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41화.
일평생, 검에 기대어 살아왔다.
무언가를 베고 싶어서 쥔 검이 아니었다.
그에게 갈망이란 그저 살아남는 것이었으며, 그에게 소망이란 검을 손에서 놓고도 편하게 잠들 수 있는 세계. 오직 그뿐이었다.
악은 많았다.
법과 질서가 남아있던 세계에도 ‘악인’은 만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종말을 맞이한 세상은 어떻겠는가.
시대는 바야흐로, 괴물과 피와 악인들의 것이었다.
베지 않으면 베인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먼저 쏘지 않으면 육신을 파고든 납탄이 썩어 피부가 문드러지기 일쑤였으며.
‘쓸모’로 인간을 구분하고, 차별하고 욕보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세계는 도래했던 것이다.
-켄신, 이 형을 믿으라니까
그래서 베었다.
-네가 어떻게 좀 해봐! 넌 스킬이 있잖아. 싸울 수 있잖아!
웃는 가면을 쓴 악인들도, 타인을 희생시키며 살아남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던 자들도, 또한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몬스터보다 인간을 사냥하길 즐기던 자들도 모두...
-애새끼가 좋은 물건을 가지고 있구나!
모두 베었다.
요시히사 켄신은 눈앞에 나타는 모든 ‘악인’을 베며 살아남았다.
벤다는 건, 그에게 있어 산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살아남고, 베고, 또 살아남으면...
멸망의 시작으로부터 10년, 20년이란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곤 했다.
세상에 다시금 규율과 법칙이 도래한다.
그렇게 일어선 신정부는 ‘무법자들의 시대’에 종언을 고했고 다시금 질서를...
마음 편히 침소에 누워 개운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시기는, 얼핏 다가오는 듯했다.
허나,
-어이! 켄신! 우리만 눈 감으면 되잖아. 주변국들도 서서히 다시 ‘사회’를 구성하기 시작했다고. 돈을 벌 수 있어! 죽을 때까지 다 쓰지도 못할 돈을, 저 쓸모도 없는 비각성자들에게서 뜯을 수 있다고!
그럼에도, 그림자에 숨어든 악인은 많았다.
-검사 나으리. 솔직히 당신도 저 밥만 축내는 비각성자들이 역겹지 않아? 우리가 지켜주잖아. 그래서 저 밥벌레들이 살아있는 거 아냐! 그런데 어떻게 딸내미 조금 만졌다고 그렇게 버럭버럭 화를 내느냐고! 짜증나게시리!
‘운’으로 각성한 주제에 계급을 만들고 차별을 당연시하는 악인도 많았다.
-마약이에요... 멸망 이전에 그 마약! 그 신정부의 어르신들은 이미 하나도 빠짐없이 즐기고 계신다고요? 뭐라고요? 밥벌레들의 인권? 민생? 흐흐흣 그런 건 나중에 하자고요.
정말, 많아도... 너무 많았기에......
‘그런가... 신정부의 어르신들도 전부...... 그랬단 말이지...?’
요시히사 켄신을 검을 놓을 수가 없었다.
-케, 켄신! 이게 무슨?! 으아아악!
-네노오옴! 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날붙이를 들이미느냐! 으윽?!
-자리를 준다고 했잖나! 아, 아니면 돈을 원하나? 대체 뭣 때문에 우리 신정부를... 우, 우리는 이 나라를 구원한 구원자란 말이! 아아악!
‘그’가 휩쓸고 지나간 곳은 곧, 시뻘건 피웅덩이만이 남는다.
여생을 불살라 피부를 시커멓게 물들이고 문답무용으로 악인을 척결하던 그 검사.
그 외향은 너무나도 악마와 같고, 그가 내뻗는 검에는 언제나 검붉은 핏자국이 남아있었기에...
세상은 ‘그’를 무분별한 학살자라 욕했고, 그를 괴물이라 모욕했다.
허나,
-정의는... 실현되어야만 한다...!
요시히사 켄신이라는 검사에게는 꿈이 있었고,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사람들은 그런 경이를, 그런 공포를 담아 그를 그리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검귀(鬼劍)라고.
