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62화.
북아메리카의 마지막 난민들을 태운 ‘스트라우스’일가와 미군의 합동군함대가 비교적 전쟁 풍파를 덜 받은 항구, 덩케르크에 도착한 것이 바로 오늘 일이었다.
해가 넘어가 어둑한 항구.
비루한 가로등과 이러한 순간에도 뱃길을 밝히는 등대의 빛이 일렁이는 파도에 닿아 부서지고 흔들리다 이내 다시 하나로 모여 반짝인다.
-착!
재앙의 현현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6시간.
덩케르크에 내려앉은 이 밤이 채 다 가기도 전에 종막의 전쟁은 발발할 예정이었다.
-촤악!
그럼에도 내뻗는 검은 달빛을 받아 빛난다.
검성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애검. 월광찬천검(月光燦天劍).
그가 내게 이 검을 건네준 이유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도 아는 것이다.
이번 전투가 끝이 곧, 모든 전쟁의 끝일 거라는 것을.
“후...”
나는 긴 한숨과 함께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지는 수직의 검격을 그었다.
-콰직! 콰지지지직!
검에 휘감긴 달빛과 나의 붉으스름한 오러.
그 여파만으로 별과 등대와 가로등의 빛으로 반짝이던 바다는 반으로 쪼개어진다.
마치 모세의 기적을 마주한 듯 말이다.
허나, 부족했다.
다른 재앙들은 몰라도 이젠 인간의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난 ‘전율하는 사성’에게는.
“하지만... 방법은 있다.”
협회장, 육군의 총수 동시에 ‘기억하는 자’가 보여주었던 모든 기억.
그리고 그 속에서 날뛰고, 절망하고, 슬퍼했으며, 분노했던 아홉 번째 회귀자. 프리드리히 파울라스.
아무리 죽여도 결코 죽음에 이르지 않은 적을 죽이는 방법은... 처음부터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준비한다.
앞으로의 난관을 알기에 대비한다.
이윽고, 철저한 준비로 승리를 거머쥔다.
첫 회귀와 함께 눈을 떴던 바로 그 신병으로서의 첫날부터 지금껏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대비한다.
재해에 대적하며, 재앙에 대항한다.
나는 ‘대항군’의 검이자 인류의 창.
뇌제이니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마주할 뿐.
***
푸르스름한 한기가 적막하게 감도는 새벽.
-촤르릉!
섬뜩하기 그지없는 쇠스랑 소리와 함께 전신을 붉은 피멍으로 물들인 남자가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읍! 으으윽!?”
올렸던 머리는 축축한 피에 젖어 내려가 있고 얼굴은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부어올라 있으나, 그는 다름 아닌 중동 연합의 왕자. 흑태자 칼레드가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그 앞에 서 있는 자.
얼굴에 선명한 십자 흉터를 가진 헌터. ‘숙청왕’이 서 있다.
숙청왕의 눈은 마치 초점이 없는 사람처럼 흐릿했고 그는 피범벅이 되어 있는 칼레드를 고요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런 두 사람의 뒤편에서 목소리는 들려온다.
“아들아.”
어둑한 방에 놓인 새하얀 조명 하나.
그 빛 너머 그늘에서부터 터벅, 터벅 걸어오는 자는 흑태자 칼레드의 친부이자 현 중동 연합의 실권자.
당당히 그 불사왕의 오른편에서 섰던 ‘흑왕’이었다.
“어찌 그리도 어리석은 판단을 내렸단 말이더냐.”
양손이 쇠스랑으로 고정되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칼레드.
허나, 그런 참상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다름 아닌 그의 아비. 흑왕이었다.
캬악! 퉤!
잠시 후, 칼레드는 걸걸한 가래를 토해내듯 입안에 가득 찬 자신의 피를 뱉어내고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아버지....... 이 몸은 철들 무렵부터 상단을 이끌었고 성인이 되던 날 거대 기업을 여섯을 인수·합병했으며 오롯이 자력으로 백만의 헌터 용병대를 사병으로 삼았소. 어째서인 줄 아시오?”
