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22화.
“검을 배우기로 했어.”
‘검성’을 찾아갔던 그 날 밤. 암행의 아지트로 돌아온 철혈검희 이서영은 아주 조그마한 미소를 머금고 내게 대뜸 그런 말을 했다.
“잘됐네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리고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어렴풋이 예상해볼 수 있었다.
“찾아가긴 했는데, 막상 할 말이 떠오르질 않아서 검을 배우고 싶다고 했죠?”
“...?!”
내가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내뱉은 말에 이서영은 몸을 크게 떨며 휘둥그렇게 눈을 떴다.
“그 정도는 알죠.”
“...어떻게?”
“그동안의 행동 패턴 그리고 방대한 자료요. 검성을 조사하다 보니 이 대령님의 조사도 겸사겸사하게 됐었거든요.”
내가 그리 말하자 이서영은 영 탐탁지 않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마 자신을 뒷조사했다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리라.
그래도 이런 모양새로라도 그녀가 검성에게 정식으로 검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은 퍽 중요한 대사건이 맞다.
‘철혈검희’는 전생에도 13살까지밖에 배우지 않았던 ‘검성류’를 독자적으로 재개발해 사용하던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리고 그녀의 그 ‘검’으로 무려, 먼 훗날 ‘검제’를 꺾는 경지에 이른다.
그런 그녀가 정식으로 ‘검성류’를 마스터하게 된다면 이서영은 분명 전생보다 훨씬 더 강한 ‘검’을 손에 넣게 될 것이 분명했다.
“다 배우시는데 얼마나 걸리실 것 같나요?”
이 늦은 밤, 굳이 내 방까지 찾아와 저런 말을 꺼냈다는 건 아마 그에 걸맞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검의 배움에, ‘다’는 없어.”
그리고 지금의 경우는 그 목적이, 아마 시간에 관해 묻기 위함이었으리라.
“대략적으로라도 좋아요. 시간이 필요하신 거죠? 검성과 함께 있을 시간도, 검을 터득할 시간도요.”
“...너 사실은 독심술 같은 스킬 있지?”
“없어요.”
“아니······. 그러면 어떻게 사람이 말도 안 했는데 다 알아.”
그야, 전생에 보낸 시간이 있으니까.
뭐 그런 말을 할 순 없으니 나는 하하하 웃고는 짐을 욱여넣던 짐가방에 더 열심히 이것저것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국에 얼마나 더 있을 건데···. 그걸 말해줘야 일정을 조율하지.”
“아, 뇌제로 승격된 인터뷰에 관례대로 몇 번씩 ‘도전’을 받는 기한도 있어야 하고···. 어떤 유적도 다녀와야 하거든요. 아마 앞으로 보름 뒤까진 중국에 있을 것 같습니다.”
말을 그렇게 했지만,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검’에 끝이 없다는 이서영의 말처럼 검성류를 깊이 있게 터득하기 위해서는 보름이 뭐냐 최소 일 년의 고된 수행이 필요할 거라는 것을 말이다.
더욱이 스스로도 검에 관심이 많은 이서영의 성격상, 그녀는 한번 시작한 수행을 제대로 끝맺고 싶어 할 것이기도 했고, 그래서 나는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덧붙였다.
“단, 대령님은 예외입니다.”
“엉···?”
갑작스러운 말에 맹한 표정을 짓는 이서영.
그녀는 13살부터 올해까지 군에 소속되어 삶을 지속 해왔던 터라 예외를 두는 이런 상황에는 익숙지 않은 것이다.
“대령님. 13살 때부터 군이 입대해서 올해까지 한번도 ‘연차’를 사용하지 않으셨었다면서요. 아무리 헌터군이라도 이건 근로기준법 위반이죠.”
“헌터 군에 그런 게 어딨어.”
“있어요. 어차피 곧 대대장직도 해임되신다면서요. 이번 기회에 정식으로 하고 싶으셨던 일을 하고 오시는 건 어떠세요? 다른 자질구레한 것들은 신경 쓰지 마시고요.”
