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70화.
아주 가끔은, 지독할 정도로 굳게 결심해 잊어보고자 노력해본 적도 있다.
또 아주 가끔은, 다른 사람을 꿈꾸어 본 적도 있었으며,
단 하루였지만, 실제로 ‘그녀’를 잊고 보낸 적도 있었다.
허나, 기억은...
볕이 밝게 드는 바티칸의 중앙 광장.
그 푸르른 벤치에 앉아 눈부시게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응시하는 것만으로 또다시 가슴을 뛰게 만드는 그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프리! 헤헤헤!”
오직 나의 앞에서만, 때 묻지 않고 순수한 아이의 미소를 보이던 그녀.
뺨에 묻는 아이스크림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자, 흰 모자를 꾹 눌러 붉어진 얼굴을 숨기던,
생에 처음으로 교황에 등극해 성복을 입고 조금은 쑥스러운 듯 어색한 미소를 짓던,
아무도 발을 들일 수 없는 성녀의 화원에 이르러, 호위를 모두 물리고 나서야 뚝, 뚝. 눈물을 흘리던,
남들의 앞에서는 한없이 성스럽고 덧없이 숭고한 성녀이지만, 나의 앞에서만큼은 그냥 한 사람의 여인이 되던,
그 가녀리고 아름다운, 다나 메이어의 기억은 꽃이 되었다.
그리고 그 꽃은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불결한 각성자. ‘네크로맨서’의 가슴에서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름다운 현악기를 닮아서...
“프리......”
뚱한 얼굴로 삐진 듯이,
“프리!”
늦은 밤, 갑자기 불꽃놀이 세트를 들고 나타나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빛내던... 그 얼굴이, 그 목소리와 함께 계속해서 피어난다.
“프리.”
그녀가 그 애칭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가장 더럽고 추한 각성자였던, 프리드리히 파울라스는 구원을 받는 것 같아서.
“프리...!”
가장 순결하고 숭고한 각성자에게, 가장 불결하고 혐오스러운 각성자였던 자신이 구원을 받게 되어서!
그래서...
“그거 알아 프리? 사실 내 인격은 ‘주’께 선택을 받기 이전의 나와는 다르데. 무지무지 많은 기억이, 엄청나게 긴 예지몽들을 꾸느라 조금 영향을 받았다고 하시더라고.”
“그런가.”
“응. 그런데 있잖아. 나는 인격이 변하기 전에도, 불꽃놀이를 좋아했데, 기억은 없고 주께서 그렇게 말해주신 것뿐이지만... 그래도 말이야. 난 이렇게 예쁜 불을 보고 있으면... 정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아.”
세계의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끝내 그녀를 대체할 순 없었기에.
그래서...
“고마워. 말도 안 되는 내 억지를 누구보다 진지하게 들어줘서, 대성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 줘서. 정말 고마워.”
아무리 잊으려 노력해도 잊히지 않는, 프리드리히 파울라스의 ‘구원’이 그날, 그 허름한 마구간 뒤편에 아직 그대로 남아있기에...
“너무 좋아.”
너 하나쯤은, 가슴에 묻을 수 있다고.
“네가 너무 좋아... 프리.”
몇 번의 계절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잊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네가...
지금 이 순간까지도 꽃이 되었기에...
꽃이 되어, 나의 가슴에 피어나기에...!
그래서......
「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전율’은 단 한 걸음도 뒷걸음칠 수가 없었다.
***
-샤아아아아!
그녀의,
아름다운 그녀의 것이 아닌, 얼핏 벼락을 닮은 빛무리가 전율의 심장을 파고든다.
빛도, 어둠도 아닌 ‘잿빛’이라도, 제로 거리에서 빛을 밝히는 광휘를 거스를 순 없다.
심장이 타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육신 속에서 흐르는 빛은 오장육부를 녹여버리고,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사성’은 자신이 결코 눈앞의 뇌제를 이길 수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그대는, 그런 생각해본 적이 없나.」
-텁!
‘전율하는 사성’은 성검, 아스칼론을 굳건히 쥐고 있는 뇌제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그 순간, ‘미지’가 넘쳐 흐른다.
