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61화.
무너지다 못해 으스러진 유럽.
막상 일본에 출현했던 재앙, ‘태고의 흡혈귀’의 잔상도 다 정리하지 못한 상황이었거늘...
세계는 그 이상의, 전례 없는 위기를 맞닥뜨리고 있는 상태였다.
<*제1구역 ‘미국’의 헌터들은 재앙의 탄생을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제3구역 ‘캐나다’의 헌터들은 재앙의 탄생을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제9구역 ‘사우디아라비아’의 헌터들은 재앙의 탄생을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3대 재앙의 동시 잉태.
그리고...
<재앙, ‘전율하는 사성(死星)’이 탄생했습니다.>
그 무엇과도 비견되지 않는 괴물.
한때는 인류의 이정표이자 희망이었던 존재, 프리드리히 파울라스의 재앙화.
즉, 전세계의 사람들은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무려 네 개체나 되는 재앙의 동시 현현을 말이다.
그렇기에 피해를 복구하고, 생존자를 치료하길 우선으로 하던 ‘전세계 연합’은 특급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렇게, 인류가 가진 모든 자산 그리고 한치의 숨김없는 조력을 약조하는 회의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열린다.
“뇌제님은...?”
반쯤 벗겨진 머리의 남자가 퍽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허나, 다소 우악스러운 외향과 달리 멋드러진 콧수염을 가진 그는 멕시코의 헤드 헌터로, 세계 랭킹 20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S급 헌터 중 한 명이었다.
“뇌제는 정확히 오늘 밤까지 안정을 취하실 예정이십니다.”
마찬가지로 기계적인 어조로 그의 질문에 답하는 건 S급 헌터는 아니나 언제나 그 이상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여걸. 검희 이서영이었다.
“건우님의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의, 의식은 돌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설마, 뇌제께서 다가오는 전쟁에 참전하지 못하실 정도의 휴유증이 있으시거나...”
“잠깐! 저, 정말 그럴 수도 있단 말입니까?”
“한국의 신의... 곽재신이 분명...”
그리고 이어지는 발언들 역시 시장을 방불케 할 만큼 두서가 없고 정신이 없었으나 이곳에 모인 모든 존재는 하나같이 세계 랭킹에 이름을 올린 혹은 특출난 이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죽은 검제의 빈자리를 채운 검성.
제이슨 스트라우스의 손녀 올리비아.
그녀를 따르는 ‘스트라우스’ 일가와 그 보좌진들.
유럽 연합군의 대표 기술관이었으나 인류를 위해 필리핀으로 망명했던 과학자.
에테르 기술의 선두주자라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헌터들 역시 보인다.
그들은 각각이 국가를 대표하는 자들이었고 또한 현재는 세계를 대표하게 된 입장의 헌터들이었다.
최정상의 헌터들.
그들은 모두가 제각각의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었으나, 이 유럽의 절반이 날아간 참상이, 흡혈종에게 핍박받던 일본의 폐허가 큰 충격을 준 듯했다.
자국의 이익 혹은 자기자신만의 이득.
이젠 그런 것이 모두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민간인을 우선적으로 대피시켜야...”
“지금 민간인 타령할 때요?! 우린 멸망을 코앞에 두고 있소!”
“그럼 아메리카 대륙 전역이 불타는 꼴을 그냥 두고 보겠다는 소립니까?”
“어차피 우리가 재앙을 그 자리에서 막아내지 못하면 끝이오!”
“이 사태에 필요한 건 뇌제... 오직 뇌제님 뿐이오.”
‘회의’라는 이름이 무색해질 만큼 20개국을 대표하는 쉰 명가량의 헌터들은 의견을 모을 수가 없었다.
“뇌제님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모셔야 하오!”
“맞는 말이네. 아메리카는 현재 재앙이 무려 두 개체나 현현할 예정 아닌가”
“자, 잠깐! 자네 그걸 말이라고 하나? 현장에서 못 봤어? 파울라스... 아니, 그 전율하는 재앙은 ‘흑왕’과 한패였다고!”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이고... 중동 전체가 이미 재앙의 세력권이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격해지는 언성.
허나, 그 와중에도 각국의 헤드헌터들이 더 목소리를 높이는 까닭은, 사실상 중동과 아메리카 모두 두 개체의 재앙이 동시 출현할 예정이란 점이었다.
