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60화.
딩-
손끝을 튕기면 소리가 난다.
아름다우면서도 외로운 음색이 맨해튼 외곽 센트럴 파크를 뒤덮는다.
소녀는 뒤늦게 저것이 아주 먼 과거 ‘통기타’라 불리었던 물건임을 기억했다.
얼핏 외로우나 동시에 절절함이 느껴지는 음색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소녀는 문득 의문에 휩싸인다.
여긴 어디인가.
그리고 자신은 무엇을 하던 중이었던가.
생각이 나는 것이 없었다.
다만, 얼핏 머릿속에 자리한 기억의 끄트머리에서 목소리는 들려왔다.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도 아니... 인류 전체에게 평등한 각성의 기회를 주어야 해.”
소년은 비장한 얼굴로 그런 말을 곱씹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가씨.”
그때, 눈앞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소녀는 반짝임이 없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고 남자는 그 모습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괜찮니?”
괜찮은가.
눈앞의 기타리스트는 어째서 그런 것을 묻는가.
소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자신이 누구인지, 이곳은 어디인지 지금의 그녀는 뭘 하던 중이었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저런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초점 없는 눈으로 질문을 건넨 아티스트를 그저 응시하는 소녀.
이에 기타리스트가 걱정스런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 ‘911’을 입력하려는 찰나.
-쩌억!
모든 것을 망각한 소녀의 귀를 때리는 굉음은 들려왔다.
그래. 이곳은 맨해튼.
그리고 자신은 지금 저 하늘 위에서부터 쏟아져 내려올 괴생물체들을 불태울...
최초의 헌터.
서열 50위의 ‘대악마’ 아슈타르테의 차원검.
모든 드래곤의 수장. 로드 ‘잿빛의 왕’의 드래곤하트.
제멋대로 하루 이틀의 ‘시간’을 넘나드는 마계대공 파이몬의 뿔.
자신은 그것을 모아 ‘시간이 되감겨도 사라지지 않는’ 인벤토리에 넣어야만 했다.
어째서?
모르겠다.
다만, 소녀는 자신이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 만큼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잘 있어.”
그제야 소녀는 말했다.
인사조차 없이 마주했던 스트릿 뮤지언에게 끝을 알 수 없는 이별을 말이다.
***
“시스템은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결실이다. 발상은 경악스럽고 과정은 잔혹했지만, 그 결과만큼은 확실했지.”
‘기억하는 자’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그럴 것이다.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의 시간’을 그저 보여주며 약간의 해설을 덧붙일 뿐이었으니까.
허나, ‘전지’했던 ‘십자가에 못 박힌 자’와 ‘전능’했던 ‘소녀’가 걸어온 길을 모두 응시한 나는 결코 무덤덤한 표정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정말......”
말을 하려다가도 멈춘다.
입안에 감도는 씁쓸함과 눈앞에 보이는 섬뜩한 ‘숫자’에 도저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숫자.
즉, 회귀를 상징하는 짧은 문구.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시스템을 고안했던 것은 분명 350회차의 말미였으나 내 눈앞에 보이는 숫자는 정말 흉악하기 그지 없었다.
<991>
최초의 헌터... 아니, 그냥 14살짜리 아이에 불과한 소녀 노을은.
무려 641회차를 홀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재료를 수집하며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감정은 메마를 대로 말라 구겨진 낙엽 조각처럼 바스러졌고 그 출생부터 ‘반신’이었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만이 남아 기계처럼 변한 소녀의 곁을 지켰다.
그래.
마치 앤젤라를 처음 만났던 당시, 그 두 번째 성녀가 스스로의 감정을 죽이고 있던 것과 같았다.
만일 그 소녀가 자신의 모든 감정을 훌륭하게 ‘자살’ 시켜냈다면 아마 저런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난...
과거의 나는 저 기계적이고 효율적이며 능률적인 존재를 이상처럼 여기곤 했었다.
허나,
“정말로... 끔직하군.”
이젠 아니었다.
팔 한짝이 날아가도 물러섬이 없다.
외로움과 즐거움 이외에도 소녀는 본디 두려워해야 마땅한 고통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아프면, 그냥 되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되돌아가면 또다시 일순간에 한국을 빠져나와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로 향한다.
그리고는 앉아 기다리는 것이다.
하늘이 갈라지기를...
그렇게 반복되는 삶을 소녀는 지금 991회차째 보내고 있다.
“위대한 희생이었지.”
“위대하긴 개뿔. 이건 학대다. 아니, 학대보다 더 끔찍하지. 이건 고문이잖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저런 일이 가능한 존재는 오직 이 세계에 저 소녀 하나뿐이었으니.”