“...”
“스스로를 ‘파라오의 후예’라 논하는 당신의 배후에 썩을 불사왕 놈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오. 당신이 구제 불능한 인류의 적이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오!”
“그래서, 이 아비의 등에 칼을 꽂고자 힘을 갈구했더냐.”
“아니. 아니지! 어찌 아비란 작자가 아들의 마음 하나 모른단 말이오. 나는 그냥 바랐을 뿐이오.”
무엇을?
그런 질문은 흑왕의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았다.
흑왕은, 오만하면서도 이성적이고, 언제나 계산적인 사고로 활로를 개척하던 자신의 아들 칼레드와 비루한 질의응답이나 하고자 이곳에 찾아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허나, 그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핏발을 곤두세운 눈으로 칼레드는 말했다.
“당신에게 영원불변의 충성을 증명하고자 내 어머니를 바치라 명했던 썩을 불사왕놈에게 죽는 한이 있어도... 딱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한 방 먹일 기회가 오길. 바라고, 또 바랐단 말이오!”
“그렇다면 참으로 유감스럽게 되었구나. 아들아. 이젠 무슨 수를 동원하더라도 너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으니.”
흑왕의 눈짓에 그의 영원한 충견, 숙청왕이 움직인다.
새빨갛게 녹슨 도끼가 들어 올려진다.
“이 아비는 동정하마.”
그리고 일말의 주저 없이 높게 치솟았던 그 도끼는 향한다.
다름 아닌 쇠사슬에 묵여 고정된 흑태자 칼레드의 어깨를 향해서.
-찌그극!
흉측한 파육음과 함께 피가 튀었다.
허나, 그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흑왕은 말했다.
“또한, 이 아비가 보장하마. 우리들의 사성께서 인도할 새로운 세계에서... 순수했던 너와 아냐는 생전보다 더 완벽한 모습으로 부활할 수 있음을.”
-촤악!
“끄으읍?!”
또 한 번 도끼는 가른다.
흑태자 칼레드의 다른 어깨를.
“그러니, 이제 털어놓거라. 그 ‘전세계 연합’의 머저리들의 행방 따윈 관심 없다. ‘뇌제’. ‘뇌제’는 어디로 향했지?”
범지구적인 대피.
허나, 돌연 납치를 당한 흑태자 칼레드가 묶여 있는 이곳 사우디아라비아 말고도 재앙이 출현하는 북아메리카 역시 어마어마한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다.
동시에,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는 밑도 끝도 없이 퍼져나온 것이다.
-‘뇌제’는 앞선 재앙들과의 전투 후유증으로 불참을 선언했다.
-‘뇌제’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뇌제’와 군수뇌부는 아메리카 대륙을 포기하고 전세계 군을 사우디아라비아에 집중하기로 했다.
-‘뇌제’는 홀로 북아메리카로 향했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다양한 정보들이 각기 다른 나라의 신뢰할 수 있는 ‘스파이’의 입을 통해 들려왔다.
허나, 백 건이 넘는 보고의 결과, 뇌제의 행방만큼은 결국 미궁에 빠진 것이다.
“네놈들이 의도적으로 숨겼음을 안다. ‘뇌제’는 그 피박쥐년의 ‘계시’로도 행방을 추측할 수 없는 존재지. 그러나 아들아 너는 알 것 아니더냐. 너는 뇌제의 벗이니.”
양팔이 잘려나가 피가 흐른다.
당장 쇼크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광경이었으나 곧 숙청왕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엎어진 칼레드의 머리 위에 포션을 흩뿌렸다.
즉, 곱게 죽도록 놔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본래, 칼레드는 고작 하루 전까지만 해도 ‘전세계 연합’의 수뇌부들이 거주하는 보호시설에 거주하고 있었다.
허나, 일순간 ‘공간’이 뒤바뀌더니 그는 숙청왕과 흑왕이 있는 바로 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지하감옥에 도달해 있었다.