***
“모두가 믿지 아니하더라.”
혹자는 어째서 그렇게까지 ‘악’을 송두리째 뿌리 뽑기에 그리도 악착같이 집착하느냐 물었고.
요시히사 켄신은 답한다.
10대 초반, 종말을 맞이함과 동시에 가족을 모두 잃고 이 드넓은 세상에 홀로 남겨졌던 어린 소년이었던 시절부터 변치 않은 그 대답을 말이다.
“피에 미친 검귀가, 대의를 위해 일생을 바친 검제가, 실은 하룻밤. 딱 하룻밤이라도 편안하게 잠들어보고 싶었을 뿐인 어린 아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혹자는 끝끝내 입을 다물지 못했고, 또 다른 혹자는 허허 웃으며 검제의 유머를 칭송하기까지 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잠이 많은 소년이 아닌, ‘무법자’를 가장 많이 학살한 검귀였으며 일본내 모든 부정과 부패를 척결한 검제였기에...
그들은 끝끝내 요시히사 켄신의 꿈을 부정했다.
“알고 있었다. 실은 그들에게도 마음을 기댈 존재가 필요했을 뿐임을...”
사회를 구성하는 기반은 언제나 신뢰다.
어느 날 갑자기 옆집 사람이 마을에 불을 지르지 않을 거라는 신뢰.
혹은, 그런 악행을 벌였다간 악마보다도 더 악마같은 어떤 귀신이 그 악인을 죽음보다도 더 끔찍하게 도륙내 주리라는 믿음이 무너진 사회 속 ‘비각성자’들에게는 필요했던 것이다.
일본은, 징악의 상징인 검제를 통해 다시금 사회를 복원했던 것이다.
“그것이 모래로 만든 성이었음을 안다. 그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었음을 이 노구 역시 알고 있었다.”
허나...!
요시히사 켄신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은 이미 새카맣게 물들어 부릅떠졌으며 그 이마의 십자핏줄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곤두서 그의 격노가 어찌나 거칠고 무거운 것인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평화 아닌 평화를... 네놈은 최악의 형태로 깨부수었지!”
정면.
이미 두 팔이, 이윽고 상체까지 검은 ‘귀신의 반점’에 파묻힌 검제의 눈앞은 흑백의 세계다.
모든 것이 멈춰선 세계.
허나, 그 찰나에서도 다시 일순을 의미하는 ‘틈’ 속에서 검제는 정면을 응시했다.
보이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평생을 바쳐 구해낸 국가를 송두리째 망가뜨린 재앙.
이윽고, 두 번째는...
<경고>
ㅡㅡㅡㅡㅡㅡㅡㅡ
*각성자, 요시히사 켄신의 고유 스킬. ‘귀신의 흑점’이 발동됩니다.
*각성자, 요시히사 켄신의 남은 수명은 1622시간 11분입니다.
*‘흑점’은 불사른 수명만큼 각성자의 육신을 강화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이 세계에서 오직 검귀만이 가지고 있는 스킬. ‘귀신의 흑점’이 발동되었다는 메시지였다.
“어딜 짐의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냐아아아아!”
거대한 함성이었다.
‘소리’로 그저 울려퍼지는 음파만으로 흑백의 세계를 붉게 깨부술 만큼의 그런 외침.
직후,
검제가 내달리던 ‘틈’의 세계는 재앙의 힘에 강제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쩌적!
동시에 ‘차원’ 그 자체를 찢는 열 가닥의 시뻘건 손톱은 일제히 검제를 향해 쇄도하지만,
“레나를... 레이라를 만나기 위해 참고... 또 참아왔다.”
뇌제 이건우에게 진노하여 검을 휘두를 대조차 ‘귀신의 흑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건, 만나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기 때문에, 제 딸을 만나, 제 품에 안고 재회의 인사를... 그간의 안부를 물을 시간만은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허나,
“이미 레이라가 세상에 없다면, 어차피 네놈들에게 레나를 돌려 보내줄 마음이 없었다면... 이 노구에게 남은 건 오롯이......”