나는 어딘가 불안한 듯,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이서영에게 한 발짝 다가가 말했다.
“검성류, 배우고 싶으시잖아요. 그것도 엄청나게 말이에요.”
이서영의 검에 대한 열망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어마어마하다.
그런 드러낸 적 없는 마음을 정확히 짚고 그녀가 듣고 싶어 하던 말을 순서대로 쭉 읊어주자 이서영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가까이서 바라보는 그녀는 확실히 작다.
이른 나이에 키가 큰 성녀, 앤젤라 엘런과 얼핏 똑같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거기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에 작은 얼굴까지.
성전사 메리를 보며 어린 애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 같이 생겼다고 줄곧 말해왔는데, 새삼 이렇게 근접해서 바라보고 있으니 이서영이야말로 그런 말이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쭉 내 눈을 응시하던 이서영의 눈이 조금 떨리며 내려갔고, 어느새 뺨이 달아오른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입술만 달싹거리다가도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잠시 반응 없이 멈춰선 이서영.
“...대령님?”
서서히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 내가 그녀를 부르며 반 발짝 더 다가가자. 이서영은 촉촉해진 눈을 크게 뜨고 코앞까지 다가온 나를 놀란 눈으로 응시했다.
“우, 우세요?! 호, 혹시 제가 너무···. 과한 참견을 해서······?”
“아, 아니야! 이건 가, 갑자기······. 그냥···.”
허나, 이서영은 그 큰 눈동자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갑작스럽게 울기 시작했다.
정말 어린 아이처럼 꺼이꺼이 우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답지 않게 어깨를 떨어가며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이에 놀란 나는 그녀를 아무 말 없이 꽉 안았고, 품 안에 쏙 들어온 그녀의 등을 천천히 토닥여주었다.
내 예상과 달리 ‘검성’에게서 좋지 않은 말이라도 들었던 걸까.
아니면 나의 과한 간섭이 기분 나빴던 것일까.
갑작스러운 울음에 내가 당황하며 이런저런 불안을 떠올리고 있자, 내 품에 안겨 있던 이서영은 돌연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스승한테···. 어째서 그동안 직접 찾아오질 않았던 건지 물어봤거든. 그랬더니 스승이 그러는 거야······.”
-이미 그곳에서도 가족을 만들었으니,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었다.
그건, 참 미련하고 바보 같지만, 퍽 상냥한 말이기도 했다.
어차피 당시의 중국은 위험했고, 검성이 그런 어중간한 상태로 어중간한 군 생활을 이어가던 이서영을 찾아왔다간 아마 그녀는 지금처럼 군에 완벽히 적응하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15년이 넘도록 찾아오지 않은 건 심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을 홀로 떠올리고 있자, 이서영은 조금 더 진정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생각해봤거든. 대체 스승은 뭘 보고 내게 가족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말이야.”
“그야···.”
“그래. 소대원들, 전우들, 2대대의 간부들과 내 병사들. 많이 있겠지. 근데 나에게 그 친구들은 전부 가족이 아니라 그냥 친구일 뿐이었으니까.”
그녀는 검사로서의 자신, 군인으로서의 자신. 이른바 ‘이용가치’에 기반한 인간관계는 지금껏 가족이라 생각해오지 않았었다고, 그런 이야기를 쭉 코맹맹이 소리로 풀어놓았다.
“그럼, 가족은요?”
“당연히 없다고 생각했지. 내가 그런 이야기만 나오면 질색했던 거. 건우 너도 알잖아.”
“그건, 그랬죠.”
“근데, 딱 한 사람은 나를 가족처럼 대해주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
‘이용가치’에 기반한 인간관계는 가족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던 이서영.
그리고 조금 전의 상황.
-검성류, 배우고 싶으시잖아요. 그것도 엄청나게 말이에요.
나는 그제야, 그녀가 갑자기 눈물을 터트린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네가 처음이었어. 그냥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말한 사람. 군인으로서도, 검사로서도 아니고···. 그냥 내가 원하는 걸 정확히 알아봐 준 사람······.”
그렇게 말하며 나를 올려다보는 이서영.
