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43화.
신비로운 빛무리에 휘감긴 아카식 레코드의 유적.
거의 100일에 1번 간격으로 잠자리에 드는 이서영은 나의 무릎을 베고 누워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고, 웬일인지 그 ‘혈마’는 다가와 묻는 것이다.
-두렵지는 않더냐.
무엇에 대한 의문인지 되묻지는 않았다.
당시는 그와 ‘진조’라는 존재에 대해 이미 여러 차례의 문답을 주고받은 후였으니까.
나는 고개를 들어 그 적발 적안의 ‘혈마’를 응시했고, 혈마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다 문득 말했다.
-상대는 신격을 가진 존재다. 신격은 이 세계의 인과를 비틀고, 있을 수 없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일으키는 힘이지.
실제로 재앙, ‘태고의 흡혈귀’는 행했다.
무려 목숨을 아홉 개나 가지고 있다는 경이로운 힘을 소유하고 있던 것이다.
-또한, ‘신격’을 가진 존재는 인간이라면 필시 따를 수밖에 없는 시스템의 규칙을 무시할 수마저 있다.
실제로 ‘진조’는 자신의 현현 시간이 다 경과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알을 깨고 튀어나왔다.
-우리에겐 자연재해라 불리는 ‘게이트’를 만들어내는 존재들. 그게 바로 ‘재앙’인 게야.
‘게이트’를 만들어내는 배후.
이 세계에 ‘혼란’과 ‘각성’을 야기한 존재.
그것이 바로 ‘재앙’이라고, 혈마는 말하는 것이었다.
-혈공의 묘리로 허를 찌를 순 있어도 그것의 목숨을 완전히 앗아갈 수는 없을 게다. 그런데도, 도리어 놈이 묘리를 깨닫고 너의 팔다리를 쥐어뜯을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혈마’는 몇 번이고 경고했었다.
다른 상대도 아니고 ‘진조’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라면 필시, 그 순수한 ‘피의 주인’은 순식간에 혈공의 묘리를 깨닫고 역이용을 다시 역이용하려 들 것이라고 말이다.
-너는 정녕, 두렵지 아니 하단 말이더냐?
마치 자신의 두려움을 시인하라는 듯한 말투였다.
이 문답 자체가 하나의 시험이고 이를 통과하면 무언가 새로운 깨달음을 내려줄 것만 같은 그런 뉘앙스였던 것이다.
다만,
나의 대답은 변치 않았다.
먼 과거, 새로운 생을 시작하던 순간에도,
퍽 멀게 느껴지는 과거, 천외경의 마수를 토벌하던 순간에도,
이젠 꽤나 근접한 과거, 불사왕을 상대하던 순간에도,
-예. 두렵지 않습니다.
아주 조금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흔들리지 않는 올곧은 대답에, 도리어 ‘혈마’는 눈동자에 의문을 가득 품었고 물었다.
-어째서냐. 이 하나도 제자 같지 않은 제자 놈아. 어째서 넌 재앙 앞에 떨지 않을 수 있지? 네놈의 말대로라면 너는 필시 그 재앙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 않더냐.
죽음은 아니, 죽음보다 더 지독한 피가 그곳에 있음에도... 어찌하여 두려워하지 않는가.
스승은 그것을 물었고,
제자는 이에 답했다.
-저도, 두려웠습니다. 재앙이 두렵고, 언제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를 배반자가 두렵고, 그렇게 다리를 덜덜 떨면서도 두렵지 않은 척하며 나아가다 첫 번째 생을 마감했지요.
-그렇다면...!
-아니요. 그렇기에, 이젠 두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살아왔습니다. 숱한 운명을 바꾸었지요. 숱한 미래 또한 바꾸었습니다.
철저히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흑태자에겐 인류의 생존에 배팅해도 될 이유를,
고독과 인간에 대한 회의로 모습을 숨긴 검성에겐 새로운 가능성을,
오만한 지배자들에게는 그들의 ‘지식’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님을 직접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하나, 하나가 변했다.
불사왕을 마주했을 때와 크게 다르진 않다.
