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30화.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천국제공항에는 헌터들의 편의를 위한 특제 마강석으로 구성된 훈련장이 존재했다.
정식 ‘도전’을 행하기도 전에 멋대로 ‘결투’를 청한 올리비아 스트라우스.
“우리 뇌제님 용기가 가상하시네?”
현대판 황족이라고도 불리우는 ‘스트라우스’ 일가의 맏손녀는 기자들이 안전을 위해 대피소로 자릴 비우자 곧바로 말을 놓았다.
‘결투’를 청했으나 우아하게, 고양 있게 훈련장까지 걸어오던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어조, 얼굴은 아직도 웃고 있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급작스럽게 건조해졌다.
“듣자 하니 나랑 나이도 엇비슷하다던데... 대체 얼마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왔으면 이렇게까지 세상을 모르는 거니?”
일평생을 온실 속 화초로 살아온 자의 표본인 그녀가 먼저 그런 말을 하다니.
나는 듣는 귀는 없어도, 보는 눈이 많은 이 자리에서 그대로 박장대소할 뻔했다.
“글쎄. 세상을 모르는 건 어느 쪽일까.”
“하아? 그럼 뭐, 허울만 남은 제(帝)급 헌터 격상을 빌미로 감히 선대 랭커들을 푸대접한 인간이 이 세상을 아주 충분히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거니?”
말을 듣자 하니 역시 그녀는 내가 랭커들을 멋대로 오락가락하게 했다는 사실 자체가 퍽 불만인 모양이었다.
재앙, ‘태고의 흡혈귀’의 예고.
거기에 ‘2대 성녀’의 존재가 이번 흑룡 사태를 통해 알려지며 바티칸에서는 수상한 움직임마저 포착되었다는데...
고작, 일주일을 기다리게 하고 또 한국행 비행기를 보낸 것이 뭐가 그리 불만이란 말인가.
‘심지어 검성에게 듣기론, 그 합법적 휴일이나 다름이 없는 일주일간 중국 곳곳을 관광하고 다녔다던데...’
나는 눈앞의 한심하기 그지없는 ‘대마법사’를 지켜보며 자연스레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봐. 뇌제님. 지금 내 앞에서 한숨을 쉬는 거야?”
그런 나를 응시하는 올리비아의 눈은 어김없는 황녀의 시선이다.
자신의 앞에서 허락도 없이 한숨을 쉬었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 무례하다는 그런 눈 말이다.
전생의 올리비아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땐 ‘불사왕’으로부터 시작된 전쟁의 화마가 미국에까지 닿았던 시기였기 때문일까.
올리비아는 이보다 더 총명했고, 현명한 지도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내가 아는 그녀는 지금보다 다섯 살은 더 먹은 사람이었으니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
나는 미간을 살짝 좁힌 그녀를 향해 또한번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됐고, 바로 시작하죠.”
“또 한숨을... 그래. 좋아. 이 기회에 확실하게 알려주면 되는 거니까. 그렇지 뇌제님?”
“뭐... 좋을 대로.”
나의 대답은 끝내 무미건조했고 화가 많은 올리비아는 눈을 부릅뜨며 스태프를 꽉 쥐었다.
***
‘스트라우스’일가에서 행하는 가문의 이름을 건 ‘결투’의 룰은 언제나 같다.
한쪽이 일격을 날리고, 다른 한쪽은 이를 재주껏 피하거나 막아내야 한다.
무투가와 무투가의 싸움이라면 초마다 공수가 변하고, 마법사와 마법사의 전투라면 마법의 발현 1회당 공수의 순서가 변하는 것이다.
“듣자 하니 당신도 검사이기 이전에 전격 방출계 헌터라고 하던데, 마법전의 룰을 적용해도 상관없겠지?”
물론 이건우의 대답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좋을 대로 해라.”
대체 얼마나 자신이 있기에 저렇게 여유로운 태도를 끝까지 유지하는 걸까.
올리비아의 전속 집사이자 같은 세계 랭킹 8위의 헌터, 스티븐 클라크는 줄곧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인 이건우를 보며 그런 의문을 떠올리게 되었다.
사실 겉보기에 이건우는 그렇게 특별한 헌터처럼은 보이질 않았다.
혈속성을 다룬다고도 하고, 신력을 다룬다고도 하며 검술에 조예가 있다는 말도 많았고 실제로 그의 전투 영상에는 빠짐없이 검이 등장하곤 했다.
이윽고 그 모든 능력을 이어주는 그의 근간, ‘전격’은 어느 방송사나 신문사에서도 뒷전으로 취급하고는 했던 것이다.