“사성께서는 이미 ‘공간’의 제약마저 조율하실 힘을 가지셨다. 나와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사성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지.”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 ‘아카식 레코드 1번’을 컨트롤 할 수 있게 된 불사왕의 관하여 논하는 흑왕.
그 얼굴에서는 마치 과거의 ‘휴거교’가 그러했듯 광신의 빛이 엿보이고 있었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말하거라. 뇌제의 행방만을 말한다면 내 친히 너의 시체를 거두어 왕께 자비를 구할 테니!”
고개를 땅에 처박고 자신이 흘린 피로 만들어진 웅덩이에서 숨을 고르는 흑태자.
허나, 이내 고개를 들어올린 칼레드의 눈은, 지금껏 단 한 번의 비명도 지르지 않았던 그 강한 의지를 증명하듯 번뜩인다.
“아버지...”
“그래. 말하거라. 그리고 안식을 맞이하는 게다. 이 세계가 다시금 진짜 세계로 거듭나는 날, 이 아비가 너를 부활시켜줄 테니...!”
“허억! 후우우...... 그게, 그게 아니오. 아버지......”
“...아니라고?”
“그렇, 소... 아버지. 당신은 날 동정한다 말했지만, 그게 아니오... 동정하는 건, 나요...!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적으로 돌려선 안 되는 자를 적으로 삼았소.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나 계시는 거요?”
“...아들아. 너는 정녕, ‘뇌제’라는 그 꼬마가 절대적인 존재, ‘사성’을 넘어설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단 말이냐?”
자신의 두 팔이 날아갔다.
그럼에도 흑왕을 노려보는 흑태자의 눈빛에는 일말의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런 흑태자 칼레드를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흑왕의 얼굴에는 옅은 당혹감이 서렸다.
“흐흐흐! 하하하하하!”
그러자, 칼레드는 처음으로 흔들림을 보이는 자신의 아비를 응시하며 미칠 듯이 웃고는 입안의 피를 게워내며 말하였다.
“아직도,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 넘어선다, 만다의 개념이 아니오...! 뇌제를 적으로 돌린 자는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지.”
“그래 봤자, 한 인간이다!”
“인간? 아버지도 직접 보아 알지 않소. 이미 그 녀석... 아니, 나의 벗은 인간이 아니오. 오오, 어리석은 나의 아버지. 당신은 그날 어머니를 제물로 바쳐선 안 되었소.”
“못 들어주겠군!”
“아니, 들으시오! 그대가 죽인 그대 아들의 유언이니 똑똑히 들으시오!”
-콰득!
흑왕의 얼굴이 완전히 찡그려지자 주저 없는 도끼질은 또 한 번 칼레드의 다리를 절삭한다.
허나, 칼레드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자신의 혀를 깨물고는 피를 토하며 말했다.
“나는... 인류는...! 나의 벗 ‘뇌제’는 당신을 절대 용서치 않을게요. 이 반 압둘 아자스 알 사우드 칼레드는 당신을 동정하오...”
그제야.
죽어가는 칼레드를 코앞에 둔 흑왕의 얼굴에는 정체불명의 공포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
-재앙의 현현까지 남은 시간: 3시간 22분...
공간을 비트는 힘을 가진 신선, ‘검은 산군’ 조성우와 마천신교의 죄인 ‘우선’의 교차 검증을 했다.
이윽고 정말 갑작스럽게 사라진 ‘흑태자 칼레드’가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우디아라비아로 ‘공간이동’ 되었음이 밝혀졌고 ‘전세계 연합’에는 묘한 공포가 서렸다.
지금껏 ‘게이트’를 거쳐야만 이 세계에 영향을 끼치던 이계(異界)가 하늘 저편에서부터 나타난 것 자체가 큰 혼란을 야기하고 있었거늘,
이젠 아예 침대에서 잠을 자던 이가 제멋대로 적에게 끌려갔음이 밝혀진 것이다.