나는 알고 있기에, 미래를 체험하고 돌아온 회귀자이기에...
그저 담담히 밀어닥칠 헤일에 대항할 돌담을 쌓아 올렸고, 재해를 막아설 때마다 나의 옆에는 함께 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제가 걸어온 길을 믿습니다. 제가 남긴 족적을 따라 걸으며, 때로는 저보다도 먼저 이 세상을 떠나간 이들의 그 의지를 믿습니다.
나 자신을 믿는다는 오만이 아닌.
나 자신의 준비를 믿는다는 경솔함이 아닌,
내가 구해낸, 나와 함께한 이들을 믿는다고 말하자 혈마의 눈빛은 요동쳤다.
아마, 흑도의 무인들에게는 아니, 혈공의 계승자들에게서는 들을 수 없던 대답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그때였을 것이다.
혈마가, 내게 이 ‘여의’를 주고자 마음을 먹었던 순간이 말이다.
-피이이이이!
저 멀리 빗발치는 포성이 울린다.
-타당! 타다다다당
숱한 총성 또한 들린다.
“화력을 들이부어라! 대마력 포병대!”
언젠가, 내가 속해있던 7여단의 자랑, 대마력 포병대가 혼합 마법을 쏘아 올린다.
“방벽을 보강해! 과열되어도 상관없다! 녹아내려도 신경쓰지 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놈을 꺾는다!”
5군단, 부산의 방패는 빛을 발하고,
“너, 너희들까지... 하... 그래 가자.”
본디 이서영이 창단한 집단, ‘철혈검사대’는 이미 전역한 자들까지 모두 모여 그녀를 따랐다.
‘올리비아 스트라우스’는 거대한 규모의 마법을 재창했고,
집사 ‘스티븐’은 그녀의 곁을 지켰으며,
흑태자 칼레드는 천문학적인 금액의 장비들을,
그 장비들을 ‘비공정’에 가득 실은 용병대 ‘황해’는 나와 재앙의 바로 머리 위에서 타오르는 여명을 수직으로 들이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공격이 한 점으로 집중되는 곳.
“죽는다! 이러다가는 그대와 짐은 공멸할 거라는 말이다! 그대여어어!”
그곳에는 나와 재앙이 있었다.
“아니, 죽는 건 너뿐이다. 재앙!”
푸르게 겐 하늘이다.
맑은 햇볕은 내리고,
그 햇빛에 더 밝은 하늘색으로 비추어지는 비도 내린다.
허나, 동시다발적으로 쏘아 올려진 포격과 마법과 검기와 투척물과 주문은 마른하늘에 수 놓인 우주와도 같이 빛난다.
「권세와 폭력과의 싸움에서 보호하시옵고」
“내려줘. 더, 더 많이!”
두 성녀의 기도와 간원이 하늘에 닿으면...!
빛과 물의 방벽은 나를 감싸는 것이다.
-쿠우우웅!
-콰아아앙!
-콰지지직!
-쐐애애애애액
-퍼어엉!
이윽고 맞닿은 폭격이 다시금 새로운 폭격과 마주해 끝이 없는 폭발과 폭풍을 일으키면...!
“그대여어어어어어!”
그 공격에 노출되어 녹아내리는 것은 오직 재앙, ‘태고의 흡혈귀’ 뿐이었다.
-역이용당할 수도 있다.
‘혈마’는 아니, 스승은 걱정했다.
흐름을 읽는 혈공의 묘리를 ‘피의 주인’인 그 존재에게 행하면 결국, 재앙은 혈공을 터득할 것이며 그 끝에 나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그리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애당초부터 그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었다.
“역산해라. 어디 한번, 역산해보란 말이다!”
헤아릴 수도 없는 포격이 하늘에서 내린다.
오롯이 나뿐이었다면, 혹은 나를 비롯한 소수의 인간만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진조는 그 모든 것을 혈공의 묘리로 역산해 역이용하려 들었을 것이다.
허나, 불가능하다.
믿을 수 없는 수와 보고도 믿기 힘든 이들이 모두, 나의 부름에 따라 이곳에 모여주었으니까.
