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129화 (129/175)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29화.

별빛이 반짝이던 밤이었다.

성흔의 보유자와 비슷한 은발을 가지고 푸른 하늘과도 같이 맑은 벽안의 소유자. 프리드리히 파울라스는 지평선이 내려다보이는 산맥의 중턱에 걸터앉아 먼 곳을 보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다나, 난 말이다······.

네크로맨서와 성녀.

전혀 다른 운명을 타고난 두 각성자는 같은 곳에 앉아,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같은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이 세계가 앞으로도 아름다웠으면 해.

그런 말을 꺼낸 프리드리히 파울라스의 목소리는 묘하게 애절하여, 대성녀 다나 메이어는 말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때, 그의 옆자리에 함께 앉아 있던 다나 메이어는 분명 자신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그럼에도 다나 메이어는 알았다.

프리드리히는 이미 3대가 넘는 회귀자들의 길잡이를 자처한 자신이 처음으로 ‘존경’이라는 감정을 느낀 각성자였다는 걸.

허나, 그렇기에 ‘주신’이 파편적으로 추체험을 선사하는 그 미래도 과거도 아닌 그 ‘다중우주’ 속에서 그녀는 더더욱 괴로웠다.

죽음을 다루는 네크로맨서지만, 이 세계에 아름다운 생명을 가득 꽃피우려 했던 각성자. 프리드리히 파울라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성녀가 존경했고 진심으로 따르고자 했던 그 헌터가 타락하는 과정을 그의 옆에서 똑똑히 지켜봐야만 했으니 말이다.

-재앙을 무찌르기 위해선 힘이 필요해... 절대적인 힘이...!

-젠장...! 어째서 배신하는 거지? 눈앞의 이익을 위해 재앙과 손을 잡다니...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회차를 거듭하고 거듭한다.

-제기라아아알! 쓸모없는 것들! 살려둬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 내란을 일으켜?

-...

-난, 헌신했다. 찢어진 걸레짝처럼 버려지는 한이 있어도 헌신하고 또 헌신했다. 그런데도 그들이 나의 등에 칼을 꽂는다면......

세계는 반복되고 반복된다.

다나 메이어는 회차를 거듭할수록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던 각성자, 프리드리피 파울라스와의 거리가 멀어져만 갔고.

끝내, 마지막 15회차에 도달한 프리드리피 파울라스는...

이미 사신과의 거래를 통해 평생의 골칫거리였던 ‘마나 불능’를 극복해낸 ‘불사왕’은...

이미 다나 메이어의 ‘적’이 되어 있었다.

이윽고 그는 나지막이 고했다.

숱한 노력과 천년이 넘는 기억 속에서 찾아낸 자신만의 결론을 말이다.

-이 세계는 철저하게 통제되어야 한다!

인류의 궁극적인 구원을 막아선 것은, 언제나 같은 인류였기에.

‘힘’을,

‘지혜’를,

‘젊음’을,

‘생명’을 빌미로 재앙의 편에 서는 그 극악무도한 배신자들로 인해 세계는 몇 번이고 멸망을 반복했기에.

프리드리히 파울라스는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이었다.

‘전 인류의 언데드화’라는 어긋난 결론에.

허나, 비록 ‘추체험’이고, ‘주신’이 선별하여 보여주는 ‘편집된 기억’뿐이었을지라도, 대성녀 다나 메이어는 원했다.

아직 ‘적’이 아니던 시기의 청년.

인간을 권속화를 시킬 때마다 그의 영혼을 위한 위령제를 올리던 순박하고 마음씨 고운 청년 프리드리히가 다시 돌아올 수는 없는 걸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끝내, 다나 메이어가 프리드리히 파울라스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던 말을 꺼낸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나를 믿어라. 난···. 그 누구의 삶도, 필생을 위한 노력도 소홀히 하지 않은 미래를 꿈꾸고 있으니까···!

그는 뇌제.

사실상 대성녀와는 일평생 연이 없던 동향의 작은 국가 대한민국의 희망, 이건우였다.