눈물에 눈을 비벼 벌겋게 달아올랐음에도 그녀의 눈은 참 덧없이 깊으며 맑았다.
그렇게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품에 안은 그녀를 내려다보는 사이, 이서영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내 입에 그녀의 입을 맞추었다.
“네가 좋아. 무지무지 많이···.”
그렇게 내게 갑작스러운 고백을 날린 이서영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 미소가 만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답은···. 안 해줘도 되니까······.”
그리고는 그런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툭 던지고 그녀는 도망을 치듯 내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
허나, 나는 그녀가 뛰쳐나간 후에도, 한참을 더 몸이 굳은 그대로 멈춰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찰칵!
“어떻게 그런 극적인 성공 가도를 달성하신 건지···!”
-찰칵!
“뇌제께서 1년 전까지만 해도 D급의 헌터였다는 루머가···. 예?! 사실이었단 말씀이십니까?”
-찰칵! 찰칵!
“뇌제께서 목표로 하시는 바와 앞으로 세계 헌터계에 어떤 방향성의 영향력을 떨치실 계획이신지···!”
대도시의 야경처럼 반짝이는 카메라 플래쉬.
대체 이게 무슨 소란인지.
톈진 성 외각에 위치한 초거대 복합 호텔의 1층 로비는 통째로 기자회견장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을 수놓은 반짝이는 레드카펫에 찍힌 발자국은 단 하나.
이곳에 모인 이들은 살벌하다 표현해도 좋을 만큼 어마어마한 인물들뿐이었다.
세계 헌터 연맹의 중역들,
신 무림맹의 핵심 구성원들과 이번 ‘전세계 합동 레이드’에서 각국을 대표했던 헌터들,
거기에 세계적으로 퍽 영향력 있는 정계 인사들과 거대 길드의 1등 스카우터들···.
이윽고, 그 각각의 집단과 집단을 대표해 직접 질문을 던질 권한을 가진 세계 각국의 이름 있는 기자들까지.
허나, 앞서 말했듯.
그 중심을 가르고 단상으로 향하는 레드 카펫에 찍힌 발자국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찰칵!
“뇌제께서는 프랑스 총리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도 명망이 높으신데, 이번 수식언의 격상건으로 그분께 하시고 싶으신 말씀은 혹시 없으신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어딜 가던 주인공이라 불릴 법한 이들을 모조리 객석으로 내쫓은, 이 무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나였다.
나는 드디어 나온 ‘불사왕’과 관련된 인터뷰 질문에 씩 웃으며 준비해온 말을 거침없이 입에 담았다.
“아, 존경하는 프랑스 총리. 보내주신 선물 잘 받았습니다!”
“버, 벌써 개별적으로 선물까지 주고받는 사이셨단 말씀입니까!?”
“그···! 프랑스 총리가 주셨다는 ‘선물’에 대해서 조금만 언급을······.”
눈에서 불이라도 내뿜을 것처럼 열렬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는 기자들.
나는 그런 그들에게 흥분을 가라앉히란 의미로 손바닥을 들어 올렸고, 잠깐의 소강상태를 맞이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씩 말씀드리겠습니다.”
단순한 인터뷰라 보기 힘들 정도로 막대한 인사들이 몰린 회견장.
제(帝)급 헌터는 지난 26년간 단 한 사람도 이 세상에 나타나질 않았었으니까.
이렇게나 많은 관심을 받게 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 후로도 오직 나와 식사를 하고 싶다는 것 하나만으로 상상 이상의 비용을 지불한 거대 기업, 거대 길드들과의 만찬회가 있었고 커피를 마시며 나누는 간담회도 있었다.
그렇게, 무리하다 싶을 만큼 하루에 몰아넣은 일정의 마무리는 새로운 ‘황제’의 등장을 축하하는 축하파티 자리였다.
“후우우우우···.”