‘그러니 사실상, 그의 전격이 얼마나 무시무시할지는 미지수. 그런데 말괄량이 아가씨는......’
올리비아는 무투전이 아닌 마법전의 룰을 적용하자는 제안에 이건우가 동의하자마자 이미 자신이 다 이겼다는 듯 표정으로 입꼬리를 씰룩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스티븐은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하아, 혹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는 무투전으로 하자고 끝까지 우기면 어쩌나 했는데, 마법전 룰을 적용하기로 했으니 이건 뭐 볼 것도 없겠군. 안 그래? 무왕 양반.”
스티븐의 옆에는 바보가 하나 더 있었다.
“...염제. 세계 헌터 연맹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들이 뇌제를 3위로 등록했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겠죠.”
“아휴. 꽉꽉 막혀있기는. 무왕. 그 정돈 나도 알지. 하지만 그건 검을 뽑아 들고 서로에게 달려드는 전투에 한한 이야기고... 마법전은 오직 마력. 마력의 승부에서 올리비아 아가씨가 설마 비참하게 패배할 거라고 생각하는 겐가?”
“물론, 그건 아니지요.”
솔직히 스티븐으로서도 무슨 생각으로 이건우가 마법전을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로써 확실해진 것은 세계 랭킹 3위에 이름을 올린 이건우는 올리비아 아가씨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리라는 사실이었다.
“그럼 간다!”
잠깐의 기다림 끝에 무지막지한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올리비아의 스태프.
직후,
-쿠르륵! 쿠르르륵!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허공에 맺히며 보는 이로 하여금 시야를 앗아갈 정도로 밝은 빛을 방출하고 있었다.
뇌제가 얼마나 강하건, 마법전에서 올리비아를 상대하며 고전을 면치 못하리라 확신한 이유가 바로 저것이다.
“휘유. 아가씨가 많이 화나셨나 본데? 처음부터 제대로야.”
화룡 베르타스와 지룡 아타스의 드래곤 하트를 심장에 융화시킨 희대의 ‘반인반룡’.
올리비아는 이 지구상의 그 어떤 마법사들보다도 강대한 땅과 불의 마력을 다루는 대마법사였다.
그리고 눈앞의, 소형 태양이라고까지 여겨질 법한 저 무식한 광원의 정체는 초고온의 화염과 단단한 대지 마법이 뒤섞여 만들어진 최고위 융합 마법...
“라바 스톰!(Lava Storm)”
마그마 폭풍이었다.
-쿠르르륵!
점도 높은 용암이 스태프의 움직임에 맞춰 허공을 가르며 나아가는 라바 스톰.
그것은 오직 그 여파만으로 이 훈련장의 ‘특제 마강석’을 녹여버릴 정도로 엄청난 열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티븐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의외의 모습은 올리비아가 아닌 뇌제, 이건우 쪽에서 나타났다.
“저···. 저 녀석?”
갑자기 놀란 얼굴로 목소리를 높이는 염제.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후우우.”
당연히 라바 스톰을 회피하리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두 눈을 감고 숨을 고르고 있는 이건우의 모습이 보였다.
“...왜 피하질 않는 거지?”
피할 시간이라면 충분하다.
라바 스톰은 투사체의 속도가 느린 기술이니까.
단, 최고위 융합 마법이라는 그 명칭에 걸맞게 그 위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단 말이다.
이건우도 결국 자신의 힘을 키운 방식은 ‘검’.
그런 무투계의 헌터가 저걸 받아낼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검도 뽑지 않고, 뭔가 특별한 방어 마법을 구축하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리지도 않았다.
신력도,
혈속성의 마력이나 오러도,
하물며 그의 근간인 ‘전격’마저도 끌어올리질 않은 것이다.
‘자, 자살이라도 할 셈인가!’
이에 경악하는 무왕 스티븐은 자신이 ‘흑장갑’에 빠르게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는데···!
“흡!”
내쉬던 한숨을 단숨에 들이키는 이건우.
그런데, 그 작고,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행동과 동시에 곧게 서 있던 이건우의 몸 주위에서 빛이 번뜩였다.
-팟!
귀를 찢는 굉음도, 눈을 마비시키는 빛도, 정말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터져 나온 시퍼런 ‘전격’.
무왕 스티븐은 그 광경을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라바 스톰’과 마주할 때까지만 해도 무광무음.