그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을 전기고문 해야만 성장할 수 있는 최악의 전격 마력을 타고났음에도, 그 한계를 극복하고 끝내 인류의 창이 되었던 자.

특이하다 못해 특별할 정도로 이미 죽어 사라진 이들을 기억하는 자.

그리고, 역대 넷이나 되는 회귀자들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세계의 진실’에 닿은 자.

냉정히 그가 가진 자질은 둔재 그 이상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올곧은 의지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새로운 신화를 써 내려갈 천재의 것이었고...

오직 의지와 노력만으로 쉼 없이 달리고 달려 그는 실제로 다른 재능의 천재들을 뛰어넘었다.

타고난 무언가가 없는, 그런 그이기에...

-난, 5대 재앙을 모두 쓰러뜨릴 것이다.

도리어, 그 대단한 프리드리히조차 불가능했던 일을 해낼 수 있진 않을까......

홀로 남은 대성녀는 그렇게 이 시간도, 공간도 뒤엉킨 ‘아카식 레코드’의 유적 속에서 방금까지 뇌제 이건우가 서 있던 자리를 응시해 보았다.

그는 말했다.

-나를 도와라. 두 번째고, 세 번째고 하는 막말도, 후대에 폭탄을 떠넘기자는 헛소리도 관두고, 이젠 진정으로 이 세계를 구하는 거다. 다나 메이어!

그 말을 들은 대성녀는 울었다.

그냥 눈물을 뚝뚝 흘린 것도 아니고 제자리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다.

창피하다 못해 우스꽝스러울 지경이었다.

다만, 그 눈물을 통해 다나 메이어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것이, 진짜 듣고 싶던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꿈’

이미 현실의 시간이 20년 넘게 흐르도록 다나 메이어는 ‘꿈’과 ‘꿈’을 오가며 셀 수 없는 시간을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야 알았다.

그녀는 드디어 자신이 이 긴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 되었다는 걸.

차갑게, 자신의 결의를 내비치고 휙 사라져버린 뇌제 이건우.

그녀는 이윽고, 시간이 멈춘 듯 정지해 있던 신성 바티칸을, ‘누구’를 위해 움직여야 할지 결정을 내렸다.

***

새로운 제(帝)급 헌터의 등장을 축하하는 축하파티.

뇌제의 정식 인터뷰와 환영식이 있은 지 무려 보름 후···.

중국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최고급 항공기 내부에서는 이제 막 성인이 되었다 해도 믿을 법한 앳된 여인의 격한 항의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솔직히 이건 아니지 않아?! 아저씨,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치?!”

그녀는 어찌나 흥분했는지.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스태프를 좌우로 마구 흔들며 볼멘소리를 내고 있었고, 그녀의 옆에는 구김 없는 집사복을 입고 있는 남자가 서 있다.

“올리비아 아가씨. 우선 진정하십시오.”

집사복을 입은 남자는 노련하고 능숙하게 투정을 부리는 아이를 달래듯 말했으나, 올리비아라 불린 그녀는 되레 남자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더 높였다.

“아니! 아니! 진정 못 해. 내가 얼마나 바쁜 몸인데, 일주일이나 대기를 시켜놓고도 갑자기 ‘도전’의 장소를 베이징에서 서울로 갑자기 바꿔? 그 이건우라는 놈, 진짜 미친놈 아냐?”

“아가씨... 말을 가려주시길 바랍니다. 이곳에는 저희 ‘스트라우스’의 인간만 있는 게 아니니 말입니다.”

스트라우스.

이 세계에서, 그 명칭이 가리키는 단체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세계 최초의 드래곤 슬레이어이자 미연방을 한데 묶어낸 히어로. 제이슨이 창시한 길드 연합체의 우두머리.

초거대 길드 연합체 ‘제이슨 스트라우스’.

그리고 지금 불만 가득한 얼굴로 툴툴거리기 바쁜 그녀의 이름은 올리비아. 다름 아닌, 제이슨 스트라우스의 장손녀이자 세계 헌터 랭킹 3위‘였던’ 현 4위. 대마법사 올리비아 스트라우스였다.