제로 거리에서 번뜩이는 광휘와 마찬가지로 제로 거리에서 넘실대는 ‘잿빛’.
서로를 밀어내는 잿빛과 광휘.
그 사이에서 말도 안 되는 두 에너지의 틈에서 굉음은 쏟아져 나온다.
이로 인해 그 일대에 서 있던 아홉 헌터들의 귀에서 피가 툭, 터져 나오는 지경이었으나,
그 ‘미지’와 제로 거리에 닿아 있는 두 사람은 태연히 아니,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눈으로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포기해라! 넌 결코 다나 메이어를 구할 수 없어! 다나 메이어를 죽인 건, 다름 아닌 네놈이잖아!!”
「그래. 그렇다! 나의 모든 노력들이, 그대가 부르짖는 그 ‘필생의 노력’들이 모두 성녀의 사명 완수로 이어졌단 말이다. 그녀는 나로 인해 이상을 이루었고, 짐이..! 아니, 내가! 그녀를 죽인 살인자다!」
스스로의 자질과 재능이 ‘시스템’을 만나 ‘각성’을 이룩하는 여느 각성자들과 달리, 신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각성한 존재.
성녀.
심지어 보통의 각성자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권능과 힘을 ‘레벨업’이라는 과정조차 없이 휘두르는 자.
단적으로 말해 이는 재앙에게서 권능을 하사받던 휴거교도들과 그 근본이 같다.
단순히 비합리적인 것을 넘어, 도리어 부조리하다 여겨질 수준의 ‘압도적인 힘’.
「그러니, 짐이 구하겠다. 짐의 이 두 손으로! 제멋대로 권능을 쥐여주고선 가증스럽게 목숨을 거두어가던 그 ‘신’이라는 작자를! 죽여서라도, 이 행성 자체를 분쇄해서라도...!」
목구멍에서 피가 끓어 오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안간힘을 다해 말을 토해낸 ‘전율’은 연이어 눈에 힘을 주며 고한다.
「짐은 구한다. 다나 메이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를, 모든 것이 붕괴하고 으스러진 세계에 오직 짐과 그녀만이 남는다 할지라도! 짐은... 그녀를 구한다!」
‘신위’를 얻은 재앙.
‘전율하는 사성’은 피를 토하며 외치고 또 외쳤다.
이젠, ‘신위’를 얻었기에.
‘회귀’는 뇌제만의 것이 아니다.
여느 재앙들이 그러했듯이, ‘사성’은 회귀와 동시에, 자신이 재앙으로서 강림했던 그 순간의 스팩과 힘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과거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뇌제를 처음 만나던 그 순간부터, 불사왕은 이런 미래를 그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뇌제는 처음부터 다름 아닌 불사왕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허나,
하지만, 말이다.
놈은,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착각하고 있었다.
회귀의 진실을 알게 된 뇌제.
‘사성’은 예측했을 것이다. 결국, 뇌제... 아니 이건우라는 한 인간도 끝내 회귀자의 책무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다름 아닌 ‘다나 메이어’의 설득이다.
설득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재앙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틀렸다.
“그래서 죽였나.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 ‘다나 메이어’를 구하기 위해서! ‘다나 메이어’를 네 손으로 직접 죽였나! 구하겠다고? 살려내겠다고? 감히, 구원해내겠다고?!”
뇌제의 용안이 시퍼런 뇌광을 토해낸다.
그 압도적인 기백과 함께 두 손으로 움켜쥔 성검은 엄청난 양의 흐르는 비를 방출했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네놈이다. 프리드리히! 세상 그 어떤 자가 ‘다음 생’을 고려하며 살아간단 말이냐! 애초부터 그 정신머리부터가 글러 먹었다고!”
일순간, 이건우가 적광의 눈동자를 부릅뜨자 비가, 뇌광이, 빛이 일순간에 핏빛으로 물들며 타오른다.
동시에 그 어마어마한 양의 에너지 반전이 서로 다른 마력과 반발을 일으켜 핵폭발에 비견될 수준의 파동을 방출한다!