그 모든 ‘세계’를 역산하여 이용하는 건. 이 세계의 그 누구도 행할 수가 없는 일이란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내, 나는 허공에 내뻗은 손을 내뻗고 그것을 쥔다.
-텁.
검제가 홀로 맞써 싸우는 동안에도, 그 혈속성 오러를 역이용해 진조의 목숨을 앗아가던 순간, 순간에도 계속해서 신력을 담아내던 스승의 무구는 부름에 응한 것이다.
“여의...!”
-치직! 치이이익!
여의를 쥔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전격과 신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푸르게, 또 푸르게.
신력과 온전한 조화를 이루며 ‘거꾸로 솟아오르는 비’가 되는 나의 근원, 전격.
다만, 세상은 일순간에 붉게 그리고 그 붉음은 한 점에 모여들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렇게 나타나는 것은 일곱 번째 운명을 걷는, ‘태고의 흡혈귀’였고 그것은 부활과 동시에 세계 그 자체를 요동치게 하는 고함을 내질렀다.
동시에, 지금도 하늘에서 날아들던 그 끝도 없던 포격들은 마치 불꽃놀이처럼 허공에서 터져나갔지만...
“너는, 나의 증명이다!”
나는 그런 재앙을 향해, 주저 없이 날아들었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푸르름!
모든 부정과 부패를 녹여낼 푸른 신력의 ‘여의’는 자세를 갖추는 재앙의 머리를 노린다.
“그대여어어!”
네 쌍의 날개는 혈공을 발했다.
소용돌이치는 여덟 갈래의 오러 폭풍.
-콰지지지지직!
-후우우우웅!
내리꽂히는 여의를 받아내는 네 쌍의 날개.
나와 진조의 사이에는 형언할 수 없는 일렁임이 일어날 정도로 막대한 힘은 교차하니...!
“나는, 너를 뛰어넘어! 증명할 것이다! 세상은 바뀔 수 있다고. 수백, 수천의 미래를 엿보면서도 도달하지 못했던 ‘평화’가, 일흔 번이나 되감긴 이 세계에도 언젠가 도달할 수 있는 ‘평화’는 아주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여의’는 내가 읊는 신념에 반응하듯, 더 푸르고, 더 밝은 빛을 번뜩인다.
-쿵!
이윽고, 커진다.
-쿠웅!
마치 태고의 검, 하늘 거인들이 휘두르던 거검(巨劍) 티탄의 검과 같이 말이다.
-쿠우우우우우웅!
“크윽! 크으으으윽?!”
이젠 두 손으로 그리고 여덟 개의 날개로 하늘을 떠받들 듯 선 재앙.
-터억!
그런 재앙의 옆으로, ‘여의’를 손에서 놓은 나는 떨어졌고 의지를 품은 검을 쥐며 형(形)을 갖춘다.
눈에서는 피가 흐른다.
입과 귀에서도 피가 흐른다.
숱한 고통이 전신에 엄습했고, 믿을 수 없는 피로와 정신이 아찔해지는 스트레스가 요동쳤다.
그건, 내 것이 아닌 ‘빛’을 멋대로 응집시켰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것이 아닌 ‘비’를 멋대로 사용하려 했기 때문일까.
혹은, 이미 허비한 그 ‘힘’을 억지로 끌어올리기 때문이었을까...
“무엇이 되었건, 질책은 나중에 듣겠다.”
지금은 다만, 응시할 뿐.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강제로 신력을 주입한 극상성의 무구, ‘여의’마저 손톱을 박아넣고 쥐어뜯으며 균열을 일으키는 괴물, ‘진조’.
재앙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그건 정말이지 있을 수 없는 일을 태연하게 행하는 모습이었다.
<재앙, ‘태고의 흡혈귀’는 2천 년간 쌓아 올린 ‘신위’를 불태웁니다!>
<인과율을 무시하는 ‘결과’는 나타납니다.>
“캬아아아아악!”
돌연 나타나는 메시지와 함께, ‘혈속성’은 ‘신력’을 깨부수는 힘을 가지기 시작했고, 푸른 하늘에는 붉은 일렁거림이 침범하기 시작한다.
