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17화.
미친 세계였다.
내리는 비는 붉었으며, 지상에 발을 딛고 일어서 있는 이들은 모두 부패한 아가리로 망자의 절규를 노래하고 있었다.
어딜 둘러보아도 지옥의 온상이 펼쳐져 있었다.
죽은 아이의 시체,
그 시체를 부둥켜안고 피눈물을 흘리는 어미,
‘그것들은’ 미소와 함께 그 어미를 차디찬 쇠말뚝으로 뭉개버렸고,
그런 ‘그것들을’의 악행을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도움의 손길을 뻗을 수가 없는,
그런 미친 세계였다.
무신론자인 검희가 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고,
학자이자 탐구자인 이준학 준장님은 빌런들에게 교화의 가능성을 기대하기 시작했으며,
박애주의자였던 홍진웅 대령은 빌런이 숨어들었다는 난민 수용소에 학살을 자행하는 냉혈한이 되어 있었다.
돼지 배터리였던 내가 인류의 창이라느니, 희망이라느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매일같이 터져 나오던 세계다.
미쳐있는 말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세계’를······.
고층 빌딩보다도 더 거대한 키를 가진 저 스카이 타이탄의 오른 어깨에 올라 서 있는 저 불사왕은, ‘구원을 받은 세계’라 말을 하고 있었다.
놈는 세계를 압도했다.
실제로 개인이 세계를 압도한다는, 듣는 것만으로도 헛웃음이 절로 나올 법한 허무맹랑한 소리를 실현시킨 괴물.
그게 바로 불사왕이라는 한 존재였다.
불사왕은 죽지 않는다.
자신에게 복속된, 단 하나의 권속이라도 이 범지구적인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면, 불사왕은 그 육신을 제물 삼아 지구 반대편에서라도 부활하는 괴물 같은 놈이니까.
순수한 ‘던전 은’으로 제작된 무구들은 언데드를 상대로 두 배의 파괴력을 발휘한다.
전장에서 줄곧 내리던 ‘수신의 비’는 언데드의 능력치를 두 배로 낮춘다.
능선의 중턱,
그중에서도 이미 절반 이상을 광범위하게 아군이 점거하고 있던 지형적 이점은 분명,
불사왕으로 하여금 단번에 자신이 가진 모든 언데드를 소환할 수 없도록 하는 제약으로 작용했을 것이었다.
거기에 2대 성녀의 ‘구마경’은 이 야산의 중턱에까지 부패를 정화하고 만인을 치유하는 기적을 전파했으며,
우린, ‘던전 은’으로 특수 제작된 포탄을 아낌없이 퍼붓는 흑태자의 화력지원마저 받아가며 싸우는 상황이었다.
그 상태로, 아니 그 지경에 이르러서야··· 우린 불사왕과 비로소 ‘대등할’ 수 있었다.
사실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수만, 수십만의 사역마를 부리는 만큼, 압도적인 마력을 소비 중인 ‘네크로맨서’가···.
고등 ‘전격 방출계 헌터’인 나와 1대1로 대등한 전투를 벌였다는 것 자체가 실은 정말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단 말이다.
허나, 불사왕은 가능했다.
아직 ‘본 드래곤’이라는 세 번째 비장의 수를 보유하고 있던 것도 아니면서, 놈은 그 미친 열세를 극복해낸 것이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신력’에 저항력을 가진 ‘스카이 타이탄’을 공개하지도 않으면서까지······.
알고 있었다.
현시점에서 놈이 가진 비장의 수는 두 가지였다는 것을 말이다.
첫째는 놈이 입고 있던 푸른 로브가 상징하는 ‘흑색 마탑’에 소속된 고위 언데드들과 미치광이 학자들이다.
만일 불사왕이 그들을 전부 대동해 이곳에 나타났다면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그 행진을 막을 수는 없었으리라.
둘째가 바로 혼혈의 거인 ‘자이언트’의 수십 배 크기를 자랑하는 순혈의 거인.
50년 전, ‘에계해 제도’ 전역을 혈혈단신으로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거악(巨惡).
바로 이 ‘스카이 타이탄’이었다.