「그으으으윽!! 으으으으으으으으으윽?!」
다만, 이마저도 ‘잿빛’의 힘은 시커먼 안개를 일으키며 중화시키려 들지만, 이미 완성된 ‘전율’의 육신은 넝마나 다름이 없었고 그 입에서는 끊이지 않는 신음이 터져 나온다.
-착!
그런 와중에도, 핏빛 안광, 핏빛 오러, 엄청난 양의 핏빛 혈류를 방류하던 뇌제는 이를 악물며 외치는 것이었다.
“내겐 처음부터 ‘다음’ 따위는 없었다. 내게 모든 ‘생’은 이 세상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소중한 것이었으며, 내게 모든 ‘사’는 어느 것 하나도 가벼이 다룰 수 없는 무거운 것이었단 말이다!”
허공에서 검집으로,
날아든 검은 다름 아닌 뇌제가 최초로 손에 넣었던 신화급의 혈검. 본디오 빌라도다.
이윽고, 두 눈을 부릅뜬 뇌제가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굉음과 함께 검을 뽑으면...!
비명검(悲銘劍) 제2형.
망우(忘雨).
이건우의 오리지널 검술.
비명검이 시간과 기억 속에 묻혀 잊힌, 비와 비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귀를 찢는 비명이,
공간, 그 자체를 절삭하는 시뻘건 검광이 파고드는 건, 이미 ‘성검 아스칼론’에 찔려 붕괴하고 있던 심장.
‘전율’의 심장이었다.
***
나의 심장이 반으로 갈라지는 감각을 느꼈다.
동시에 실감한다.
‘그’라면 해낼 수 있다고.
이 세계를 분명, 저주받은 네크로맨서의 운명을 타고난 자신보다 더 아름다운 세계로 이끌어갈 수 있음을 실감한다.
사실,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이미 이 헌터세계의 법칙과 역사를 부정할 수준으로 그 힘을 키워가는 모습들을 보며, 알고 있었단 말이다.
“프리.”
허나, 그가 구원한 완벽한 세계에서도 그녀는 없다.
“프리...”
불사왕에게, 프리드리히 파울라스에게 구원이란 이 세계가 아니었다.
나는 다만, 다시금 그 작은 손을 맞잡고, 그 여린 몸을 끌어안고, 그 감미로운 노랫소리를 닮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을 뿐이었기에...
언젠가 또 사라지고, 되돌아가며, 나와의 추억을 망각할 새로운 ‘다나 메이어’가 아닌...
나와 함께, 진정으로 내일을 꿈꾸며 사랑을 나누었던, 그 ‘서른 번째 세계’의 그녀를 되찾고 싶었기에...
오직 그녀만이 나의 구원이었기에...!
아무리 지쳐도.
아무리 힘들어도 멈출 수 없었다.
한시의 쉴 틈 없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그 순간이야말로 진정, 그 세계의, ‘나의 그녀’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것만 같아서...
그게 너무 두려워서...
“프리!”
나는 걸었다.
그녀와 함께했던 길을 걸었고,
우리가 함께하지 않았던 길마저도 서슴없이 걷고 또 걸었다.
“프리이이이이이!!”
그때, 울부짖는 듯한 외침이 들려왔다.
“...!”
그러고 보면, 이곳은 어디인가.
이 빛만이 가득한 세계는...
허나, 그런 의문을 깊게 생각해보기도 전에──────
나비가 날고 있었다.
새하얀,
나에게 있어 너무나도 친숙한 동시에 그리운... 빛의 나비가 있다.
“프리!”
그제야, 똑바로 들려온다.
지금껏 몇 번이고 귀가를 맴돌던, 언뜻 화를 내는 듯 언성을 높였음에도 그저 아름다울 뿐인 목소리가.
이내, 흐릿했던 정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새하얀 ‘빛의 나비’ 무리는 한 곳에서 소용돌이치듯 날갯짓을 반복하고 있었고 그 속에 ‘그림자’는 있었다.
“...”
목이 멘 듯 말이 나오질 않았다.
허나, 재앙은... 아니, 불사왕은... 아니. 그냥 프리드리히 파울라스라는 이름의 청년은...!
외쳤다.
“다나!”
-펄럭!
동시에, 새하얀 빛의 나비무리가 흩어지며 보인다.
