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28화.
계승자 탐색.
역대 회귀자들이 수행해온 하나도 빠짐 없이 행해왔다는 숙명이자 사명.
그러나, 내가 그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차분히 듣고, 처음으로 떠올린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후대···. 회귀자라고···?”
“그렇습니다. 고정된 회귀의 시점이 이건우 님보다 나중인···. 다시 말해, 향후 10년에서 20년 후에 새로이 각성한 인류의 희망이 되기 적합한 자에게 ‘이어져 온 꿈’을 넘기는 겁니다.”
그러하면, 그렇게 ‘이어져 온 꿈’은 후대로 전달되고 세계는 보다 ‘안전해진’ 상태로 연장된다.
코앞에 둔 멸망을 조금이라도 더 미루고, 미루고, 미루길 반복하는 것.
그게 ‘이어져 온 꿈’의 정체라고, 이 대성녀님은 말하고 나자빠진 것이다.
“그게 다인가···.”
“그렇습니다. 그것이 회귀자의 숙명. 지금까지 반복되어온,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반복될···. 숙명입니다.”
확인차 던진 물음에도, 이 대성녀님은 그저 슬픈 어조로 그리 답할 뿐이다.
회귀다.
무려 회귀!
미래 지식을 가진 자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이 힘을···.
“고작 그딴, 비참한 삶의 연명을 위해 사용해왔단 말이냐!”
내가 화를 내는 이유는 단순했다.
어째서 그녀는 싸우려 하지 않는가.
어째서 이 세계는 벌써 일흔 번에 달하는 회귀를 반복해온 거였나.
어딜 어떻게 보아도 그 원초적인 이유는 결국, 그 끔찍한 5대 재앙을 쓰러뜨리고 다시금 이 미쳐버린 세계에 ‘진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넘어간 불사왕도, 당신도 제정신이 아니야···!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최고의 무기잖아!”
어째서 그녀는, 세계인의 은인이자 구원자인 이 위대한 대성녀는 이리도 슬픈 눈으로 그저 허망하게 이 미쳐가는 세계를 방관하려 한단 말인가.
“이런 미친 세계를 그저 방관하고 오늘 터질지, 내일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그저 미래에 떠넘기는 것이 회귀자의 역할이라면···.”
누가 뭐라 해도 나는 회귀자다.
회귀를 통해 현재를, 지금을 그리고 미래를 뒤바꾼···. 두 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란 말이다.
“난, 후대 회귀자 따위, 무슨 일이 있어도 선택하지 않겠다.”
“그 선택은 도리어 이건우님을 힘들게 만들 뿐입니다. 당신이 후대 회귀자를 선택하지 않아도···. 당신이 얼마나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일지라도···. 재앙들은 수십, 수백년에 걸쳐 당신의 정신을 파괴할 겁니다.”
“아니.”
“‘아니’가 아닙니다! 그렇게 ‘당대 회귀자’의 정신이 완전히 타락했을 때, ‘이어져 온 꿈’은 멋대로 새로운 후대 회귀자를 선별하죠. 유럽의 희망인 프리드리히가 타락하고 그와 아무런 연이 없던 당신이 꿈의 선택을 받았던 것처럼!”
다나 메이어는, 드물게 눈살을 찌푸리며 내게 목소리를 높였다.
언제나 초연하던 그녀다.
이미 한 세기를 살아왔고, 이젠 역할을 다했으니 스스로 말하길 이제 곧 죽을 예정인 그녀다.
그럼에도 다나 메이어는 끝내 흥분하면서까지 내게 그 ‘숙명’이란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역할.
맡은 바 사명을 다하고 죽는 다는 것.
그것이 그녀가 천 번이 넘는 미래를 엿보고도 아직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나는 내심 지금까지 품어왔던 의문 하나가 해소되는 느낌이 들어 피식, 하고 미소를 짓고 말았다.
“왜, 갑자기 웃으시는 겁니까.”
한껏 소리를 질렀다가 또 갑자기 웃는다.
감정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나를 보며 묘하게 겁먹은 표정을 짓는 다나 메이어.
그러나, 나는 그런 그녀에게 더욱더 정신 나간 소리로 들릴 법한 말을 꺼낼 생각이었다.
