흡할 필요가 없는 자도.
후읍─────────────────
자신의 모든 것을 게워내서라도, 시퍼런 불꽃이 되어 스스로를 불사르는 자도.
호흡한다.
먼저 팔을 내뻗은 건, 자신의 모든 생을 통틀어 쌓아 올린 ‘신위’를 내려놓은 은발의 사내였다.
그 주먹에는 짙은 잿빛도, 이글거리는 죽음 마력도 담겨있지 않았으나, 뻗어 나아간다.
이를 수직으로 올려 베며 막아선 마검에도 흉흉한 저주는 번뜩이지 않는다.
-챙!
모든 ‘이능’을 말소당한 마검은 그저 단단할 뿐인 재앙의 팔에 닿아 철과 철의 비명을 토해낸다.
그러면서도 뇌제는 팔을 당긴다.
일순간에 형을 취해 내뻗는 건, 검푸른 밤하늘의 달빛을 닮은 장검.
섬뜩하기 그지없는 검푸른 빛이 완전을 넘어 완벽에 이르렀던 재앙의 팔을 가른다.
일순간에 교차한 세 번의 공방.
허나, 승패를 논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하아─────────────────!
폐를 훑고 나온 뜨거운 숨을 토해내자, 잿빛 눈동자가 번뜩인다.
동시에 월광찬천검을 하늘로 집어 던지며 또다시 얼마 남지 않은 ‘제어력’으로 다른 무구를 쥐는 이건우의 모습이 보인다.
태고의 검, 티탄이 거대한 호를 그린다.
동시에 땅에서 솟아오른 죽음의 낫이 보랏빛 광채를 번뜩이며 이를 막는다.
-콰앙!
폭발을 연상캐하는 굉음이 터져 나온다.
동시에 이미 넝마나 다름없는 푸른 로브를 펄럭이며 프리드리히는 거리를 좁히고자 날아든다.
마찬가지로 이건우는 일순간에 눈빛을 붉게 물들이며, 혈마의 보구 ‘여의’를 꺼낸다.
추격과 동시에 새카만 격류가 뇌제의 발치에서 솟아오른다.
이를 빠른 보법으로 아찔하게 회피해낸 이건우가 크게 회전하며 ‘여의’에 힘을 싣는다.
몰아치는 핏빛의 ‘여의’를 잿빛의 재앙이 잡아낸다.
허나, 잡아내었음에도 봉을 타고 흐르던 혈류는 질주한다.
-화르르르륵!?!
끓는 듯한 열기가 이미 죽어 피가 흐르지 않는 재앙의 육신을 불태운다.
다만, 시뻘건 화마에 휩싸여서도 잿빛은 큼직큼직한 걸음으로 거리를 좁힌다.
잿빛으로 물든 손아귀가 노리는 건, 푸른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는 뇌제의 목이다.
이를 아는 뇌제는 또한 마지막으로 남은 신력의 방울들을 끄집어 올린다.
-슉! 슈슈슈슉!
날카로운 가시의 형상을 취한 물방울들이 잿빛이 마차 뒤덮지 못한 프리드리히의 팔꿈치를 노린다.
-파스스스스!
새카만 연기가 피어오르며, 이미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니게 된 재앙의 팔 한쪽이 툭, 땅에 떨어진다.
다만, 그럼에도 세계는 계속해서 ‘이치’를 거스른 자를 위해 운행되기에.
쩌적─────────────────!
현실에 깨진 유리와 같은 균열이 일어나고, 직후 균열에 휩싸였던 재앙의 팔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다시 붙어있다.
그러나 방금의 그 신력을 끝으로, ‘수신의 사도’는 자신의 모든 신력을 다 소실해버렸다.
잿빛 죽음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주저 없이 다가온다.
동시에,
쓰읍─────────────────
뇌제는 터질 듯이 박동하는 심장의 위험신호조차 무시하고 ‘틈’을 파고든다.
무채색으로 물든 세계에서 뇌제는 도리어 재앙에게 달려든다.