세계가, 다시금 재앙의 뜻을 따른다.
붕괴한 결계가 아닌 이 세계 그 자체가, 저항하는 ‘진조’의 의지대로 운행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허나,
“말했을 텐데, 진조.”
나는 그 모든 변이와 변화를 눈앞에 두고서도, 그저 억지로 끌어올린 그 ‘권능’을 틀어쥔 검에 담아낼 뿐이었다.
“너는 나의 증명일뿐이다. 내가 변했다는, 전생과는 다르다는, 내가 택한 선택과 내가 행한 행동의 결과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증명!”
이내, 억지로 끄집어낸 힘에 검은 울부짖는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익!
그것은 언젠가,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길고도 아득한 고래의 울음소리.
<알림>
ㅡㅡㅡㅡㅡㅡㅡㅡ
*수신의 사도, 이건우는 권능을 행사합니다.
*개방한 권능은 하늘을 집어삼킨 고래. ‘천경(天鯨)’의 힘입니다!
*흩뿌려진 신력은 오직 ‘사도’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하늘을 집어삼킨 바다의 신수, 천경(天鯨)의 힘이었다.
상승한다.
힘도, 물체도, 사람도, 마력도, 오러도. 무엇 하나의 구분 없이...
모든 것이 거꾸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너는, 나의 적이 아니다. 그냥 증명의 ‘과정’에 불과하지.”
“그럴 리가, 그럴 리가! 그대는 짐의 것이다! 다른 재앙에게 넘겨줄쏘냐! 짐은 그대를 이해할 것이다. 그대는 짐을 이해할 것이야! ‘영원’에 갇혀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이 ‘감옥’을! 그대와 짐은 함께 깨부술...!”
“잠꼬대는, 자면서 해라. 재앙!”
재앙은 무언가를 발악적으로 외쳤지만, 나는 일갈하며 그저 들어 올린다.
일 점에 모인 바다와 그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신수의 그림자를 함께 말이다!
한 점은 일순, 선에 되었고, 그 푸르른 선은 다시금 면이 되었다.
그렇게 응축되고 함축되어 있던 바다가 내질러지면 세상은 바다 위 하늘 그리고 그 너머의 수 놓인 바다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었다.
수검(水劍) 제7형.
천해(天海).
“아아아아아악!”
그 하늘의 바닷속에서 재앙은 녹아내렸고, 하늘에 범람하던 게이트들도, 그 속에서 쏟아져 내리던 ‘몬스터 카니발’ 역시... 한 줌의 먼지처럼 사라져갔다.
이윽고 보이는 것은, 너무도 평화와 맞닿아 보이는 푸르게 겐 하늘이었다.
“하... 하아아...”
벅찬 숨이 고통으로 가득찬 폐를 비집고 튀어나온다.
그 뜨거운 숨결을 내쉬고 다시 차가운 숨을 들이쉴 때마다 나는 더이상 어찌할 수 없는 피로에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젠 괜찮으리라.
세계는 다시금 일순, 붉게 물들었지만...!
재앙은 하늘에 수 놓인 바다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속에서 부활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싫다! 싫다아아아! 짐을 다시금 아무것도 없는 그 ‘허무’로 밀어 넣을 셈이냐! 짐은 싫다. 짐과 함께 이 ‘영원의 감옥’을 깨부수잔 말이다! 그대여어어어어어어!”
그것이 마지막, 아홉 번째 운명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기 때문일까.
재앙은,
거대하지만, 10대 초반에 불과한 소녀의 형상을 가진 그 재앙은 눈에서 눈물을 뚝, 뚝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허무... 영원의 감옥?’
마음에 걸리는 단어가 귓가를 스친다.
허나, 나는 하루에 한 번 휘두를 수 있는 ‘사도의 권능’을 두 번이나 억지로 휘둘렀기에 머리가 점점 멍해져만 갔고,
재앙은 정말 끈질기게, 끝도 없이 엉엉 울며 자신의 생존을 부르짖었지만, 나는 그저 멍하니 그것을 응시할 뿐이었다.
