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126화 (126/175)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26화.

-삐비비빅! 삐비비빅!

999일.

사전에 준비해둔 타이머가 드디어 끝을 고하는 알림을 울렸다.

나와 이서영은 짐을 챙겨 ‘문’ 앞에 섰고 지난 7주 남짓한 시간 동안 내게 혈공의 진수를 전수해준 나의 스승, ‘혈마(血魔)’는 아무런 말도 없이 팔짱을 끼고 그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실 두 번째 생을 살아가는 내게는 ‘밖’에서도 이렇게나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동료는 없었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스승을 만나고 말았다.

-터벅, 터벅.

그때, 무뚝뚝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혈마.

그는 어째서인지 퍽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알겠느냐. 뇌제. 나의 속가제자야. 너는 이제 속세로 나가 세상을 피로 씻는 게다. 나의 유지, 나의 의지를 잇는 게다!”

당돌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혈공을 전수받은 이들이 대대로 소망하던 간원을 그는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고, 이미 몇 번이고 주고받은 적이 있는 이 문답에서 나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더러운 세계를 피로 쓸어내리나, 결코 피에 취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서열을 중시하는 혈교의 사제 간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대화였다.

나는 혈교에서 대대로 의지를 잇지 않겠다고 소릴 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혈마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기는커녕 도리어 밝게 물든다.

“그래. 그 마음가짐을 결코, 잊지 않도록 해라.”

“물론입니다.”

다음은 이서영의 쪽이었다.

시선을 교환하는 두 사람, 나와는 달리 혈마는 굳이 구구절절 무슨 말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그러다 문득, 툭하고 말했다.

“라오 위에게 가서 전해라. 제자를 키우는 승부만큼은 나의 압승이었다고···.”

“...건우가 대단한 건 인정하지만, 딱히 당신이 키운 건 아니잖아?”

“혈교의 마음가짐을 익히고 교리를 학습했다. 그럼 이미 제자인 게다.”

“......순 억지야.”

나 때와는 달리 묘한 적개심으로 티격태격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

아마 혈공을 이어받는 적통 후계자가 생겨나면서, 혈마는 더이상 이서영을 자기 제자처럼 여기지 않게 된 듯했다.

뭐, 이미 이렇게 친해진 마당에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긴 하다만···.

그렇게 잠깐의 인사를 주고받은 우린 다시금 ‘문’을 바라보았다.

다시 봐도, 이런 지하에 어떻게 제작된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크기의 거대한 문이다.

나는 그 손잡이를 한 손으로 잡았다가 다시 놓고는 문득 뒤를 돌았다.

아직도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혈마.

500년만에 만난 사람이라 그런건지, 그래도 자신이 가르침을 준 우리이기 때문인지. 그의 눈빛은 얼핏 우수에 찬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양손을 모아 절도 있게 포권을 취하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에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많은 가르침, 정말 감사했습니다. 스승님.”

그러자 혈마는 피식 웃고는 콧김을 휙 내쉬며 답하는 것이다.

“됐다! 어디 가서 죽지나 말고 언젠가 다시 만나면, 그땐 술이라도 한잔 기울이자꾸나.”

-끼이이익!

혈마의 대답이 들려옴과 동시에 문은 내가 가진 ‘아카식 레코드 3번’에 반응해 웅장한 진동을 일으켰다.

이윽고 그것은 제멋대로 활짝 열렸고, 나의 눈앞은 흑백으로 점멸했다.

마치 꿈을 통해 ‘다나 메이어’를 만났을 때처럼,

마치 ‘앤젤라 엘런’을 꿈속에서 마주했을 때처럼,

마치 ‘불사왕’과의 전투에서 잠시 정신을 잃고 옛꿈을 꾸었을 때처럼,

나의 정신은 형언할 수 없는 급류에 휩쓸려 내려가듯 어딘가를 향해 흘러갔다.

***

힘과 지혜와 수명.