<각성자, 요시히사 켄신이 육신을 강화하기 위해 불사른 수명은 ‘200시간’입니다.>
단 한 번의 발동에 불태운 시간은 무려 200시간. 자신에게 남은 수명의 8분의 1을 불사른 검제는 다만,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복수뿐이다.”
-샤, 샤샤샤샥! 샤샤샤샤샤샤샤샥!
세계가 총천연색으로 물들어가며 아니, 으스러지고 부서져 가는 ‘틈’의 파편 속에서 드디어 그 진짜 형태를 드러내는 검격들.
허공에 검을 새겨놓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완벽하게 동일한 순간에 ‘재앙’을 향해 쇄도하는 무려, ‘일흔두 번’의 검.
네 쌍의 날개를 다시금 흉기처럼 내뻗던 ‘진조’의 육신이, 그 어떤 충격에도 날카로운 충돌에도 미동조차 없던 그 새하얀 피부가 갈라져 내리는 것이었다.
“크으으윽!?”
처음으로 재앙의 입에서 신음이 토해졌다.
“일검에 베지 못하면, 두 번 휘두르면 된다. 이검에도 베지 못한다면, ‘틈’에서 휘두른 세 번째 검으로... 삼검, 사검에도 네놈을 벨 수 없다면...! 그 만큼의 수명을 불태워 더 빨리, 더 많이 베면 그뿐이다.”
-슈우욱?!
붕괴함과 동시에 수복되는 진조의 육신.
그 속도는 ‘첫 번째 혈족’이었던 피의 여왕 바토리조차 비교를 불허할 만큼 빠르다.
마치 그저 검이 재앙의 육신을 통과해 지나갔다고 여겨질 정도로 붕괴와 재생은 검제의 미칠 듯이 빠른 검격 만큼이나 빠르게 일어나고 있었다.
허나,
“레나는 웃지 않았다.”
검제의 검은 그 와중에도, 더 가속한다.
‘귀신의 흑점’은 이윽고, 그의 상반신만이 아닌 하반신과 손끝 발끝에 이르러 이내 머리까지 새카맣게 물들이는 것이었다.
“레나만은, 그저 편하게 잠을 자고 싶었다는 나의 말에 도리어 눈물을 흘리며 말해주더군.”
-정말... 힘드셨겠네요......
감정이 없는 인형 같은 존재였다.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고, 몸을 건드려도 반응이 없던 엘프.
그런 그녀가 돌연 눈물을 뚝, 뚝, 흘리며 대답을 해주었던 것이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잎이 흩날리던 날이었다.
볕이 좋아 마루에 앉아, 풍경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사색에 잠기던 그런 날.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눈물을 훔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레나는 처음으로 검제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쿠에에에에에에엑!
거대한 울림.
붕괴와 재생을 반복하던 재앙은 돌연,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잘라 검제의 눈앞으로 집어 던졌고, 초근접한 그 자리에서 지천을 뒤흔드는 절규는 울려 퍼졌다.
툭!
투둑!
양 눈이, 두 귀가, 코에서도, 입 구멍에서도 막대한 양의 혈류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일순간에 죽음을 마주하게 하는 흡혈귀들만의 비기. 타인의 피가 흐르는 방향을 강제로 거꾸로 흐르게 만들어 전신을 모두 붕괴시키는 극악의 ‘피 뒤집기’였다.
다만, 전신에서 피를 이것이 정녕 가능한가 싶을 만큼 흘려내면서도...
“그녀는 내가 만난 첫 번째 벗이자, 첫 번째 안식, 그리고...... 첫 번째 사랑이었다.”
전신을 검게 물들인 검제는 태연하게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래서 더욱더! 나는 네놈을 저주한다. 재앙이여!”
-기이이이이이이이잉!
씹어 뱉듯 토해낸 검제의 단말마와 함께 돌연, 미친 듯이 터져 나오는 엄청난 굉음.
이윽고 빛을 번뜩이는 건, 검제의 손에 들린 천하패도(天下敗刀)와 허공을 자유로이 유영하던 그의 신화급 검 두 자루. 이자나기외 이자나미였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오직 요시히사 켄신만이 구사할 수 있는 기술.
