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38화.
요시히사 켄신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도리어 보이는 것은 많아진다.
감각이 곤두선다.
그가 쥔 검에 찌릿찌릿한 전류가 닿는다.
그 색은 짙은 푸른색이다.
빠르게 몸을 회전시킨다.
경지에 이른 오러는 마력 그 자체를 비트는 힘이 된다.
그러자 굉음은 들린다.
인간의 것이 아닌 심장이 지금 박동하고 있다.
-두근!
한 호흡에 다섯 번의 박동.
허나, 그 박동은 그저 단순한 두근거림에 그치지 않고 마치 태양처럼, 보고도 믿기 힘든 양의 뜨거운 혈속성 오러를 방출했다.
“그윽!?”
하나를 쳐내면 다른 것이 날아든다.
자연히 늙은 몸뚱이는 고통으로 비명을 내지르지만, ‘검제’에게도 물러설 수 없는 선이라는 게 있었다.
“아아악!”
억지로 이어가는 검격이다.
검제가 휘두르는 검은 자연을 비추는 달빛과도 같은 검성의 검과는 다르다.
그는 흐르지 않는다.
도리어 거슬러 오른다.
그는 달빛도, 태양도 아닌 무직한 기암괴석이니까.
-탓!
막대한 양의 혈속성 오러를 피하지도, 오러로 흘려내지도 않고 달려드는 검제.
그 무식한 전투방법만큼은 전생의 기억을 가진 이건우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단,
이건우는 충분히 경악했음에도 기다렸다는 듯 시퍼런 파도를 일으킨다.
물과 같이 흐르는 ‘신력’은 검제에게 고통 없는 물리력을 행사한다.
그저 극에 달한 오러의 운용과 기합만으로는 버텨낼 수 없는 ‘척력’이 이건우에게서 검제를 밀어내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익숙해진 혈속성의 에너지들과 달리, 헤일과도 같은 ‘신력’은 역시나 대항할 수 없는 종류의 기적이었다.
-쿠르릉!
충분히 거리를 벌리자, 이건우는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높게 들어 하늘을 두 쪽으로 쪼개버리는 거대한 낙뢰를 쏘아 올렸다.
“기억해내십시오! 검제!”
뇌제는, 구시대의 망령과도 다름이 없는 자신에게 계속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허나,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들면 어김없이 떠오른다.
-압빠... 압빠! 압빠아아아!
레이라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 작고 여린 손을 틀어잡은 창백한 손은 누구의 것이었던가...
눈앞의 뇌제였던가...
아니면......
“딸을......”
“진실을 떠올리셔야 합니다. 검제!”
“내 딸을 데리고 와라아아아아!”
-스릉!
우직하게 뽑아 든 검은 올곧게 나아간다.
검제가 긋는 검격은 직선.
오직 정면만을 바라보고, ‘적’만을 응시하는 최단거리의 베기다.
-탓.
일보(一步).
세상은 흑백으로 물든다.
-터업!
이보(二步).
크게 굽힌 다리는 탄성을 가득 머금은 스프링과도 같이 대지를 박차고.
삼보(三步)는 허공을 딛으며,
사보(四步)에 세상은 뒤집힌다.
반의반 호흡.
검성, ‘라오 위’와 함께 서로 다른 방향에서 검의 정점에 오른 검제는 세상 그 누구보다 ‘틈’을 잘 활용하는 쾌속의 무인이었다.
이윽고 다시 반의반 호흡이 검제의 폐를 비집고 나가면, 장검 이자나기는 위에서 아래로, 중검 이자나미는 불가측의 변칙적인 방향으로 사각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검제가 거꾸로 선 그곳은 이미 이건우의 머리 위.
하나를 피해도 다른 하나는 그를 추격할 것이다.
필사이자 필살의 일격.
이는 검제가 가진 최속의 검이었다.
헌데,
-오싹.
느릿하던 세계가 다시금 총천연색으로 물들며 시간의 흐름이 되돌아오기 시작하는 그 찰나, 검제는 전신을 휘감는 오한을 느꼈다.
“읏?!”
