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57화.
“허무의 열쇠... 아카식 레코드 1번.”
비틀린 입에서 재앙, ‘전율하는 사성(死星)’은 재앙으로 거듭난 뒤 처음으로 인간의 육성을 토해냈다.
‘허무’ 나는 또다시 재앙들의 입으로 몇 번이고 거론되던 단어의 등장에 눈을 부릅뜨지만, 돌연 이 현장에 나타난 수수께끼의 남자. 이준학 준장은 전혀 놀라는 반응 없이 말을 받았다.
“너도 알고 있지 않나... 지금의 너는 불안정하다. 대성녀, 교황 그리고 사신마저도 이용하여 ‘생과 사’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에너지를 융합시키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이준학 준장은 어째서인지 ‘금빛’으로 빛나는 눈을 부릅뜨고서 불사왕의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네 ‘육신’은 아직 그 힘을 멋대로 휘두를 수 있는 강도를 가지지 못했다. 아마 네가 ‘완성’되려면 적어도 또 하나의 재앙의 ‘신격’을 먹어치워야 할 게다.”
그런 말을 하는 이준학 준장은, 어째서인지 내가 아는 준장과는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빛나는 ‘금안(金眼)’.
그리고 두 번의 생을 살아온 나조차 알지 못했던 많은 ‘정보’들.
그는 분명 이준학이었지만, 무언가 달랐다.
이윽고 그 금안이 일대 전체를 훑고 내게로 향하면, 그는 말하는 것이었다.
“네가 이곳의 헌터 전부를 몰살시킬 수 있다는 걸 안다. 네가 마음만 먹으면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신’적 존재들조차 ‘말소’시킬 수 있음을 안다. 허나, 기억해라.”
꿀꺽.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준학의 덧없는 확신에 공포를 눈에 담고 있던 수많은 헌터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하지만 준장은 그런 반응들 따위는 모두 관심이 없다는 듯, 퍽 무심하게 말했다.
“여기 이 뇌제가, 뇌제를 비롯한 영웅들과 필사의 항쟁을 이어갈 용사들은 전투를 개시한 네놈을 결코,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걸.”
거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깨달았다.
이준학 준장이 방금 언급했던 불사왕의 아니, 이젠 재앙 ‘전율하는 사성’의 육신이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말.
그리고 나를 비롯한 이 프랑스 땅을 밟고 서 있는 모두가 쉽게 그를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말.
이윽고, 조금 전...
새로운 재앙, ‘전율하는 사성’이 탄생하기도 전에 전세계 하늘을 가득 채운 3개의 메시지.
즉, 지금 이준학 준장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에게 더 중요한 건, 우리가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현현 중인 재앙들이지 않나?
협박 아닌 협박이었다.
그와 당장 맞부딪힌다면 필시 이 땅의 모든 헌터들이 끔찍하게 학살당할 것이라는 걸 스스로 확신해놓고서도 침착하게 다시 적의 처지에서 생각해 경중을 생각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한 인간이, 이젠 명실공히 한 재앙으로 거듭난 존재에게 꺼내든 당돌하기 그지없는 협박.
단, 어디까지나 ‘불사왕’에겐 가벼운가 무거운가에 관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기에... 적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에는 딱 한 수가 모자른 것이다.
허나, 거기까지 생각한 시점에 이미 눈앞에서 ‘불사왕’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예상할 수 있었다.
‘이 화술은...’
그는 언제나 ‘싸우지 않는 승리’를 거머쥐는 자였기에, 곧 이준학 준장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예상할 수 있었다.
정확히 딱 한 수 모자란 그 틈을, 이준학 준장은 이미 무엇으로 채울지 언급해둔 상태였지 않은가.
“만일 네가 이 자리에서 그냥 물러난다면... 이 인원들의 안전이 확보되는 그 즉시, 아카식 레코드 1번의 행방을 알려주겠다.”
교묘하게, 이미 현장의 헌터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자 했던 ‘전율하는 사성’에게 다른 길과 그에 따른 보상을 제시했다.
