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109화 (109/175)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109화.

언데드는 일종의 마력 생물이다.

무덤에서 일으켜 세운 술사의 역량에 따라, 그 언데드가 취하게 된 형태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하다만,

제대로 사고할 능력이 있는 언데드는 공통적으로 마력 흐름에 무척 예민한 특성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더 영민하고 정밀한 ‘눈’을 가진 아이스 밴시 레이첼.

그런 그녀에겐 보였다.

하늘의 떠 있던 번개 형태의 구.

그것과 이건우의 손끝에서 솟아오른 한 줄기의 전격이 닿는 순간, 세계 전체를 번뜩이고 요동치게 만들던 그 어마어마한 마력을 말이다.

태생부터 S급 헌터였던 레이첼에게도 그만큼 짧은 찰나의 순간에 그토록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 움직이는 광경은 생전 처음 보는 경이로움이었다.

말 그대로의 재해(災害).

헌터 이건우는 자신의 의지로 재해를 일으키는 각성자가 되어있었다.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고는······.’

툭 까놓고, 레이첼은 이건우를 그리 경계하지 않았다.

반년 전, 황금 게이트로 인한 ‘정상회담’.

그 정상회담장에서 그를 실물로 보았을 때도, 쓸만한 잠재력은 있으나 경계 대상으로 삼기에는 5년은 족히 더 걸리리라 판단했었다.

허나, 반년하고도 몇 달.

고작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그 짧은 시간 안에 놈은 변했다.

심장이 뛰어야만,

머리에 뜨거운 피가 스며들어야 사고하고 살아 숨 쉴 수 있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생자의 육신으로, 이건우는 ‘용’의 힘을 연상케 할만큼의 막대한 힘을 거머쥐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도 황금 게이트의 보상은 꺼내지도 않았다.’

헌터의 인생을 바꾼다는 황금 게이트의 보상, 아스가르드의 신물들.

심지어 사전에 접한 정보에 따르면 이건우의 진짜 힘은 그 신화급 무구 하나가 끝이 아니었다.

흡혈귀를 상대하며, 흡혈귀보다 더 혈속성 마력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게 된 놈의 ‘공명’.

혈검을 쥐고, 혈창를 허공에 띄우고, 단전의 혈속성 오브를 기동해 열기를 내뿜는다.

그 혈속성 공명의 삼중주야말로 이건우가 자신의 본 실력을 발휘한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이건우는 ‘미후왕’을 상대할 때조차 꺼내 들었던 혈검을 뽑지 않았다.

‘우릴 얕잡아 봤다는 건가···.’

하지만 실제로 일순간에 천지개벽의 빛을 맞이하고 곧장 패배한 것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렇게 평소와 같은 다혈질의 성격 대신, 그런 납득과 이해로 머리를 차게 식힌 아이스 밴시, 레이첼은 그가 꺼낸 의의의 한마디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천마의 죽음. 너희와 불사왕이 이번 흑룡 레이드에서 이루려 하는 그 비원을, 나 역시 원하고 있다는 소리지.”

“한국의 헌터가 천마의 죽음을······?”

한참의 상황파악과 고찰 끝에 드디어 입을 벌린 아이스 밴시. 레이첼이 의아한 듯 목소리를 높이자 그녀의 입에서 흰 서리 결정이 내렸다.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그녀의 한기보다 더 냉랭한 눈으로 응시하던 이건우는 충분한 시간을 기다려줬다는 듯 주머니에서 손을 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어째서, 같은 한심한 질문은 서로 삼가지. 나는 네놈들을 이용할 거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천마의 목숨을 끊을 생각이지···.”

“우리가···. 널 배신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건가.”

녹슨 쇳소리 같은 목소리로 고위 리치 볼프 루이스가 대뜸 물었다.

‘협력’에 앞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확인한다기보단, 은근한 위협의 의지가 엿보이는 말투였다.

허나, 이건우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너희는 배신할 수 없다. 아니, 나를 배신할 이유가 없지.”

마치 레이첼의 속을 다 꿰고 있다는 듯한 자신만만한 말투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의 말은 정확했다.

이미 몇십 년, 세계 랭킹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파울라스 총리.

위대한 ‘불사왕’의 좌를 위협하는 세계 유일의 헌터는 오직 세계 랭킹, 부동의 2위인 ‘천마’였다.