방문객에게 셋 중 하나를 보상해주는 아카식 레코드의 유산에서 내가 택한 것은 다름 아닌 ‘지혜’였다.

잘난 양반들이 허구한 날 말해대던 ‘세계의 진실’이니, ‘이어져 온 꿈’이니 하는 것들을 이젠 나 역시도 알아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애당초 ‘아카식 레코드’라는 말의 어원 자체가 인류와 우주의 모든 기록을 담은 초차원 정보 집합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던가.

전생에는 그저, ‘읽으면 미치는’ 지혜와 값진 아이템 중 양자택일을 하라 강요하는 ‘히든 피스’로 통했었지만, 그 근본은 어디까지나 모든 정보를 기록하는 ‘책’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의식중에, 나의 의식이 도달할 장소를 일종의 도서관 같은 곳이리라 예측하고 있었다.

허나, 어렵사리 눈을 뜬 내가 목도하게 된 광경은······. 참으로 기괴했다.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다채로운 광채를 난반사 하며 내부 전경을 밝히고, 그 끝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높은 천장이 블랙홀처럼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교회?’

중세 유럽풍 고딕 양식의 거대한 석제 건물.

이윽고 흐릿했던 시야가 서서히 돌아오고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데······. 그런 나의 눈앞에는 상상하지도, 믿을 수도 없는 어떠한 존재가 우뚝 서 있었다.

그 외향은 마치 무구한 어린 여아처럼 순수하다.

허나, 희고 긴 머리칼은 얼핏 불그스름한 빛을 품고 있었고 ‘그것’이 입고 있는 드레스에는 수십, 수백의 혈화(血花)가 장식처럼 수 놓여 있다.

체구는 작고 외향은 어리나 그 키는 거구의 이준학 준장보다 더 거대한, 2M를 넘기는 괴물.

시뻘건 피로 가득한 깊은 우물과도 같은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응시한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그것의 명칭을 떠올려내고 말았다.

‘.....진조.’

진조.

시스템 메시지에서 일컬어지길 재앙, ‘태고의 흡혈귀’라 불리우는 모든 흡혈종의 어미이자 시작점이 되는 존재.

‘그것’은 전생의 마지막 순간, 내 머리를 직접 쥐어뜯었던 그 재앙이 분명했다.

마주 보는 눈.

이 뭔지 모를 돌발적인 상황에 천천히 마른 침을 삼키는 사이,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끈적끈적한 적안은 조금씩 내게 다가왔다.

“회귀자······.”

이윽고 서로의 코끝이 닿기 직전의 거리까지 다가온 그 거대한 재앙은, 섬뜩한 크기의 송곳니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이렇게 직접 마주하는 건 이번으로 두 번째인가. 뇌제여.”

‘두 번째···?’

나는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어조로,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존귀한 황녀의 자세를 취하며 말을 걸어오는 재앙.

이에 내가 설마하는 마음으로 인상을 크게 찌푸리자 전생 나의 마지막에 닿아있는 재앙, 태고의 흡혈귀는 전보다 더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또다시 언젠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할 만한 말을 꺼내는 것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냐. 그대여. 그대가 짐의 어여쁜 사도들을 숯덩이로 만들고, 짐의 소중한 가축들을 불태워 죽이지 않았더냐···. 전생에도, 현생에도 말이야···.”

-파직!

생체전기를 끌어올린 건,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 주둥이에서 느껴지는 혈향이, 그 역겨운 숨결이 원초적인 나의 생존본능을 자극했기 때문에 말이다.

멈칫,

내가 튀긴 스파크에 다가오던 얼굴을 잠시 뒤로 빼는 재앙.

허나, 시뻘건 눈을 크게 뜨고 놀라던 것도 잠시, 태고의 흡혈귀는 다시금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짐이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도 놀랍더냐. 고작 2회차밖에 도달하지 못한 여리고 여린 짐의 뇌제여.”

2회차밖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 말투는 마치, 나 이외에도 ‘회귀자’가 달리 존재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나 이외의 또 다른, 회귀자라고···?’

