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127화 (127/175)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27화.

불사왕이 회귀자였다.

한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총력을 다 기울려 그 정성스러운 지옥을 일구어낸 희대의 ‘악’이···.

“회귀자였다고···?”

듣고도, 보고도 납득하기 힘든 말이었다.

아니, 실은 알고 있었다.

눈앞에 떠 있는 저 괴상한 메시지를 통해 내가 모르는 또다른 ‘프리드리히 파울라스’를 목도했던 그 순간부터, 나는 그 누구보다 그가 불사왕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의 눈과 귀가 그리고 이젠 반인반룡으로서 느낄 수 있는 한 인간의 고유한 마력이 그가 불사왕이란 것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끝내 이해할 수 없던 것은······.

“그렇다면 놈은 어째서 세계를···.”

오직 전 인류를 ‘언데드’로 만드는 것만이 구원이라던 그 미친 파시즘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느냐는 말이다.

그런 의문에 사로잡혀 말문이 막혀 있던 내 앞에서, 다나 메이어는 문득 답을 내어주었다.

“뇌제 이건우님이 가지는 모든 의문의 답은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샤아아!

허공을 유영하는 새하얀 손길.

그런데 그 짧은 손짓 하나만으로 눈앞에 있던 메시지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

주르륵 늘어나는 ‘파일 넘버’라는 단출한 이름의 메시지들.

그 와중에 변하는 것은 오직 메시지 끝에 적혀있는 숫자뿐이었다.

1부터 15.

그 앞에 나타나는 ‘8-7’이라는 숫자과 모든 파일의 맨 뒷부분에 나타난 ‘10-1’이라는 숫자.

내가 그 메시지에 적힌 숫자의 비밀을 알아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근거는 하나뿐이었다.

-고작 2회차밖에 도달하지 못한······.

그건, 돌연 눈앞에 나타났던 재앙, ‘태고의 흡혈귀’의 말.

“프리드리히 파울라스···. 아니, 불사왕은 이 세상에 존재했던 아홉 번째 회귀자였나.”

“...역시, 전대미문의 회귀적응자 이건우님이네요.”

전대미문의 회귀적응자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일까.

허나, 그런 내 궁금증과는 관계없이 다나 메이어는 먼곳을 바라보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 돌연 입을 열었다.

“우선, 정말 대단하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건우님. 당신은 역대 회귀자들 중 최초로···. 가장 많은 것을 바꾸고 가장 빨리 ‘아카식 레코드’ 유적에 도달한 최초의 회귀자시니까요.”

“역대······. 아니, 불사왕은 그러지 못했다는 건가.”

내가 내심 놀라며 묻자 1대 성녀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보통의 인간에게 아니···. 아무리 강한 정신력을 가진 영웅일지라도, 전생의 기억을 단번에 받아들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같잖은 추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명명백백한 기억의 헤일.

“마치, 미래 예지의 능력을 갖춘 헌터들이 수십, 수백, 수천 번 자기 자신의 죽음을 목도하다 정신력이 마모되는 것처럼···.”

다나 메이어는 뒷말을 끊고 입을 다물었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그녀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앤젤라 엘런을 떠올리면 쉽다.

미쳐버린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죽이던 그 기괴한 발상.

그건, 앉은 자리에서 수년을 수십 년을 혹은 수백 년을 체험해야 하는 이들의 숙명이었던 것이다.

즉, 프리드리히 파울라스 역시,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음을 알고 그 자리에서 정신이 나가버렸음을 나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는 대단한 자였습니다.”

-스르륵.

이번에도 손짓에 따라 움직이는 메시지.

그러자 여러 가지의 ‘파일 넘버’ 메시지들이, 마치 컴퓨터 모니터만한 사이즈의 각기 다른 세계를 비춘다.

9-2.

불사왕은 앉은 자리에서 정지했다.

뭐 별다른 일이 있던 것이 아니다. 그냥 그대로 가해지는 정신적 부하를 견디지 못해 그대로 정지했던 것이다.

허나, 그가 ‘죽자’ 비정한 세계는 다시금 되감긴다.

‘9-3’, ‘9-4’. 이윽고 ‘9-5’번의 파일이 그렇게 덧없이 붕괴하고 나서야. ‘9-6’번의 미래는 간신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죽어도 세계는 무미건조하게 반복될 뿐이다.

