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136화 (136/175)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36화.

그것은 덧없는 추억이었다.

눈 덮인 고성과 얼어붙은 호수는 아름다웠고 이제 막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푸르름을 싹 틔우는 그 새순이 아름답게 반짝이던 새벽.

“꺄르르륵!”

아이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었고, 무인은 평생을 이고 다니던 검을 내려놓고 자신의 딸아이와 함께 이른 아침을 거닐었다.

아이는 유독 새순을 보면 활짝 웃곤 했다.

역시 그 근본은 ‘흡혈종’이기 이전에 ‘엘프’였기 때문일까.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또한 흥미롭게 응시하던 그 녹색의 눈동자를 무인은 사랑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이른 아침은 언제나 새순을 찾는 시간이었다.

‘엘프’의 피와 ‘무인’의 피를 반씩 이어받은 아이.

“압빠!”

무인, 검제는 양손을 높게 치들고 자신을 부르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품에 안은 그 작고 여린 것이 온기는 참으로 따스했다.

“레이라...”

검제... 아니, 요시히사 켄신이라는 남자는 생에 처음으로 가족의 온기라는 것이 이토록 따스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겨울바람은 너무도 매서웠고 손발이 덜덜 떨려올 만큼 차가웠으나, 요시히사 켄신은 자신의 품에 안은 아이만 춥지 아니하다면 자신도 춥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압빠!”

레이라는 애교가 많은 아이였다.

품에 안아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까르르 웃던 순수한 아이.

“그래. 레이라...”

무인이 아닌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사랑해 마지않던 그 딸은.......

-‘휴전 협정’의 마지막 조건을 발표하지. 검제여...

일본과 이계의 ‘10년 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인질로 현재도 ‘어딘가’에 구속이 되어 있다.

그것도 무려... 이미 10년도 더 넘는 긴 시간 동안 말이다.

“압빠!”

흡혈귀의 손에 끌려가듯 멀어져가던 아이.

몇 번이고 불안한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던 그 얼굴을... 검제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이나. 레이나! 헉!”

이윽고 검제가 그날 이후 단 하루의 예외 없이 꾸던 악몽에서 눈을 뜨자 창밖은 아직도 어둑한 새벽이었다.

그는 혼자였다.

온기도, 아무것도 없이.

빈방에 조촐하게 깔린 이부자리 그리고 검 한 자루.

“큭...”

그 차가운 한기에 그리고 섬뜩한 고독에, 검제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명을 스스로의 손으로 끊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죄인’이기에...

이미 망국이나 다름이 없는 이 일본의 그래도 살아남을 이들의 ‘희망’이 되어야 하기에 차마 자결을 위해 늘 가지고 다니는 단검을 뽑을 수가 없었다.

그때, 검제의 침소 옆문은 돌연 열렸다.

-드륵.

자신의 제자 중 그나마 가장 뛰어난 검사, 현재보다는 향후 20년 후가 더욱 기대되는 청년, 검왕 류자키의 조심스러운 목소리는 들려왔다.

“스승님. 드디어, 뇌제가 언급했던 ‘헤븐즈 게이트’가 열렸고 밤사이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

“약속의 시각까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슬슬......”

“...그래.”

그 짧은 문답을 끝으로 문을 닫고 휙, 하고 사라지는 류자키.

“뇌제...... 이건우.”

홀로 남은 검제가 새삼 그 이름을 입에 담자 어째서인지 검제의 머리는 다시금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이건우는 세상 그 누구도 그 존재조차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던 ‘레이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당돌하게도, ‘검제’가 흑룡 레이드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레이라’를 구출해주겠다 약조했었다.

그런데...

“이미 전쟁마저 시작되어버린 지금까지도.... 어째서 레이라의 구출 소식은 없단 말인가.”

레이라의 구출에 전쟁이라는 가림막이 필요하기 때문일까.

허나, 뇌제가 사전에 고지해준 ‘작전’에는 그 어디에도 ‘레이라’의 구출에 대한 항목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 어째서...”

지긋지긋한 기다림이었다.

레이라는 이 10년의 세월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압빠... 압빠!

창백한 손아귀에 끌려가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끝까지 요시히사 켄신을 자신의 부르짖던 그 떨리는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단 말이다.

-텁!

이내, 검제는 머리맡에 두었던 자신의 검을 쥐고 일어섰다.

허나, 어째서인지 그는 미간을 좁힌 채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고, 그의 눈동자에서는 묘한 이채가 감돌고 있었다.

***

세계의 멸망과 각성자의 출현이라는 기현상을 최초로 겪은 1세대.