직후, 숨이 터져 나온다.
지금껏 ‘틈’에서도 단연 으뜸의 속도를 가지는 검제의 움직임을 ‘보던 자’는 딱 셋이었다.
하나는 세계의 구원자 ‘다나 메이어’였으며,
둘은 중원의 검성 ‘라오 위’.
셋은 그 간악한 흡혈귀들과 협력관계를 이룩했던 프랑스 총리 ‘프리드리히 파울라스’...
헌데,
그 ‘절대자’들 역시 그저 뒤늦게 대처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을 진데...
눈앞의 뇌제는 고개를 들고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무시무시한 경악을 그대로 토해내면서도 검제의 두 신화급 검들은 멈추지 않는다.
아니, 이미 철과 바위의 오러를 머금은 그 검은 멈출 수가 없던 것이다.
그러자, 검제의 ‘생존본능’에 경종을 울리던 무시무시한 소름은 그 정체를 드러냈다.
혈마류(血魔流)-혈공(血功)
역류(逆流)
검을 뽑지도 않았다.
고개를 빳빳이 들어 검제를 응시하면서 힘을 꽉 준 양손을 들어 올릴 뿐.
허나,
-푸르르르르르르르르륵!
그것만으로 이자나기의 철은 뒤틀리고, 이자나미의 바위는 녹아내린다.
미친 듯이 용솟음치는 혈류는 도리어 막대하고도 아득했던 검제의 ‘오러’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그 몸집을 배로 불리고 있었다.
“그, 아아아아아악!”
우직한 바위가, 단단한 철이 비틀려 으스러지는 것이었다.
작열하는 핏빛 오러를 전신에 뒤집어쓰고, 그대로 다시금 날아가 버리는 검제의 육체.
끔찍한 작열통이 전신에 엄습한다.
-터업!
당장이라도 눈앞이 암전되어 정신을 잃을 것 같지만, 어째서인지 검제의 두 다리는 땅을 딛고 서 있다.
“......정말”
허나, 벌써 두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려오는 상황이었다.
신화급의 무구인 두 자루의 검을 쥔 손 역시 뇌를 뒤흔드는 고통에 흔들리고 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해졌군. 뇌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건우는 아직도 저렇게 멀쩡히 서 있지 않은가.
심지어 검제는 알고 있다.
그의 혈검은 아직 검집에서 뽑히지도 않았고, 그가 전신전력을 다한다는 증거인 ‘신력의 비’는 아직도 내리지 않고 있다는 걸 말이다.
“혈검을 들지 않을 셈이냐.”
“요시히사 켄신. 당신은 저의 적이 아니고 저는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제 딸 하나 지키지 못하는 늙은이에게 그 정도의 가치도 없다는 게냐? 그렇게 이 몸을 우롱해야만 속이 풀린다는 게냐!”
“아니지요. 그게 아닙니다. 검제. 당신은 그저 잊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의 진짜 기억을 되살려 드리려는 것뿐입니다.”
-스릉.
이건우의 말을 모두 들은 검제는 검을 들었다.
그리고 삽시간에 핏발이 곤두선 눈으로 이건우를 노려보며 말하는 것이다.
“레이라는... 내 딸은 죽지 않았어!”
그리고 그 함성과 함께, 검제의 날카로운 검은 가속한다.
-촤아악!
이젠 ‘틈’에서도 보이지 않는 속도로 뻗어 나아가는 검. 그러나 이건우는 눈빛을 새파랗게 물들이며 ‘수왕검’에 신력을 둘렀다.
“죽었습니다. 기억해내십시오. ‘맹세’의 수장이자, 버림받은 나라의 희망! 당신은 당신의 손으로... 딸이 아닌 이 나라를 택하지 않았습니까!”
“내 딸은 살아있단 말이다아아!”
-채재쟁! 챙!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의 검과 보이지 않는 검격이 동시에 날아든다.
단, 이건우 역시 그 가속에 가속을 더하는 검제의 검을 신력과 전격과 혈공의 묘리를 뒤섞어 무식한 방식으로 밀어내는 것이었다.