그런 경악스러운 추측에 스스로 놀라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중, 돌연 싱글벙글한 미소짓던 재앙의 얼굴은 경직되었다···.

“그리운 재회에, 벌써 훼방꾼이 도착했구나···.”

그런 재앙의 중얼거림과 함께 이 석제 건축물의 천장으로부터 새하얀 빛의 나비 무리가 펄럭이며 내려앉기 시작했다.

‘이 정결한 신력은···.’

분명 바티칸의 신이 내려주는 기적의 산물.

허나, 그 신성력을 나비의 형태로 부릴 수 있는 자는 내가 아는 한 이 지구상에 단 한 사람뿐이었다.

“아쉽지만, 남은 회포는 현실에서 마저 풀자꾸나. 짐의 가장 멋진 인형이 될 뇌제야.”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릴······!”

뒤늦게 이 기이한 공간에 몸이 적응된 내가 입을 틀어 목소리를 높이지만, 새하얀 나비 무리에 완전히 감싸진 재앙, ‘태고의 흡혈귀’는 구토가 쏠리는 윙크를 내게 날렸다.

“...짐의 숙주 육신이 완성되었다. 이번에는···. 이몸이 그대를 찾아갈 터이니······.”

“이봐! 이봐!”

나는 한 발짝 늦게 사라져가는 태고의 흡혈귀를 불렀지만, 빛의 나비들은 이미 그것을 완전히 이 공간에서 소멸시켜버렸다.

이윽고, 이 영문모를 상황에 내가 멍하니 굳어 있길 수초. 나의 등 뒤에서는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먼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확 풀린다.

그저 담백한 인사 한마디가 감미로운 노랫소리처럼 들려오는 지경이다.

보이는 머리칼은 회백색에 가까운 은발이다.

그녀의 눈은 영롱한 보석보다 더 반짝이는 에메랄드의 광택을 띠고 있었고, 작은 손짓과 후후훗 웃는 미소에도 덧없는 기품이 서려 있는 존재.

“다나··· 메이어······.”

그녀는 다름 아닌, 이 세계인의 은인이자 1대 성녀로서 이미 한차례 ‘세계를 구원한 자’. 다나 메이어가 분명했다.

“예. 운명을 뒤엎는 자. 뇌제 이건우님.”

그건, 상당히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운명을 뒤엎는 자, 운명을 뒤집는 자. 부를 때마다 아주 조금씩 표현이 변하긴 했다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오직 하나였다.

“운명을 뒤엎는 자···. 지난번에도 당신은 나를 그렇게 불렀지.”

“한낱 ‘꿈’을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감사고 자시고, 하나만 묻지. 다나 메이어, 당신이 나를 그렇게 부른 이유는···. 내가 당신이 꾼 예지몽을 모두 벗어난 미래를 이끌어내서가 아니라······. 그냥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나. 회귀에 대해서 말이야.”

전생을 기억하는 자.

혹은 회귀자의 존재를 아는 자.

지난번 다나 메이어를 만났을 당시의 나는 그런 ‘비밀’들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던 상태였으나 이번은 달랐다.

‘죽어도 과거로 돌아가는 존재가 있다.’

세계에는 ‘회귀’하는 인간이 있고 또, ‘회귀’를 아는 인간이 있다.

이 간략하지만 분명한 사실을 깨닫게 된 나는 자연스레 생각해낸 것이다.

과연 수천의 미래를 엿보았다는 그 다나 메이어가 ‘회귀’에 대해 몰랐을까.

이윽고 나의 질문에 잠시 멈칫하는 반응을 보이던 다나 메이어는 이내 우수에 찬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며 어딘가 구겨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당신께서 생각하시는 그대로입니다. 저는 애당초 당신이 이번 대의 회귀자라는 것을 알고 접근했고···. 당신을 ‘더 큰 꿈’으로 인도하기 위해 길잡이를 자처했습니다.”

다나 메이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듯 그런 말을 내뱉었고, 나는 ‘그녀가’ 그리고 ‘재앙’이 공통적으로 입에 담던 특정 키워드에 집중했다.