숱한 공포가 이미 중동 연합군을 목전에 두고 있던 ‘전세계 연합’에게 퍼져나간다.
허나, 마치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하기라도 했었다는 듯,
흑태자를 바로 옆에서 보좌하던 비서관은 그의 유언이 적힌 글귀를 들고 나타났다.
그곳에는 비룡 군단 데메테르와 중동 연합의 약점 사우디아라비아의 은닉된 통로 따위가 낱낱이 적혀 있었다.
이를 받아든 자는 ‘전세계 연합’에서도 ‘뇌제’의 개별적 부탁으로 인해 전장 지휘를 맡게 된 한국의 군인, 홍진웅 대위였고...
언제, 어디서라도, 자신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이후를 대비하고 있었던 칼레드의 ‘유서’는 다름 아닌 출전식 직전 단상에 오르는 홍진웅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음에도 겁쟁이처럼 숨지 않고, 백만의 헌터 사병 중.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인류를 위해 공헌한 자. 칼레드의 숭고한 의지를 우린 기억해야 합니다!”
대위.
국가를 대표하기도 아니, 한 부대를 대표하기에도 부족한 보잘것없는 직책. 허나, 홍진웅은 이건우의 가장 오랜 친구였고 동시에 지금 이 순간 흑태자의 유지를 잇는 자가 되었다.
그렇게 직책에 걸맞은 권위를 가진 홍진웅은 지금껏 그 누구보다도 필사적으로 갈고 닦은 ‘지휘력’을 뽐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진군하라! 우리에게 물러설 곳은 없다. 아니, 우리는 단 한 걸음의 뒷걸음질도 치지 않는다! 싸우자! 먼저 간 이들을 위해! 우리의 유지를 이어갈 미래를 위해서!”
언제, 어디서라도 적이 가진 ‘미지의 힘’으로 끌려가 참살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
칼레드의 부재로 인해 발생한 그 공포를 홍진웅은 도리어 지금 이 순간, 더더욱 물러설 수 없다는 투지로 승화시켰다.
이윽고,
-피이이이이이이!
전세계 연합과 중동 연합의 전쟁은 막을 올렸다.
-재앙의 현현까지 남은 시간: 2시간 6분.
한 줄기의 섬광이 대서양을 가르며 나아간다.
그 번개가 뉴욕항에 도달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아메리카 대륙이 도달한 한 남자. 이건우의 초월적인 용안(龍眼)은 이내 목도한다.
하늘에 떠다니는 악마성, 판데모니움의 거대한 그림자를.
재앙, ‘검은 밤의 주인’을 맞이하려는 듯 이미 시스템에 의해 제1구역이라 명명된 미국에는 수도 없이 많은 ‘악마종’이 자리한 상태였다.
이윽고 ‘검은 밤의 주인’이자 서열 1위의 악마왕 베르제뷔트가 현현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2시간 남짓.
허나, 뉴욕항에 선 이건우의 눈빛에는 아주 조금의 조급함 따위도 엿보이질 않았다.
툭,
바닷물에 젖은 전투복을 살살 털며 채비를 갖춘 이건우는 문득 말한다.
“여기까지 오면,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허나, 분명히 누군가를 향해 나아간 그의 목소리.
그러자 잠시 후, 이젠 버려져 차게 식은 뉴욕항 뒤편의 건물의 문은 벌컥 열렸다.
“내가 언제부터 네 명령대로 행동하는 부하였니.”
그렇게 어둠 속에서부터 터벅, 터벅 걸어와 모습을 드러내는 자는 다름 아닌 가장 밝게 빛나는 검 ‘백룡도’의 소유자이자 검성의 후계자.
철혈검희 이서영이었다.
“대령님...”
“난, 네가 혼자 아메리카로 오겠다고 했을 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만에 하나 죽어도... 네 옆에서 죽을 생각이었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서영이라니.
건우에게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 주길 원하는 대상이었기에 솔직히 조금 당황하지 않을 순 없었다.