“태생적인 S급 헌터였던 당신은! 자신만은 영원히 ‘세뇌’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여겨왔겠지만, 단 하나! 당신은 단 하나의 세뇌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일순간에 수십 개의 수 싸움이 오간다.
“닥쳐어어어!”
바로 그러한 현장에서 이건우는 애잔한 눈빛으로 검제를 응시하는 것이었다.
“그 세뇌란, 당신의 딸, 레이라가 아직 살아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 당신은 딸이 아닌, 국가를 택했었단 말입니다!”
이토록 치열한 공방을 벌이면서도, 저런 눈이라니...
어째서 뇌제는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 드는 검제를 저리도 덧없이 슬프게만 바라본다는 말인가.
바로 그 의문이 검제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정말일까.
정말로 자신은 그 ‘배신의 죄’를 범하지 않았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정말로 자신은 스스로의 손으로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했었다는 말인가.
숱한 의문에 극심한 편두통을 느낀다.
초마다 수십 개의 의문을 떠올리고 숨을 쉴 때마다 더더욱 자신의 기억을 믿을 수 없게 된다.
“내 딸... 레이라는...!”
그럼에도......
“기억해내십시오!”
그는 다만,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그것만이 자신의 일평생을 관통하는 삶의 방식이었기에.
-쿠르르릉!
내리치는 낙뢰에 발작을 일으켜가면서도 검제는 검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
뜻밖에도, 처음 ‘휴전’을 제안했던 것은 일본측이 아니었다.
기습적인 테라포밍.
‘파괴불가 오브젝트’라는 신의 장난보다도 더 어처구니가 없는 시스템의 보호 속에서 무한한 군사를 소환해 일본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던 ‘흡혈종’.
강산이 충분히 변하고도 남을 시간 동안 이어진 전쟁에 국민들은 이미 빈사 상태였다.
국토 전역에 깊게 뿌리 내린 기근과 만연하는 회의론과 사회적 불안.
사회는 이미 그 기능을 멈춘 지가 오래였고, 이대로 가다간 국가 전체가 아사할지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다.
비록 ‘휴전’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꺼내 든 것은 ‘흡혈종’이었으나, 어쩌면 ‘일본’에게 선택권 따위는 이미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흡혈종’들은 주기적으로 일정한 양의 ‘피’를 공납하기만 하면 된다는, 일본에게 비교적 유리한 조건의 ‘휴전’을 제시했고, 그 대신이라며 검제에게는 아주 해괴망측한 요구사항을 꺼낸 것이다.
-엘븐 가르드의 마지막 왕족. 이 순수 엘프와 아이를 만들 거라.
레나.
겉보기에는 아직 30대 초반에 불과한 외모를 가진, 초점이 없는 눈의 여인이었다.
인형 같은 외모에 긴 귀.
너무나도 무표정해 숨만 쉬는 생물공학 인형인지 정말 감정을 가진 존재인지 제대로 구분하기조차 힘들던 그런 자였다.
휴전을 위한 조건이.....
아이 만들기?
어긋나도 너무나 어긋난 이야기였다.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유아용 만화영화의 시나리오란 말인가.
허나, 참혹한 전쟁은 엄연한 현실이었고, 그들이 내건 ‘조건’에 비해 그 결과물은 너무하다 싶을 만큼 값진 것이었기에.....
-알겠다.
당대 일본 사회를 이끌던 ‘맹세’ 길드의 수장. 검제는 그들의 요구사항을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레이라가 태어났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이, 그냥 허울 좋은 헛소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준 어여쁜 아이.
-압빠...!
뱃속의 레이나를 품던 순간부터 서서히 감정을 되찾아가던 레나는, 레이라가 태어나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아예 미소를 되찾기까지 했었다.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색이 짙어진다.
철들 무렵부터 검을 잡았고, 검에 기대어 살았다.
그로인해 보지 못했던 계절과 자연과 숱한 아름다움들을 볼 수 있던... 레나와 레이라와 함께했던 시간은 바로 그런 감격의 행복이었다.