“두 번째 생이라니···. 이미 일흔 번째 이 세계가 되감긴 상태라니······. 생각해보면 우습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얼핏 허탈해 보이는 미소와 함께 그런 말을 꺼내니 대성녀의 얼굴은 단번에 딱딱한 돌가면처럼 굳기 시작했다.
“...이건우님도, 다 무의미하다고···. 그 얼마나 노력한들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그런 말을 하려는 건가요.”
그 말투는 마치, 그런 사람을 이미 만나본 적이 있는 어조였다.
그녀와 함께 행동했었다는 불사왕이, 그런 존재였던 걸까.
아니, 만일 그가 그녀가 방금 언급했던 ‘회의론’에 취했었다면, 결코 저기 저 파일 넘버가 열다섯 번의 회귀를 뜻하는 ‘9-15’에 도달하지는 못했겠지.
그러니 그녀가 지금 말하는 ‘당신도’에 해당하는 회귀자는······. 아마 그보다 더 앞선 순번의 회귀자였을 것이다.
모든 것은 반복된다.
내가 뭘 하던, 나의 죽음이 곧 세계를 되감는 신호탄이 된다면, 확실히 오늘의 노력이, 내일의 훈련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게 되어버릴 것이다.
납득은 간다.
허나, 내 가슴은 그딴 약해빠진 마음에 전혀 동조하질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말한다.
내가 지금 보고 들은 것들을 토대로 떠올리고, 느끼고, 생각하던 것들에 대해서···!
“그 반대다.”
“...예?”
불안한 눈빛.
하지만 나의 한마디에 다나 메이어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 피어난다.
“그 반대라고 말했다.”
“반대, 라면···.”
그리고 그 숱한 의문이 나에게 닿아 새로운 가능성을 싹틔울 때, 나는 확신 가득한 목소리로 대성녀를 향해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재앙의 손에 죽어줄 마음이 없다는 소리다.”
의문, 희망 그리고 허탈함.
나의 대답을 들은 대성녀의 얼굴에는 그런 감정들이 차례로 스쳤다.
이윽고, 그녀는 물었다.
“설마 이번 회차만에 그 5대 재앙을 모두 몰아내고 재앙들과 결탁한 빌런들마저 이 지구상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응징하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퍽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단, 나의 대답에는 거침이 없었다.
“바보 같은 질문이군.”
“...?”
“너는 마치 내게, 제정신이 맡는지 의심스럽다는 듯이 방금 같이 한심한 질문을 건넸지, 허나, 잘 생각해라 다나 메이어.”
나는 복잡한 심경을 얼굴에 한껏 드러내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다나 메이어를 똑바로 응시한다.
이윽고, 말한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인간’이 ‘다음 생’ 따위를 고려하며 살지?”
“......?!”
“너는 아니, 역대 길잡이라는 것들도 회귀자 작자들도 다 우습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라고!”
인간은,
사람의 생명은 하나다.
이런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전생의 불사왕도, 눈앞의 성녀도 어째서 망각하기라도 한 것처럼 살아가고 있느냐는 말이다.
“세상이 되감기니까. 너희는 그 잘난 ‘더 큰 꿈’이라는 놈을···. 아니 조금이라도 더 먼 미래를 구축하고 싶다는 알량한 이유로! 지금 오늘을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소리를 하고 있다! 내 말이 틀렸나!”
어째서 머리끝까지 이렇게 화가 차오르는지. 한껏 소리를 내지른 이제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눈앞의 대성녀는···. 아니 전대 회귀자라는 불사왕 역시 똑같다.
그들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버렸다.
다음 생을 위해 이번 생을 구깃구깃 구겨서 쓰레기통에 처박는 일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자빠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능률과 실리만을 악착같이 챙기던 인간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건 바로 과거의 ‘나’였으니까.
“그랬던 나에게, 앤젤라 엘런을 구하길 유도했던 건···. 바로 당신 아니었나. 다나 메이어!”
그런 당신이 어째서. 이토록 쉽게 현재를 버리자는 의견을 낸단 말인가.
회귀라는 것이 잘못된 걸까.