내게 있어 헌터군의 생활관이 시작점이었던 것처럼, ‘불사왕’ 역시 그가 각성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몇 번이고 되돌아간다.

다만, 그는 내가 아는 프리드리히 파울라스와는 사뭇 달리, ‘마나 불능’의 육신을 뜯어고치는 일부터 차근차근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런 눈앞의 형상을 응시하던 차, ‘다나 메이어’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우린, 많은 종말을 몰아냈습니다.”

펼쳐지는 파일들.

9-7, 9-8, 9-9···.

그 이미 기록으로만 남은 세계의 전경 속에서 줄곧 불사왕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자는······. 바로 눈앞의, 다나 메이어였다.

“우린, 여덟 명이나 되는 역대 회귀자들이 이룩하지 못했던 ‘평화’의 20년을 이룩했습니다.”

평화.

세계에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가 끓어넘치기 시작한 이래, 전 세계가 고루 ‘평화’라 부를 수 있을 법한 시대는 오직 하나였다.

바로, 내가 태어난 세대.

고아가 만연하고, 전쟁의 잔재가 남아 꿈틀대던 세대의 바로 밑 세대.

비록, 대한민국에서는 종교와의 전쟁이 중국에서는 수많은 내란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몬스터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냥하는 시대.

나, 홍진웅, 김장훈, 남궁연이 태어나던 바로 그 ‘평화의 세대’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태어나던 세대의 평화를 이룩한 게······.”

“무엇을 물으십니까. 이건우님이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그 평화를 만들어낸 장본인을.”

세계인의 선구자.

헌터 세계를 선도하며,

차별받던 이들을 모아 막강한 헌터 세력인 ‘저스티스 가디언즈’를 만들고,

혐오받던 이들을 모아 세계 최고의 연구시설인 ‘흑색 마탑’을 세운 마탑의 수장.

이윽고, 젊은 시절 ‘에게 해’ 제도를 멸망시키기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바로 그 ‘스카이 타이탄’의 섬멸자.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는 영웅중의 영웅이자 괴물중의 괴물.

“프리드리히 파울라스······.”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설마, 그 프리드리히 파울라스가 자신의 야욕을 위해서가 아닌 진짜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봉사자였다고?

그 의문에, 그 짧은 가정에 내 속은 뒤집히고 돌연 현기증마저 일었다.

불사왕이 정말 인류를 위한 선구자였다면, 나라는 존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허나, 그런 숱한 절망과 동시에 나의 머릿속에서는 끓어오르는 열기와 분노가 동시다발적으로 솟구쳤다.

“그가···. 구원자라면······. 그가 정녕, 인류를 위했다면···! 대체 왜 세계를 그 모양 그 꼴로 만들었단 말이냐!”

나는 악에 받쳐 소리치듯 말했고, 다나 메이어는 어째서인지 그런 나를 이해한다는 듯 또다시 슬픈 눈빛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습니다.”

그렇게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9대 회귀자인 ‘불사왕’의 열두 번째 회귀를 의미하는 파일이었다.

드디어,

열 번이 넘는 회귀 속에서 기나긴 평화의 단초를 학습하고 거침없이 그 평화를 위해 나아가던 프리드리히 파울라스.

그런데, 그런 그의 앞에 새카만 그림자는 나타났다.

-오오, 불쌍하고 가여운 나의 대적자여.

그 그림자는 이내 새카만 망토가 되고,

긴 로브에 전신을 감춘 백골의 마귀. 사신, 레골라스는 ‘재앙의 잉태’를 거치지 않은, 불완전한 모습으로 불사왕의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는 이미 정신이 마모될 대로 마모된 불사왕을 향해 말하는 것이다.

-이 세계를 보다 확실하게, 한낱 인간에 불과한 대적자로서는 떠올릴 수도, 고안해낼 수도 없는 ‘구원’이 바로 이 사신의 손에는 있단 말이다!

‘구원’.

어떠한 형태로든 인류를 존속시키겠다는 그의 믿음을, 똑같은 ‘구원’의 이름으로 사신 레골라스는 유혹한다.