그리고 그 감격스러움이 정점에 달하던 때, 지옥은 참으로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이 평화를 이어가고 싶다면 죽여라. 검제여.
-주, 죽이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를...!
-말 그대로의 의미다. 총명하고 강인한 자여. 네 손으로, 네가 키운 딸을 죽이거라. 이것이 우리가 그간 너희들에게 제공해준 평화의 진짜 조건이다.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일본은 놈들의 ‘세뇌’의 힘을 이용해 타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고, 이를 통해 벌어들이는 막대한 자금으로 다시 수혈팩을 사들여 다시 그들에게 바친다.
그런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고 순수한 평화를 이룩한 지가 이제 막 이었을진대... 흡혈귀의 수장이라는 이 작자는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느냔 말이다.
-스릉!
너무도 얼토당토않음에,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검제는 대뜸 나타난 놈이 대체 무슨 개소리를 떠들어대는 것인지 완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검을 뽑아 들었다.
이미 그의 검은 눈앞에 나타난 ‘흡혈종’의 목을 관통했고, 조금만 더 힘을 주면 그대로 그의 목을 날려버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괜찮겠느냐.
허나, 그 짧은 한마디가 그의 손을 멈춰 세웠다.
-내 목이 날아감과 함께 휴전은 끝이다. 너는 정녕... 그 영원한 전쟁을 다시금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나는 묻고 있다.
이윽고 무게추에 올려지는 건, 일본 전역의 전 국민과...... 레이라 하나의 목숨이었다.
그때, 그 검을 멈춰선 안 되었다.
차라리 그 극악무도한 것의 목을 치고 그대로 그들의 본거지를 쓸어버렸어야 함이 옳았던 것이다.
그랬더라면 적어도, 후회밖에 남지 않는 일생을 보내게 되진 않았을 테니까......
며칠 밤을 앓았다.
그 누구에게도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지옥에서 검제는 끝도 없이 고민했다.
-압빠...
그러다...
그날도... 소리 없이 그리고 하염없이 울고 있던 어느 밤.
레이라는 대체 어찌 알았는지. 졸린 눈을 부비며 침소를 나와 모든 쓸모를 빼앗기고 버려진 나무의 밑동과도 같이 서 있던 검제를 찾아온 것이었다.
-압빠! 우, 우지마, 세요. 압빠아... 흐아아아아앙!
그리고는 손을 높게 들어 허망하게 줄곧 눈물을 흘리고만 있던 켄신의 오른손을 감아쥐고는 도리어 자신이 더 크게 울음을 터트리는 것이다.
검제의 고민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 작고 여린 것은 그저 그가 울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더없이 서럽게 엉엉 우는 것이었다...
그 밤의 일이, 그 따스한 눈물에 검제는 고민을 끝냈고 그는... 레이라를 살리고자 ‘흡혈귀’에게 무릎마저 꿇었다.
그렇게 자신은 죄인이 되었다.
딸은 볼모로 잡혀갔으며,
그간 어떻게 해서든 막아왔던 일본인에 대한 ‘세뇌’를 묵인하게 되었고,
끝내 레나마저 그들의 고향이라는 엘븐 가르드로 송환되며 혼자가 되었다.
그렇게, 검제는 붉은 녹에 휘감긴 이가 다 빠진 검이 되었다.
-툭.
남겨진 그에게, 남은 것은 대체 무엇인가.
-투두둑.
홀로 몸을 뉘는 독방.
그리고 하염없이 반복하는 그 지난날의 꿈들.
새순을 찾는 레이라는 까르르 웃었고, 잠에서 깨어난 검제는 소름 끼치는 오한과 함께 울고, 또 울뿐이었다.
-파아아아아아아아!
청각을 마비시킬 듯 억세게 내리는 빗소리.
오늘도 홀로 독방에서 눈을 떠, 극한의 ‘자살 충동’을 견디며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검제의 머리 위로...
폭우는 내리고 있었다.
‘폭우...?’
자신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던가.
그리고 비는 어째서 지붕을 뚫고 건물 내부에 내리는가.
그러한 의문이 떠올라 의아한 심경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바로 그 순간.