“어이, 스티븐! 거 아가씨 말씀 하나도 틀린 것 없는데 뭘 훼방을 놓고 그러나. 이건우인지 저건우인지. 감히 ‘도전’을 위해 찾아온 랭커들을 홀대하다니... 솔직히 미친 거 맞잖아.”

그리고 그런 올리비아와 집사간의 투닥거림에 끼어드는 흑색 피부의 남자는 염제(炎帝) 압둘 라자흐 역시, 현 헌터 랭킹 6위에 달하는 강자 중의 강자였다.

“그치? 그치? 거봐 아저씨! 이건 이건우 그놈이 잘못 한거라니까? 우린 랭커야.”

“그래도 품위를 지키셔야 합니다. 아가씨.”

“아저씨! 솔직히 아저씨도 랭커인데. 짜증 나잖아. 우리의 하루가 얼마짜린데!”

“...”

거의 휘두를 것처럼 거대한 스태프를 마구 흔드는 올리비아 스트라우스.

그런데 줄곧 그녀를 진정시키던 집사, 스티븐 클라크 역시 그녀의 말을 부정하진 못하겠는지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새로운 제(帝)급 헌터의 등장은 자연스레 세계 헌터 랭킹의 변동을 일으키고, 랭킹의 변동은 관습적으로 ‘도전’을 촉구한다.

‘도전’이란, 최초에는 세계 헌터 연맹의 판단에 불만을 가진 랭커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마련된 룰이었지만, 시대가 흐름에 따라 그 도전은 일종의 정치 경제적인 이유를 동반하게 되었다.

고등급 헌터의 수는 곧, 그 나라의 안정성.

안정성을 확보한 나라는 경제적으로도 많은 투자를 받게 되고 그렇게 늘어난 부는 다시금 그 나라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이같이, 이 시대는 랭커의 유무와 수, 혹은 그 순위를 통해 국가의 희비가 엇갈리는 시대.

그렇기에 랭커들은 앞서 언급된 ‘도전’을 조금 다르게 이용하게 된다.

새롭게 순위가 상승한 랭커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선보일 기회를,

밀려난 랭커에게는 아직 자신의 건재함을 알릴 기회로 ‘도전’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라면 비등하게 싸우다가도 순위에 맞춰 밀려나는 게 관례지만...... 솔직히 이런 취급을 받고 그냥 져줄 순 없는 거잖아. 그치 염제 아저씨?”

“아이고, 우리 올리비아 아가씨가 잘 아시네. 이걸 그냥 넘어갔다간, 다른 랭커들 사이에서 우리가 웃음거리가 되겠지. 안 그런가? 무왕 양반, 그리고 신비 처자.”

올리비아 스트라우스와 한참 쿵짝을 맞춰 떠들던 염제, 압둘 라자흐는 돌연 고개를 돌리며 동의를 구했다.

이에 한참 전부터 올리비아의 옆을 지키던 8위의 랭커, 무왕 스티븐 클라크는 말없이 이마를 짚었고,

비행기에 탑승하던 순간부터 구석 자리에 앉아 입을 열지 않던 5위의 랭커, 신비의 에이바 리는 이번에도 창밖의 하늘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런 미적지근한 반응들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찬 염제.

그는 다시금 말이 잘 통하는 4위의 랭커, 올리비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아가씨. 이참에 그 뇌제놈의 코를 확 짓눌러 버리는 건 어때. 응?”

“꺄아아! 그거 너무 좋다. 새로운 제급 헌터고 자시고, 이렇게 매너없는 남자는 안 된다고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려주는 거지.”

“그래! 뇌제놈도 반인반룡인 올리비아 아가씨의 드래곤 브레스에는 속수무책일 테니까!”

즉, 이 퍼스트 클래스 항공기에 탑승중인 네 사람은 모두 세계 헌터 랭킹에 이름을 올린 랭커들이었던 것이다.

먼저 제이슨 스트라우스의 맏손녀인 4위의 대마법사 올리비아 스트라우스부터,

아랍계 화속성 헌터들의 정점으로 명망이 높은 6위의 염제 압둘 라자흐,

그리고 올리비아와 함께 ‘스트라우스’의 비호 아래, 올리비아의 전속 집사직을 맡은 8위의 무왕 스티븐 클라크,

이윽고 이미 오랫동안 세계 랭킹에 이름을 올리고도 제대로 된 개인 정보가 새어나온 적이 없는 5위, 신비의 에이바까지···.