아니면 겉으로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 천회 이상의 미래를 엿본 다나 메이어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던 걸까.
명확한 답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다나 메이어가 틀렸다는 사실 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때, 나의 일갈에 한참 동안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던 다나 메이어가 아주 작게, 입을 열었다.
“...프리드리히는 내가 본 가장 뛰어난 헌터였습니다. 그런 그조차···. 5대 재앙을 모두 몰아낼 수는 없었단 말입니다······.”
희망을 노래해야 할 성녀가, 도리어 절망을 입에 담으며 불안해 떤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대성녀에게, 이 세계의 앞선 구원자를 향해 당당히 가슴을 펴고 말했다.
“날 얕보지 마라. 다나 메이어!”
“얕보다니···. 그런 말이 아니······!”
“놈이 해내지 못한 비원을, 어째서 내가 달성해내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 그게 날 얕보는 것이 아니고 대체 뭐란 말이냐!”
누군가는 오만하다고, 또 누군가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협력 관계를 통해 그리고 지금껏 쌓은 인망과 준비한 전략을 총동원해 간신히 그 ‘불사왕’을 한번 무찔러 놓고 이런 말을 태연하게 하다니···.
하지만 나는 화를 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확신을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차피 생이란 인간에게 딱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것이었으니까.
“모든 삶은 필생의 역작이다.”
어째서 나는 그때, 바로 산자의, 산 자에 의한, 산 자를 위한 각오와 외침을 읊었던가.
어떻게 나는, 불사왕으로 인해 떠올리게 된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를 깨닫게 되었던가.
삶이 하나 뿐이라는 건,
일생동안 만난 모든 이들의 그 모든 노력들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건···. 종교를 믿지 않는 나의 신념이자, 의지다.
그리고 다나 메이어가 오직 ‘당대 회귀자’인 ‘나’를 기다리기 위해 그 오랜 시간을 아득바득 살아남고, 이윽고 나를 돕기 위해 지금 이곳에 나타났을지라도···.
내가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이유 그 자체를 부정한다면 그녀는 나의 ‘적’이다.
그것도 그 누구보다도 기필코 꺾어내야 하는 숙적이 되는 것이다.
“나는 지지 않는다.”
내가 어깨에 이고 있는 그 죽음들이, 그리고 수없이 많이 반복해온 결의들이 있는 한, 결코 질 수 없단 말이다.
“내가 걸어가는 그 길이 고통에 찬 가시밭길일 뿐일지라도···. 언제 끝날지 모를 모래 폭풍이 너의 눈과 귀와 코와 입을 막고, 또 때로는 나의 육체마저 집어삼키려 들지라도···.”
‘그 말’은 내 생각을 거쳐 튀어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언젠가···.
그래, 데스나이트 케일른과 싸우며 처음 혈검, ‘본디오 빌라도’를 쥐었던 그때였던가.
나는 그때 처음 수신과 빛에 휩싸인 그 반신을 만났고 분명, 이와 비슷한 문답을 주고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 바티칸의 주신이자 반신인 그 빛의 신은 내게 물었다.
내가 나아갈 길은 앞으로도 극심한 고통만이 가득한 가시밭길일 것이라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준비가 되었느냐고 말이다···!
그리고 그때도, 지금도, 나의 대답은 전혀 변치 않았다.
“나는 멈추지 않는다. 다나 메이어···.”
실제로 ‘회귀자’의 힘을 이용해 지금을 버리고, 오늘을 버리고 미래만을 신경 쓰는 것이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낸 합리적인 길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동료들의 시체와 유언과 절규 위에 서 있는 ‘나’이기에······. 결코 그런 허울 좋은 길을 택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나를 믿어라. 난···. 그 누구의 삶도, 필생을 위한 노력도 소홀히 하지 않은 미래를 꿈꾸고 있으니까···!”
그런 나의 확신에 아니, 굳건한 의지에···.
“흐윽···.”
다나 메이어는 어째서인지 다리에 힘이 풀린 사람처럼 제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펑펑 흘리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 내가 내뱉은 확고한 의지와 굳건한 맹세를, 다른 누군가의 입에서도 듣고 싶었다는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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