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40화.
지긋지긋한 악연이었다.
신도가 자신의 눈을 자발적으로 뽑게 만드는 종교 휴거교의 배후.
일본을 참략한 ‘흡혈종’의 주신.
‘불사왕’의 가장 절친한 협력자이자 숱한 한국의 헌터들을 유혹해 종으로 부리고 또한 미련 없이 버리던 ‘피의 주인’.
그 모든 ‘악’을 행한 존재가 바로 나의 앞에 있었다.
-터.
무언가를 긁는 소리가 났다.
-터어억!
아니, 그것은 긁는 소리가 아니었다.
날아드는 그것이 그저 팔을 휘두르는 소리.
허나, 오직 그것만으로 공기는, 아니 ‘공간’이라 정의내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타아아아아아악!
으스러져 내리고 있었다.
“...윽?”
그 손톱이 지나온 길에 진득한 붉음이 남았다.
세상에 피를 아로새기는 것이 아닌, 이 ‘차원’ 그 자체를 찢어발기는 기다란 손톱.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온 ‘재앙’의 일격은 정확히 나의 오른 눈을 관통하고 있었다.
“크으윽?!”
이를 악문 입에서도 비명은 흘러나온다.
극악의 격통이 눈만이 아닌 전신에 엄습하는 것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악!”
이것이 바로 혈속성의 진짜 힘.
물리적인 규범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체험하게 만드는 가장 혐오스럽고도 순수한 ‘저주’의 힘이었다.
-뚝, 뚜욱.
이내 나의 찢어진 눈으로부터 쏟아져나오는 피가 뇌까지 짓이기고자 계속해서 파고드는 ‘진조’의 손톱을 타고 흐르자...
“하아.. 하아아. 그대의 선혈. 그대의 피가아아아아!”
재앙은 벌겋게 홍조를 띄우며 황홀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착!
그제야. 미친 격통에 삽시간에 정신을 잃었다 차리기를 반복하던 나는 검을 쥐었다.
뇌가 구워지는 듯한 격통에 무의식으로 휘두른 검.
일격에 극에 달해 있던 나의 ‘생존 본능’은 그 무의식으로 내가 가진 최강의 비기를 내지르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늘을 집어삼킨 고래. 천경(天鯨).
-기이이이이이이익!
일순간에 치솟는 ‘신력’의 소용돌이.
길고 아득한 고래의 외침은 나의 오른쪽 안구를 반으로 갈라버린 재앙의 시뻘건 손톱과 그 손톱으로부터 어이진 손을 일순간에 먼지 조각으로 만들었다.
“흐흐흐. 흐흐흐흐흐.”
단, 재앙은 넘실거리는 고래의 형상으로 응집되어 유영하던 그 ‘신력’을 거대한 손아귀로 틀어쥐었다.
충분히 신력을 응집하지 못한 채 구현된 ‘천경’은...
유영할 하늘의 비도, 바다도 존재하지 않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 흉측한 재앙의 손과 날카로운 손톱에 잡혀...!
-끼이이이이이익!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사라졌다.
“어여쁜 비명이로구나. 하지만...... 짐은, 그대의 비명을 더, 더더 듣고 싶구나!”
-터어어어어어억!
동시에 그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모든 흡혈귀의 ‘신’은 또한번 차원 그 자체를 으스러뜨리는 시뻘건 손톱을 곤두세우며 손을 뻗었다.
“그대여! 아아! 울부짖거라! 핏물 섞인 눈물을 흘리거라!”
그 아무것도 아닌 듯한 손짓에 실린 힘은 그야말로 태산의 붕괴. 산사태와 쓰나미가 뒤엉킨 지옥도를 실현하고도 남을 듯한 힘의 일렁임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단,
“기억이 나질 않는 거냐. 흡혈귀...”
뇌를 통째로 구워버리는 듯한 격통의 헤일 속에서도, 나는 시퍼렇게 눈을 부릅뜨며 검을 쥐었다.