부서지는 빛, 그 반짝이는 아름다움조차 감히 비견될 수 없을 만큼 숭고하고, 순결하며,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보인다.
흩날리는 바람에 비단결과 같이 고운 은빛 머리칼이 일렁인다.
착각하지 않는다.
결코, 헷갈리지 않는다.
외향은 같았다.
내가 반복해온 100회 이상의 세계 그 어느곳에서도 ‘다나 메이어’는 언제나 ‘다나 메이어’ 였기에.
목소리도, 키도, 언행도, 사소한 버릇들마저 똑같다.
허나, 그럼에도 알 수 있다.
눈앞의 그녀가 다름 아닌 그녀.
처음으로 자신과 함께 세계의 구원을 이룩했던,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했으며 처음으로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였던... 그 ‘서른 번째 세계’의 다나 메이어였음을.
“다나!”
정신을 차리자 자신은 이미 눈앞에 나타난 다나 메이어를 와락 끌어안고 있었다.
잘 지냈냐는 안부의 인사도,
어떻게 지금 이곳에 이렇게 존재할 수 있냐는 물음도,
보고 싶었다는 사랑의 속삭임도,
마음과 마음들 모두 한 아름에 전하고 싶어서, 도리어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나가질 않는다.
이에 입술만 달싹거리며 왈칵 벅차오르는 눈물만을 쏟아내던 나의 앞에서. 문득, 그녀는 말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프리. 나 때문에 힘들었지? 나 때문에, 내가 프리를 너무 아프게 했어.”
그건 재회의 기쁨도, 안부 인사도 아닌 짙고 깊은 ‘자책’.
이에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반사적으로 항변한다.
“때문이라니.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는 다나, 너를 위해서...!”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말이야... 알고 있었어. 내가 사명을 완수하고 나면 주께서, 나의 생을 거두어가실 걸 알고 있었어. 내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고 프리. 네가 많이 슬퍼할 거란 것도 알고 있었어.”
툭,
자책하듯.
눈물을 터트린 대성녀는 흐느끼면서도, 이를 악물고 후회와 사과를 쏟아내는 것이었다.
“다 알고 있었는데도, 네가 너무 좋아서. 너처럼 멋진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는 게 너무 좋아서... 다 털어놓고 나면 네가 훌쩍 떠나버릴 것 같아서...... 그게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질 못했어.”
“...”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야. 프리. 나는 이기적이고, 유치하고 우습기 짝이 없는... 그냥 바보일 뿐이었어.”
“...”
‘나’는 아무런 대답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이를, 언제나 자신의 가슴속에 피어나던 꽃을 드디어 마주했음에도 말이다.
“그런 부족한 나를, 바보 같은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할 정도로 고마워. 그리고 아무리 말해도 모자랄 정도로 사랑해.”
울며, 또 울며.
다나 메이어는 감사를, 사과를, 후회를, 미안함을 차례차례 게워내었고 끝내, 고한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자. 나 때문에 네가 아파하는 그 모습을, 이젠 그만 보고 싶어. 나 때문에 네가 괴로워하고, 나 때문에 네가 소리 없이 우는걸. 이제 그만했으면 해.”
그리고 그 게워내고 게워낸 끝에 내뱉은 진심 한 줌에 나는, 드디어 말했다.
“어째서냐. 다나. 어째서 사과하지. 너도 나도, 아직까지 그때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다나, 너만큼은! 세계의 모든 인류가 나를 등지더라도 너만은! 나를 응원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잖아. 응?! 나는 너를 위해서!”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세계 전체를 부수더라도 구해내려 했던 다나 메이어를 향한 의문과 아주 작은 원망을.
그러자, 다나 메이어는.
내가 사랑했던, 나를 사랑해주던 그 다나 메이어는 말했다.
아주 차갑고 또한 단호하게 자신의 ‘정의’를.
“누군가의 밤을 밝힐 기름이, 다른 이의 핏속에서 흘러나와선 안 돼. 밤을, 새카만 어둠을 쫓아내고 싶다면, 스스로 불꽃이 되는 수밖에 없는걸.”
봉화였다.
