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12화.
일순간이었다.
초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들이 으레 그렇듯, 그들은 찰나와 찰나 사이에 발을 딛곤 하니 말이다.
한 손으로 고위 리치 볼프 루이스의 한쪽 어깨를 잡아 뜯으며, 맹독의 갈비뼈를 사출하는 리치 두개골을 으스러뜨리고 뼈로 만든 대검을 허공에서 소환하기도 전에 데스나이트의 두 팔을 뭉개버린 것이다.
일순,
아이스 밴시, 레이첼이 숨을 들이쉬고 내쉴 틈도 주지 않고 일어난 경각의 폭력.
허나, 그 순간, 가장 큰 타격을 입고 비명을 내질러야 할 고위 리치, 볼프 루이스의 입은 떡하니 벌어질 뿐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아비규환의 머리 위로 어둠이 내렸다.
-샤아아아아아아악!
묵직한 안개의 형태로 날아드는 어둠.
그것은 닿는 것만으로도 ‘퀘속 전차’를 녹여 내렸다.
그것도, 흑태자를 보호하기 위해 몇 겹의 보호 마법이 내장되어 있던 ‘퀘속 전차’의 외장갑피를.
이에 천마의 반응은 빨랐다.
손으로 잡아 이미 반쯤 찢어버렸던 고위 리치, 볼프 루이스를 안개를 향해 집어 던진다.
탈출로가 막힌 사방 대신, 바닥을 주먹으로 뚫고 지면을 있는 그대로 잡아 뜯어 길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땅을 뚫고 튀어나오자.
저 멀리서 날아오는 ‘마천신교’의 2인자. 우화등선의 경지를 이룩하고도 다시 땅으로 돌아온 우선(愚仙)의 모습이 보였다.
펄럭이는 소매에서 부적을 집어 든다.
그것을 허공에 흩뿌리자 생겨나는 법진.
옥빛으로 반짝이는 법진은 전차를 송두리째 녹여버리고 흩어지는 흑룡의 브레스를 가두었다.
다만,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앙!
자연스레 대폭발을 연상케 하는 길고 거대한 포효는 다시금 터져 나오는 것이다.
-절그럭··· 절그럭···.
검은 안개에 녹아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던 언데드들은 전보다 더 해괴망측한 몰골로 그 어둠 속을 걸어 나온다.
반쯤 녹아내리다 만 시체의 얼굴.
허나, 일곱 데스나이트와 넷의 고위 리치 이윽고 새카만 어둠에도 태연히 걸어 나오는 아이스 밴시는 서리를 토했다.
죽지 않는, 말 그대로 언데드의 안광이 서슬 퍼렇게 번뜩인다.
“적어도 흑룡 토벌에 도움이 될까 싶어 놔두었거늘···. 끝내 이렇게 훼방을 놓는구나. 언데드!”
천마의 얼굴이 격노로 일그러진다.
허나, 그 말을 듣는 레이첼 역시 지지 않고 응수했다.
“개 같은 새끼가 헛소리를 지껄이네? 우린 불쌍한 헌터들을 불사왕께서 인도해주실 신세계의 주민으로 만들어, 구원하기 위해 움직인 거야. 네놈같이 이기적인 이유가 아니었다고!”
“하찮은 것이!”
“하등한 생자 주제에!”
그런 말싸움이 있고 수초.
엄습하는 거대한 발톱은 정확히 아이스 밴시를 노리고 있었으나 레이첼은 이를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아뮤르타스의 앞발에 공격을 당하는 그대로 천마를 향해 도약했다.
-푸욱!
이에 천마는 닿는 것만으로도 동상에 걸리는 아이스 밴시의 복부를 강하게 가격해 날려버리려 했지만, 밴시의 등 뒤에서 엄습하던 흑룡의 발은 그 천마와 레이첼을 동시에 짓눌렀다.
“커헉···!”
설마했던 자살 공격.
이에 천마는 당황한 듯 숨을 집어삼키지만, 얼음에 균열이 일 듯, 몸 이곳저곳에 금이 간 레이첼은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뭘 놀라! 뭘 당황해! 난 안 죽어, 하등한 생자랑은 달리, 나는 안 죽는다고! 캬하하하하!”
밀어닥치는 거대한 용의 폭력에 상체와 하체가 찢어져 날아가 버리면서도, 상체에 달린 레이첼의 머리는 음험하게 웃었다.
“쳇!”
힘 대 힘의 승부였다면, 뭘 생각해볼 겨를 도 없이 승패는 갈렸으리라.
허나, 사방에서 꿈틀거리는 언데드에게 무차별적인 폭격과 폭력을 난사하는 흑룡이 있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아비규환에 빠지고 말았다.
“막아! 막아아!”
“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이어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천마’와 ‘우선’을 뒤따라온 ‘마천신교’의 일각, 삼각, 사각, 오각, 칠각.
거기에 오직 ‘모든 중국인을 위한’ 세계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뭉친 각기 다른 문파의 무인들도 대군을 이루어 달려오기 시작했다.
상대는 천외경의 마수 ‘흑룡’.