‘틈’과 ‘어검술’의 극의.
일검에 백번의 참격을 담아 휘두른다는, ‘검귀의 검’이었다.
***
죽어감을 안다.
흑점에 파묻힌 육신에는 이미 고통이 없다.
고통이 없다는 건, 어쩌면 좋은 일일지 모른다.
오직 자신의 ‘검’에 모든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는 의미이니까.
다만, 고통이 없다는 건... 동시에 나쁜 일이기도 했다.
그건, 통각이라는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감각체계마저 송두리째 붕괴했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크에에에에엑!
일순에도, 비명이, 손톱이, 날개가, 숱한 피보라를 일으키는 ‘저주의 세례’가 요시히사 켄신의 육신을 파괴한다.
그에 따라 그의 눈앞에 수 놓인 ‘남은 수명’은 폭발적으로 줄어들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검제는 스스로 그 육신을 불태웠다.
<각성자, 요시히사 켄신이 육신을 강화하기 위해 불사른 수명은 ‘500시간’입니다!>
“크아아아악!”
흑백의, 총천연색의,
멈춰선, 박동하는,
으스러진, 붕괴하는...!
각기 다른 세계들이 교차한다.
이윽고 그의 눈 앞에 펼쳐지는 세계는 적어도 함께 죽는 세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에게 진짜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알려줌과 동시에 그 아름다운 행복을 산산조각으로 만든 ‘재앙’과 함께 죽는 세계.
-푸우욱!
끔찍한 파육음이 터져 나온다.
왼팔이 으스러진 검제는 입으로 검을 잡았고, 그의 다리는 이미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며, 눈과 코와 입과 귀는 모두 피로 범벅이 되어 이미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허나, ‘재앙’은...
“흐윽. 흐으으윽?!”
조각 조각난 육신을 더 이상 재생시킬 수 없는 듯,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무, 무슨... 감히! 감히 다 죽어가는 벌레주제에 짐에게 무, 무슨 짓을! 흐윽?!”
반이 날아간 상체에 들러 붙어있던 재앙의 머리가 버럭 소리를 지르지만, 제아무리 ‘재앙’일 지라도 사지가 뭉개지고 전신이 찢긴 데에 고통은 느끼는지. 숨을 쉬듯 비명 같은 신음을 연신 토해내고 있었다.
“그게...”
이에 검제는 입을 연다.
이미 인간이 오감이 붕괴하고 정말 죽음을 코앞에 둔, 그런 상태였음에도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연 것이었다.
“그게 나의 복수다! 재앙이여!”
승리.
그는 곧 죽을 운명이었으나, 그건 분명한 승리였다.
절망 어린 목소리의 재앙.
그리고 고고히 두 발을 땅에 딛고 선 검제.
이윽고 그는 다 으스러진 입을 비틀며 말을 쥐어짜 냈다.
“재앙이여, 너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너의 현현은 무의미했고, 남겨진 이들은 더더욱 필사적으로 너의 혈족들과 노예들을 토벌하리라.”
무의미.
그가 일생 동안 필생의 노력을 다해왔듯, 침략을 위해 이 세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해왔던 재앙의 그 모든 노력들을 수포로 돌리는 것.
그것이 바로 검제의 복수였던 것이다.
“크윽, 흐그윽. 흐으윽?!”
고고하고 굳건하게 바로 서서 아무런 소리를 내쉬지 않는 검제와 달리 재앙, ‘태고의 흡혈귀’는 연신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 재앙을 그 비참한 몰골이, 고통에 겨워 목소리 하나 참아내지 못하는 지경까지 몰아넣었다는 그 사실 자체에 검제가 흡족해하며 검을 땅에 짚던 그 순간.
“흐으으. 흐흐으으. 흐흐흐흐흐흐!”
돌연, 들려온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에 검제는 눈을 부릅뜨는 것이었다.