길을 여는데 거의 전부를 소모한 ‘생체전기’를 뇌제는 또다시 한계를 초월해서 쥐어 짜낸다.
뻗어 나가지 못하는 번개를 손에 쥐고 허릿심을 담아가며 주먹을 휘두른다.
다만,
동시에.
잿빛 안광 또한 ‘틈’을 파고든다.
막대한 양의 죽음 마력은 불사왕의 승리를 축복하듯 넘실거린다.
모든 것을,
모든 생을 걸쳐 끝내 일구어낸, 그 모든 ‘신위’마저 불태우는 불사왕의 손이 향하는 곳은 이미 날아들던 이건우의 주먹이 아니었다.
그는 마찬가지로 달려든 뇌제의 머리를 노린다.
─────────────────으득!
─────────────────퍼억!
뇌제와 불사왕의 머리에서 동시에 끔찍한 타격음이 터져 나온다.
묵직한 충격에 뇌가 울린다.
균형이 무너지고, 몸이 비틀거린다.
이미 쓰러져도 진작에 쓰러져야 했을 ‘마력 탈진’과 ‘신력 과용’의 반작용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뇌제의 정신을 뒤흔든다.
그러나.
그럼에도──────
-터업!
쓰러져가던 그 방향으로 다시금 발을 내디뎌 엉망진창의 몸을 강제로 일으켜 세운 뇌제는 치열하기를 넘어 악에 받친 모습으로 추락하던 팔에 힘을 준다.
-파직! 파지지직!
일순간에 시퍼런 뇌광을 손에 쥔, 뇌제의 주먹은 끝내 ‘전율’의 예상을 초월한다.
허를 찌른 한방이 그대로 전율의 복부를 파고든다.
-퍼억!
“크으윽?!”
엄청난 타격음과 함께 번개가 놈의 전신을 뒤튼다.
기역 자로 구부러진 재앙의 입에서 썩은 내가 나는 무언가가 역류한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닫힌 세계’ 밖, 9할의 인류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반투명하게만 보이던 세계 속에서, 뇌제는 모든 ‘악’을 극복해냈으며 이윽고, 저 새로운 재앙에게마저 승리를 따내기 일보 직전인 상황인 것이다.
손에 땀을 쥔다.
입은 떡하고 벌렸으나 아무런 말도 튀어나오질 않는다.
고요한 함성은 끝도 없이 터져 나오나, 정작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 세계는 적막함이 감돈다.
주먹을 꽂아 넣은 뇌제도,
제대로 복부를 맞아 무언가를 토해낸 재앙도,
이를 지켜보는 S급의 헌터들도,
전장의 한복판에 서 있던 군인들도,
쉘터에 은거해 있던 민간인들도,
모두가 침묵하던 그때.
“나는...”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그라운드 위에 서 있던 장본인.
프리드리히 파울라스였다.
“너처럼 되고 싶었다...!”
그 의미를, 진의를 따지기 이전에 너무나도 프리드리히 파울라스 같지 않은 발언에 모두가 경악한다.
허나, 그러한 반응 따위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듯 사상 최강의 네크로맨서는 울부짖는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귀신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되며, 또 악을 처단하기 위해 악마와 거래를 하지 않아도 되며, 성녀의 축복 없이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반강제로 흡혈귀의 가호를 받지 않아도 되는...!”
“...”
“나 역시 가능했다면 네놈처럼! 축복받은 ‘필생’을 살아가고 싶었단 말이다!”
허나, 그를 올바른 길로 인도했던 ‘선’은 종국에 이르러 그의 가장 소중한 이를 앗아가 버렸기에.
그렇다고, 맨정신으로는 결코 ‘절대악’이 될 수도 없던 경계에 놓인 자.
프리드리히 파울라스는 바라본다.
정면,
신력도, 뇌격도, 신성력도, 혈류마저도 이미 전부 바닥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아직 선명하게 번뜩이는 푸른 안광으로 그를 마주 보고 있는 한 헌터를.
오직 올바른 신념만으로 점철된 타협 없는 푸른 봉화가 그곳에 있다.