“이번 대···. 라고?”

아까도 재앙, 태고의 흡혈귀는 비슷한 말을 사용했다.

내가 2회차까지밖에 도달하지 못했다느니 하던, 바로 그 말 말이다.

그리고 눈앞의 다나 메이어 역시 ‘이번 대’의 회귀자는 나. 라는 식의 말을 사용했다.

즉, 정말로 있는 것이다.

나 이외의,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온 ‘회귀자’가.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낼지, 나는 손에 땀을 쥘 정도로 긴장한 채 기다렸다.

다만, 좀 전부터 우수에 찬 눈빛으로 어긋난 미소를 짓고 있던 1대 성녀, 다나 메이어는 내가 기대하지 않은 말만을 입에 올렸다.

“백번 설명해 드리는 것보단 직접 보시는 것이 더 빠르겠지요.”

-샤아아아!

대성녀의 말과 함께 파닥이는 수천의 날개. 이내 그녀가 소환한 빛의 나비들은 서서히 허공에 모여 특정한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보여주겠다니, 대체 무슨 소릴···.”

단도직입적인 행동에 나는 눈살을 좁히며 그런 말을 중얼댔지만, 다나 메이어는 그저 자신이 형성한 허공의 빛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지난번에도 인간의 몸으로 내게 ‘퀘스트’를 발주하던 신비를 선보인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시스템 메시지’를 움직여 무언가를 하려는 건가···!‘

그런 의문 머릿속에 품길 수초, 눈앞의 빛무리는 예상대로 정형화된 메시지의 형태를 취했으나, 조금 이상했다.

익숙한 것이라곤 직사각형의 반듯한 그 형태뿐··· 그 메시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영롱한 녹색의 광택을 내뿜고 있던 것이다.

마치, 지금도 내 주머니에 들어있는 ‘아카식 레코드 3번’과 같이 말이다.

“이게 무슨···.”

어떻게 한 인간이 메시지를 생성하는 것인가.

다나 메이어에게 지난번부터 줄곧 궁금했던 의문을 입에 담으려던 찰나, 석제 교회의 형태를 띠고 있던 이 일대는 갑작스레 격변했다.

-차라라라라라락,

고즈넉한 필름 영사기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허나, 눈앞의 펼쳐진 광경은 영화관도, DVD방의 모습도 아니었다.

<경고>

ㅡㅡㅡㅡㅡㅡㅡㅡ

*제6구역 ‘독일’의 각성자들은 재앙의 잉태를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재앙의 현현까지 남은 시간: 3시간 21분

<재앙으로부터 살아남으십시오.>

ㅡㅡㅡㅡㅡㅡㅡㅡ

그것은 언젠가의 나도 직접 본 적이 있던 피처럼 흉흉한 광택의 메시지.

바로 ‘재앙의 현현’을 경고하는 메시지였다.

다만 내가 직접 보았던 것과 다른 점이 딱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메시지에 적힌 구역이 대한민국을 지칭하는 14구역이 아닌, 독일을 지칭하는 6구역이었다는 점이었으며···.

둘째는 최후의 인류를 이끄는 구심점으로 보이는 이들이 나와 이준학 준장이 아닌, 은발 벽안의 한 남자였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얼핏 낯선 유럽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나는 그 푸르른 안광과 남자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모르겠는가.

전생에도, 현생에도 나는 언제나 악몽속에서 그를 마주해왔거늘······.

‘프리드리히 파울라스···.’

눈앞의 그는 바로, 불사왕이었다.

그가, 생존한 유럽의 헌터들의 중심에서 굳건한 팔을 들어 올리며 힘찬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인류의 명운은 경각에 달했다. 종말은 다가왔고 재앙은, 지금 우리들의 눈앞에 잉태되고 있다···! 허나, 우리는 절대 물러서지 않으리니! 우린 결코 쉽게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눈에는 실핏줄까지 곤두세우며, 마이크도 없이 완전한 잉태를 코앞에 두고 있는 ‘재앙’을 기다리는 자.