“그... 그건 모르는 게지요! 만일 뇌제를 중동으로 보내두었는데 그 사성(死星)이라는 재앙이 아메리카에 나타나면 어쩌란 말이오!”
“셋이나 되는 재앙을 막아낼 헌터 따위... 세상에 있을 리가 없잖소! 그건,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낼 헌터는 뇌제님 뿐이오...!”
정작 ‘스트라우스’의 정식 후계자 올리비아는 입을 꾹 닫고 곤란한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허나,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를 대표하는 이들은 일제히 뇌제의 아메리카행을 주장했고, 이는 당연하지만 어마어마한 반발을 낳았다.
“그 프리드리히 파울라스가... 괴물이 된 현장을 내가 봤다니까?! 이보게! 그 옆에 서 있던 헌터는 다름 아닌 흑왕이었어!”
“우, 우리 파키스탄은... 그 흑왕의 괴상한 명령마저 거부하고 이 전쟁에 참전했소! 그런 우리를 내버려 둘 셈이오?!”
“뇌제님은 중동으로 향해야 하오!”
그 주축은 중동 연합에서도 흑왕의 명을 거역한 국가들부터 러시아, 중국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회의’
말이 좋아 회의지...
이건 어딜 어떻게 보아도 세계 최강의 헌터인 그저 ‘뇌제’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신경전의 현장이었다.
이에 줄곧 곤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여자. 대한민국 헌터 협회의 부회장, 백귀야행 이초희는 고민했다.
이곳에 모인 모든 헌터들이 한심해 보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론 두렵다.
그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 손으로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최강의 헌터들.
단 한 번의 말실수로 국가 고립 사태를 유발할지 모르는 그런 상대들이었단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크게 아메리카와 중동으로 나뉜 회의장의 세력들.
허나, 그 두 세력의 주장은 사실상 둘 다 타당했다.
어차피 ‘전율하는 사성’으로 거듭난 불사왕의 행방을 파악할 수 없는 한, 모든 이야기는 ‘확률’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에잉! 이런 식으로 입씨름하는 시간이 아깝소!”
“뇌제께선 어떻게 판단하실지는 한국의 헌터들이 가장 잘 알겠지!”
“그렇소! 한국의 대표 백귀야행! 그대가 보기에 뇌제님은 어떻게 행동하실 것 같소. 뭐라고 말 좀 해주시오!”
허나, 아무리 파고들어도 미궁 속으로 향할 뿐인 이초희의 깊은 고민에도 결국 회의장의 시선은 그녀에게로 모였다.
이젠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치지 않는, 참된 리더가 되길 다짐했던 이초희였으나...
이건 도를 넘어도 너무 넘겼다.
이곳에서의 한 마디가 곧 대륙 하나의 멸망을 좌지우지할지도 모를 상황이었으니까.
“백귀야행!”
“가만히 있지만 말고 무슨 말이라도 하게!”
뭐가 정답일까.
어떻게 해야 이 끔찍한 비상사태에 그렇지 않아도 위태로운 이 ‘전세계 연합’이 서로를 적대하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걸까.
“거, 건우는...”
그녀가 입을 열자, 회의장은 일순간에 침묵에 휩싸인다.
마른 침을 삼키는 자도, 손을 떠는 자들도 있을 정도로 긴장되는 순간.
허나, 입을 연 이초희에게는 마땅한 대답이 없는 현재...
그녀는 눈앞이 핑핑 돌 정도로 엄청난 부담을 느끼며 입술을 떨었는데.
-벌컥!
더 최악의 소식은 급작스럽게 열린 문과 함께 터져 나오고 만다.
“크, 큰일입니다!”
“올리비아 아가씨! 큰일입니다!”
일순간에 들이닥친 ‘정보계’ 헌터들의 숫자가 스물을 넘긴다.
그런 그들이 일제히 입에서 내뱉은 말은 무려...
“전세계 각국의 하늘 위에서 저, 정체 모를 형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게이트인가?”
“그... 그게 아닙니다. 아예 새로운 현상입니다! 이미 멕시코는 허공에서 나타난 ‘다른 세계’에서부터 용족들이 날아들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멕시코가?!”
벌떡 일어선 멕시코의 헤드 헌터가 경악한다.