숱한 전설을 쌓아 올리고 또한 수많은 신화를 직접 만들어낸 그 1세대 헌터들에게 있어 ‘재앙’이란 확인되지 않은, 확인해서는 안 될 ‘악’의 호칭이었다.

‘재앙’이 자신들의 하수인을 보내어 끔찍한 침략을 행하고, 1세대의 헌터들은 그것을 막아낸 것이다.

다나 메이어가 ‘이미 세계를 구원한 자’라 불리던 이유는 다름 아닌, 그녀와 그녀의 숭고한 동료들이 이미 한차례 ‘재앙의 잉태’를 막은 이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재앙’은 그 잉태를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세계 어느 곳에서도 확인 가능한 ‘경고 메시지’를 동반했었고, 세계의 모든 헌터들은 그것을 막고자 목숨을 걸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경악스러웠을 것이다.

‘재앙의 잉태’가 시도되고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 한 줄 없이...!

<경고>

ㅡㅡㅡㅡㅡㅡㅡㅡ

*재앙이 잉태되었습니다!

*제13구역 ‘일본’의 각성자들은 재앙의 잉태를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재앙의 현현까지 남은 시간: 39시간 59분.

ㅡㅡㅡㅡㅡㅡㅡㅡ

돌연 그 메시지는 나타났으니까.

‘아마, 놀라서 뒤집혔겠지.’

이서영은 이미 이건우의 입을 통해 이런 일이 일어날 거란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실제로 그것을 직면하자 일순 손끝이 떨려왔다.

그만큼의 충격 그리고 공포.

허나, 놀랄 일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경고!>

분명 전 세계에 수놓여 있을 그 ‘재앙의 메시지’는 실시간으로, 한 번 더 변화했기 때문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

*‘재앙’은 혈천사 ‘미구엘’의 권능을 흡입합니다.

*재앙은 더욱 빠르게 성장합니다!

*재앙의 현현까지 남은 시간: ‘39:32’··· ‘38:51’···‘37:46’...

ㅡㅡㅡㅡㅡㅡㅡㅡ

초 단위로 수십 분씩.

‘재앙의 현현’까지 남은 시간이 그야말로 미친 듯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서영과 홍진웅을 비롯한 이 자리의 ‘지휘’를 맡는 이들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전과 같이 이미 들어 알고 있던 상태였다.

허나, 그럼에도 역시나 너무도 충격적인 이 광경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잉태가 시도된다는 경고의 메시지도...

현현까지 남은 시간이 대폭으로 감소하는 이 기현상도...

이 헌터의 세계에서는 전례가 없는 ‘최초의 현상’이었으니 말이다!

아마, 모든 방송사는 저 메시지를 촬영하며 이 기현상을 보도 중이리라.

또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헌터 길드들은 당장 비상 인력을 총집결시켜 어떻게 해서든 이 사태에 대한 대처 방안을 떠올리려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딘가에서는, 이 괴기하기 그지없는 현상을 응시하는 또 다른 ‘악’들은 이제야 수면 위로 자신의 본색을 드러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 저게 무슨...!?”

“재... 재앙이라며, 왜 시간이 갑자기?!”

“뭐야 저게!”

다만 얼마나 많은 방송사가 이를 보도하건, 얼마나 많은 길드의 병력들이 집결하건, 또 혼돈을 틈타 어떤 빌런들이 날뛰건... 그건 모두 나중의 일일 뿐이었다.

“똑바로 집중하고 정면이나 응시해!”

이윽고 이서영은 단숨에 얼굴을 공포로 물들이는 ‘번개 중대’의 대원들을 향해 뱃심을 가득 담은 고함을 내질렀다.

“두려워 떨어도, 비명을 질러도! 바뀌는 건 없다! 우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야!”

정면을 보라.

극악무도한 몬스터 카니발은 아직도 계속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하늘의 저 끔찍한 메시지가 어떤 괴현상을 일으킬지언정 눈앞의 몬스터들에게 끝없이 포격과 총탄 그리고 각종의 마법들을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기억해! 여기까지 온 이상 뒤는 없어! 믿어! 저 게이트에 홀로 뛰어든 이건우를 믿으라고!”

그렇게 당황하는 대원들에게 일갈을 날리며 목소리를 높이던 순간.

-기이이이익!

굵은 강철이 엿가락처럼 구부러지는 것 같은 거대한 굉음이 청각을 마비시킬 기세로 터져 나왔다.

그리고 바로 그 직후,

“역겨운 신력의 냄새 진동하는구나!”

그 주먹 하나가 이서영의 머리에 배는 더 거대한 ‘그것’의 목소리는 들려왔다.