“혼자? 아니지. 이봐. 생각해봐. 그 소년의 모습을 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매번 찾던 존재가 있잖아. 그 ‘절대신’이라는 작자는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건데?!”
격해진 감정에 내가 소리 높여 외치자 ‘기억하는 자’는 잠시 눈앞의 형상을 정지시키더니 숨을 고르고는 말했다.
“천상에는 규율이 있다. 그 지고한 존재는 법칙과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만, 우릴 도울 수 있지.”
“...규율? 법칙?! 벌써 몇 번이나 세계가 멸망했는데 그게 중요해? 어차피 인류가 멸망하면 그 잘난 ‘권능’도 똑바로 휘두르지 못하다 재앙에게 먹힐 거면서?”
계속해서 답답한 소리를 재창하는 ‘기억하는 자’에게 참다못해 한소리를 내뱉으려던 찰나, 나는 눈앞의 그 역시 나 못지않게 얼굴을 시뻘겋게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중요하다고... 말하더군. 그 오만한 작자들은 말이야.”
오만한 자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그는 천사와 반신 그리고 여태껏 제모습 한번 드러낸 적이 없는 신을 그렇게 불렀었다.
즉, 그도 분노했던 것이리라.
자신들의 멸망을 자각하고도 끝내 그 권좌에서 무거운 엉덩이를 떨어뜨리지 않는 ‘신’들에게.
“후...”
나보다도 훨씬 더 분노하는 ‘기억하는 자’의 모습에 나는 입안에 맴돌던 쓴소리를 삼켰다.
그 모습을 본 ‘기억하는 자’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규칙. 그래. 결론적으로 십자가의 못 박힌 자가 고안해낸 ‘시스템’은 탄생했다.”
-드르르륵?
투박한 무언가를 긁는 소리와 함께 빠르게 변화하는 숫자.
이내, 내 눈앞의 숫자가 다시금 <1002>에 도달했을 때, 지금껏 ‘저항’만을 반복해왔던 세계는 변화해 있었다.
시끌시끌한 맨해튼이 보인다.
허나, 소녀의 존재는 보이질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눈앞의 전경이 멸망 직전의 그 광경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쩌억!
하늘은 갈라진다.
내가 헌터사 교과서에서 읽었던 그 역사 그대로.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띵!
내겐 너무나도 익숙한 그 소리.
그건. 시스템 메시지의 소리였다.
<제1구역, ‘미국’에 최초의 게이트가...>
내가 무려 천 번이 넘도록 ‘보았던’ 세계가 드디어 달라졌다.
하늘 위,
거대한 균열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용족들이 쏟아져 내려오는 것까진 같았으나, 직후 하늘로 뛰어올라 용과 싸우는 이의 얼굴이 달라졌던 것이다.
그는 장창을 들고 있었다.
일반 남성은 들 수도 가지고 있었을 리도 없는 선 분홍빛의 거대한 창.
그 얼굴은 낯설면서도 익숙하다.
‘제이슨 스트라우스...!’
최초의 드래곤 슬레이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윽고 ‘세계’는 1002회의 반복을 거치고 나서야 드디어... 내가 아는 헌터사 초입에 들어섰다.
***
-딸깍! 쿵!
묵직한 울림과 함께 텅빈 허공이 반으로 쪼개어진다.
회색 머리칼의 남자가 발을 딛고 선 땅은 어떠한 유적과 같은 장소였다.
허나, 그 회색 안광의 남자가 손에 쥔 영롱한 청록색 열쇠가 한 번 더 크게 회전하자 ‘유적’은 공간 그 자체가 뒤틀리며 변한다.
천장이었던 것이 바닥에.
바닥이었던 것이 기둥에.
기둥은 다시 하늘이 되고 그가... ‘전율하는 사성(死星)’이라는 이름의 재앙이 된 불사왕이 서 있던 ‘공간’은 말 그대로 비틀리고 뒤엉켰다.
“흐읍?!”
그 인간의 이해와 세상의 이치를 벗어난 풍경에 숨을 들이켜는 건, 다름 아닌 흑태자 칼레드의 아비이자 중동 연합의 수장인 ‘흑왕’이었다.
“와... 왕이시여. 이게 무슨...?!”
흑왕은 연륜이 넘쳐 보이는 외향과 달리 끝없이 뒤엉키고 비틀리는 광경에 적잖게 놀란 눈치였다.
허나, 그 모든 현상을 일으킨 장본인, ‘불사왕’은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재앙의 육성을 토했다.
「아카식 레코드 1번. ‘공간’」
이에 흑왕이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닫자, 불사왕은 이번에는 자신의 입을 움직여가며 말했다.
“이 시스템을 창시한 자. ‘반신’은 생각했다. 천상의 존재들이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 ‘규율’. 자신들은 이를 어길 수 없으나, ‘재앙’들은 언제나 자유롭지.”