허나,
“나 정도로 놀라기에는... 좀 이른데?”
이어지는 그녀의 말마따나 검희 이서영을 따라 뉴욕항의 조명광 아래로 걸어 나오는 인물들 역시 만만치 않다.
“건우야.”
애처롭기보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이는 눈동자로 건우를 응시하는 그녀는 수신의 성녀이자 먼 과거부터 건우가 속한 소대의 소대장이었던 여인.
섬광의 남궁연이었다.
“물론, 저도 있어요. 아저씨.”
더군다나 남궁연과 몸을 밀착한 채 엉겨 붙은 모습으로 걸어오는 작디작은 소녀의 형상은 이건우에게 적잖은 두통을 유발하기 충분했다.
“앤젤라. 너까지.”
그들은 이서영과 달랐다.
인류를 위한 전쟁에서 전선에 서기보단 살아남은 인류를 굽어살피기에 적합한 두 신의 사도들.
그렇기에 이건우는 이번만큼은 안된다며 반론을 꺼내려 들었으나 남궁연과 앤젤라라는 두 성녀는 어떤 물건을 건우에게 들이밀며 그의 입을 막았다.
“...이건?”
“건우야. 네 부탁으로 보름이나 고생하게 해놓고 그냥 놔두고 가면 어떻게 하니.”
“맞아요. 아저씨. 저희가 이걸 구현화 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마치 소풍을 위해 호화스러운 도시락을 맘잡고 준비한 사람처럼 말하는 수신의 성녀와 빛의 성녀.
허나, 그 두 사람이 힘겹게 들고 나타난 그 ‘물건’은 결코 그 억양과 같이 가볍게 넘길 수는 없는 물건이었다.
봉마의 기운이 서려 있는 헝겊으로 몇 겹이나 칭칭 휘감겨 있는 물건.
이정도로 감춰 두었으니 그 어떤 악마종도, 감각이 뛰어난 헌터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눈앞에 두니 그제야 건우의 눈에는 보였다.
봉마의 헝겊으로 휘감긴 이 기다란 물건의 정체를 말이다.
“...성검. 아스칼론?!”
그건 오직 성흔을 부여받은 자. 그 중에서도 ‘신벌’의 권능을 부여받은 성자만이 제멋대로 소환하고 잡아 휘두를 수 있던 빛의 검. 아스칼론이 분명했다.
건우는 유럽에서 두 번째 재앙과의 격전을 개시하기 전, 수신의 성녀인 남궁연에게 어떤 부탁을 했었다.
그 부탁이란, 한국에서 천마의 손에 산채로 붙잡힌 자. 성자 카르막 베르무트와 성검의 분리화.
그리고 그에 더해, 가능하다면 수신의 신력을 불어넣어 자신이 다룰 수 있도록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허나, 대략 보름간 성검 아스칼론의 안정화와 성질 변환에만 총력을 기울이던 남궁연은 분명...
‘아무래도... 불가능한 것 같아.’
뇌제가 성검을 휘두를 수는 없다는 결론을 냈었다.
“그랬지. 나도 안 될 거라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아저씨한테는 제가 있잖아요.”
남궁연의 말을 가로채듯 치고 들어오는 건, 다름 아닌 빛의 성녀 앤젤라 엘런.
즉, 그런 것이었다.
한쪽의 성녀가 아닌 양측 성녀의 조력을 받는다면...
“성검, 아스칼론을 휘두를 수 있다...?”
이 같은 희소식은 정말로 많은 것들을 뒤바꾼다.
당장 이건우가 목전에 두고 있던 이 미국의 재앙은 다름 아닌 ‘악마왕 베르제뷔트’.
그리고 흡혈종과 수신의 신력이 극상성을 이루었듯, 악마종에게 극상의 힘을 발휘하는 건 다름 아닌...
‘빛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짓는 이건우.
그런 그를 응시하던 두 여인과 한 명의 소녀는 그제야 얼굴 가득 큰 미소를 지었다.
성검을 쥔 뇌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