허나, 놈은 자신의 목에 ‘데스사이드’가 박혔을 때조차 이 하늘 거인을 소환하지 않았다.
놈이 뭔가를 숨긴다는 건, 지금 한번 ‘죽어도’ 끝내 자신이 승리할 수 있을 거라는 철저한 계산이 있다는 소리다.
전생을 통해 알고 있었다.
나는 실제로 셀 수도 없이 불사왕의 그러한 함정에 빠져 죽을 위기를 직면했었던 자였으니까.
그래서, 나도 숨기고 있었다.
지금 막, 거동하는 스카이 타이탄을 기분 나쁘다는 듯이 바라보는 저 검제(劍帝), 요시히사 켄신의 존재를···!
퉷!
그때, 검제는 입에 물고 있던 갈댓잎을 탁 뱉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약속대로, 내가 협조해주는 시간은 단 10분이다. 시건방진 꼬맹아.”
딱히 누구를 보며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일대의 모든 이들은 검제가 나를 향해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눈치였다.
검제의 제자들은 쓰러진 헌터들을 구한다.
검왕 류자키와 검희 이서영이 터벅, 터벅 이쪽을 향해 걸어온다.
흑룡이 완전히 죽었으니, 곧 검성도 모습을 드러내겠지.
전생에는 세계 ‘4대 검객’이라는 말이 있었다.
존재 자체가 범지구적인 공포로 자리매김한 괴물, ‘스카이 타이탄’.
언데드이면서, 신력에 저항성을 가진 기형적인 괴수, 그러면서도 엄청난 육체 강도를 가져, ‘악마’보다 더 단단한 육신을 가진 순수의 거악.
‘4대 검객’과 그렇게 불리지 않는 이들을 구분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였다.
-GAAAAAAAAAAAAAAAAAA!
하늘의 구름마저도 흐트러뜨리는 외침을 토해내며, ‘스카이 타이탄’은 주먹을 내지른다.
허나, 검제의 ‘천하패도(天下敗刀)’는 이를 피하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아앙!
단순한 정권 찌르기가 아닌 거대한 다이너 마이트의 폭발이라 생각할 법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다만, 검제의 비스듬히 기울어진 검은 그 하늘 거인의 주먹을 흘려냈다.
그래.
4대 검객이 4대 검객이라 불리게 만든 기준.
그건 바로, 저 스카이 타이탄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가, 없는가였다.
-촤아아악!
무식하게 뻗어 나오던 주먹에서 거무죽죽힌 피가 흘렀다.
‘거악’에게는 정작 피 한 방울에 불과한 하찮고도 미개한 그냥 생채기에 불과할지라도···.
그 어떤 마법적, 물리적 충격에도 상처를 입지 않던 저 ‘거악’이 피를 흘리게 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단, 전생의 검성과 검희 그리고 검제와 검왕은 어떤 일이 있어도 같은 편에 서는 일이 없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추구하는 바가 모두 다른 이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거악에 대항할 능력이 있는, 그들은 모인다.’
전생이었다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4대 검객이 한자리에 모여 등을 맞대고 ‘스카이 타이탄’을 상대하는 광경이라니···.
이를 실현한 나조차 그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허나, 전생의 과정을 그대로 답습해서 어찌 저 미친 ‘거악’에게 대항하겠는가.
승리를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모았다.
다름 아닌 내가, 저들을 한자리에 모은 것이었다.
본래라면, 앤젤라 엘런은 이 시기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본래라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수신’과 그 신의 성녀와 사도.
본래라면, 죽어도 옛날에 죽었을 ‘윤지아’의 발상을 통해 흑룡의 가디언들을 타지로 소환하지도 못했을 것이며,
본래라면, 빌런들의 계획을 모두 뒤집어엎어 버리지도 못했으리라.
본래라면, 이미 대부분이 사망했을 ‘전세계 합동 레이드’의 헌터들은, 아직도 살아있다.
한 걸음이 변하며 그다음 스탭이 변했다.
스탭이 변하니 그 이상의 작전을 수립할 수 있었고,
그 이상의 작전을 수립하며 나는 이윽고 미래를 바꾸었다.