네 헌터는 사실상 ‘형식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이유를 위해 이건우에게 ‘도전’을 청했던 이들이었다.

그래, 분명 처음은 이해 타산적 가치를 위해 어렵게 중국행을 결정했던 이들이었으나 열흘간의 기다림 끝에 일방적인 통보로 ‘서울행’이 결정된 순간부터 이렇게 식식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무리 이건우에게 이유가 있었더라도, 무려 넷이나 되는 랭커를 오락가락하게 만든 것은 사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던 건 사실이다.

다만,

“아가씨, 아예 인천 공항에 내리자마자 전세계 방송사들 다 불러서 한 방 먹이는 건 어때?”

“그거 재미있겠네. 아예 무릎을 꿇려서 사과하게 만드는 거야.”

네 사람 중, 두 랭커의 언행은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아가씨···. 그리고 염제 당신도 적당히 하십시오. 애당초 그 흑룡 아뮤르타스와 1대1로 싸웠다는 뇌제를 저희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쓰러뜨릴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아저씨는! 하여간 뭔 남자가 그렇게 겁이 많아!”

“겁이 많은 게 아니라 냉정한 겁니다. 저도 뇌제와 한국의 방식에는 불만이 있지만, 세계 헌터 연맹이 아무런 근거 없이 그를 3위로 선정하진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 답답해 답답해! 그래도 그놈이 미친놈인 건 확실하잖아! 그럼 혼을 내줘야지!”

하,

무왕, 스티븐 클라크는 이제 성인이 되고도 아집이나 부리는 아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올리비아의 언행에 한숨을 내쉴 뻔했다.

나이를 먹었으면 분명 성장해야 하건만, 세계 그 어디에서도 귀빈 대접을 받는 이 랭커는 도통 성장할 기미가 보이질 않는 것이다.

그렇게 두 랭커가 서로를 답답하다는 듯 응시하던 중, 비행기는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

“그래서···? 그 진실이라는 건 대체 뭐였어?”

이곳은 인천 공항의 VIP 입국장.

벌써 ‘아카식 레코드’의 유적으로부터 빠져나온 지는 닷새가 더 지났건만, 그 속에서 함께 ‘천일’이란 시간을 보냈던 이서영은 벌써 열 번이 넘게 그런 질문을 해왔다.

“대체 뭐냐고···. 왜 앤젤라 꼬맹이도 남궁연 대위도 다 아는 걸 나만 몰라야 하는 건데.”

철혈검희 이서영의 이 묘한 집착은 유적에서 ‘지혜’라는 보상을 수령한 내가 아지트로 돌아와 두 성녀와 대화를 나누던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남궁연과 앤젤라는 어느 정도 이 세계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각각의 ‘주신’들에게 들어 지식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정신적 타격이 오는 ‘추체험’은 아니었고 일종의 ‘주신’과의 만담을 통해 전해 들은 정도였기에 직접 다나 메이어를 만나보고 들은, 나보다는 많은 것을 알진 못하고 있었다.

뭐, 이 세계가 몇 번째 세계고 자시고... 사실 내가 회귀 그 자체를 이용할 마음이 없는 인간이기에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렸던 건, 재앙 ‘태고의 흡혈귀’가 언급했던 말.

숙주 육신이 완성되었다는 말과 이번에는 그쪽에서 찾아오겠다는 그 말...

그게 신경이 쓰여, 나는 주변을 정리하는 데 필요했던 닷새가 흐르자마자 한국으로 귀국을 했던 것이다.

다행히 한국 전역에 ‘수신의 비’를 내려본 결과, 일본을 점령한 흡혈종의 마수는 아직 뻗어오지 않은 상태였지만 말이다.

그 사실에 퍽 안심하는 한편, 나는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두고 왔던 ‘랭커 도전자’들을 떠올렸고 뒤늦게 그들을 정식으로 서울에 초청했던 것이다.