더 이상, 포격은 날아오지 않았다.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하늘에 수 놓인 바다와 날아간 재앙 이윽고 홀로 선 나를 경악하며 응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대... 여어어......”
-파아아아아아아!
이내, 진조는 신력에 타올라 재가 되어 사라지고, 하늘을 집어삼킨 바다는 그 목적을 다 하고 나서야 따스한 빗방울이 되어 이 세상에 내리었다.
<경악!>
ㅡㅡㅡㅡㅡㅡㅡㅡ
*수신의 사도, 이건우는 재앙, ‘태고의 흡혈귀’를 쓰러뜨렸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에 시스템은 경악합니다.
*존재할 수 없는 일에 시스템은 경악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끝... 난건가.”
“뇌제는... 그 재앙을 거의 혼자서?!”
“부, 분명 메시지에서는 재앙이라고 했을 텐데?”
“그럼 ‘재앙’을 이 세계의 존립을 위협하는 그 재앙을! 뇌제와 검제 둘이서 궁지에 몰아넣었단 말인가!”
몇 번이고 반복되었던 메시지가 하늘에 수 놓이고...
아직도 정녕 끝이 난 것인지를 믿지 못한 이들은 눈을 크게 뜨며 의아하면서도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끝났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재앙이 정말로 ‘부활’을 한다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헌터들은 처음 수 놓였던 메시지를 기억한 것이다.
‘일곱 번째 운명’을 걷는 중이라는 재앙.
그렇다면 그 앞에 ‘여섯 번의 죽음’이 있었음을 추론하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세계가.
세계 각국의 군대가 한 대 모여 형성해낸 연합의 파괴력을 담아내고서야 간신히 그 ‘목숨을 하나’ 빼앗을 수 있었던 재앙이다.
“그런 괴물을...”
“둘이서 여섯 번이나?!”
헌터들의 얼굴에 자리한 것은, 숱한 두려움이 아닌 경이로움.
그리고 그 대상은 자신의 육신을 새카맣게 물들인 검제와 얼핏 선체로 기절한 듯이 미동도 보이질 않는 뇌제였다.
“저 둘 헌터는 도대체......!”
여단장 최중철마저, 탄식을 내지르며 있을 수 없는 일을 이루어낸 두 헌터에게 찬사를 보낸다.
-짝!
-짝짝짝짝!
-휘이이이이!
박수는 박수를 부르고, 휘황찬란한 경이에 감탄하듯 감사와 놀라움의 찬사가 이어지기 시작하던 순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치익!
세계가 적광으로 물든다.
-치지직!
분명하게 떠올라 있던 ‘재앙 토벌’의 메시지가 찢어진다.
멈춰선 세계와 움직이는 무언가.
혈속성의 마력보다도 근원적인 힘이, ‘피’가 요동친다.
뇌제도,
두 성녀도,
7여단과 5군단도,
검성의 제자 이서영도,
‘중동 연합’도, ‘제이슨 스트라우스’의 랭커들도, 눈치채지 못하는 시간의 틈 속에서......
“가, 가가가가가가 가질 수, 어, 어어어없다면, 주, 주주주주주죽... 이겠......다아아아아아아!”
시뻘건 핏덩어리는 움직이고 있었다.
그곳은, 시간을 초월한 ‘틈’의 세계.
그곳에서 제정신을 유지한 채 사고를 유지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재앙’과 ‘신’처럼 신위를 가진 존재들 뿐이었던 것이다.
“주주주주주죽, 인다! 그그그그, 그그대가 내, 내내것이 되, 되되되되지 않는 다, 다다다면!”
이윽고 제대로 된 형태도 갖추지 못하고, 끝내 부활할 수도 없는 상태에 놓인 재앙, ‘태고의 흡혈귀’는 순수한 핏덩어리가 소용돌이치는 형태로 멈춰선 뇌제를 향해 날아들었고,
“볼품없는 몰골이로다.”
전신을 새카맣게 물들인 귀신.
‘검제’는 그 ‘틈’의 세계에서 우뚝 서 있었다.
“너, 너너너너, 너느으은! 어, 어어어떻, 게에에에!”