방금까지 울며불며 형편없이 퉁퉁 부르텄던 그녀의 그 눈에서 반짝이는 건,
이 세계에서 최초로 국경의, 민족의, 성별의, 나이의, 등급의, 각성의 구분 없이 모든 인류를 지키고자 했던 성인(聖人)의 불꽃.
에메랄드빛, 인류를 보호하기 위해 제 몸마저 불살라 빛을 밝히던 바로 그 성녀의 봉화.
언제나 흔들림이 없다.
타협의 접점 따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선’을 행하던 고결한 성품의 존재.
그 자체였다.
참으로 새삼스럽다.
어째서 잊고 있던 걸까.
자신이 대성녀를... 그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또한 한없이 사랑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음을.
고집스럽게 그리고 때로는 미련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완고하고 또한 단호했던 이 ‘절대선’의 면모.
이런 그녀였기에, 자신이 그녀를 끝도 없이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흠...”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다나’가 오직 자신을 부활시키기 위해 세계 자체를 저버린, 그런 나를 용서해줄 리가 없는 거였는데.
심지어는 끝내 나를 미워하지 못하고, ‘나’라는 괴물을 만들어 낸 원인이 ‘자신’이라며 줄곧 자책하고 있지 않던가.
그녀는 지나치게 ‘선’했고, 그렇기에 끝내 모든 죄를 자신이 품어버린 것이겠지.
그러면서도 진심으로 자신의 탓이리라고, 그리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묻지 않아도,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천년에 달하는 시간을 보냈음에도 한눈에 그녀를 알아본 내가 아니던가.
“정말...”
어디서부터가 잘못되었던 걸까.
자신은 어쩌다, 이곳에 이렇게 서 있게 된 걸까.
이내, 생각이 ‘과거’가 아닌 ‘현재’에 닿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자신의 심장을 파고들었던 성검.
그리고 그 검을 휘두르던 꿈의 선택을 받은 자. 뇌제.
“그랬군.”
당장이라도 성녀의 손을 꼭 쥐고, 이대로 함께 사라지고 싶은 마음은 물론 있었으나, 나는, 프리드리히 파울라스는 그러지 않는다.
“다나. 조금만 더, 기다려주겠어?”
“프, 프리?”
그러자 나의 입에서 원망이 아니, 절망 섞인 한탄과 배신이라며 울부짖는 듯한 말이 나올지 몰라 두려워하던, 그 다나의 표정이 휙하고 변했다.
아니, 그녀의 표정이 바뀐 게 아니었다.
나의 표정이 바뀐 거겠지.
“당황하는 그 얼굴도, 단호하게 자신만의 정의를 주장하던 너의 그 얼굴도... 정말, 여전히 아름답구나.”
“으, 음?!”
갑작스러운 말에, 단호하기 그지없던 다나 메이어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물든다.
그 모습은 아직, ‘나의 그녀’가 그대로 남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 같아서, 나는 끝내 속이 시원할 정도로 깨끗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기다려주면 돼. 내게도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 말이야.”
***
흐릿했던 빛의 세계가 사라진다.
다만, 그것이 단순한 허상이 아님을 알기에 프리드리히 파울라스는 일어섰다.
이 세계에서 오직 ‘그’만이 해낼 수 있는 마지막 일.
그건...
<재앙, ‘전율하는 사성’은 신위를 불태워 관리자의 권능을 발현합니다.>
<고쳐 쓰여진 금제-2. ‘홀로 이치를 거스르는 세계’는 ‘관리자’의 의지대로 ‘운행’됩니다.>
마지막 남은,
이 세계가 회귀한 뒤, 자신의 기억과 힘을 보존하기 위해 남겨두었던 그 끝의 ‘신위’까지 모두 불태워서라도...!
“뇌제여. 그대의 말대로, 나는 ‘순수악’이 될 수 없었다. 다만, 사랑했던 다나의 대척점이자 ‘절대선’의 가장 짙은 그림자였던 이몸이... 이 ‘절대악’이 네놈을 시험하겠다!”
‘뇌제’가, 정녕 이 세계에 영원불멸의 평화를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인지, 아닌지를 테스트하는 것이었다.
스스로 불꽃이 되는 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