퍽 하면 내란을 일으키고, 불만으로 토로하고, 선행을 강요하는 인간들보다는 생각만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언데드’가 이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기에 적합한 존재라고 말하면서.

“당연하지만, 그는 사신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5대 재앙을 몰아내기 위한 순례의 길에서 도리어 그 재앙의 손을 잡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으니까요······. 다만,”

뒷말을 흐리는 대성녀.

허나, 그녀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9-13’의 메시지는 빛을 발하는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이 세계가 무한히 ‘회귀’하고 있다는 걸 아는 건, 회귀를 체험한 당사자뿐만이 아닌 재앙도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성녀는, 바티칸 신의 기억을 통해 ‘회귀’에 대해 파편적으로 알게 된다고 말했다.

아마 수신의 성녀인 남궁연과 2대 성녀인 앤젤라 엘런 역시 비슷한 감각으로 ‘회귀’에 대해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허나, 신의 기억을 통해 회귀를 파편적으로 알게 되는 것과 실제로 자신의 몸을 불살라가며 ‘회귀’를 반복하는 건 엄연히 다르다.

즉···.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믿음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왔던 머저리 같은 구원도···.

-‘구원’이 네 앞에 있다.

-어찌하겨 그런 가시밭길을 고집하더냐. 네크로맨서여.

-나와 손을 잡아라, 나의 협력자가 되어 이 세계를 구원하라!

-그대에게 복속을 맹세한 모든 아둔한 자를 이 사신, 레골라스는 결코 적대하지 않을 터이니···!

9-12, 9-13, 9-14, 9-15.

각각의 생이 모두 100년을 넘긴다.

이는 다시 말해, ‘불사왕’은 자신의 숙적이었던 사신에게서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숱한 유혹과 미혹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내가 알고 있는, 그 불사왕이란 건가.”

‘이어져 온 꿈’.

불사왕이 줄곧 언급하던 그 말을 이젠 알 수 있었다.

‘이어져 온 꿈’이란 내가 체험하고 그가 기억하는 이 ‘회귀’ 그 자체를 가리키는 단어였던 것이다.

그리고 세계의 비밀이란···.

“그렇다면 이 세계는 대체 얼마나···.”

“이 세계는···. 정확히 일흔 번째로 수복된 세계입니다.”

일흔 번.

그래. 이 세계는 반복되고 있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하건, 무슨 대업을 이룩하건···.

나의 죽음은 곧, 이 세계가 되감기게 만드는 기폭제가 되는 것이다.

“하아···.”

예측을 못 했던 것은 아니나 직접 들으니 내 전신을 훑는 깊은 한숨이 돌연 흘러나왔다.

그제야, 나는 대체 어째서 1대 성녀 다나 메이어가 줄곧 나를 덧없이 슬픈 눈으로 응시하고 있던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밉겠군. 내 존재는 곧 당신과 일생을 함께 싸워온, 타락한 불사왕의 증명이니까.”

“...”

확신 어린 나의 말에 다나 메이어는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없는 애절한 눈으로 그저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있고 난 뒤, 자신의 감정을 수습한 듯한 다나 메이어는 전보다 조금 더 차갑게, 기계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제가, 역대 ‘길잡이’들에게서 숙명을 부여받았듯···. ‘회귀자’인 이건우님에게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있습니다.”

“숙명···?”

“예. 일종의 사명 같은 것입니다. 이미,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육체를 현실에 두고도, 아직도 제가 살아있는 것과 같은 것이죠.”

죽지 않는 1대 성녀.

다나 메이어.

그녀는 말했다.

자신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은 모두, 자신의 숙명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고.

그건, 오직 이 세계를 위해 악착같이 살아남고 있으리라 예상했던 나와 전생의 이준학 준장의 예측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이윽고, 어렵사리 입을 땐 그녀는 말했다.

역대 회귀자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뇌제. 이건우님은 역대 회귀자들이 그러했듯, 당신의 정신이 모두 마모되기 전에 후대 회귀자를 선정해주십시오. 이 멸망한 세계를 단 하루라도 더 연장시킬 수 있는······. 계승자를 찾으셔야 합니다.”

계승자 탐색.

그것이 역대 회귀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행했던 사명이라고, 눈앞의 대성녀는 말하고 있었다.

회귀자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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