이번 ‘흑룡 레이드’에 앞서 레이첼이 받게 되었던 지령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전세계 합동 레이드’ 군사들의 진군이 최대한 늦어지도록 유도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삼스럽지만 ‘천마’의 제압 혹은 죽음이었다.

그중, ‘불사왕’께서 더 중시하는 일을 굳이 꼽자면 당연히 전자가 아닌 후자일 것이고 말이다.

“그렇지 않나? 영국 왕의 사생아 출생이었던 S급 헌터 레이첼 공주. 그리고···. 불사왕의 사관학교를 조기 졸업한 천재 공학자 볼프 루이스.”

그때, 정확히 고위 리치 볼프 루이스와 아이스 밴시 레이첼을 번갈아 노려보며 두 사람의 생전 내력을 거론하는 이건우.

이렇게까지 치밀한 사전조사가 있었다는 것을 대놓고 티를 낼 수 있다니.

아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그에게는 이 이상의 숨김 패가 아직도 더 남아 있는 느낌이 강했다.

압도당했다.

단순히 물리적인 영역을 넘어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말이다.

허나, 정작 티 없이 맑은 패배를 맛보고도 레이첼은 자신이 손해 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마의 살해.’

그 엄청난 비원만 제대로 이루어낼 수 있다면···.

‘불사왕’께서는 분명 용명하게 대업을 달성한 ‘저스티스 가디언즈’의 일원들을 다시금 새로운 육신으로 부활시켜주실 테니.

“그렇다면 이건우여, 딱 하나만 묻지. 반대로 네가 우릴 배신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디에 있지.”

이번에도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볼프 루이스가 입을 열었다.

지난 질문이 은근한 위협이었다면, 이번 질문은 진솔한 심경으로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였다.

“보장?”

그러나 정작 이 저스티스 가디언즈에게 ‘협력’을 요구한 이건우는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듯 공격적인 눈매로 볼프 루이스를 노려보다 답했다.

“너희가 아직도 살아 있지 않나. 너희가 ‘필요’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진작에 너희를 모두를 도륙 냈을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새삼, 레이첼은 애초에 처음부터 이쪽에는 선택권 따위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죽음 혹은 협력.

이건우의 이야기는 단순했다.

그리고 레이첼은 언제나 그러했듯, 자신의 생을 더 연명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

본격적인 ‘협력’에 앞서 나는 레이첼에게 작전의 안정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불사왕’에게 거짓 보고를 하도록 종용했다.

‘불사왕’은 앞서 현장에 보내둔 레이첼의 보고에 따라 중국에 도달하는 시점이 유동적으로 변한다.

‘불사왕’을 필두로 한 언데드의 군단에게는 ‘눈’이 있다.

흑색 마탑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정보 감지 체계가 따위가 세계 각지 전역에 넓게 퍼져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중국의 넓은 땅덩어리에는 그게 없다.

‘불사왕’을 경계한 ‘천마’가 일찍이 국경선을 넘어온 모든 타국의 정보 감지 체계를 박살을 내버렸으니 말이다.

불사왕의 늦은 도착.

전생에 이는 분명한 ‘흑룡 레이드’의 실패 원인이었다.

허나, 현생에는 같은 이유로 ‘흑룡 레이드’는 성공할 것이다.

“오래 기다렸나.”

상식과 규범, 관례와 법칙.

그 모든 것을 뒤엎을 패가···. 드디어 내 앞에 도착했으니까.

“아니요. 생각보다 더 일찍 도착하셨군요. 플랜 A의 주역은 잘 섭외되었습니까?”

밝은 볕이 드리워지고, ‘계획’을 위해 다시금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저스티스 가디언즈를 바라보던 나의 옆에 ‘그’는 돌연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히 접촉하는 것보다는···. 설득하는 데 더 애를 먹었네.”

“애를 먹어서, 고작 하룻밤이 걸린 거면···. 애를 먹지 않았다면 대체 얼마나 빠를 예정이었다는 말입니까···. 이준학 준장님.”

볕이 드는 공간에서도 새카만 그림자처럼, 자신의 형상을 감추고 있는 남자.

이준학 준장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뭐 거창하게 말할 것 있겠나. 아무리 그 상대가 구세대를 풍미했던 ‘검성’일지라도 협상과 설득의 테이블이 갖춰진다면 불가능한 일은 없다네.”

“역시 믿음직하십니다.”