다만, 각국의 정보원들은 땀을 뻘뻘 흘려가며 전 대륙에 멕시코와 마찬가지의 기현상들이 발생하고 있음을 계속해서 외쳤고...
사실상, 이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전세계의 모든 하늘 위, 동시...”
“모, 몬스터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다고?!”
“나, 나는 돌아가겠네! 우리 처자식이 아직 브라질에...!”
“크흠! 나도 이만 일어서지!”
“나도...!”
-드르륵!
하늘 아래 이젠 ‘안전’을 논할 수 있는 지역 자체가 사라졌다는 말에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사람들.
“잠깐만요! 이렇게 흐지부지 흩어졌다간! 결국, 재앙의 현현을 막을 수 없을 거에요!”
“지금 자국의 위험이 네 개체나 되는 재앙의 대책 마련보다 중요하다는 겐가?!”
이에 곧바로 ‘올리비아’와 ‘검성’이 쌍심지를 켜며 그들을 만류하지만...!
“그 잘난 스트라우스도... 검성 당신도... 우리 수단을 위해 싸워주시진 않을 것 아닙니까!”
“이건 적의 계략에 놀아나는 꼴입니다.”
“놀아나더라도! 나는 고향에서 싸우다 죽겠소!”
결국, 으르렁거리는 맹수와 같이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전세계 연합’.
사태는 경각에 달했고 이대로 재앙에 대항하기 위한 ‘연합’이 무너지는 건 시간 문제나 다름없어 보였다.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리는 헌터들.
다름 아닌 세계 최상위권의 헌터들이 그런 행동을 자행하자 사방의 서류들이 흩날리고, 펜과 수첩이 날아다니는 기현상들마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만 있으면 다름 아닌 서로에게 칼을 들이밀 법한 그 일촉즉발의 현장에...
돌연, 시퍼런 섬광 한 줄기는 날아들었다.
-파직!
그 벼락은 말 그대로 아주 길고 얇은 스파크와 다르지 않았다.
“모두...”
허나, 짧은 목소리와 동시에 그 중심에 도달한 한 줄기의 벼락은, 일순간에 회의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수십 명의 마력을... 짓누른다!
“조금만 진정하시죠.”
이내, 푸른 번개를 타고 등장한 회의장 정중앙에 등장한 자.
그는 다름 아닌 뇌제.
이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세계 최강의 헌터였다.
***
안정을 취하겠다던 뇌제.
그의 등장만으로 회의장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집혔다.
모두가 힘을 합쳐도 모자란 상황에 서로에게 서슬 퍼런 칼날을 들이밀려던 현장의 모든 헌터들이 순한 양처럼 변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뇌제라는 명칭이 가진 명성의 힘이 아니었다.
‘말도 안돼...! 오고 있다는 걸 느끼지도 못했다고? 탐색계 헌터들의 정점인 내가?’
‘그냥 번개 한 줄기로... 내 오러를 전부 짓눌러 버렸다고?!’
이집트를 대표하는 세계 최고의 탐색계 헌터 이시스.
평생을 ‘오러’만을 수행해 세계 최고의 오른 무인 그린란드의 에이크.
그들은 자신의 이름만으로 세계 어디서든 헌터군을 수하로 부릴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 누구도 이시스의 ‘감지’를 벗어날 순 없고 그 누구도 에이크의 묵직한 ‘오러’를 정면으로 받아낼 수 없다고 여겨지던 세계 최상위권의 헌터들이었단 말이다.
허나, 이건우는 그저 아주 먼 곳에서 이곳으로 ‘번개’와 함께 나타나는 것만으로 그들의 자존심이자 최고의 특징이었던 면면을 아예 박살 냈다.
뇌제는 그저 이곳에 나타났을 뿐이지만, 세계 랭크를 논하는 현장의 모든 헌터들은 알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몸이 경직됐어?!’
‘무... 무서운 카리스마다!’
‘마, 말도 안 돼. 이 정도의 마력량이 한 헌터의 몸에서 느껴진다고?’
자신들과 뇌제는 그 수준부터가 아예 다른 존재라는 걸.
허나, 그런 경악 따위는 정말 별것도 아니란 듯이 이건우는 또 한 번 20개국을 대표하는 모든 헌터들을 놀라게 만든다.
