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59화.
마실 수 있는 물이 없다.
호흡할 때마다 폐가 저리다.
땅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다리는 끝없이 후들거릴 뿐이었고, 억지로 일어나 걸음을 내디뎌도 비참하게 쓰러진다.
-후우.
때는 여름이었다.
끔찍한 무더위가 세계를 뒤덮고 피어난 새싹이 두텁고 견고하게 자신의 생을 한층 더 밝게 키워내기에 적합한 그런 여름이었단 말이다.
-하아.
허나, 미약하고 얇게만 이어지는 숨은 마치 차디찬 서리처럼 하얗게 물든다.
계절이 뒤엉켰다.
불타오르는 도심 옆, 거대한 산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으며 그 위에는 괴물들의 사체가 일구어낸 피가, 아래에는 그 피로 물들어 불그스름하게 흐르는 강이 있었다.
죽은 물고기들이 떠올라 있다.
얇은 강에서부터 대양에 이르기까지. 괴물들의 죽음이 다시 다른 생명의 죽음을 낳은 것이다.
-털석.
이내, 그런 ‘텅 빈’ 세계에서도 안간힘을 다해 걷던 소녀는 쓰러진다.
찰박찰박.
메마른 땅 위로 엎어졌으나 소녀의 손끝에는 어째서인지 물이 느껴진다.
‘소녀’는 감았던 눈을 뜨고 바라본다.
거무죽죽한 아스팔트 위로, 있을 리가 없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그냥 강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의 것이 아니었다.
바다.
넓디넓은 우주에서 흘러내리는 ‘은하수’처럼 신비롭게 반짝이는 바다가 소녀의 눈앞에는 펼쳐져 있다.
입술은 진작 바싹 말랐고, 이미 며칠이나 굶주린 허기짐은 소녀를 움직이게 했다.
그렇게 소녀는 참으로 긴 시간 만에 마주한 ‘투명한 물’에 입을 가져갔고 동시에 눈물을 터트렸다.
‘엄마... 아빠......’
그러나, 소녀는 알지 못했다.
그 대양이자 바다, 물이자 우주와도 같았던 그 ‘신비로운 에너지’가 자신에게 어떤 ‘운명’으로 이끌어갈지를...
보고 싶어요...
이젠 말 잘 들을게요. 제발 돌아와요.
나 외로워요.
여긴 너무 춥고, 슬퍼요...
그건 긴 후회임과 동시에 간절하게 품어온 소녀의 소망.
이미 종말을 맞이한 세계에서 살아남은 이가 꾸던 ‘꿈’.
가족과 함께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잡담을 나누고, 친구들과 만나 실없이 웃고 뛰놀고 또한 학교에 가는... ‘꿈’.
허나, 방사능보다도 더 인류에게 치명적인 성분, ‘마나’에 전신이 피폭되어 있던 소녀의 육신은 이미 망가진 상태였고.
죽어가는 소녀는 꿈을 꾸었다.
눈앞의 보이는 바다를 향해, 그리고 은하수를 향해서 자신의 아득한 갈망을 이루어달라 빌고 또 빌었다.
이윽고 힘겹게 뜨고 있던 소녀의 눈이 아주 천천히 감기자...
“...세계는 최초의 회귀를 이룩했다네.”
‘기억하는 자’는 그렇게 말했다.
***
한여름에 내리는 눈.
그리고 흰 눈밭에 파묻힌 소녀는 죽었고 그 비참한 비극의 말로에서 ‘기적’은 이루어졌다.
세계가 되감긴 것이다.
‘기억하는 자’가 언급했던 최초의 각성... 그리고 ‘시간을 되감는 스킬’에 의하여.
그 ‘키’는 다름 아닌 소녀의 죽음.
이윽고, 눈을 뜬 소녀는 멍한 눈으로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을 응시했다.
움직임은 없다.
그저 응시할 뿐.
나는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소녀는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라는 걸.
기억이 선명할 것이다.