검제가, 검왕이, 검희가 이윽고 검성이 한곳에 모인다.
이윽고, 변화한 ‘지금’은 바꿔낼 것이다.
병들고,
부패하고,
미쳐가던,
‘그 전생’과는 크게 동떨어진 새로운 미래로, 우릴 인도할 것이다.
***
전생에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었다.
죽음을 구원이라,
불사왕이 건국하는 나라가 곧 이 세계의 원주민들을 인도할 ‘방주’니라.
그런 말을 숱하게 뱉어대는 언데드들을 매일 같이 마주하다 보니, 나 역시 그런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대체 뭘까.
만일 이 세계가 정말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우리가 어떤 발버둥을 치더라도 세상은 그저 그런 미래를 향해 달려나가고 있을 뿐인 거라면···.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대체 뭐냔 말이다.
죽은 자는 산 자보다 강하다.
물론이다.
마력만 있다면 매번 땅 밑에서 생전 모습 그대로 일어설 수 있다.
어쩌다 날아든 비수 한발에 명을 달리하는 산 자보다 과연 죽은 자가 약하겠는가.
강인함이란,
실제로 앞으로도 더더욱 강대한 재앙을 맞닥뜨려야만 하는 이 세계의 주민들에겐 필연적인 전제 조건이었다.
우리는 어찌 되었건, 이 세계에 범람하는 모든 괴물들과 계속해서 싸워나가야 하니까.
허나, 만일 그 언데드에게 생전과 똑같은 이성이 있고, 생전과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사고 회로가 존재한다면,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란 뭘까.
정말로 멸망하는 이 세계에서는 ‘언데드가 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판단인 것은 아닐까.
대체 무엇으로 산 자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가.
그러한 속이 답답해지는 의문에 답을 내어준 것은···.
총명한 이준학 준장도,
이성적인 박애주의자 홍진웅 대령도,
평소에는 4차원 같으나 진지할 땐 진지한 검제 이서영도 아니었다.
그 자조적이고 자학적인 의문에 시원한 답을 내려준 것은, 참 우습게도 전혀 예상 밖의 존재였다.
-너, 생전에 알던 사람을 언데드로 다시 만나봤어?
그녀는 ‘대항군’의 일원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자.
대항군의 대표 연금술사이자 매번 윽박지르거나, 귀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기 바쁜 미치광이 연구자, 바로 ‘분노의 연금술사’라 불리던 이모님이셨다.
그간 동료들에게 이상한 질문을 하고 다닌다는 나의 이야기를 어디서 들으신 것인지, 이모님은 웬일로 매우 침착하고 점잖은 어조로 입을 여셨다.
-나는 만나봤어. 내 남편 말이야. 팔 한 짝은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없었고, 눈코입에서는 냄새나는 진물이 계속 흘러나와서 정말 역겨웠지.
이렇게나 길게, 점잖은 말투로 말을 하는 이모님을 뵌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지라 나는 그 묘한 존재감에 압도되어 그저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이모님은 말씀하셨다.
-그래도, 나는 그런 남편을 안아봤어.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뜨는 나.
전투 능력이 없는 그녀에게 언데드란, 결코 다가가서도 안 될 위험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본래부터 제정신은 아니셨지만, 그런 기행을 선보이셨다니···.
뒤늦게라도 뭐라 걱정 어린 말 한마디를 내뱉으려던 찰나, 이모님의 입에서는 싸늘하게 툭, 하고 침을 뱉듯 한마디가 다시 튀어나왔다.
-차갑더라······.
침묵이 있었다.
허나, 이모님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게 끝이 아니었는지 이윽고 다시금 입을 여셨다.
-심장이 뛰질 않으니 당연히 그렇겠지. 근데 말이야. 불사왕이 어찌나 잘나신 작자일진 몰라도 과연 세계의 모든 인간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성과 이성을 가진 상태로 유지할 수 있을까?
이모님의 질문에 나의 눈은 크게 뜨였다.