왜냐하면... 뇌제는 현장의 모든 갈등을 해소하고도 남을 만큼의 파격적인 ‘작전’을 구상했기 때문이었다.
“자, 잠깐만요 뇌제님. 그 말인즉......”
“어렵게 돌아가실 것 없습니다. 제가 말한 그대로이니까요.”
너무 놀라 되묻는 올리비아 스트라우스에게 뇌제는 차분히 답했다.
허나, 그럼에도 올리비아 스트라우스는 고뇌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고...
“그러니까... 지금 뇌제께서는 미국, 캐나다... 하물며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는 신형 재앙... ‘전율하는 사성’까지도 혼자서 막아내겠다는 말씀입니까?”
뇌제가 내놓은 해답이란 다름 아닌 희생
불사왕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재앙.
미국과 캐나다의 재앙.
이렇게 둘과 둘로 나뉘었기에 그 누구도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던 문제를 그는 혼자서 셋을 떠안겠다는 말로 정리해버린 것이었다.
그러면, 지금껏 막혀 있던 문제는 해결된다.
‘전세계’는 다 함께 인류를 배반한 ‘흑왕’과 과반수 이상의 중동 연합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에 현현할 재앙만을 막아서면 되는 일이니까.
그래. 문제는 해결된다.
혼자서 셋이나 되는 재앙을 감당해야만 하는 ‘뇌제’를 제외하면 말이다.
물론 반발은 있었다.
아무리 뇌제가 다른 인류 전체가 합심해도 이길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가 되었을지라도...
혼자서, 동시에, 셋이나 되는 재앙을 막는다는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납득이 가질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올리비아 스트라우스가 뒤늦게 이건우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지만,
“대책이 있는 분만 입을 열어 주십쇼. 불필요한 입씨름은 삼가주시길 바랍니다. 이제 모든 재앙의 현현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70시간 남짓이니까요.”
뇌제는 푸른 안광을 번뜩이며 그런 올리비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방법이 있나.
아니, 없다.
전인류가 다 같이 힘을 합쳐도 결국, 하나의 재앙에 대항하기도 벅찬 것이 잔혹한 현실이었으니까.
“안돼.”
다만, 딱 한 사람.
모두가 입을 다물고 그저 뇌제의 주장에... 희생에 암묵적 동의를 표하던 순간, 딱 한 사람은 입을 열었다.
“다들 바보 아냐? 야 이 머저리들아! 생각을 해! 생각을!”
입을 열자마자 거침없는 욕지거리를 내뱉는 그녀는 다름 아닌 백귀야행. 즉, 이건우와 연이 깊은 이초희였다.
“저 잔학무도한 재앙들을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헌터가 여기 건우뿐인 거 몰라? 근데 뭐? 유일한 희망인 건우를 셋이나 되는 재앙에게 턱하고 던져주겠다고? 아니, 자발적으로 거길 기어들어 가겠다고?”
-쾅!
자기 분을 못 이긴 이초희는 결국 눈앞에 있던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 병신들아! 그랬다가 건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만에 하나라도 재앙들이 똘똘 뭉쳐서 건우를 협공하면! 그래서 유일한 희망인 건우가... 건우가 돌아오지 못하면 그다음은 어쩔 건데. 어?! 어쩔 거냐고!”
“부협회장님.”
“건우 너도 그래! 네가 제일 강한 헌터잖아. 그럼 전세계 모든 헌터들이 죽는 한이 있어도 널 지켜야지! 네가 살아남아야! 남은 사람들도 살아남을 거 아냐!”
그 말은, 이건우로서는 퍽 많이도 들어왔던 말이었다.
뇌제였던 과거에도,
뇌제로 거듭한 현재에도,
결국, 인류 최강의 공격력을 가진 자신은 타인의 시체를 밟고 서서 살아남아야 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새삼, 본래 이 시점에는 이미 ‘암살’ 당했을 이초희의 주장에 이건우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자신에게 애정표현마저 아낌없이 해주며 편애해주던 이 눈앞의 여인에게.
“역시... 당신이라면 한국을 믿고 맡길 수 있겠군요.”
“아니, 건우야!”
“부협회장님. 죄송하지만, 그 방법은 소용없습니다. 제가 후방에 남으면, 엄청난 희생이 야기될 뿐이죠”
“해보지도 않고...!”