‘전세계 합동 레이드’가 소집되지 않았다면 본래 일어났어야 할 중국계 헌터들과 아뮤르타스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지긋지긋한 언데드가 끼얹어진 상태로 말이다.
***
‘흑룡’의 베이징 도달로부터 13시간 경과.
이미 태양은 하늘의 중천에 떴다.
볕이 들고, 세상이 밝은 빛에 휩싸여 다시금 다채로운 색으로 빛나는 그 시간···.
베이징 상공에는 거대한 태산 하나가 떠올라 그 거대한 날개를 연신 위아래로 뒤흔들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
포효와 폭격.
이젠 듣는 것만으로도 지상의 무림인들이 다리를 후들거리게 만드는 죽음의 포효가 또다시 들려왔고···.
“으, 아아악!”
한 헌터······.
창을 잃은 미후왕은 덩그러니 떨어져 있던 언데드의 팔에 다리를 붙잡혀 비명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콰득! 콰득!
반쯤 부서진 두개골이었다.
허나, ‘데스나이트’였던 그것은 그 처참한 몰골로도 움직이며 윗니와 아랫니를 연신 부딪치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치, 죽음을 두려워하는 미후왕을 비웃는 것처럼 말이다.
“사, 살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당연한 행위 하나, 하나에서 튀어나오는 구조 요청과 비명.
미후왕은 이젠 스스로도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태양의 볕을 한 몸으로 가려버리는 흑룡.
각성과 함께 생겨난 고유 스킬인 ‘공중 부양’으로 하늘을 날며, 흑룡 ‘아뮤르타스’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천마.
허나, 상식과 이해를 아득히 벗어난 그 천마마저도 흑룡의 브레스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빛을 흡수하다 못해 세상에서 소거해버리는 검은 안개.
자신만만했던 미후왕과 그의 ‘마창대’는 누군가와 전투를 제대로 벌여보기도 전에 브레스에 맞아 사라져버렸다.
그래. 단순히 죽는 것도, 크게 다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녹아 소멸해버린 것이다.
형체도 먼지조차도 남기지 않고, 그저 이 세상 존재하지조차 않았던 것처럼.
“주, 죽고 싶지 않아···!”
어차피 ‘천마’나 ‘우선’급의 헌터가 아니고서야 창공을 날아오른 흑룡에게 대항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무림의 헌터들이 끝없이 전장의 바닥을 부단히도 뛰어다녔던 건, 어디서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언데드들과 갑작스럽게 나타난 ‘용마교’의 일당들 때문이었다.
“지고한 용의 분노를 봐라!”
“하찮은 인간들은 무릎 꿇으라! 흑룡이 내려주시는 안식을 그저 받아들여라!”
흑룡의 무차별적인 브레스에 소멸하는 것은 자신들도 똑같으면서, 용마교는 눈이 돌아간 얼굴로 무림의 헌터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내 어디선가, 수백 대의 공성병기를 대동해 나타난 블러드 엘프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으나, 당연히 ‘몬스터’라 생각하고 경계하던 것과 달리 엘프들은 하늘의 흑룡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무거운 추가 달린 공성 병기 수십 개가 흑룡의 육체에 박혔다.
고도가 낮아지는 흑룡.
그것만으로도 ‘천마’와 ‘우선’이 전투에 임하기에는 훨씬 더 편한 환경이 마련된 듯했다.
허나, 정작 지상에서 폭격에 녹아내리며 언데드와 용마교를 막아서던 무림의 헌터들은 당혹스럽다.
대체 누가 적인가.
대체 무엇이 아군인가.
무엇하나 확립된 것 없이 그저 어지럽게 뒤엉키고 있으면···.
단일 국가로서는 최대 규모의 각성자들을 동원했던 중국계 헌터들은 그 압도적인 규모만큼, 어마어마한 수의 각성자가 초 단위로 녹아 사라져가고 있었다.
폭격에 맞기 직전에도, 미후왕이 확인한 사상자의 수만 5천에 달했다.
지금은 그 이상, 아니, 자칫 잘못했다간 그 배 이상이 죽음을 맞이했겠지.
그럼에도 흑룡은 땅으로 내려앉을 기미가 없고, 뜨겁게 달아오른 이 아수라장은 식을 기미가 없다.
그렇게 시간은 더더욱 비참하게 흐른다.
끔찍한 악몽이, 거친 죽음이 허공을 수놓고 지상을 뒤덮어 이젠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된 미후왕과 중국계 헌터들이 좌절에 빠져, 바닥에 엎어졌을 때쯤.
-치익!
이유는 모르겠지만, 먹통이 되었던 광역 통신망을 수신하는 미후왕의 무전기에서 잡음이 들려왔다.
“그··· 으윽···.”
이에 언데드에게 발목이 잡혀, 흑룡의 브레스로 한쪽 다리를 소멸당했던 미후왕은 문득 정신을 차렸고, 그제야 자신이 격한 고통에 정신을 잃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으으, 으으으,”
목에서 모래가 갈리는 소리가 나온다.
자신은 분명 맨바닥에 엎어져 있었거늘 어째서 그늘에 들어와 있는 걸까.