마치 그냥 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만으로도 ‘불사왕’에게는 뜻하지 않은 이익이 발생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 제안의 진짜 목적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던 현장의 세계 연합군을 살리려는 것이리라.
침묵.
머릿속에 깊게 울리는 격통마저 잊게 만들어버릴 만큼의 끔찍한 침묵은 다시 한번 이 반파된 마탑 꼭대기에 내리었다.
그렇게, 나의 청안과 이준학 준장의 금안 그리고 불사왕의 잿빛 눈동자가 서로 교차하면...
-우...우웅!
아직까지도 불사왕의 손끝에 맺혀 있던 그 거대한 ‘회색 응어리’는 사그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맨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숱한 영웅들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오려던 그 찰나...!
“재미있군.”
“큽?!”
멀찍이 떨어져 있던 불사왕은 어느새 내 후방에서 돌연 등장했던 이준학 준장의 옆에 서 있었다.
더욱이 그 손에 움켜쥔 것은 다름 아닌 이준학 준장의 핏발선 목이었다.
““준장님!””
“이런...!”
스스로 소총을 내던진 ‘암행’의 단원들 사이로 혼돈이 퍼져나가고, 뒤늦게 내가 혈검, 본디오 빌라도의 손잡이를 움켜쥔다.
“멈춰!”
허나, 그 순간에도 이준학 준장은 큰 목소리로 윽박을 내지르며 당혹감에 휩싸인 이들을 일순간에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도리어 자신의 목을 틀어쥐고 그대로 들어올린 재앙, 전율하는 사성에게 느긋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나를 이곳에서 죽인다면... 아카식 레코드 1번은 결코 손에 쥘 수 없을 거다.”
“혀가 길군.”
“흐! 네가 나의 말을 모두 헛소리라 판단했다면 어쩔 수 없지. 허나, 곰곰이 곱씹어보는 편이 좋을 거다...! 어째서 네가 서른 번이 넘는 회귀를 거치면서도 끝내 아카식 레코드 1번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인지를...”
「흠?!」
‘서른 번이 넘는 회귀’라는 말에 나의 눈동자가 커지는 한편, 준장의 목을 쥐고 있던 불사왕의 얼굴에는 격한 분노 따위가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네놈이었단 말인가...!?」
그건 피보다 붉고 밤하늘보다도 어둑한, 차가운 분노.
경악과 격노와 격앙된 슬픔이 한 얼굴에 담긴 듯한 표정으로 불사왕은 이준학 준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이준학 준장의 입에서는 내 예상을 아득히 상회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제야 깨달았나. 과욕으로 자신이 구원한 세계를 스스로 깨부순... 덜떨어진 ‘악’이여.”
당장이라도 이준학 준장을 분쇄해버릴 듯 그의 목을 움켜쥔 불사왕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허나, 마른 침을 몇 번이고 삼켜댄 후에도 놈은 준장의 명을 끊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휙! 돌아선 불사왕의 눈이 나를 향한다.
마치 나에게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이 그렇게 다시 한참의 시간을 굳어 있던 후에야 격노로 굳어졌던 표정을 지운 불사왕은 말했다.
「마지막이다. 네놈에게 휘둘려주는 것은. 너는 네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인간의 육성이 아닌 재앙의 음성으로 불사왕은 이준학 준장의 목을 놓으며 그리 말했고,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석상처럼 굳어 있던 ‘흑왕’과 ‘차원의 악마’ 안드레말리우스가 서 있던 곳에 나타났다.
「간다.」
그렇게, 숱한 수수께끼를 몰고 나타난 이준학 준장의 활약으로 새로운 재앙으로 다시 태어난 불사왕은 물러났고, 나의 기억 또한 그곳에서 끊어졌다.
***
사흘 동안 잠을 자지 않았고, 일본에서 ‘헤븐즈 게이트’를 열고 유럽에 도달하기 전부터 한 끼의 식사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상태로 70시간이 넘도록 검을 휘둘렀고 숱한 벼락 또한 내리쳤다.