그것도 무왕 스티븐과 염제 압둘이라는 두 랭커가 이건우가 마력을 전혀 운용하지 않고 있었다고 생각했을 만큼 미칠 듯이 은밀하고 치밀하게 ‘제어’된 마력이었던 것이다.
허나, 정말 놀라운 것은 그게 시작이었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시퍼런 전격의 벽.
그런데, 그 ‘벽’에 닿은 라바 스톰은...
-쿠르륵!
-파지지지직!
단순한 마력 덩어리로 보이는 그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아니, 모습을 드러낸 그 반투명한 시퍼런 ‘전격의 벽’에는 아주 작은 흠조차 생기지 않았다.
“무, 무슨......!”
동시에, ‘전격의 벽’ 앞에 허무하게 비산하는 라바 스톰을 보며 경악하는 올리비아.
그녀 역시 저 미친 듯이 은밀한 마력 운용과 얼핏 유리창처럼 보일 뿐인 ‘벽’의 내구성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다.
올리비아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완전히 벙찐 얼굴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결투’는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정신 차려라. 이번에는 이쪽 차례니까.”
벙쪄 있던 올리비아에게 굳이 담담한 목소리로 경고를 날리는 이건우.
아직도 그는 양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고 제자리에 그냥 서 있을 뿐이었다.
허나, 이제 그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은 모습에 방심하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으나 그는 이미 운용하고 있다.
아직도 눈앞에서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저 시퍼런 ‘전격의 벽’과 똑같이, 무언가를 말이다...!
이건우의 경고에 낯빛이 어두워진 올리비아는 자리에 섰고 자신의 애장(愛仗), 천년 고목의 스태프를 꽉 쥐었다.
직후,
화룡 베르타스와 지룡 아타스의 심장이 대마법사의 고유 마력과 함께 박동하며 일반인의 시선에도 보일 만큼 막대한 양의 마력이 적색, 갈색으로 빛을 발하며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것이다.
그것은 최고의 방어이자 공격기, 동시에 성능 좋은 탐색 마법의 일종인 마력의 실체화.
어디서 공격이 날아들던 실체화된 마력을 폭발시켜 공격의 궤도를 바꿀 수 있고, 마찬가지로 언제든 적에게 이 마력을 날려 공격도 가능한 만능의 마법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주위에 쭉 깔아두고 빠르게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올리비아.
“...헉!”
그런데 돌연, 그녀는 다시 경악하는 눈으로 자신의 머리 위를 올려다보며 숨을 멈췄다.
‘저 위는 천장이 뻥 뚫려 그냥 하늘뿐일 텐데 아가씨는 뭘 보신...?’
무왕 스티븐이 그런 의문을 품기도 잠시.
-팟!
아주 얇고 가느다란 번개 줄기 한 가닥이 하늘에서부터 올리비아를 향해 내리 꽂히고,
“제대로 막아라. 올리비아.”
그 직후···!
“정말 죽을 수도 있으니까.”
-콰지이이이이이이익!
대낮의 하늘에 숨겨져 있던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
대마법사 올리비아 스트라우스.
그 어마어마한 호칭에 걸맞게, 전장에 기암괴석을 날리며 수백만의 군대가 우습다는 듯 천하를 호령하던 그녀를 만나, 그녀의 마법을 보고 내가 처음 떠올린 생각은 우습게도 ‘뭐가 이렇게 느려?’였다.
마력을 운용하는 그 속도도, 최고위 융합 마법을 구현해내는 속도도, 하물며 그 투사체가 내게 날아드는 속도마저도...
‘느려도 너무 느리잖아...’
한심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현재 올리비아가 발현한 마법은 그야말로 학술적이고 이론적인 마법학의 연구 결과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무식하게 위력만 끌어올리고, 캐스팅에도 더럽게 오랜 시간이 들어간다.
즉, 뭐냐.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거다.
“너의 마법은 전혀 실질적이지 않다.”
-파직, 파지직!
아직도 몸을 덜덜 떨고 있는 올리비아.
그녀는 내가 ‘느려도 너무 느린’ 마법을 기다리는 동안 허공에 수놓아 둔, ‘뇌옥(雷玉)’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렇게 대놓고 뭐라고 핀잔을 줘도, ‘감전’ 상태에 빠져 아무 대답도 내놓지 못할 만큼 말이다.
“‘스트라우스’의 맏손녀로 살아온 너도 언젠가 홀로 수많은 무인과 생사를 넘나드는 혈투를 벌이게 될 날이 올 거다. 언제까지고 저 ‘무왕’이나 ‘스트라우스’의 인간들이 호위해주리라 생각하는 건 좋지 않을 거야.”