-착!
울려 퍼지는 건, 시원하다 못해 차디찬 철과 철의 소리다.
이윽고 그어지는 건, 높디높은 태산도, 깊디깊은 바다도 모두 평등하게 베어 가르는 올곧은 의지의 검이었다.
검성류(劍星流)-발(拔), 제9형.
근원 베기.
-촤아아아아아아악!
시퍼런 신력은, 시뻘건 혈속성의 오러를 칭칭 휘감고 날아들던 ‘차원을 찢는’ 손톱을 양단했다.
“나는 전생에도... 빈손으로 시작했던 생에도! 네놈의 군단을 괴멸시켰다!”
-투, 투두두웅!
후두둑, 떨어지는 진조의 손톱들.
허나, 그 강도와 무게가 어찌나 경이로웠던 것인지, 손톱들은 땅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지진을 일으키기라도 할 것처럼 거대한 굉음을 일으켰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다만, 눈앞의 진조를 노려보며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런 내가, 네놈을 쓰러뜨리고자 두 번째 생을 살아온 내가!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것 같았단 말인가?!”
이어지는 공세는 시퍼런 번개와 목소리를 씹어 뱉는 순간에도 나의 등 뒤에서 꽃피우던 뇌옥(雷玉)의 세례였다.
-콰직!
-콰지지지지직!
서로 다른 종류의 마력을 거칠게 끓어 올릴 때마다 짓이겨진 오른 눈에서는 미칠 듯한 격통이 치솟았지만,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날 밤.
현생에서 눈을 떴던 그 밤, 전기 콘센트에 손을 집어넣던 그 순간부터...... 내가 겪을 고통은 알 바가 아니었으니.
“나는 네놈을 죽인다! 네놈은, 네 혈육들처럼 이 땅에서 죽을 것이다! 진조오오오!”
-챙!
날카로운 검과 교차하는 손톱.
-콰지지직!
굽이치는 벼락과 마주하는 혈속성의 마력들.
-휘이이이잉!
이내 내가 혈공(血功)을 발현하며 손에 쥔 ‘본디오 빌라도’에 그 힘을 더하면, 엄청난 굉음과 함께 피처럼 흐르는 혈속성의 오러들은 거친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것이다!
“흐흐흐! 하하하하하하!”
다만, 시스템이 규정한 현현의 시간마저 으스러뜨리고 튀어나온 ‘재앙’은 그런 나의 연속적인 공격마저도 웃는 얼굴로 마주하는 것이다.
“좋구나! 짐은 그대와의 이 피 튀기는 혈투를 꿈에서도 원해왔단 말이다! 나의 그대여! 울어라! 눈물을 흘리면서도 짐에게 흉악한 날붙이를 들이밀 거라!”
악에 받친 얼굴로 검을 휘두르는 나와 이러한 격전마저도 순수하게 즐겁다는 듯 새하얗고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웃는 진조.
-팅!
나와 놈의 싸움 속에서 놈의 육신은 수시로 날붙이에 찢기고, 베인 피가 허공으로 튀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일격, 일격에 담긴 혈속성 마력의 양이 다르고 그 무게가 다르다.
숨을 내쉴 때마다 풍겨오는 역겨운 피비린내도, 몸을 조금 움직일 때마다 쥐, 박쥐, 뱀, 사마귀, 메뚜기 심지어는 ‘나’나 ‘앤젤라’의 형상으로 다가오는 무수히 많은 ‘저주’들도 달랐다.
동시다발적이고 찰나의 틈도 없이 이어지는 연속적인 ‘저주’와 혈속성의 마력과 무시무시한 손톱의 연쇄가 바로 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눈치챘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늘어난 후였다.
-띵!
-띵!
-띵!
나의 검에 베일 때마다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던 진조의 핏줄기들...... 그러자 그것들은 허공에서 형상을 갖추고 또한 형태를 뒤바꿔가며 ‘메시지’를 만들었다.