마나가 고갈되고 다시 나의 심장에 자리한 드래곤 하트가 거의 억척스럽게 마력을 충전시킨 횟수만 스무 번이 넘는다.
그 때문에 몇 번이고 ‘오버 쿨럭’ 시켜 강제로 성능을 끌어올린 조립식 컴퓨터와 같이, 나의 몸은 이미 한참 전부터 정상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또 ‘틈’을 파고들어 검에 마력과 신력 혈공을 휘감았고 반의반 호흡으로 세 번의 검을 휘둘렀으니 몸이 이 지경이 되는 건 당연한 결과라는 말도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마주한 남자.
신의(神醫) 곽재신은 그렇게 내 몸 상태에 관한 소견을 들려주었고, 그 후 검성과 검희 이서영의 방문을 통해 앞선 그 말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입을 통해 나는 깨어난 지 정확히 한 시간 21분째, 나를 대신해 ‘숙청왕’의 투기를 정통으로 맞은 ‘검제’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내 생의 그 어떤 순간보다도... 네놈이 마련해준 지난 보름이 가장 행복했다. 이 망할 꼬맹아.
그가 땅에 엎어지던 순간에 내뱉었던 그 한마디가 그의 유언이 되었다......
착잡한 기분에 먹을 것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허나, 그런 나의 상태를 듣고, ‘아주 중요한 일을’ 도맡아주느라 유럽으로 함께 오지 않았던 ‘수신의 성녀’. 남궁연은 금세 나타났다.
끝까지 ‘헤븐즈 게이트’를 유지하느라 거의 녹초가 되어버린 두 번째 성녀, 앤젤라 엘런과 함께 말이다.
두 사람은 그 누구보다 나의 상태를 잘 이해해주었는지. 내게 맛나게 차려진 밥을 먹여주며 퍽 일상적인 이야기만을 해주었다.
‘선택적 함묵증’에서 벗어나며 흑색 가발로 신분을 숨기고 서울시 한복판을 돌아다니던 성녀 앤젤라.
앤젤라는 흥미 차원에서 학교에도 가보았고 길거리 음식 또한 사 먹어보기도 하며 큰 사건의 사이, 사이에 ‘일상’이라는 것을 향유했다고 한다.
각성 후 처음으로 말이다.
또한, 여러 가지 복합적 이유로 ‘아팠던’ 그녀를 주변 상인들은 진심으로 걱정해주었고 앤젤라는 나날이 상태가 호전되며 인근의 예쁨을 독차지하는 아이로 거듭났다.
남궁연은 몇 안 되는 휴식의 시간, 짬짬이 주변 지인들에게서 악기를 배웠다고 한다.
그녀가 택한 악기는 다름 아닌 바이올린이었고 내가 별말 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직접 연주를 들려주겠다며 혼자서 사용하기에는 지독하게 넓었던 병실을 음악으로 가득 채워주었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을 처음으로 머릿속에서 지워둘 수 있던 한나절은 흘렀고, 밤은 찾아왔다.
-툭!
신의 곽재신은 만약을 위해서라도 최소한 이틀이라도 더 안정을 취할 것을 권했다.
다만, 그 말을 직접 내뱉으면서도 한없이 착잡했던 그의 표정을 보면, 역시 그도 알고 있는 듯했다...
나에게 허락된 휴식의 시간 따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돌연, 세계 각국의 하늘을 가득 채우며 나타난 세 재앙의 잉태 메시지.
<*제1구역 ‘미국’의 헌터들은 재앙의 탄생을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제3구역 ‘캐나다’의 헌터들은 재앙의 탄생을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제9구역 ‘사우디아라비아’의 헌터들은 재앙의 탄생을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재앙의 현현까지 남은 시간: 91시간 44분입니다.>>>
충분한 제물이 없던 상태에서 현현을 시도한 반동인지, 아니면 과거와 달리 그저 현현의 시기가 너무 앞당겨져서 그런 것인지.