그리고 음속으로 뻗어 나오는 팔.

그 흉측한 가시가 다닥다닥 박힌 팔은 이서영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일격에 터트려버리겠다는 듯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들었다!

-챙!

허나, 이미 ‘백룡도’를 뽑아 들고 있던 이서영은 눈썹도 까딱하지 않고 그대로, 그 흉측한 주먹을 막아냈다.

“호오! 뛰어난 반응속도로다!”

그러나 그 오만방자한 존재는 도리어 입꼬리를 올리고 흰 이를 드러낸다.

“허나! 이것도 막을 수 있겠느냐. 검사여!”

그러자 음속으로 움직이던 주먹은 관절이 없는 것처럼 거꾸로 휘어 이서영의 ‘백룡도’를 뱀처럼 타고 올랐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예측불허의 습격이었다.

이에 철혈검희가 빠르게 ‘백룡도’를 당기며 구불거리던 팔을 베어냈으나,

-쏴아아악!

베어진 ‘그것’ 상처에서부터 핏방울들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며 이서영에게 날아들었다.

쾌속의 권과 반격을 예측한 재반격.

분수처럼 쏟아져 나온 피가 돌연 수백 개의 바늘처럼 돌변해 이서영을 덮쳐온 것이었다!

다만,

“지랄하네.”

공교롭게도 이서영은 눈앞에 들이닥친 ‘흡혈귀’보다 자신의 혈류를 더 자유자재로 흉기처럼 다루던 인간을 잘 알고 있었다.

검성류(劍星流)-유(流), 제2형.

진(眞)-소용돌이.

-채재재재쟁! 채쟁! 채재쟁!

극한의 반사신경을 가졌다고밖에는 보이지 않는 경이로운 반응속도였다.

이서영은 급습과 기습에서 다시 블러핑으로 이어진 반격마저도 말 그대로, ‘보고 대응하는’ 경악을 선보였으니 말이다.

이내 모든 공격을 막아낸 이서영은 정말 갑작스럽게 나타난 눈앞의 ‘흡혈귀’를 당황하지도 않고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비대칭으로 거대한 오른팔. 거기에 박힌 가시들과 새빨간 박쥐 날개. 네가 그거지? 다섯 번째 혈족인지 뭔지 하는 거.”

-촤악!

이서영은 ‘백룡도’에 묻은 끈적끈적한 놈의 피를 털어내고는 여유로운 어조로 그리 말했고 ‘다섯 번째 혈족’이라 불린 흡혈귀는 안면을 채우고 있던 미소를 지웠다.

“하등종족이... 어디 순혈의 귀인에게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너흰 어떻게 한 놈도 빠짐없이 다 그딴 식이냐?”

“무어라...?!”

“맞잖아. 허구한 날 자기가 우월하다느니 대접을 해달라느니 지껄이면서 정작 대접받을 인간의 걸맞은 행동을 하진 않아. 애새끼야? 아니면 병신새끼인거야?”

“말을......”

“말을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아무 데나 나타나서 쓸데없는 짓만 골라서 하는 주제에? 뭐라고? 귀인? 저기요. 이 머저리 같은 족속들아. 내가 제발 부탁하건데...”

-드드득?!

-스릉!

갑작스러운 굉음은 이서영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터져 나왔다.

-채재재쟁!

다만, 이서영이 내뻗은 검은, 소름돋을 정도로 그 크기를 배로 키우던 ‘다섯 번째 혈족’의 오른팔을 막아냈고... 이젠 완전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혈족’을 향해 이서영은 말을 이었다.

“그만 좀 오만하면 안 되겠냐? 니들 그 말투만 듣고 있으면 속이 뒤집혀! 알아?!”

-착!

경쾌한 착검.

-드득!

흉측하게 비대해진 팔로 붉은 쐐기를 잔뜩 곤두세우는 혈족.

이서영이 무시무시한 발검과 응집된 혈속성의 오러는 또다시 제대로 맞부딪혔지만...!

“크으윽?!”

이번에도 신음을 토해내는 건, 이서영이 아니었다.

붉은 쐐기를 있는 대로 도륙 내고 ‘다섯 번째 혈족’의 가슴팍에 사선의 상흔을 남기고 지나간 백룡도.

그 압도적인 힘과 속도의 차이는 새삼 오만하게 세상을 내려다보던 ‘다섯 번째 혈족’에겐 큰 충격이었다.

‘이런 녀석이... 대적자 말고 또 있었다고?!’