정신을 잃었던 미후왕이 그런 의문을 품고 눈을 굴리자 그제야 자신이 기절했던 사이, 긴 시간이 흘렀었음을 알 수 있었다.
푸르게 밝아왔던 하늘은, 어느새 다시금 밤이 되어 있었다.
-콰아아아아아!
허나, 제대로 정신을 차리는 것과 동시에 들려오는 무시무시한 굉음.
미후왕은 아직도 저 하늘 위에서 흑룡과 천마가 접전을 벌이고 있음에 전신을 흠칫 떨었다.
그러자 자연히 막대한 격통이 그의 사라진 다리에서부터 전신을 타고 넘실거렸다.
“크으윽···!”
비명은 절로 튀어나왔다.
살아있다.
허나, 이것을 살아있다고 봐도 좋은 걸까.
언제라도, 천마의 주먹을 맞고 흩뿌려진 브레스의 편린에만 닿아도 미후왕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인간처럼 사라질 것이다.
혹은 어디선가 튀어나올 용마교, 언데드, 블러드 엘프와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죽을 것이다.
이게 살아있는 것 맞나.
이걸 살아있다고 봐도 좋은 걸까.
자신의 인생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미후왕이라 불리고, 일각주의 직위로 살아왔지만, 장 웨이라는 헌터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몬스터에게 가족을 잃고 저잣거리를 방랑하다 마교에 주워졌던, 그 고아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중국인을 위해’
‘천마’가 줄곧 강조하던 그 이상향을 현실화시키고자 살아왔던 그였다.
고작 이런 허무한 죽음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생을 살아왔던 건가.
“모든··· 중국인을 위한 세계···.”
그런 단말마를 흘리며 서서히 흐려져 가던 정신을 놓아가던 중, 연약하고 고운 목소리가 그의 귀에 닿았다.
“괜찮으세요···?”
무겁게 내려앉았던 눈꺼풀을 다시 뜨고 눈앞을 응시하자 그곳에는 천사가 있었다.
백옥같이 흰 피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눈부시게 반짝이는 은발과 에메랄드 빛의 영롱한 눈동자를 가진 소녀.
‘이런 전쟁터에 소녀가···.’
그래 죽었구나.
자신은 지금 죽은 것이로구나.
미후왕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눈을 감으려던 바로 그 순간,
-덥석.
그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미후왕의 널브러진 팔을 감싸 쥐었다.
이윽고, 기적은 일어났다.
“일어나세요.”
따스한 빛이 미후왕의 전신을 감싼다.
그는 분명 한쪽 다리를 잃은 절름발이였으나, 그 천사가 일어나라 말하자···.
“다, 다리가···!”
미후왕의 다리는 원상복구가 되어 있었다.
이에 놀란 미후왕이 눈을 크게 뜨는 한편, 기적을 행한 천사······. 2대 성녀 앤젤라 엘런은 그를 걱정스럽게 응시하다 그에게 따듯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얼른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세요.”
끝까지 그를 걱정해주는 소녀.
미후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각에 휩싸여 눈만 끔뻑거렸지만, 소녀는 무심히 걸음을 옮겨 어디론 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제정신을 되찾은 미후왕은 부러진 자신의 창을 들어 올리며 소녀를 쫓아가려 했는데,
“여, 여긴 위험···!”
-스릉.
새하얀 검광이 그런 자신의 목 바로 앞에서 멈춰서는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젊은이, 기적으로 얻은 두 번째 생을 땅바닥에 버리지 마.”
눈에 보이지도 않았던 엄청난 속도의 검.
그래도 초절정의 무인이라 불리는 미후왕이었으나, 그 검은 반응할 수 없을 만큼 빨랐고 그 어떤 살의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제야 미후왕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쭉 훑자, 자신의 주변···. 아니, 저 천사와도 같은 소녀의 주변에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서 있었음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단순히 각성자임을 넘어 일정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기에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
밤하늘과 같은 검정색 후드 로브를 깊게 뒤집어쓴 그들의 몸에는 그 외향과는 너무나도 상반된, 새하얀 ‘신성력’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눈앞.
보이지 않는 검을 휘두르던 이의 얼굴을 확인한 미후왕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어르신은···?!”
유일하게 전신에 신성력을 두르지 않은 남자의 정체가, 중국의 헌터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전설적인 영웅. ‘검성’ 라오 위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기 때문에 말이다···!
전쟁터에 나타난 ‘천사’와 ‘검성’.
미후왕은 경악하는 눈으로 ‘검성’을 응시하다 의문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데···.
“거···. 검성 어르신이 어째서 이곳에···!?”
검성은 당혹스러운 미후왕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요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부단히도 돌아다니는 성녀, 앤젤라 엘런을 가만히 응시할 따름이었다.
소녀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건물의 잔해를 뒤적이며 찾고 있었다.
바로, 지금도 어딘가에서 생을 마감하고 있을 부상자와 희생자들을 말이다.
그때, 검성은 청록색으로 번뜩이는 눈을 부릅뜨며 멍하니 서 있는 미후왕에게 말했다.
“이 전쟁을 끝내러 왔다.”
흑룡과 불사왕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