잉태된 재앙들의 ‘현현 예정시간’은 이전 재앙들과 달리 상당히 길었다.
단, 문제는 그 세 재앙이 정확히 동일한 순간. 이 세계에 당도하리란 것이었으며...
이러한 ‘세계의 위기’에 이젠 공식적인 세계 랭킹 1위의 헌터로서 자리매김하게 된 ‘뇌제’. 즉, 나라는 존재는 한가롭게 휴식이나 취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세계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던 위기에 직면해있다.
-투둑!
그렇기에, 나에게 ‘충분한 안정’을 취할 여유 따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아저씨 아저씨!
-드, 들어볼래 건우야? 나... 여, 연습 많이 했어!
귀엽게 소매를 잡아끌며 애써 어색한 애교와 고집을 부리던 오전의 앤젤라도, 그래도 퍽 완벽주의자이면서 어설프기 그지없던 바이올린을 굳이 연주해주던 남궁연도...
아마 그런 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한나절의 휴식이라도 취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했다는 걸 알고 있다.
‘참...’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전생부터 홍진웅과 김장훈을 포함한 선임들을 만났던 것부터, 현생에서도 다시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복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좋은 사람들을 주위에 많이 두면 둘수록 나의 어깨는 무거워져 갔다.
동시에 들이닥칠 세 재앙, 거기다 ‘전율하는 사성’이라는 새로운 재앙마저 규합된 현재를 냉정하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고려해보면...
‘최소... 8할은 죽을 것이다.’
그런 결론은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그 모든 각성자들.
만일 우리 인류가 네 개체나 되는 재앙에게 승리를 거둔다 할지라도 각성자의 8할 그리고 아마 그 여파인한 비각성자의 5할도 함께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최악의 경우는...’
우린 애당초 ‘살아남는’ 미래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윽고, 그런 최악과 최흉의 미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그를 찾아가야만 했다.
-치익! 툭.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야심한 시각.
나는 몸 곳곳에 단자로 연결되어 있던 병원 기기에 전류를 흘려 넣어 정지시켰고 손목에 꽂혀 있던 링거마저 뽑아 던지고는 몸을 일으켰다.
얇게 열린 창틈으로 새벽의 한기가 밀려들었다.
-드르륵!
그렇게, 쪽빛으로 가득 찬 병실을 잠시 응시하다 나는 문을 열었고, 당연하다는 듯 나의 병실 앞에 서 있던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습니다...... 준장님.”
나는 의도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는 이준학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고,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고개만 끄덕이다 답했다.
“그래. 나도 예감하고 있었네.”
전생과 현생, 두 번의 생을 함께 했던 자.
대항군의 총수이자 암행의 단장... 그리고 한때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현재로서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그’인지조차 알 수게 없게 된 인물.
이준학.
그런 수수께끼의 그를 향해 나는 물었다.
“준장님...”
숱한 의문과 이젠 비대하게 부풀어 올라 이젠 나 자신의 통제마저 벗어난, 오래도록 은닉되고 숨겨지던 그 비밀들을 드디어 풀어헤칠 시간이 된 것이다.
“당신은...... 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흠. 늘 적인지 아군인지만을 논하던 자네의 입에서 존재에 관한 질문이 나오다니...”
그러자 그는 퍽 감회가 새롭다는 듯이 콧잔등을 긁적이며 그리 말했고, 천천히 감았던 그의 눈이 다시금 뜨여지는 순간...!
그의 눈동자에는 더 없이 반짝이는 황금의 빛이 깃들어 있었다.
“자네라는 인류의 창을 발굴해낸 당사자로서 퍽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군.”
이윽고, 그 금안(金眼)으로 나를 응시하던 이준학 준장은 손가락 끝에 푸르른 마력을 응집시켰고 올곧게 위로 들어 올리곤 무심하게 수직의 선을 그었다.
그동안은 그저 이준학 준장의 ‘스킬’이라 여겨왔던 이 신비로운 균열.