당장, 아주 조금 전 자신의 생이 끝나가는 것을 ‘실감’했음에도 자신의 육신이 멀쩡하니 그 괴리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겪어 보았기에 잘 알고 있다.
허나, 나는 10년이 넘도록 전장에서 구르던 대항군이었고 저 소녀는 그저 ‘살아남았을’ 뿐인 아이에 불과하다.
충격의 그 질과 양이 달랐을 것이다.
“노을아~”
다만, 얼어붙었던 소녀의 시간을 녹여주는 목소리는 곧 들려왔다.
동시에 소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고, 잠시 멈칫하는 사이 문이 열리며 ‘어머니’로 보이는 존재가 방으로 들어왔다.
“노을아!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어... 어엄....... 엄마. 엄마! 엄마아아아!”
소녀는 곧 어머니의 품으로 뛰어들며 울었다.
“얘가?! 왜 그래서 노을아. 무서운 꿈이라도 꿨니? 어머, 얘, 얘가? 울긴 왜 우니! 괜찮니? 어디 아픈 거야?”
그토록 간원하던 재회.
이에 소녀는 서럽게 어깨를 떨며 긴 울음을 터트렸고 그런 소녀의 입가에는 질문이, 걱정이 그리고 자신의 머릿속에 분명하게 아로새겨진 그 지옥 같은 ‘시간’이 맴돈다.
이에 몇 번이고 입술만 달싹거리던 소녀였지만, 그녀는 끝내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낼 뿐이었다.
그때. ‘기억하는 자’는 때가 되었다는 듯 줄곧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태초의 각성자. 모든 각성의 시조... 노을은 인류 최초이자 최후의 ‘마나 적응자’였다.”
“...최초의 각성자가 한국인이었다고?”
“안타깝게도 그러했지.”
“안타깝다고?”
“뭐... 곧 알게 될 거야.”
-휘릭!
손끝을 파랗게 물들인 ‘기억하는 자’가 다시 수평의 선을 긋자, 세계는 또다시 ‘몇 배속’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감동적인 재회의 장면은 이내 안개처럼 흐려지고, 눈앞의 풍경은 다시금 미국의 맨해튼으로 격변했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소녀.
빛의 반사각에 따라 갈색으로도 진한 금발로도 보이는 머리칼의 소유자였던 그 소녀는 ‘전능’했다.
-쩌억!
하늘은 또다시 갈라지고 ‘용’들은 쏟아져 나온다.
다만 직전의 회차와 달라진 것이 있었으니.
그건, 육신 전체에 순도 높은 ‘마나’를 휘감고 있는 한 소녀의 존재였다.
“그 소녀는 ‘전지’하진 않았으나 ‘전능’했다. 갓 태어난 흡혈귀가 능수능란하게 혈마력을 운용하듯, 소녀는 ‘마나’라는 가장 원초적인 에너지를 아주 당연하다는 듯 다루었지.”
그리고 그 결과는...
-죽어
‘살아 숨 쉬는 마나’라는 별칭마저 가진 괴수의 정점. ‘용’마저 압도하고 있었다.
-다 죽어버리라고!
소녀의 손에서 피어오른 벼락은 하늘 전역을 불태웠으며,
소녀의 손에서 타오른 불꽃은 밤을 대낮처럼 밝혔으며,
소녀의 손에서 내리는 비는 그곳에 새로운 바다를 창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소녀는 저항했다.
인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제 가족을 안전히 지키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웠고 ‘전능’하게 승리했다.
“허나...... 한 인간이 어찌 이 세계 전체를 지키겠는가.”
생존한 인류는 소녀를 추종했고, 소녀는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신앙이 되었다.
다만, 그럼에도 대다수의 인류는 학살에서 벗어나질 못했고 ‘오만한 존재’들은 전생과 같이 행동했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들이 휘두르는 ‘신성력’의 원천인 인류를... 몬스터와 함께 무차별적으로 불태운 것이다.
이에 소녀는 천사들과도 싸웠다.