이내 재앙이 쓰러져 있던 곳을 바라보면, 재앙 ‘태고의 흡혈귀’의 머리는 작은 바람에도 타고 남은 잿가루처럼 흩날리며 사라지고 있던 것이다.
<경악!>
ㅡㅡㅡㅡㅡㅡㅡㅡ
*각성자, 요시히사 켄신은 재앙, ‘태고의 흡혈귀’를 쓰러뜨렸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에 시스템은 경악합니다.
*존재할 수 없는 일에 시스템은 경악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이윽고, 이 세계에 군림하는 절대적인 규율이자 법칙.
시스템 메시지는 정식으로 ‘재앙’의 죽음을 선언하기까지 했다.
‘대체...’
그 마지막의 웃음은 무엇이었던...?
검제가 그런 의문을 떠올리며 의아함에 눈을 크게 뜨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직... 지지지지직!
오래된 텔레비전이 주파수를 잡지 못해 지지직거리듯 이 세계가 돌연 기괴한 빛에 휩싸이며 정지했다.
이내 그 흑색도 붉게, 백색도 붉게 멈춰선 세계에서 아주 느릿하게 물들어가기 시작하면...!
-지이이이이이익!
온전히 적색만이 남은 세계는 소용돌이치며, 느닷없이 한 곳을 향해 모여드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만상이 적광이다.
그리고 세계 그 자체가 움직이며 한 점에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집중시키면, 그 붉은빛으로 가득 찬 소용돌이 속에서 익숙하기 싫음에도 익숙한 그림자는 보이는 것이었다.
이윽고, 어느새 허공에 나타났던 ‘재앙 토벌’의 메시지는 사라지고 그 목소리는 들려오는 것이었다.
“감히, 짐에게 무의미하다. 했더냐?”
초재생 아니, 이건 흡혈종 특유의 재생력으라느니 회복이라느니하는 개념의 것이 아니었다.
재앙은 정말로 죽었었고, 메시지마저 이를 확신했다.
그러나, 아주 분명히 죽음에 이르렀던 ‘재앙’은 다시금 아무런 이상도 없이 본래의 형체를 되찾아 나타난 것이다.
이건.
말 그대로 여벌의 목숨을 가지고 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경악의 순간이었다.
‘여러 개의 목숨... 그렇다면 도대체 몇 개의...?!’
허나, 검제가 무엇을 추리하기도, 무언가를 깊게 사색하기도 전에 이 잔혹한 세계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대뜸 내놓는 것이었다.
<재앙, ‘태고의 흡혈귀’는 소유하고 있던 아홉 운명 중, 하나의 운명을 소실했습니다.>
“아, 아홉...?!”
둘도, 다섯도, 하물며 일곱도 아닌 아홉...!
재앙이.
검귀, 요시히사 켄신이 무려 ‘1200시간’의 수명을 불사르고서야 겨우 압도해낼 수 있었던 그 재앙이...
앞으로 여덟 번이나 더 부활한다고?
“이, 이게 무슨...!”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망연자실한 목소리를 내던 검제.
허나,
-텁!
올곧게 선 검제보다 더 거대한 소녀의 형상을 가진 재앙은 가차 없이 그의 목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짐에게, 의미를 논했더냐. 감히 짐에게 노력의 가치를 논하더냐! 감히!! 재앙의 좌에 앉은 짐을 능가할 수 있으리라 상상했더냐!”
-촤아아악!
“꾸르륵!?”
검제의 목에 그어지는 아슬아슬한 손톱.
그건, 죽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죽이지 않은 것.
이내, 분노로 얼굴을 물들인 진조는 이젠 제대로 움직일 여력조차 남지 않은 검제에게 흉측하게 번뜩이는 혈속성 공격을 잔혹하게 퍼붓는 것이었다.
“으아아아아악!”
미칠듯한 격통에 이미 검제의 눈에 핏발이 곤두서며 비명이 터져 나온다.
“무의미한 것은 네놈이다.”