그는 분명 인류의 재앙인 프리드리히 파울라스가 맞았으나, 일장연설하는 그 말들도 그 결의에 담긴 의지도 내가 아는 프리드리히 파울라스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건···. 대체······.’

당혹스러운 마음에 내가 눈을 크게 뜨자, 이윽고 눈앞의 광경은 빠르게 흘러 잉태된 재앙이 깨어나는 순간으로 이어졌다.

“으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

거대하고 굵직굵직한 뼈 무장으로 전신을 휘감고 깨어난 사신, ‘레골라스’에 맞서 싸우는 유럽계 헌터들.

숱한 헌터들을 흡혈 구울로 만들어 전장을 엉망진창으로 만들던 ‘태고의 흡혈귀’와 달리, ‘사신’은 고고하게 홀로 서서 모든 유럽의 헌터들을 아작내기 시작했다.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제 발로 사지에 달려드는 이들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지켜보기도 힘들 만큼 처절했다.

“우린... 우린, 아직지지 않았.... 크허업!”

무엇보다, 사지가 분쇄된 상태에서마저 처절하게 땅을 기어 언데드를 소환하는 불사왕의 모습은···. 정말이지 내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허나, 그런 최후의 저항마저 무참히 짓밟는 재앙, 레골라스.

거대한 사신은 몇 번이고, 불사왕에게 처절한 절망을 선사했다.

이윽고 사신이 손에 쥐고 있던 ‘데스사이드’가 불사왕의 머리에 내리꽂힌다.

-뚝.

섬뜩한 소음이 울려 퍼지고 으스러진 불사왕의 머리와 함께, 고즈넉이 돌아가던 필름 영사기는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를 냈다.

마지막으로 내 눈에 담긴 광경은, 죽는 그 순간까지 푸르른 안광을 번뜩이며 사신 레골라스에게 짙은 적의를 쏟아내던 불사왕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일순간에 격변한 광경.

나는 어느샌가 그 끝을 알 수 없는 높이의 석제 교회로 돌아온 상태였다.

뭔지 모를 상황에 내가 멍하니 그렇게 서 있자 다시 나타난 다나 메이어는 아주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연다.

“이름, 프리드리히 파울라스. 독일 출생. 당대로선 이유 없는 차별을 당하던 ‘죽음 수확자’의 선구자로···. 그는 태생적으로 마력을 느낄 수 없는 마나 불능의 육신으로 세계 최강의 ‘네크로맨서’가 됩니다.”

“...뭐, 라고?”

지구상의 그 누구보다 거대한 마나 총량을 가진 그 불사왕이, ‘마나 불능’이라고···?

이해할 수 없는 말, 그리고 이해를 벗어난 헛소리에 두 눈을 부릅뜬다.

허나,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건 슬픈 눈의 다나 메이어는 그저 자신이 하고자 했던 말을 끝까지 읊어줄 뿐이었다.

“그는 죽음 수확자 뿐만 아니라 차별 받던 비스트 테이머, 인섹트 테이머들을 결집해 온 유럽을 구원했으며 훗날, 전세계의 인류를 수호하는 전인류의 희망이 됩니다.”

“잠깐, 잠깐···! 그건, 내가 아는 불사왕이 아니야. 불사왕은 세계 최악의 마력 총량을 가진 괴물이고···. 이 세상을 송두리째 불바다로 만든 최악의 재앙이잖아······!”

불사왕이 전 인류의 희망이라니.

불사왕이 진짜 구원자라니.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중의 헛소리란 말인가.

그 어처구니가 없는 말에 내가 식식거리며 언성을 높이던 차, 슬픈 눈의 다나 메이어는 끝내 말하고 만다.

“프리드리히 파울라스는···. 뇌제 이건우. 당신의 바로 전대 회귀자였습니다.”

“그 불사왕이···.”

회귀자였다고?

회귀자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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