“..!”
내가 이를 눈치챘을 땐, 이미 하늘 위에는 기괴하기 그지없는 붉은 메시지들이 세 개나 수 놓인 상태였다.
<경고>
ㅡㅡㅡㅡㅡㅡㅡㅡ
*현현한 재앙, ‘태고의 흡혈귀’는 응축된 피를 소모해 고유결계, ‘성역’을 펼칩니다!
*‘성역-혈옥(血獄)’: 혈옥에 발을 디딘 인간은 모두 인간의 오감 중 한 가지를 랜덤하게 잃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태고의 흡혈귀’는 응축된 피를 다시 소모해, ‘감각 소실의 저주’가 오직 ‘시각’ 혹은 ‘청각’에 한하도록 재조율했습니다!>
어느새 이 이나리 신사를 감싸고 있는 붉은 형태의 구(球).
내가 뒤늦게 이를 눈치채고 마지막으로 허공에 솟아오르는 진조의 ‘핏줄기’들을 굵직한 번개로 단번에 증발시켜버리려는 찰나...!
이미 하늘까지 부유해 있던 핏줄기는 순식간에 마지막 메시지로 그 형태를 뒤바꾸었다.
<‘태고의 흡혈귀’는 응축된 피를 다시 소모해 ‘성역-혈옥’에 입장 제한 인원을 설정합니다.>
<제한 인원: 1/7>
그리고선, 극악무도한 괴현상을 직접 일으킨 ‘재앙’은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양손의 손톱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말하는 것이다.
“그대는 충분한 수의 군단을 집결시키려 했지. 흑룡을 쓰러뜨릴 때처럼, 불사왕 파울라스를 몰아냈을 때처럼, 앞에서도 다시 앞의 수를 읽어내 적재적소에 필요한 인간을 불러모아 짐을 몰아붙이려 했지?!”
쏟아져 나오는 재앙의 확신에 나는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도 나는 ‘흡혈종’의 군대를 먼저 제압하고, 이후 ‘태고의 흡혈귀’ 대 막대한 수의 군대라는 유리한 전투 구도를 만들고자 했었으니까...
-촤아악!
-채쟁!
“하지만, 아니 된다. 짐은 그대와의 이 오붓한 데이트를 누구에게도 방해받을 생각이 없단 말이다! 흐흐흐. 하하하! 하하하하하!”
모든 준비가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진조가 이런 ‘결계’ 따위를 만들 거라는 것을 내가 몰랐겠는가.
당연히 ‘모든 것을 짓이기는’ 티탄의 검으로 재앙이 ‘결계’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이를 깨부술 작정이었단 말이다.
-툭!
-타악!
허나, 스스로 알을 깨고 튀어나온다는 예측불허의 변수가 모든 작전을 뒤흔들어 놓았다.
‘어떻게든, 다른 수를...!’
초마다 열댓 번의 수 싸움이 오가던 격전의 순간,
“짐을 눈앞에 두고! 한눈을 파는 게냐아아아!”
-쫘아아악!
돌연 진조는 격노로 안광을 번뜩이며 지금껏 한 번도 무기로 활용하지 않은 ‘네 쌍의 박귀 날개’를 크게 펼쳤고.
여느 혈족들과 다름없이 무시무시한 농도와 밀도로 범벅이 된 혈속성 오러의 날개는 내게 동시에 내게 날아들었다.
진조의 날개는 무려 네 쌍.
두 쌍의 날개를 가지던 ‘첫 번째 혈족’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그 피로 응어리진 ‘흉기’는 모두 각기 다른 방향에서 쇄도하고 있었다.
‘이런?!’
나는 아찔한 감각과 함께 과연 전신 갑주 ‘아이기스’가 어디까지 버텨줄 수 있을까를 손에 땀을 쥐며 고민했다.
-키이이익!
충격을 받자 반사적으로 방출되는 새하얀 신력의 번개.