‘재앙’은 경악하며 움직이는 검제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새하얀 머리를 흩날리는 검제는 그저 비루하게 바닥에 꽂혀있던 자신의 천하패도(天下敗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말하지 않았더냐. 이제, 텅 빈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육신을 가졌다기보다는 사념 체에 불과한 불안전한 형태가 되었던 재앙을 향해 검제는 검을 휘두른다.
살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잡아 왔던 그 검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죽이기 위해 휘두르는 것이었다.
“복수뿐이라고!”
“그, 그그그그! 그러러럴 수...가아아아!”
“오오... 무엇을 두려워하는 게냐. 오오...! 무엇을 그리도 슬피우느냐! 오오!! 두려워 말라, 슬퍼하지 말라! 이 검귀(劍鬼)가 네놈과 함께 지옥으로 떨어질 테니! 지옥에서도 다시! 네놈을 벨 테니 말이다아아아아!”
-샥, 샤샤샥! 샤샤샤샤샥!
그것은 한 검에 담아 베는 백번의 검격.
‘검귀의 검’은 불완전한 ‘재앙’의 머리를 수직으로 갈랐고...!
세계는, 다시금 시간을 되찾았다.
***
아무도 알지 못하리라.
그들의 눈에는 그저 쓰러져 있던 검제의 위치가 돌연, 이동한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겠으리라.
허나, 검제 요시히사 켄신은 외롭지 않았다.
고독은 언제나 자신과 함께하지 않았던가.
필생의 결과. 끝내 자신의 손으로 귀신을 벤 검귀.
“와아아아아아!”
찬사의 목소리가, 경탄의 목소리가 흐릿해져 가는 검제의 귀를 스친다.
눈은 멀어 이미 보이질 않고, 귀는 거의 다 닫혀 아련할 뿐이었다.
보이진 않지만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이제 남은 시간은 3분 남짓이란 것을.
그러나, 이 필생에 여한은 없을지니.
그래도 검귀는 귀신을 베었기 때문이었다.
“하아아아아.”
고요가 넘실거리는 빛의 탄성과 동시에 검제를 감쌌다.
가까이 다가온 이들은 하얗게 타고 남은 잿가루와 다름이 없는 검제를 감쌌다.
어떤 감사가, 어떤 희생에 대한 눈물이 검제의 전신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다 문득... 듣게 된 것이다.
“...버지!”
그리운 목소리였다.
어렵사리 정신을 집중한다.
“아버지!”
있을 수 없는 목소리는, 분명히 들려오고 있었다.
“아버지이이이이!”
슬픔에 찬, 고통에 겨워하는 여리고 어린 목소리.
도저히 믿을 수 없음에 뜰 수 없는 눈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려 맑은 빛의 세상을 보자.
검제의 눈앞에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있던 한 소녀가, 있었다.
“레.....”
움직이지 않던 성대가 떨려온다.
도대체 어째서인지 이미 죽었다 생각했던 몸은 다시금, 생기를 되찾아가는 것이었다.
허나, 그런 자신의 육신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신비는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레이라!”
노란 머리카락과 작은 몸에 얼굴에는 올망졸망한 눈동자를 가진 소녀.
그 아이는 분명, 자신의 딸 레이라였다.
“아버, 아버지이이이!”
이젠 말을 더듬지도, 발음이 어눌하지도 않지만, 그 겉모습은 그대로인 작고 예쁜 자신의 딸.
“아버지이이이!”
“레이라! 레이라! 내 아이야!!”
하프엘프의 소녀. 레이라가 분명했다.
그 벅찬 감동에, 격앙된 감정에 눈물을 검제마저 눈물을 뚝, 뚝 흘리던 찰나.
그 옆에 다가온 한 그림자는 입을 여는 것이다.
“약속했지 않았습니까. 검제...”
그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었고, 찌들대로 찌든 피로에 눈빛은 흐려졌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피식, 웃으며 검제를 바라보는 남자.
그는 다름 아닌 뇌제, 이건우였다.
“따님을 구출해드리겠다고요.”
그제야, 검제는 이건우가 자신을 속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있을 수 없는 잉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