뭐, 랭커들이라고 해도 에이바, 올리비아 그리고 스티븐과는 전생부터 퍽 친하게 지냈던 적이 있기에 그리 부담 같은 걸 느끼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언제까지 얘기 안 할 거야... 너, 너 나랑 같은 텐트에서 잠까지 잔 사이면서 이, 이럴 거야?!”

“대령님... 진짜 잠만 잤잖아요. 그것도 100일에 한 번꼴로.”

피로를 풀기 위한 수면, 그 시간이 뒤틀린 공간에서도 피로는 잠을 통해 더 빨리 풀렸기에 우리는 이따금 석제 공동에서 간의 텐트를 설치해 함께 잠을 자곤 했었다.

이서영과는 기습적인 입맞춤으로 인해 퍽 사이가 어색해졌던 상태였던 터라, 나도 별의별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었는데...

정작, ‘검성류’를 터득하겠다고 눈에 불을 켠 그녀 쪽에서 거기에 집중하느라 다른 곳에는 한눈을 팔지 않아 나와 그녀 사이에 관계는 전혀 진전이 없던 게 현실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밖’으로 나와, 두 성녀와 내가 우리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대화를 나누니 뒤늦게 어린아이처럼 질투를 해대기 시작한 것이다.

“자, 잠만 잔 거 아니잖아. 거, 건우 네가... 잘 때마다 나를 꽉 끌어안고...!”

그건, 이서영이 잘 때마다 몸을 덜덜 떨 정도로 지하 대공동의 석제 바닥이 차갑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 이상의 일은 없기도 했고···.

그러나 이서영이 묘하게 표정으로 붉히며 말끝을 흘리면, 주위의 반응은 영 좋지 않아진다.

-서걱, 서걱!

-쓱쓱!

이 VIP 입국장 일대에는... 방금 공항으로 들어온 네 랭커들의 요청으로 막대한 수의 기자들이 배치된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들은 공식적으로는 나와 랭커들의 만나는 순간을 촬영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으나, 아까부터 이서영이 흘리는 말들로 인해 열심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젠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내 눈에는 ‘뇌제는 기혼자?’, ‘뇌제는 난봉꾼’, ‘불륜을 즐기는 제급 헌터?’라는 기묘한 메모들이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령님? 대령님 다 좋은데. 그런 말은 좀 작게···.”

“그럼 말해. 그 진실이라는 게 뭐야.”

바람을 피웠느니, 불륜이라느니 이상한 흐름에서 다시금 ‘진실’을 언급하니, 다시금 기자들의 손에 바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하.

이 세계가 무한히 반복되고 있다는 걸, 굳이 널리 알려서 좋을 게 없단 생각에 말을 아꼈던 것을 그녀가 이토록 불만스러워 할 줄은 몰랐다.

아니···.

실은 그녀가 정말로 그 진실을 궁금해하기 보단, 남궁연과 앤젤라가 아는 걸 자기만 모르고 있다는 게 불만이라는 것을 나도 알곤 있지만 말이다···.

남궁연은 모르겠지만, 왜 앤젤라에게까지 질투 같은 걸 하는 건지 나로서는 이해가 잘 가질 않는다.

‘혹시, 체격이나 체구가 비슷해서 그런 건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던 찰나, 나는 소리도 없이 백룡도를 뽑아 들고 빵긋빵긋 웃고 있는 이서영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건우, 지금 무슨 생각해?”

“아,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만···.”

“그래...? 그치? 하. 하.”

혹시 유적에서 독심술이라도 익힌 것인지.

이서영은 ‘천일’을 함께 보낸 후로 이렇게 내 생각을 꿰뚫어 보는 일이 많아졌다.

“하하하.”

정말이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미소였다.

그나저나 그녀는 전생에도, 기자들의 시선을 퍽 의식해 쉽게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지난 닷새간 검성을 만나고 돌아온 그녀는 더더욱 변해있었다.

이서영의 행동은 마치, 나와 그녀에 대한 이상한 기사글이 나길 유도하기라도 하는 사람 같았다.