그 기세와 힘 그리고 압도적이길 뛰어넘어 절대적인 그 속도는 무려 혈족의 ‘다섯 번째’ 좌를 지키고 있는 그 순혈의 흡혈귀조차 혀를 내두를 수준이었다.

-착!

그때, 무식한 육탄전 끝에 한발을 뒤로 빼고 숨을 고르던 흡혈귀의 귓가에 스치는 경쾌한 소음.

오싹!

그 소음을 듣는 것과 동시에 ‘다섯 번째 혈족’은 본능적으로 크게 도약해 단번에 반투명한 벽, ‘게이트’ 너머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쳇!”

그러자 자세를 낮추고 오직 발검에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이서영은 혀를 찼다.

“좀 도발하면 쪽팔려서라도 도망치지 않을 줄 알았더니... 아예 겁을 먹어 버렸네?”

긴장감도, 분노도 없이 그저 아쉽다는 듯한 얼굴. 그 모습은 마치 수면 아래의 물고기를 낚으려는 노련한 낚시꾼과 같았다.

-뚝.

‘다섯 번째 혈족’은 그 극악무도한 철혈검희의 모습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저기, 시퍼런 신력의 비를 내려 수천의 피조물들에게서 ‘진조의 축복’을 씻어내리고 있는 저 성녀를 제거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나면 자연히, 평범한 마공학 무기에는 꿈쩍도 않는 ‘피군단’이 그 압도적인 물량으로 저들을 휩쓸어버릴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대체 눈앞의 저 작은 괴물은 뭔가.

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기에 ‘다섯 번째 혈족’이 내지르는 힘은 그대로 역이용당하고, 불시의 기습에는 모조리 반사신경만으로 대응할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인정하마. 네년은 나보다 강하다.”

-퍼억!

호전적인 성품의 ‘다섯 번째 혈족’은 끝끝내 인정하기 싫은 마음에 자신의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도 저 ‘성녀’를 서둘러 죽이라는 어머니의 명을 받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땅에 자신의 오른팔을 내리꽂았다.

-꿀럭?!

그러자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로 단번에 그 크기가 줄어드는 팔.

단, 그 팔에서부터 빠져나온 혈속성의 정수는 돌연 땅에서부터 솟아오르며 문의 형상을 취했고,

“허나! ‘우리’는 네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할지니...”

그 도깨비의 머리와도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던 문이 위아래로 입을 쩍하고 벌리자, 그 내부에서는 ‘다섯 번째 혈족’과 같이 고위 흡혈종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붉은 박쥐 날개’를 가진 흡혈귀들이 걸어 나왔다.

“일곱, 여섯 그리고 다섯 번째 혈족인 나와......‘네 번째’의 좌를 지키고 계신 누님께서도 당도하시니...!”

이윽고 ‘다섯 번째 혈족’은 차례로 걸어나오는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불렀고 마지막으로 여인의 모습을 취하고 있던 흡혈귀가 ‘문’을 통과해 나오는 순간...

“읏?!”

“가, 갑자기 숨이...?!”

“허억! 숨이 안 수, 숨이! 쉬어지질 않아...!”

그 어떤 굉음이 터져나오더라도 오롯이 ‘몬스터 카니발’의 방향만을 응시하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번개 중대’의 대원들이 비명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

동시에 음침한 웃음소리를 내뿜으며 한 걸음, 한 걸음 게이트의 경계로 다가오는 여인.

상위 흡혈종임을 증명하는 두 쌍의 박쥐 날개는 타인들의 비명에 반응하듯 붉은빛을 반짝거렸다.

이윽고 무려 ‘네 번째’ 좌를 지키는 진조의 자손은 새하얀 얼굴에 홍조를 띠운 채,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 더더욱 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그저 가만히 서서 거무죽죽한 비웃음을 짓고 있을 뿐임에도, 전황은 급작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아. 아해야. 당찬 아해야.”

-치익! 대령님! 비상입니다. 불특정 다수가 동시다발적인 호흡곤란을 일으킵니다!

-저, 전사장! 저주일세. 갑작스러운 저주가... 이 교토 일대에 범람하기 시작했어!

-나, 남궁연 대위님! 해, 해주의...! 해주의 기적이 필요합니다!

-서, 성녀님은 몬스터 카니발이 끝날 때까지 비를 내리셔야 한다고! 그럴 여력 없어!

비상시를 제외하고는 절대 켜지 말자고 서로 다짐했던 무전.

허나, 저 ‘네 번째 혈족’의 출현과 동시에 이서영의 옆을 지키던 홍진웅의 허리춤에서는 미친 듯이 많은 무전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이건...”

지금껏 다른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오직 ‘몬스터 카니발’의 지휘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던 홍진웅이었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었다.