흑왕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불사왕’의 고등사령술을 통해 ‘불사왕’이 알고 있는 세계의 진실을 적잖게 간접 체험한 후였기에...
이 세계가 실은 무한히 반복되고 있음을.
또한 ‘시스템’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류를 어시스트해주는 에너지가 실은 바티칸의 반신과 정체불명의 신의 합작품이라는 진실을 얼핏 알고 있던 것이다.
“자유를 향유하는 ‘재앙’을 강제로 일정한 법칙과 규율 속에 가두고 두꺼운 자물쇠를 걸어 잠근다. 거기서 파생된 자물쇠를 열 열쇠가 바로 아카식 레코드다.”
그제야 ‘흑왕’은 자신의 주인이 어째서 그토록 ‘아카식 레코드’ 라는 아이템을 찾아 헤매였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규율을 어길 수 없는 천상의 존재들과 같이,
본디 ‘자유’였던 재앙과 몬스터 역시 강제로 일정한 틀에 끼워 맞춘다.
그리고 ‘불사왕’은 이미 먼 과거부터 스스로 아카식 레코드 2번, ‘이치’를 깨부수고 새로운 재앙으로 거듭나길 꿈꿔왔던 자였다.
즉, 그는 자유로운 재앙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오직 이 세계를 진정한 의미에서 복구 불가능한 잿더미로 만들기 위해.
‘역시...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세상에 단 한 분이시다. 이 썩어빠진 세계를 송두리째 뒤엎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향할 방주를 건조하실 분은......!’
‘흑왕’이 그리고 이젠 재앙이 된 불사왕을 따르는 몇몇 ‘악마’들이 그에게 약조 받은 것은 하나였다.
무한히 되감기길 반복하는 이 허망한 세계의 종언.
그리고 그 누구도 제멋대로 뒤바꿀 수 없는 진짜 세계로 향하는 방주의 탑승권.
오직 그것만을 위해 ‘흑왕’은 일평생 본심을 숨기며 정의 속에 살았고, 이렇게 세상의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배신과 함께 ‘불사왕’을 도울 수 있었다.
그때,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공간을 자유롭게 조작하던 불사왕의 손이 멈춘다.
그리곤 ‘재앙’은 저 드높은 하늘을 응시하며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지는 소리로 말했다.
「아카식 레코드 1번. ‘공간’」
「아카식 레코드 2번. ‘이치’」
「아카식 레코드 3번. ‘시간’」
「아카식 레코드 4번. ‘무의식’」
「참된 미래로 향하는 길을 막아서고 있던 닳고 닳은 네 개의 금제 중. 이젠 ‘공간’과 ‘이치’가 나의 손에 있다.」
-펄럭!
로브를 펄럭이며 넓게 펼친 양손.
그 손에 각각 들려있는 것은 영롱한 청록색의 두 열쇠.
이윽고 불사왕이 두 열쇠를 모두 허공에 꽂아넣자 엄청난 수의 ‘경고 메시지’가 점멸했다.
허나, 불사왕은 도리어 그 경고에 입꼬리를 올리며 근엄하게 고했다.
「이젠 ‘게이트’라는 제약에서 벗어나리라.」
그러자 흑왕의 눈앞에는 여러 세계의 형상이 스쳐지나간다.
피로 물든 바다의 세계,
묘지만이 즐비한 죽음의 세계,
오만으로 몰락한 용들의 세계,
본디부터 지옥이라 불리던 마계 등등.
본디 ‘재앙’들이 거주하던 세계부터 그 재앙들의 잔혹한 침략으로 멸망에 도달한 여러 폐허까지...
허나, 이제 그 숱한 세계는 다가온다.
지금껏 허상으로만 존재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르게 미국, 캐나다, 핀란드, 베트남, 호주, 일본, 한국 등등.
전세계의 하늘 위에 말이다.
즉, ‘게이트’라는 통로를 거쳐서야 이어질 수 있었던 세계와 세계가 맞닿기 시작한 것이다.
“오오...... 오오오오!”
아이러니하게도 이 유적에 가만히 서서 세계 각지의 변화를 목도하던 흑왕은 목소리를 경탄을 토해냈다.
“이것이 바로 재앙. 이게 바로 진정한... 종말!”
내뱉은 말과 달리 그의 눈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했다.
빌딩보다 높은 파도가 치며, 화산이 분출되며 또한 눈이 내리고 그 바로 옆에서는 매마른 사막의 모래 폭풍이 들이닥치는 세계.
이 비틀리고 뒤엉킨 세계를 오래도록 고대해왔다는 듯.
흑왕은 양팔을 들어 올리며 웃었고 불사왕마저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세계는 멸망을 향해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비틀리고 뒤엉킨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