허나, 진조의 무시무시한 공세는 멈출 기미가 없었고 눈앞에서 터져 나오는 포탄이 발사되는 듯한 굉음과 미친 듯이 비산하는 신화급 방어구의 번개가 교차했다.
-탕! 타다다앙!
-콰지직!
그러나, 둘, 넷, 여섯을 넘어 무식하게 ‘신력’을 내뿜는 ‘아이기스’의 반격조차 뚫고 들어오는 흉측한 살인 무기.
-푸욱!
끝내 일곱 번째 날개는 나의 미간을 관통했다.
동시에 언제나 내 목에 걸려 있던 ‘호접지몽의 팬던트’가 보랏빛 빛을 발산하며 그 일곱 번째 일격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어 주었으나,
“잊었느냐. 나의 그대여...! 그 팬던트는 본래 짐의 것이었음을!”
여덟 번째,
다른 무지막지한 날개들과도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붉고 또한 짙은 오러를 가득 머금은 그 ‘마지막 날개’는 비명과도 같은 진조의 외침과 내게 밀려들어 왔다.
‘젠장! 그걸 쓸 수밖에 없는 건가...!’
마지막에서도 다시 마지막.
내가 오직 이 ‘태고의 흡혈귀’의 목숨을 완전히 끊는 바로 그 순간을 위해 감춰두고 또 감춰두었던 비장의 수를 꺼내던 바로 그 찰나......!
“허무를 싣고 비극으로 향하는 그 길만이, 이 노구에게 남은 유일무이한 길이라 여겨왔다...”
-촤아악!
어검술(馭劍術)로 머리맡에, 일본의 창세 신화를 담은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신화급의 두 검을 띄우고, 손에는 흑룡 토벌전에서 사용했던 천하패도(天下敗刀)를 들고 나타난 자.
흰 머리카락에 세월이 깊게 팬 두 손.
이윽고, 이 세상에서 가장 ‘어검술’과 ‘틈’의 활용에 능한 검사.
검제(劍帝), 요시히사 켄신.
그는 정확히 내 머리를 향해 날아들던 진조의 ‘여덟 번째 날개’를 무결점의 검격으로 베어버렸다.
그리고는 나와 진조의 사이에 우뚝 서더니 이내 ‘태고의 흡혈귀’보다도 더 짙은, 적광으로 물들인 ‘복수귀’의 눈으로 재앙을 응시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허나,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검귀에게도 마지막으로 이룰 수 있는 소망은 남아있었으니...”
“어디서 튀어나온 벌레 따위가 짐의 앞을 가로막느냐아아아!”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진조는 정말로 진노하며 다시금 일순간에 수복된 날개를 다시금 쭉 펼쳐 좀전의 나처럼 검제를 압살하려 들었다.
다만, 검제는 그저 무심히 자신의 말을 끝맺을 뿐이었다.
“그 소망이란, 오직 하나...”
압도적인 속도로 회전하는 어검.
두 자루의 신화급 어검과 오직 한 자루, 이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다룰 수 있는 ‘틈’마저도 베는 검.
천하패도는 ‘검제’이기 이전에 ‘검귀’로서 세상을 살아왔던 귀신의 손에서 다시금 그 흉흉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복수였다.”
그가 내뻗는 검은 귀신의 곡소리를 부르짖는다.
그 검을 타고 흐르는 막대한 검붉은 오러는 마치 살아있는 마귀처럼 일렁거리며 요시히사 켄신의 팔을 검게 물들였다.
이내,
-기이이이이이이익!
귀를 찢는 비명과 네 쌍의 날개가 교차하면...!
후두둑, 말라 비틀어진 낙엽처럼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은 검제의 ‘검 세 자루’가 아닌 네 쌍의 ‘붉은 날개’였다!
그건, 자신의 명(命)을 불살라 압도적인 힘을 발현해내던 귀검사(鬼劍士), 요시히사 켄신의 재림이었다.
재앙, 태고의 흡혈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