물론 내가 아는 철혈검희가 그럴 리 없지만.

...

아니겠지?

검성과 이른 시기에 화해하도록 도운 게··· 설마 이상한 영향을 끼친 걸까.

또다시 내가 엉뚱한 생각을 떠올리고, 또 이서영이 매섭게 눈살을 좁히던 찰나.

-지이잉!

드디어 VIP 입국장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오오.”

“스트라우스의 사람들이야···!”

‘제이슨 스트라우스’를 시작으로 그의 피를 이어받은 스트라우스 일가의 사람들이 주르륵 나타나 길을 튼다.

분명 국적은 미국이면서, 그 절도있는 행동들과 체계적인 움직임은 무슨 영국의 로열 가드를 보는 듯했다.

그 등장만으로도 기자들을 웅성거리게 만드는 압도적인 존재감.

허나, 진짜는 ‘스트라우스’ 휘하의 헌터들이 무전을 통해 안전 확인 보고를 올린 후에야 나타났다.

“오, 올리비아!”

“실물의 올리비아 스트라우스야!”

이윽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현대판 세계의 황족, 올리비아 스트라우스가 입국장 너머에서부터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위풍당당하다는 말이 이토록 어울리는 인간이 있을까.

겉으로도 느껴지는 막대한 자신감.

그런 오라를 전신에서 방출해대는 원조 반인반룡.

거대한 스태프를 쥐고 나타난 그녀는 내 앞에 멈춰 서고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뇌제. 이. 제. 야. 만나 뵙네요.”

수줍게 입을 가리며 웃는 얼굴과 전혀 그렇지 않은 말투.

“하. 아가씨...”

그녀보다 반 발짝 늦게 올리비아의 전속 집사인 ‘무왕 스티븐’이 나타나 이마를 짚고, 그 뒤에서 흐뭇한 미소와 함께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는 ‘염제 압둘’이 보였다.

그 모습만 봐도, 눈앞의 이들과 퍽 친하게 지냈던 과거가 있는 나로서는 염제가 올리비아를 꼬드겨 무슨 일을 벌이게 종용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또, 뭔...’

괴상한 일을 벌이려는 걸까.

그런 독백을 채 끝내기도 전에, 내 눈앞에 다가왔던 올리비아는 자신이 손에 끼고 있던 흰 장갑을 벗어 내 가슴팍에 툭, 던졌다.

“..헉!”

“저, 저건···!”

“마, 만나자마자?!”

내던져진 장갑을 맞은 나보다 더 경악하며 입을 쩍 벌리는 일대의 기자들.

그들이 이렇게나 놀라는 이유는 간단했다.

현대판 황족이나 다름이 없는 ‘스트라우스’ 일가의 사람들이 장갑을 던진다는 건···.

“저도 만나서 반갑다느니 하는 겉치레를 듣기 전에, 먼저 제가 친히 당신께 매너라는 게 뭔지 알려드려야겠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뇌제도 잘 알고 계시죠?”

양쪽 모두가 동의할 때까지 끝낼 수 없는, 결투의 신청을 의미하는 행동이었다.

분명, 나보다 키도 작으면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날 응시하는 올리비아 스트라우스.

그런데...... 그녀가 한가지 착각하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그녀의 지난 15일이 나에게는 천일 하고도 닷새가 더 흐르는 시간이었다는 점이었다.

아직 세계대전이 발발하기도 전인 이 시대, 아직 레벨이 50을 넘기지도 못한 그녀는 죽었다 깨어나도 지금의 나를 꺾을 수가 없다.

이 결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것도 잠시, 내 고민을 빠르게 끝내주는 목소리는 돌연 들여왔다.

“도망칠 생각 마. 이 몰상식한 놈아.”

아주 작게, 마주 선 나에게만 들리도록 그런 말을 속삭이는 올리비아.

허나, 그 경고성의 말 한마디는 도리어 내가 그녀를 어떻게 대할지 결정짓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끝없는 자기애와 자신감이 끓어 넘치는 철없는 공주님은···. 타인에게도 피치 못할 사정이란 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좀 배워야겠다.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그 즉석 결투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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