-없겠지. 놈이 아무리 초월적인 존재라도 40억 지구촌 인구를 다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유지하면서 게이트의 몬스터들과 싸울 수는 없을 테니 말이야···. 그럼 결국, 누군가는 걸어 다니는 시체가 되는 거야.
또 누군가는 그 걸어 다니는 시체를 자신의 양분으로 삼고, 방패막이로 쓰다 버리겠지···. 언데드에게 만일 의식이 남아 있더라도, 그 상태로서는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이다.
-내 남편처럼······. 그걸, 우리는 과연 살아남은 거라고 말해도 좋은 걸까?
나는 돌아오는 이모님의 질문에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이모님의 말씀은 충분히 논리정연했고, 또한 실제로도 불사왕은 자신의 인정을 받은 몇몇 고위 언데드를 제외하고는 그런 식으로 무생물을 대하듯 다루었었으니까.
한참 말없이 고민하고 있던 내게, 이모님은 문득 그런 말씀을 건네왔다.
-사람의 손은 말이야. 잡으면 따스한 법이야. 서로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또 자신의 의지로 눈앞의 갈림길을 선택해 나아갈 수 있으니까. 사람은 사람인 거라고.
어찌 보면 이모님은 당연한 말을 하셨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무고한 이들을 학살하는 이는 악인이다.
무고한 이들을 지키는 자는 선인이다.
선과 악이 명확히 구분 지어진 옛 동화속의 교훈들처럼.
그분은 그저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허나, 그 짧은 대화를 통해 나는···.
나를 대신해 죽어간 동료들의 유언을 깊이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
-살아라···.
그들은 어째서 그리도 처절하게 싸웠던가.
-네가 살아서 한 방 먹여줘.
그들은 어째서 그렇게나 태연하게 자기 자신을 내던질 수 있었던가.
-건우야···.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날 위해서라도, 꼭···. 살아!
홍진웅 대위와 함께 대항군에 입단했던 베테랑 관리부의 남궁연도,
-이 준위. 날 대신해서라도, 이준학 준장님을 도와줘··· 그분만은, 그분은 정말로! 이 멸망하는 세계를 구원하실 방법을 찾아주실 분이야···. 쿠헉! 그러니, 꼭······.
이준학 준장의 오른팔을 자처하던 김대위도, 어째서 나를 대신해 죽기를 자처할 수 있었던 걸까.
어째서 나는 그들의 죽음에 슬퍼했고,
또 솟구쳐오르는 핏물을 삼켜가며 이를 갈며 훈련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거였나.
그건 ‘꿈’이 있기 때문이었다.
죄 없는 자들이 이유 없이 죽지 않을 수 있는 평화.
그 덧없이 달콤하고 아름다운 이상향에 도달하진 못하더라도···.
그 이상향의 아주 작은 편린에라도 도달하기 위해, 우린 숭고한 희생을 감내했고 비장하게 전투에 임했으며 위대하고, 경건하게 전장에 섰다.
너무나 많은 목숨이 바스러져 갔다.
죽음이 없었다면, 셀 수도 없이 많은 그들의 여생은 각각의 또다른 이야기를 써 내려갔으리라.
허나, 이 미친 세계에서는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들이 안개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모든 삶은 필생의 역작이다.
허나, 차마 마침표도 찍지 못하고 스러져간 이야기들이 지금도 나의 어깨에 짊어져 있다.
그들이 못다 한 이야기를, 못다 이룬 갈망을 나는 기필코 이루어 내야만 했다.
그것이 그들의 ‘숭고한 죽음’을 무의미하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
눈을 뜬다.
눈을 뜨면 그 무엇보다 선명한 ‘악’은 나의 눈앞에서 춤을 추며 무서운 기세로 검을 휘두르는 4대 검객을 압도하고 있었다.
-GAAAAAAAAAAAAAAAAAA!
지축이 울린다.
거대한 포효에 다시금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어지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모든 삶은······.”
이윽고 악에 받친 얼굴로 내가 입으로 내뱉는 것은 불사왕이 부정하던 모든 것···!
“...필생의 역작이다!”
바로 산자의, 산 자에 의한, 산 자를 위한 외침이었다.
모든 삶은 필생의 역작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