오직 선을 위해 선행을 행하며,
오직 정의를 위해 검을 쥐는.
그녀와는 완전히 다르나, 어째서인지 한없이 닮은... ‘절대선’의 화신이 그곳에 있던 것이다.
“안다. 프리드리히.”
그때, ‘절대선’은 말한다.
살의도, 적의도 담기지 않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동시에 미간을 좁힌 프리드리히는 발악적으로 외친다.
“아니, 네놈은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지. 이 세계를 잠식한 ‘이치’와 ‘순리’를 거스르는 저주받은 힘의 소유자가 아닌 자들은 알지 못한다.”
“아니, 안다.”
“닥쳐라! 네놈이 알긴 하느냐? 자신의 피나는 노력이, 네놈이 부르짖는 그 필생의 노력들이! 도리어 함께하는 이들의 목숨을 거두는 양날의 검임을 알았을 때의 그 허망함을!”
격노하는 재앙.
동시에, 그의 육신에서는 이치를 거스른 잿빛이 넘실거린다.
닿는 즉시 마력도, 신력도, 신앙도, 피도 그 어떤 ‘이능’들도 그대로 말소시켜버리는 그 힘.
허나, 뇌제는.
푸른 안광을 번뜩이는 이건우는 이에 도망치지 않는다.
-터업!
도리어 놈의 멱살을 틀어잡고는 오롯이 단련된 육신의 힘만으로 재앙을 끄집어당기고는 말하는 것이었다.
“네놈이 어렴풋이 기억하는 전생에, 내가 어째서 인류의 창이라 불리었는지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군!”
“...?”
“잘 들어라. 프리드리히. 나는 지난 생, ‘제어력’을 단련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나기만 하는 그 끝없는 ‘전격’을 무질서하게 방출하며 싸웠다. 그리고 그 방대한 전격의 헤일 속에 파묻힌 건 바로...! 내게 유언 한마디만을 남기고 떠난, 내 동료들이었다!”
창.
창은 방패완 다르다.
창은 그 어떠한 방어도, 그 어떠한 전술과 책략마저도 한 호흡에 꿰뚫어버릴 수는 있다.
단,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용맹하게 함께 전장에 섰던 전우.
스스로의 생을 내던져서라도 필시 사살해야 할 적을 붙들어 ‘전격의 헤일’로부터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던 동료도 모두.
뇌제는 그 누구도 구하지 못하는, 그저 파괴하고 불태우는 ‘창’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기억한다.”
불사왕의 심복을 처단하고자 사지로 몸을 날리던 전우.
진조의 혈족을 일망타진하고자 전격의 헤일에 스스로 몸을 내던진 전우.
재앙의 사도들과 싸우기 위해, 몇백에 달하는 동료들은 모두 자신의 죽음을 자처했다.
이것이, 이건우가 끝끝내 자신이 짊어지길 다짐했던 동료들의 유언을 잊지 못한 진짜 이유.
“과정이 어땠건, 목적이 어찌나 숭고했건, 결과적으로 그들을 죽인 건 나였다. 그래. 마치, 네놈처럼!”
‘전율’이 뇌제를 바라보며 대성녀를 떠올리던 것과는 달리, 뇌제는 ‘전율’의 모든 생을 바라보며 다름 아닌 자기 스스로를 찾았다.
부러움도, 대단함도, 경이로움도 물론 있었다.
허나, 무려 백여섯 번에 달하는 생을 반복했던 프리드리히 파울라스의 일대기를 모두 지켜본 결과, 이건우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감정은 다름 아닌 ‘동질감’이었던 것이다.
“나에게 네놈은 잔혹한 학살자이며 동시에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용서할 수 없는 최악의 원수지만...!”
그로기에 빠져 있는 재앙.
막대한 탈력감에 이미 서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인 뇌제.
그럼에도, 짙은 잿빛의 안개로 물들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일말의 ‘이능’조차 뒤섞이지 않은 그냥 주먹을 내지르는 일뿐이었을 지라도.
“나는 그런 너를 용서하겠다. 프리드리히.”