‘결투’는 그것으로 끝났다.
단 한 번의 라바 스톰과 딱 한 번의 뇌옥 폭격.
올리비아는 내가 완벽한 ‘제어력’을 활용해 그 빛, 소리, 기운을 모두 숨겨두었던 뇌옥을 막아내지 못했고, 결과는 보는 그대로였다.
입을 떡 벌리고, 일격에 쓰러진 올리비아와 나를 번갈아 보는 ‘염제’ 압둘.
긴말을 마친 내가 휙 돌아서자 곧바로 올리비아를 보필하는 ‘무왕’ 스티븐.
나도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는 ‘신비’의 에이바는 그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대피소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을 기자들의 얼굴들은 굳이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밖으로 나가면 한국의 헌터 협회에서 대기시켜둔 리무진이 있을 겁니다. 그걸 이용하세요. ‘도전’은 이틀 후입니다.”
나는 그렇게 알려야 할 정보들만 전달하고서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만나자마자 장갑을 집어 던지는 몰상식한 이들을 굳이 내가 직접 대접해야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죠.”
“어... 그래.”
직접 이 결투를 보고도 떨떠름한 표정의 이서영.
그녀도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천일간의 훈련 상대가 그 500년 묵은 ‘혈마’였기 때문이었을까.
무려 세계 랭킹 4위에 빛나는 대마법사 올리비아가... 어린 아집이나 부리는 꼬마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 정도의 압도적 격차는 지난 ‘천일’을 적극 활용해 육신에 융화시킨 ‘블랙 드래곤 하트’의 영향이 크긴 했다.
이젠 몇만이라는 압도적 수치를 자랑하는 ‘제어력’은, 마법사들의 정점이라는 올리비아의 ‘마나 감응력’마저 여유롭게 속이는 경지에 다다랐으니까.
‘조금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혈마에게 전수 받은 혈공(血功)은 그 티끌도 발현해볼 법한 기회가 없었다.
다만, 그 올리비아를 상대로 이만큼 압도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이젠 정말로 그 ‘재앙’과의 전투를 벌일 준비가 되었다는 증명이리라.
그래. 난 드디어 준비를 마쳤다.
난 이를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
-추륵! 촤아악!
끈적끈적한 습기가 사방을 가득 채운 제단.
그 제단을 둘러싼 거무죽죽한 해골들은 매달려 있는 그 자체로 형이상학적인 형태로 배열이 되어 있었고.
-캬하하하학
-크흐흐흐흐흐!
수많은 원령들은 그 일대를 빠르게 회전하며 기괴한 비명 따위를 토해내고 있다.
무언가의 가죽.
무언가의 내장.
그리고 또 무언가의 뼈.
보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소름이 돋을 법한 그 광경 속에서 ‘붉은 눈’의 문양이 그려진 새카만 로브를 입은 자는 두 손을 들어올린다.
“아아. 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불규칙한 비명과 절규.
그러나, 그 외침에 담긴 해괴망측한 기운은 이 거대한 제단의 모서리를 장식하고 있던 양초의 빛을 적색에서 녹색으로 바꿔버린다.
-촤아아아악!
일렁이는 녹색 불꽃.
이내, 끈적한 점액질의 막을 찢으며 누군가의 팔이 쭉 뻗어나왔다.
-텁.
이에 그 새카만 로브의 여자는 그 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아아. 왕이여. 나의 왕이시여...!”
이내 그녀가 광기 어린 눈으로 팔을 응시하며 쭉 잡아당기자, 그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한 남자의 나체였다.
징그러운 것들을 전신에 덕지덕지 묻힌 그 상태 그대로 자리에 우뚝 서는 남자.
그 반짝이는 은발이,
그의 번뜩이는 벽안이, 그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준비는 끝났다.”
불사왕, 프리드리히 파울라스.
은하수가 내리고 약 보름 만에 그 살아 숨 쉬는 재앙은 다시금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남은 계획은 오직 하나...”
“왕의 대적자는 ‘태고의 흡혈귀’를 맞이하기 위해 정신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
휙, 하며 긴 로브를 몸에 휘감는 불사왕.
이윽고 뼈와 가죽과 뭔지 모를 진액과 원혼으로 구축된 ‘문’을 연 그는 선언했다.
“약속의 그 날, 신성 바티칸과 유럽 전역은 불타오르리라.”
‘문’ 너머에서 오직 왕의 부활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12만 5천 7백의 정예 언데드들과 3천이 넘는 고위 언데드들을 향해서...!
“죽음은, 나의 것이다.”
도전자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