도움을 주지 않는 빛은 생존한 인류에게 있어 재앙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결과, 세계는 반복되었다.”
<2>
첫 번째 회귀에서부터 이미 용족을 멸족시키고 언데드를 절멸시킨... 소녀는 충분히 위대했으나, ‘무한히’ 쏟아져 나오는 재앙들을 이겨낼 순 없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싸웠다.
범지구적 마나가 소녀를 따랐고, 태풍과 산사태, 눈보라와 해일처럼 말 그대로의 천지지변이 그녀의 손끝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정도였으니까.
‘전투’는 언제나 승리였다.
다만, 몬스터의 피와 사체가 즐비할수록 ‘마나’의 농도가 점점 더 짙어져만 가는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최초이자 최후의 ‘마나 적응자’인 소녀뿐이었다.
소녀는 늘 승리했으나, 승리를 거듭할수록 인류는 숨을 쉴 수 없어 질식사했다.
물론... 소녀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존재. 소녀의 부모님들마저도.
회차를 의미하는 듯, 푸른 광택을 뿜어내던 글씨가 계속해서 변했다.
2... 3... 6... 12... 17... 38... 65...
변하고, 변하길 반복하던 숫자가 끝내 멈춰선 곳은 무려...
<125>
“백스물네 번의 세상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던 소녀는 정지했다... 애당초 말이 되질 않는 거였어. 그저 ‘전능’하다는 이유로 그 정신은 평범한 14세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소녀에게 ‘세계’라는 짐은 너무도 무거웠던 게지.”
정지했다... 그런 ‘기억하는 자’의 말을 증명하듯.
조금 전, 그래 단 10초 전까지만 해도 수백으로 불어난 혈족들과 태고의 흡혈귀를 찢어발기던 그 소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회귀의 직후, 태엽이 다 풀린 오르골처럼 굳어버린 것이다.
“노을아~”
어김없이 이젠 회귀를 상징하게 된 듯한 어머니의 목소리는 들려왔으나, 두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있던 소녀는 움직이지 못했다.
“노을아? 노을아! 무, 무슨! 여보! 노을이가 이상해요!”
거의 절규에 가까운 어머니의 외침과 함께 가속화된 세계는 다시금 ‘1회차’와 같이 멸망했다.
소녀가 없던 세계는 무력했고, 일말의 변수도 없이 종말한다.
종말하고 또 종말하며...
126... 139... 167... 199... 계속해서 치솟아 오르던 ‘회차’를 의미하는 숫자.
이윽고, ‘변수’에 대당하는 존재가 나타난 건...!
“찾았다.”
이미 세계가 <332> 회차에 도달해있던 시점이었다.
“이 반복되는 세계의 중심.”
제멋대로 남의 집 가정집에 침입한 그 흑발의 소년은 아주 상쾌한 미소로 무생물과 다름없이 멈춰있던 소녀를 일깨웠다.
***
“저 소년은...?”
정말 느닷없이 나타난 새로운 존재.
이에 나는 참지 못하고 ‘기억하는 자’에게 질문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던 ‘332’가지의 세계 중... 그 어떤 세계에서도 ‘저 소년’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눈앞의 형상에 비추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소녀’가 살던 지역, 국가, 시간의 개념을 벗어나서도 저런 소년은 존재한 적 자체가 없었다.
그러자 ‘기억하는 자’는 금안을 개안한 후 처음으로 놀란 눈을 뜨더니 말하였다.
“눈썰미가 대단하군... 그래. 그대의 예상과 같이 저 소년은 보통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변화의 시발점은 다름 아닌...”
“300번째부터였겠지. 그때부터 ‘재앙’들도 역시 묘한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었으니.”
그저 파괴, 그리고 천사들과의 끝없는 전쟁을 반복하며 재앙들은 하나, 둘 묘한 기시감이라도 느끼는 것인지. 이런 일이 이미 일어났었다는 말이나 너는 느끼지 못했느냐는 등의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기억하는 자’는 놀란 눈을 부릅뜨고 있던 얼굴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역시 ‘꿈’의 선택을 받은 자답군. 흠. 그래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세계가 무한히 반복되던 와중, 재앙과 어떤 존재 역시 이 세계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버린 게지.”