당연히,
홀로 이치를 거스르는 프리드리히에게 있어, 그런 맨주먹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었다.
아주 조금의 마력, 혹은 거의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나 아주 분명히 잔존해 있는 신력을 약간 끌어올리기만 해도 막아낼 수 있는 그런 주먹이었단 말이다.
허나,
-퍼억!
다른 그 무엇보다도 프리드리히의 사고를 정지시킨 한 마디.
‘용서’에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서 날아드는 주먹을 그대로 맞아 뒤로 쓰러지고 만다!
쓰러진 뒤에도, 생과 사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프리드리히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많았다.
죽음 마력이,
부패하는 신력이,
심장에 고여있는 아주 약간의 신성력이.
악착같이 그의 육신을 되돌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동력이 되어줄 수 있었단 말이다.
그러나, 문득 올려다본 이 ‘몽환적인 세계’의 하늘은 덧없이 푸르렀고... 아직도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 ‘용서’라는 단어에 정신이 멍해지던 차, 이건우는 말했다.
“용서하고, 네가 짊어지고 있던 그 모든 꿈까지도... 내가 짊어지겠다.”
지금껏 프리드리히 파울라스가 악착같이 버텨 온 이유이자 가장 듣고 싶었던 그 한마디를.
동시에 지금껏 짙은 잿빛에 파묻혀 있던 이 닫힌 세계에, 찬란하게 반짝이는 새하얀 새 무리와 닿는 것만으로도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비는 내린다.
-투둑, 투두두두둑!
적막과 침묵.
유일하게 들려오는 빗소리에 맞춰 눈을 돌리면 잿빛의 재앙들도 푸른 뇌광의 전우들도 모두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고.
-쩌억! 쩌저적!
끝끝내 그 역할을 마친 닫힌 세계마저 조각나 무너져 내림과 함께...
본래의, 성흔 보유자를 닮은 은발과 짙은 푸른색의 청안을 되찾은 자. 프리드리히 파울라스는 고했다.
“......그대가, 곧 정의다.”
‘절대악’으로서, 끈질기게 ‘악’이길 자처했던 자의 마지막 역할을 다하기 위해.
그렇게,
끝끝내 종언을 고한 프리드리히 파울라스라는 한 헌터는 목도한다.
부서져 내린 번개의 세계, 그 너머에서 어둠을 몰아내며 빛을 밝히는 여명을.
그리고 그 새하얀 빛무리의 너머에서, 그와 함께 영겁의 세월을 버티며 줄곧 자신만을 기다려준 한 여인, 다나 메이어를 말이다.
***
프리드리히 파울라스는 스스로 ‘나의 승리’를 선언한 직후, 한없이 뜨겁게 타올랐던 무언가처럼 흰 잿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렸다.
무너진 세계 너머로 새하얀 새벽의 태양이 떠오르는 광경이 보인다.
다만, 이미 나의 머리 위로 내리는 한없이 맑은 비와 새하얀 새들의 날갯짓이 있어 그 전경이 새삼스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공간’의 개념이 무너져 상하좌우 그 어느 곳을 바라보더라도 전세계 방방곡곡이 보이는 이 광경이,
지구상의 현존하는 9할의 인류가 내게 보내는 그 미치와 경외의 시선으로부터 느껴지는... 절실하고도 뜨거운 긴장감만이 부유해 있을 뿐.
적막했다.
나와 프리드리히만이 남았던 ‘닫힌 세계’조차 이보다 조용하진 않았었는데.
모든 세계가 억지로 기워 붙여진 이 기형적인 공간은, 수억 명의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아예 망각해 버릴 만큼 고요하다.
그 중심에서,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은 간단했다.
작은 세계가 부서지고 무너져 굉음을 방출하였음에도 아직도, 두 무릎을 정갈하게 꿇고 두 손을 모아 고개 숙여 기도하는 자.
빛의 성녀와 수신의 성녀에게 다가가 그들이 모은 두 손을 부드럽게 쥐고는 말하는 것이다.
“...이제 끝났습니다. 전부.”
뇌제가 돌아왔다고.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