그의 목소리는 들려오는 것이었다.
“기억해내십시오! 검제!”
-우수수수!
전신에 돋아나는 무사히 많은 소름.
이윽고, 검제가 서둘러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시퍼런 눈동자의 뇌제가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당신이 어째서 그 밤을 똑바로 기억해내지 못하는지! 그걸 기억해내란 말입니다!”
기억.
그 밤의 기억...?
레이라가 자신을 찾아와, 자신보다 더 서럽게 울던 밤...
‘그 날은 분명...?’
그렇게 끝난 것이......
-아니지. 그렇게 끝이 나서는 안 된다. 검제여!
돌연, 그런 목소리는 기억의 저편에서부터 솟아올랐다.
듣는 것만으로도 오장육부가 다 뒤틀리는 듯한 그 끔찍한 음성. 그건 분명, 검제를 협박하고, 레이라를 죽이라 종용하고, 숱한 모욕과 비릿한 조소를 흘리던 바로 그......
‘흡혈귀’의 목소리였다...!
-너는 네 손으로, 네 딸을 죽여야만 한다! 그리하여 네놈의 정신이 완전히 붕괴할 때! 네놈은 우리의 새로운 꼭두각시가 될지니!
“이, 이노오오옴!”
그때도 검제는 그리 외쳤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흡혈귀’를 향해 검을 내뻗으면서 말이다.
단,
-폭주하라.
딱 그 한마디가 알게 모르게 검제에게 ‘세뇌’를 이어왔던 놈들의 기폭제가 되었고... 검제의 눈에는 일순간에 핏발이 곤두선 괴인의 안광이 깃든 것이다.
이윽고,
-먹어치워라.
투둑,
검을 떨어뜨린 손과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두 눈이 향하는 곳은 뻔했다.
꽃송이처럼 노란 머리카락.
작고 여린 몸에 긴 귀를 가지고, 늘 새로운 생명을 보며 까르르 웃던...
자신의 딸. 레이라......
“아니야아아아아아아아아!”
-챙!
-휘리리리리릭! 푸욱!
긴 비명을 내지름과 함께 정신을 차린 검제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레이라의 피는 묻어있지 않았다.
단, 방금까지도 무언가를 병적으로 쥐고 있던 양 파르르 떨리는 양손.
그리고 떨리는 눈으로 천천히 시선을 올리면, 눈앞에는 아직도 애잔한 눈으로 검제를 응시하고 있는 뇌제, 이건우가 있었다.
“이젠... 기억이 나십니까.”
무언가를 씹어 뱉듯, 입을 여는 뇌제.
“나... 나는...!”
검제 역시 무언가를 항변하고자 목소리를 높이려 했으나, 자신의 입안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텁텁함에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날 시간입니다.”
제정신을 되찾은 검제의 손에 이미 검은 없었다.
반면 비처럼 내리는 신력은 이미 이 일대를 완전히 적시고 있었고, 이건우의 손에는 그토록 뽑아 들지 않던 혈검, 본디오 빌라도가 들려 있었다.
그의 몸 곳곳에 보이는 투박하면서도 무식한 검격의 흔적.
이를 미루어보아 검제는,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죽일 작정으로 뇌제에게 덤벼들었고......
뇌제는 그러한 검제를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 않는 선에서 제압해버린 것이다.
승패는 이미 갈렸다.
더 볼 것도 없는 검제의 완벽한 패배.
허나, ‘기억’을 떠올린 검제에게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털썩.
검제는 두 무릎을 땅에 꿇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파아아아아아.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때, 이건우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휙 몸을 돌리며 검제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검제...... 모든 기억을 떠올리셨다면, 감정을 추스르십시오. 감정을 다 정돈했다면 다시 떠올리십시오.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복수는, 두 검은... 아직 부러지지 않았습니다!”
-콰지지직!
직후, 그는 시퍼런 번개가 되어 하늘을 갈랐다.
이윽고 남겨진 검제는...
-덜그락.
다시, 땅에 깊게 박혀있던 자신의 검을 쥐었다.
재앙, 태고의 흡혈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