이윽고, 고혹적인 표정으로 오직 이서영만을 응시하던 ‘네 번째 혈족’은 두 쌍의 날개를 쫙 펼치며 다시 입을 여는 것이다.

“너뿐이란다. 이 아찔한 균형이 무너져 피조물들이 날뛰는 걸 막을 자는... 오직, 너뿐이야... 아해야. 오너라. 이리로 오너라.”

그녀는 무척이나 간절한 얼굴로 계속 이서영을 유혹하고 있었다.

이서영이 저 패널티를 감수하며 게이트로 진입하고 나면, 저기 서 있는 셋이나 되는 ‘혈족’을 막을 자는 사라진다.

허나,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결국 ‘몬스터 카니발’을 가두는 마공학의 감옥은 무너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어차피 이 현장의 모든 이들은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이리로 가지도, 저리로 가지도 못하는 말 그대로의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그저 이 땅에 발을 디뎠을 뿐인데 이 정도라니...’

대체 저 ‘네 번째 혈족’이 가진 저주의 권능은 얼마나 강대하기에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나름 흑마법학도, 신성력의 원리도 오랜 기간의 탐구를 통해 퍽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터득한 홍진웅마저 그 경지와 높이를 헤아릴 엄두가 나지 않는 레벨이었다.

-터벅.

그때,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걸음을 내딛기 시작하는 이서영.

“아, 안됩니다! 아무리 대령님이라도 ‘신력’의 보호가 없는 저 공간은 위험합니다!”

홍진웅은 곧바로 몸을 움직여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이미 고민을 끝낸 이서영은 노랗게 번뜩이는 눈동자로 도리어 그런 홍진웅을 노려보았다.

“비켜”

“안됩니다!”

“비키라고.”

“대령님이 자리를 이탈하시면... 전멸입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똑같아.”

-치직!

무전은 아직도 빗발치고 있다.

사방에서 치솟는 전란의 불길은 줄어들 기미가 없고,

끝없이 괴성을 토해내는 몬스터들을 약체화시키는 ‘수신의 비’는 수십 개나 되는 붉은 게이트를 광범위하게 뒤덮어야 했기에 한눈을 팔 틈이 없었다.

“이건, 이미 내가 건우에게 부탁받았던 일이야.”

‘이건우’는 이 거대 게이트가 길목을 틀어막기 전에 이미 홀로 적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자신과 함께 천일의 수행을 쌓은, 사실상 대한민국의 2인자인 이서영에게 ‘밖’의 작전을 부탁한다고.

그렇게 ‘안’과 ‘밖’의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어 균형을 이루면, 분명, ‘재앙’마저도 이겨낼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될 것이라고 말이다...!

“대령님!”

“그러니 비켜. 내가 알아서 저 흡혈귀의 저주를 막을 테니까... 네가...”

“그, 그게 아닙니다. 대령님. 저, 저기!”

갑작스레 목소리 톤이 달라진 홍진웅.

그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으며 반투명한 이 거대 게이트의 벽 너머, 교토 내부를 응시하는 것이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이서영이 주변을 쭉 훑어보자.

모든 ‘번개 중대’의 대원들이,

‘몬스터 카니발’의 피조물들이,

이윽고 추악한 미소와 함께 이서영을 유혹하고 비웃던 순혈의 흡혈종들마저...

오직 허공을 바라보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했다.

허나, 이서영이 그들을 따라 고개를 들자...!

하늘,

이 어두운 새벽의 하늘을 정확히 반으로 가른, 거대하고 굵직한 ‘선’이 눈에 들어왔다.

그 투박한 단면과 울퉁불퉁한 외형.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는 생소할지 모르나 오직 이서영만은 단번에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한 자루의 ‘검’이었다.

이어서 이 새벽의 하늘을 매섭게 물들이는 엄청난 광원과 함께...... 그 소리는 들려오는 것이다.

-파직! 파지지지지지직!

-콰지지직!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푸른 전격, 황금빛 벼락 이윽고 새하얀 광체의 번개가 그 ‘검’의 끝부분에서 터져 나오면...

“떠, 떠떠! 떨어진다!”

“저게 뭐야!”

-콰아아아앙!

대원들의 경악하는 비명과 함께, 거검(巨劍)이자 하늘 거인의 유물.

“저건, 티탄의 검이잖아?!”

바로, 뇌제 이건우의 무구 중 하나인 티탄의 검은 이 열도 자체를 반으로 베어가를 기세로 거대한 유성처럼 떨어지는 것이었다.

검이 바라보아야 할 곳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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