허나, 재앙은 멈추지 않고 그의 전신이 너덜너덜해질 그 순간까지 미칠듯한 참격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짐은, 네가 일생을 바쳐 수호한 국가를 무너뜨렸다. 짐은, 네가 체험해보지 못한 낙원을 구축했고 또한 부수었다. 레나가 그립더냐! 레이라를 다시 보고 싶더냐!”
침까지 튀겨가며, 흥분한 어조로 목소리를 높이는 재앙.
무려 여덟 번을 더 죽어야 진정한 의미로 죽는 그 ‘태고의 흡혈귀’는 지금까지와는 감히 비교를 불허할 만큼 잔인하게 폭주하고 있었다.
“아니 된다. 아니 돼! 넌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였다. 너의 일생에 이룩한 것은 모조리 이 ‘태고의 흡혈귀’가 으스러뜨리고 짓밟아주마.”
분노에 점철된 목소리로, 토해내듯 쏟아내는 말들.
허나, 그것들은 그 자체로 강대하고 찐득한 ‘저주’가 되어, 사로잡힌 검제의 정신마저 붕괴시키고자 나아가고 있었다.
땅이,
바다가,
하늘이,
아니, 어쩌면 이 세계 전체가 재앙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부조리한 광경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무의미다. 그래! 너의 생이야말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생이었다! 너의 노력은 볼품없었다. 네가 필사적으로 연명하고자 했던 생은 정말 아무런 가치도 없는 쓰레기에 불과했단 말이다!”
이윽고 그 끔찍하고 잔인한 고문의 끝을 내고자 재앙의 올곧게 뻗은 기다란 손톱이 오직 검제의 목구멍을 향해 날아들던 그 순간...!
-파직! 콰지지지직!
전신에 시퍼런 번개를 휘감은 남자는 나타난다.
“그만.”
-텁!
이건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무심하게, 흉측하게 얼룩진 재앙의 손목을 잡은 것이다.
“아아. 나의 그대여...!”
이에 재앙은 황홀경에 젖은 표정으로 잠시 이건우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거라. 짐이! 그대 역시 극진히 대접해주리니! 우선 이 버러지 같은 것을 먼저..!”
그리나, 일순간에 흉측하기 그지없는 악귀나찰의 얼굴로 돌변한 재앙은 팔에 힘을 주어 자신의 손목을 틀어쥔 이건우의 손을 쳐냈다.
“...?!”
아니, 이건우에게 잡힌 재앙의 손목은 어째서인지 꿈쩍도 하질 않았다.
“이, 이게...... 어찌하여?!”
기교에서, 마력의 운용에서 혹은 그의 주특기인 신력의 발현에서 밀려난다면 몰라도, 무려 재앙의 좌에 앉은 ‘진조’가 단순한 힘에서 한 인간에 불과한 이건우에게 밀린다?
그건 말이 되질 않는다.
차라리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젖먹이가 불도저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린다고 하는 게 더 설득력이 있게 보일 정도로... 그건 정말로 말이 되질 않는 일이었단 말이다.
“어떻게?!”
그 때문에 처음으로 ‘진짜 경악’을 얼굴에 머금은 진조는 당혹감에 목소리를 높였고, 이건우는 담담히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만하라고, 했을 텐데...!”
-추르르르륵!
“쿠륵?!”
직후, 좀전의 검제가 그러했듯, 두 눈과 코 양 귀와 입 구멍에서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내는 진조.
이내 그녀는 목도했다.
늘 시퍼런 안광을 번뜩이던 그의 ‘눈동자’에 어째서인지 진조와 똑같이 진한 붉은 빛이 감돌고 있음을 말이다.
<경악!>
ㅡㅡㅡㅡㅡㅡㅡㅡ
*수신의 사도, 이건우는 재앙, ‘태고의 흡혈귀’를 쓰러뜨렸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에 시스템은 경악합니다.
*존재할 수 없는 일에 시스템은 경악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검제가 두 눈을 뜨고 지켜보았음에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즉살(卽殺).
뇌제는 도대체 어떤 마술을 벌인 것인지, 여명의 거의 대부분을 바쳐 간신히 재앙을 꺾어냈던 그 검제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재앙의 목숨을 앗아버렸다.
두 번째 생의 족적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