밤 8시 30분부터 시작된 파티는 자정을 넘기도록 이어졌고,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수많은 인터뷰어들의 주의를 ‘두 성녀’에게 돌리고는 파티장 구석 테라스로 도망쳐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러게 일정을 하루에 몰아넣는 건 피곤할 거라고 말했을 텐데, 끌끌끌”
그때, 어떻게 알았는지 여유로운 걸음으로 혼자 있는 내게 다가오는 남자.
그는 다름 아닌 검성, 라오 위였다.
“돌아가셨던 것 아니셨습니까?”
“이놈 보게? 다 죽어가는 노인네한테 못하는 말이 없구나?”
“아니, 아니. 맹주께서는 파티가 시작될 때 축사를 읊어주시고는 바로 회장을 나가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맹으로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끌끌끌. 알고 있다. 농담이나 해본 게야.”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장난기 많은 표정을 짓는 검성.
역시 그 본질은 어디까지나 방랑 협객이기 때문일까.
신 무림맹의 맹주가 되고도 퍽 밝고 가벼운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 썩 능숙하더구나. 요새 젊은이답지 않아 조금 놀랐다. 끌끌끌.”
“대령님은 잘 계십니까.”
나는 그와 뭔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기도 전에, 금일을 기준으로 딱 사흘 전 내게 갑자기 입을 맞추고 ‘아지트’를 떠나버린 이서영의 근황을 물었다.
기분이 나쁘다면 충분히 나쁠 수 있는 질문이었음에도 검성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흥미롭다는 듯 미소만 짓고 있었다.
“퍄. 걱정은 되는 게냐?”
“그야···. 당연합니다.”
“그럼 직접 만나러 오지 그랬느냐?”
“거기에는, 말 못 할 사연이란 게 있었습니다.”
이서영이 갑자기 짐을 챙겨 나간 것도 놀랐는데, 나가기 직전의 상황이 상황이었다보니 나는 요 사흘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질 못하고 있었다.
이 복잡 미묘한 상황을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차, 검성은 돌연 푸하하하! 하며 큰 웃음을 터트리더니 말했다.
“꼬마야. 이 노구가 아무리 늙다리에다 눈치가 없어도 서영이는 내 딸이다. 그 애 반응만 봐도 뭔가 있어도 단단히 있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렇습니까.”
“그래 요놈아. 끌끌끌. 겉으로는 하늘을 베고 은하수를 내리던 너도, 결국 속은 20대 초반의 꼬마일 뿐이었단 겐가. 청춘이로구나. 청춘이야~”
뭔가 그립다는 듯한 목소리로 잠시 상념에 잠긴 표정을 짓는 검성.
지금은 저 하늘의 별을 베는 검성이지만, 그에게도 ‘일가족 몰살’이라는 트라우마가 있다.
물론, 이미 70년도 더 지난 옛 가족들의 이야기였다.
아마 검성은 자신의 혈육들이 살아있던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던 듯했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 후, 나와 검성은 본래부터 하려 했던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 있을 ‘도전’에 대해 그리고 흡혈종에게 지배를 받는 ‘일본’과 검제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럼 너는 그 이계인과 검제가 만든 괴물마저도 죽이지 않고 구해내려 한다는 게냐.”
한참 동안 턱을 짚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을 하고 있던 검성은 다소 난해하다는 표정으로 그리 말했고, 나는 그에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이 아닙니다. 검제의 딸이죠.”
“흠. 그것을 인간이라 말할 수 있는 자가, 눈이 돌아간 검제 말고도 또 있었다니···. 딸이라······.”
“어쨌든, 제가 맹주께 부탁드리고자 하는 건 딱 하나뿐입니다. 한 번만 더 빌려주십시오. 검성의 힘 아니, 이 무림의 헌터들이 다 함께 이룩할 새로운 힘을 말입니다.”
중국은 전생과 다른 행보를 보일 것이다.
내란이 많고 워낙 이상한 것들이 득세해서 그렇지, 사실 중국의 풍부한 자원과 인력은 훗날 인류 존속에 분명 큰 힘이 될 터였다.
나는 ‘더 나은’, 전생보다는 훨씬 더,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그 힘마저도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좋다.”