허나, 이토록 가까이서 이제와서 집중해 바라보니 그 ‘마나의 움직임’이 퍽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통의 헌터들은 자신의 마력을 불태워 스킬을 사용하는 데 반해... 이준학 준장은 현재, 허공의... 자연 그대로의 마나를 불태워 이 ‘균열’을 만들어 낸 것이다.
즉, 이건 이준학 준장의 ‘스킬’이 아니었다.
도리어 파도가 치거나 비가 내리는 것처럼 자연적인 현상에 가깝다.
“건우... 자네에게 내가 뭘 하는 인간인지를 논하기에 앞서 꼭 소개해주고 싶은 인물이 있네.”
“인물... 말입니까?”
“그래. 자네도 익히 알고 있다시피 처음 자네가 김용운 대대장을 통해 내게 접촉했을 때까지 나는 전세계 첩보병들을 관리하던 일개 학자에 지나지 않았지.”
그건... 이미 나도 생각 중이던 의문이었다.
분명 이준학 준장은 접촉 당시, 그리고 두 번째 성녀 앤젤라 엘런의 구조 활동 당시에도 저 ‘금안’과 같은 이질적인 힘에 대해 아예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 그가 어째서 돌연, ‘전생’을 알고 나조차 모르는 수많은 정보를 모두 알고 있는 존재로 거듭났단 말인가...
그때, 이준학 준장은 나의 생각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분이 전생을 일깨워주심으로써 나는 모든 생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네.”
“기억을, 일깨워주었다...?”
누구인가.
대체 누가 타인의 전생을 떠올리게 만드는 ‘신비’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극에 달한 의문.
그리고 이준학 준장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자신의 좌우명과 같이, 대답보다 먼저 자신이 허공에 만들어낸 ‘작은 게이트’의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미지’.
새로운 재앙, 전율하는 사성과 마주했을 때와 같이 ‘미지’가 눈앞에 있다.
단, 이 게이트를 연 자가 다름 아닌 이준학 준장이었기에 나는 잠깐 숨을 고르는 것으로 고민을 마치고 과감히 그 안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었다.
-삑!
-삑ㅡ삑ㅡ!
이윽고 들려오는 소음은 조금 전까지 나의 전신을 휘감고 있던 병원기기의 심박수 측정기의 소음과 조금 닮았다.
그렇게 어딘가를 향해 빨려 들어가듯 향하게 된 행선지의 끝에서 나는 커다란 병원침대를 보게 되었고 그곳에 기대어 앉아 고요히 나를 응시하는 한 남자를 보게 되었다.
그는...
다름 아닌 지난 ‘번개 중대’의 창설을 발표할 당시 처음으로 만나 악수를 나누었고 또한 나에게 언젠가 더 위로 더 높은 곳에 오르리란 확신을 내비치던 자.
아흔이 넘는 나이임에도 사람을 꿰뚫어 보는 혜안과 사려 깊은 판단력으로 1세기 동안 군의 정점에 자리에 앉아있는 역사의 산증인.
“이렇게 ‘진짜 몸’으로 만나는 건 모든 생을 통틀어 처음이던가. 반갑네. 뇌제. 이건우. 아니, 대항군의 희망이자 인류의 창이었던 이건우 대령이라 불러야 함이 옳을까.”
그는 다름 아닌 ‘육군대장’ 조영수였다.
이어서 나는 육군대장 조영수가 앉아있던 병상 옆, 그를 정식으로 소개하는 이준학 준장의 발언에 더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소개하지. 이분이 바로 나를 ‘암행’으로 스카우트하시고 또한 최초로 대한민국 사회에 헌터 협회라는 기관을 창설하신... 최초의 ‘협회장’, 강 천. 동시에 대한민국의 ‘육군대장’이신, 조영수 대장님이시네.”
늘, 언제나 한발짝 뒤에서 활동하던 두 인물.
한국의 사회적 그리고 외교적 부분을 담당하던 두 그림자.
그 육군대장과 협회장이 동인인물이라고...?
Time Traveler(시간 여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