“어떤 존재...?”
“무얼 묻는가. 지금 그대의 눈앞에 있지 않은가.”
그렇게 ‘기억하는 자’가 응시하는 건, 다름 아닌 한 소년. 이제껏 반복되던 세계에서는 존재한 적이 없던 바로 저 소년이었다.
“‘그’는 이 세계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눈치챈 존재였다. 이 332회차에선 재앙들도 어렴풋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으나 저 소년은 그 궤부터가 달랐다.”
무생물 혹은 나무처럼 생각을 멈추고 감각을 차단해 ‘정지’해버렸던 소녀.
용과 흡혈귀, 좀비와 악마를 상대로 싸울 수 있음에 용기를 얻은 것도 잠시...
소녀는 좌절했고, 또한 인류를 돕지 않는 천사들에게 분노했으며 때로는 눈앞의 현실을 부정했고 끝내 체념하며 무생물와 다름이 없는 존재가 되었었다.
그 희노애락과 끝도 없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소녀는 끝끝내 ‘포기’했지만, 그런 소녀를 깨우는 존재는 따로 있었다.
“안녕?”
마치 잠자는 숨 속의 공주를 깨우는 왕자처럼 당돌하고 서슴없이, 소년은 소녀를 찾아 일으케 세웠다.
“‘그’는 회귀의 중심인 소녀를 찾아냈고 ‘전지’하지는 못하나 ‘전능’했던 어리고 여린 소녀에게 철저하게 감춰져 있던 세계의 비밀들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소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신비’했다.
소년은 천사가 어째서 하늘을 가르며 나타난 괴생물체들과 싸우는 것인지 어째서 인류를 지키지 않는지를 논했다.
인류의 기억에서 매번 지워졌으나, 그러한 ‘침략’을 수도 없이 막아왔던 것이 다름 아닌 자신들이라고... 소년은 말하고 있던 것이다.
소녀는 소년을 통해 다시금 세상을 굽어살피기 시작했으나, 동시에 두려웠다.
소년의 말투, 행동거지 하나, 하나가 소녀가 너무나도 저주하고 분노했던 그 존재들. ‘천사’들과 닮아있었기에 말이다.
“그런데 넌... 누구야?”
끝내 소년과 함께하던 세계의 말미가 되어서야 소녀는 질문했다.
두려워하면서도 올곧게, 떨리는 목소리였음에도 강한 눈빛을 품으면서 말이다.
이윽고 소년은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어째서 그 당연한 질문을 하지 않는가, 자신도 궁금했다며 중얼거리고는 말했다.
“나는 그대들의 섬김을 받는 자. 혼을 인도하는 자.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인류를 사랑하는 자이자. 그래. 그대들에게 일컬어지길...... 십자가에 못 박힌 자다.”
큰 소녀는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 그 말인즉, 자신이 그토록 저주하던 그 ‘천사’들의 위에 군림하는 자라는 소리가 아닌가...!
허나, 당혹감에 휩싸인 소녀를 아랑곳 않고 소년의 표정은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
이윽고 당황하며 동시에 얼굴을 붉히며 동시에 분노하면서도 배신감 따위를 느끼는 표정을 짓던 소녀에게, 소년은 말한다.
“이 화신의 육신도, 이제 한계인가. 그대. 나의 아버지와 같이 ‘전능’하나, ‘전지’하지는 못한 미숙한 그대여. 다음 세계에서 그대는 꼭 나를 찾으라. 그대를 통해 나는 확신을 얻었으니, 천상의 군대가 그대와 함께하리라.”
직후, 332번째 세계는 지반도, 하늘도, 깊디깊은 심해마저도 붕괴하며 종말을 맞이했다.
다시금 되감긴 세계와 전과 달리 총명하게 눈을 뜨는 소녀.
이윽고 ‘기억하는 자’는 말했다.