그때,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던 검성은 힘 있는 목소리로 시원한 답을 해주었다. 역시 의와 협을 아는 무인. 방랑 협객 라오 위다운 모습이었다.
이에 내가 슬쩍 웃으며 미소를 지으려던 찰나, 검성은 묘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단, 조건이 있다.”
“조······. 조건 말씀입니까?”
시원시원한 성격에 자질구레한 것을 싫어하는 그가 조건이라니.
나는 예상치 못한 발언에 놀라 잠시 말을 더듬었는데, 이어지는 검성의 화두는 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꼬마야. 너, 내 딸아이의 연심을 받고 또 너 스스로도 서영이에게 퍽 관심이 있으면서······. 곁가지를 썩 많이도 두고 있더구나?”
“곁··· 가지?”
“그래. 성전사단의 그 젊고 예쁘장한 아이부터, 저기 이계신의 성녀라는 처자, 그 외에도 이래저래 발을 많이도 걸치고 있는 것 같던데···.”
“발을 걸치다니요···?!”
순간적으로 소름이 쫙 돋았다.
왜냐하면, 면전에 있는 검성의 분위기가 확 변했기 때문이었다.
방금까지의 장난스러운 눈빛은 어디로 가고 악귀나찰의 얼굴을 한 검성은 눈에서 빔이 나올 것만 같은 강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다른 처자들은 다 내치고 우리 서영이와 첫 혼례를 올릴 것을 맹세해라. 그게 내가 너에게 협조하는 유일한 조건이다.”
그 내용은 퍽 장난스럽지만, 수도(手刀)를 곧게 뻗은 그의 자세는 정말이라도 나를 공격할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성전사는 누굴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남궁연과 이서영에게서 호감을 받고 있다는 것쯤은 나 스스로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일가족이라고는 ‘검희’ 하나뿐인 검성에게는 그런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정말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옛 시대의 사람이니 더더욱. ‘혼례’라느니 심하게 비약적이고 구시대적인 발상도 진심으로 행하는 듯했다.
게다가 첫 혼례라니.
사람이 결혼을 두 번 할 수도 있단 말인가. 아, 가능한가?
어쨌든, 그렇게 내가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가만히 멈춰 있자 검성은 돌연 웃으며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끌끌끌끌. 뭘 그리 진지하게 긴장하는 게냐. 요새 젊은것들은 이 늙다리의 가벼운 농에도 어울려줄 줄도 모르는 게냐?”
“노, 농담···.”
그 ‘기세’와 ‘살의’가 전부 농담이었단 말인가?
이에 내가 놀란 표정을 지으니 검성은 다시금 실눈을 뜨고는 말했다.
“하늘이 부러워할 재능을 타고난 자가 이리도 여색에 관심이 없어서야. 쯔쯧.”
참···.
대화를 주도하기가 정말 힘든 양반이다.
이 양반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면 대체 주제가 어디서 어디로 튈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래서 나는 본래부터 그를 만나면 하려고 했던 말부터 서둘러 꺼냈다.
“맹주.”
“오냐.”
“혹시 이 물건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이윽고 꺼내 드는 것은 한동안 내 호주머니에서 잠들어 있던 일종의 키. 바로, ‘아카식 레코드ⅲ’였다.
“흠.”
검성은 아카식 레코드 3번을 보자마자 방금까지 얼굴에 수 놓여 있던 미소를 싹 지웠다.
그런 반응을 확인한 후에 나는 다시 물었다.
“검성께선 알고 계시지요. 이 열쇠와 유적 그리고 그 안에 뭐가 있는지를 말입니다.”
불사왕을 나를 두고 ‘이어져 온 꿈’의 꼭두각시라는 말을 사용했다.
1대 성녀 다나 메이어는 내게 ‘세계의 진실’을 알고 싶다면 이 아카식 레코드를 사용하라 말을 했다.
그리고···.
“네가 그걸 가지고 있다는 건, 너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게로구나. 이 세계의 진실에 대해.”
드디어 검성의 입에서도 ‘세계의 진실’이라는 키워드가 나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본 게임의 시작이었다.
버그맵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