“해봤습니다. 수십 아니, 수백 번. 어쩌면 그 열 배 이상으로 저는 봤습니다. 차갑게 식은 시체. 그리고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 숱한 유언들을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말을 하려던 이초희.
그녀는 단순히 화를 내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화를 내면서도 이성적으로, 애정 이상의 무언가를 품고 있던 이건우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그를 ‘희생’의 현장에서 빼내기 위해 어떻게든 이유를 찾아내려 했다.
허나, 이내 이초희는 직감했다.
현재의 이건우는 뇌제이며 동시에 한국 전역을 휘어잡은 신흥종교, ‘수신교’의 사도다.
그리고 ‘신’과 얽힌 인간은 원하든 원치 않든 미래를 엿본다는 것을 이초희는 잘 알고 있었다.
“건우야. 너...... 대체 뭘 본 거야.”
그 한 마디의 물음에, 현장의 모든 헌터들은 침을 삼킨다.
‘뇌제’와 관련된 기사가 매일 수백 개씩 찍혀 나오는 이 시대, ‘수신’의 존재를 모르는 헌터는 많지 않았으니까.
이윽고, 뇌제는 어째서인지 조금 애처로운 눈빛으로 회의장 전체를 쓱 훑어보고는 천천히 그 입을 열어 답했다.
“모든 것.”
놀랍게도 현장에는 ‘거짓 간파’라는 S급 스킬을 가진 헌터들도 몇몇 있었으나, 그들의 눈동자에서도 이건우는 거짓이 아닌 진실을 입에 담고 있음이 보였다.
정말 그는 본 것이다.
‘모든 것’을
***
이후, 이어진 이건우의 한마디 한마디에 세계는 움직였다.
-재앙이 잉태되고 있는 미국, 캐나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접한 모든 국가들은 대피하세요. 강요는 하지 않겠습니다. 허나, 떠나세요. 모든 걸 내려놓고 최대한 멀리.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회의의 결론이 공표되던 다음 날의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국가가 망명정부를 선포했으며 믿을 수 없는 수의 난민들이 뱃길에 올랐다.
전 세계 모든 단체가 자발적으로 항공기와 배를 조달해주었으나, 그조차 부족할 지경이었다.
헌터들은 국경의, 민족의 구분 없이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에서마저 쉼 없이 나타나는 몬스터를 무찌르며 난민을 보호했고, 전세계는 이건우를 구심점으로 하나 되었다.
그렇게 70시간.
45시간.
진정한 재앙들의 현현까지 22시간을 앞둔 현재.
“정말로... 혼자서 향할 생각인 게냐.”
이건우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오는 마지막 군함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백발의 노검사. 검성 라오 위가 서 있다.
“검성.”
“지금의 네가, 나를 처음 찾아왔을 때의 너와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다는 걸 잘 안다. 허나, 명심해라. 다른 재앙들은 몰라도 ‘전율하는 사성’만큼은 결코, 승패를 예측할 수 없는 강적일 게야.”
“말리진 않으시는군요.”
“말린다고 네가 듣는 시늉이나 하겠느냐? 서영이도, 너도... 이 늙은이의 말을 곱게 들을 위인들이 아닌 게지.”
“뭐...”
틀린 말은 아니군요.
그런 말을 이건우가 내뱉으려던 찰나,
-철컥.
검성은 돌연 무언가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에 건우가 고개를 돌리자, 검성의 손에 들려있던 물건의 정체가 보였다.
하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시뻘건 돌.
허나, 혈속성을 다루는 이건우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 붉은 돌에는 자신의 스승, ‘혈마’의 기운이 서려있다는 것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건... 검성의 검이 아닙니까.”
달빛을 담아 하늘을 빛내는 검.
월광찬천검(月光燦天劍).
“가져가라.”
“...”
“이 늙은이보단 네게 더 필요한 물건일 거야.”
건우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그 달빛을 닮은 장검을 손에 쥐었고 검성은 이를 보며 피식 웃고는 느지막이 덧붙였다.
“죽지 마라. 네가 죽으면, 딸아이가 슬퍼할 테니.”
그렇게 말하는 검성이었으나, 그의 눈동자는 올곧게 눈앞에 선 이건우만을 향하고 있었다.
“노력하겠습니다.”
뉴욕 그리고 악마성 판데모니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