“그렇게, ‘종교의 시대’가 시작되는 333회차가 시작되었지.”
“종교의 시대...”
“그래. 종교의 시대. 그 소년... 아니,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소녀와 함께하던 생에 기어코 ‘각성’의 비밀을 알아내고야 말았으니. 드디어 ‘각성’은 전능한 소녀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네.”
소년의 유언대로, 소녀는 가장 먼저 세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종교, 기독교를 찾았다.
그리고 마주하게 된 것은 지금껏 한편에 선 적이 없던 ‘천상의 군대’와 신실한 믿음으로 소녀와 같이 각성한 신성한 전사, ‘세례받은 자’들이었다.
‘세례받은 자’들과 ‘천상의 군대’. 그리고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막힌 자라 칭했던 소년은 소녀와 함께했다.
“그렇게 함께 싸울 이를 얻은 소녀는, 최초의 게이트를 막아내었고 아무리 길어도 3년을 넘기지 못했던 ‘세계’를 무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켜내는 데 성공하지.”
‘기억하는 자’의 말대로 333회차는 무척 길었다.
그렇게 펼쳐진 세계에서 신성 바티칸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생존자들은 하나 되어 싸웠고, 최초로 온전한 형태의 ‘사회’를 복원해내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높디높은 고딕 양식의 첨탑들이 지평선의 끝까지 늘어선 ‘신성 국가’.
이윽고 짙은 ‘신성력’이 무한히 넘실거리던 그 세계는 앞으로도 영원히 평온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아름다운 세계를 눈앞에 두고서도 무거운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가... 다시 말해 헌터 사회에서 태어난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저 ‘신성 국가’가 끝내 멸망했음을 증명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 그대의 추측대로 저 영원할 것만 같았던 세계도 끝내 파멸을 맞이하고 말았지.”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허나, 나로서는 모를 수가 없는 물체는 돌연 드높이 솟아올랐고 나는 그 현상을 현대의 인류가 무어라 부르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테라포밍...!”
그건 나무였다.
흡혈종들이 결계를 만들어 그 속에서 키우던 무수히 많은 나무들.
시스템 메시지는 이를 ‘피를 먹는 포도나무’라 칭했고, 그 포도나무는 <파괴불가 오브젝트>라는 속성을 가진 대상이었다.
다만,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이 세계에 경고 메시지와 같은 형편 좋은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고...
10년이란 시간 동안 지하 깊숙한 곳에서부터 키워낸 ‘피를 먹는 포도나무’들은 끝내 ‘신성 국가’의 하늘을 전부 가리고도 남을 정도로 많이, 거대하게 솟아올랐다.
“정답이네.”
10년이라는 시간은 인류에게 있어서도 희망이었던 동시에, 재앙들에게도 이 세계를 더욱 새로운 방법으로 침략할 개시할 여유를 마련해주기도 했던 것이었다.
‘포도나무’에 의해, 혹은 거대한 ‘묘비’가 솟아오른 세계는 그렇게 멸망했다.
가장 상징적인 333회차도 그리고 334, 339를 넘어 350회차까지 반복되는 세계는 모조리 멸망했고...
가장 먼저 ‘회귀’를 알아채고 소녀를 찾아낸 자.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이내 과감한 결단을 내리고야 말았다.
기독교를 믿는 세계 각지의 신자들을 모두 규합해도, 천상의 군대를 총동원해도 다시금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끝끝내 침략을 성공시키는 재앙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도 아니... 인류 전체에게 평등한 각성의 기회를 주어야 해.”
오직 바티칸의 신을 위한 세계에 종언을 고한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 반신이자 주신의 아들인 그가 스스로...!
이윽고 그의 ‘전지’와 소녀의 ‘전능’은 이 세계로 하여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렇게 두 ‘반신’의 총력이 합쳐져 만들어낸 결과물이 바로, 지구상의 전 인류가 ‘마나’라는 이질적 에너지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 ‘시스템’이었다.”
비틀리고 뒤엉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