구세대 헌터들의 정점. ‘검성’의 호출.

이 혼돈의 실타래를 풀어낼 마지막 퍼즐 조각이 드디어 맞춰졌다.

“그럼 드디어···. 시작입니다.”

“그래. 자네가 해주었던 ‘흡정마공진’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이번 일은 정말 상상 그 이상의 거대한 폭풍을 몰고 오겠지···!”

이준학 준장은 아직도 그 선량한 천마를 내심 믿고 싶어 하는 눈치로 그런 말을 남겼지만, 계획은 변하지 않는다.

내뱉은 말과 엎은 물을 도로 담을 수 없듯, 천마는 이 시대, 이 시점에 이미 선을 넘은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젊음’의 눈에 멀어 손을 대선 안 될 우를 범한 자의 말로는···. 언제나 정해져 있다.

“천마는 반드시 죽을 겁니다. 다름 아닌···. 천마 본인이 이용하려 했던 존재, 흑룡 아뮤르타스로 인해 말이죠.”

***

‘전세계 합동 레이드’의 총사령관. ‘천마’가 공식적으로 진군을 명한 지 한나절이 흘렀다.

일천 명의 일본계 헌터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기이할 정도로 높게 솟아오른, ‘녹지 않는 빙산’이 가장 먼저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윽고 처량하게나마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선봉대에 합류를 마친 일본계 대표, 오이카와 미츠히로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오이카와 미츠히로라는 껍데기에 각인된 ‘피의 결속’이 빛을 발했고, 총 스물여섯 명의 눈으로 시야가 확장되어 보였다.

그리고 그 시야를 한몸에 받으면서도, ‘성역’이라는 다른 차원에서 무릎을 꿇고 경건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엘더, 그라다 투라스 비타투비스.

강제로 혼을 적출해, 텅 비어버린 일본인들의 육신을 조종하며 지금껏 몇 번이나 총리의 좌에 앉아 일본인들을 내부에서 컨트롤 해왔던 바로 그 ‘블러드 엘프’였다.

‘블러드 엘프’ 그라다는 일천의 일본계 헌터 사이사이, 심어둔 껍데기 육신을 통해 흑룡 레이드의 현황을 파악해보았다.

긴 산맥의 사이, 사이 기괴하게 솟아오른 용아(龍牙)이 보인다.

저곳에 흑룡, 아뮤르타스의 완전한 부활을 바라는 용마교가 숨을 죽이고 있다.

‘쯧.’

‘성역’의 실체 육신이 반사적으로 혀를 찼다.

어차피 불사왕의 목적은 흑룡 아뮤르타스를 죽이고 그 시체를 얻는 것인데,

저 무식하기 짝이 없는 용마교의 교인들은 흑룡 토벌을 위해 뭉친 공략대를 함정에 빠뜨리자는 일차원적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다.

한없이 원시적이고, 한심할 정도로 멍청하다.

아주 잠깐에 불과했지만, 저런 것들과 진심으로 연대할 생각을 했었다니, 그라다는 과거의 자신에게도 혀를 찼다.

이어서 조금 의식을 돌리니, 눈앞의 ‘빙산’을 만들어낸 장본인 추악한 아이스 밴시, 레이첼이 보였다.

엘더 그라다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른다.

알 도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허나, 확실한 점은 이 거대한 빙산 속에서 이미 숨을 거둔 6천의 유렵 연합군을 죽인 건, 다름 아닌 저 추한 몰골의 밴시라는 것이었다.

‘저런···. 지리멸렬하게 대가리를 잡아 족쳐도 모자랄 한심한 시체 녀석들···.’

겉은 멀쩡했다.

그저 상처가 조금 많은 보통의 인간 행세를 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엘더의 통찰력 있는 눈은 저 아이스 밴시 뿐만이 아니라 숱한 데스나이트와 리치들의 몸속에 강력한 전격 마력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토록 조심하라 말했거늘···.’

끝내 이건우의 상식을 벗어난 함정에 빠진 거겠지.

허나, 정작 그들의 계획이 무산되었건, 한국군이 휴거교의 제사 도구를 이용했건 말건, 그 모든 일들은 엘더 그라다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우린, 각자의 목적을 위해 모였다.’

목적 달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이쪽은 이쪽의 목적만을 달성하고서 일본계 껍데기 헌터들과의 링크를 끊어내면 그뿐이다.

자금성 내부에서 사흘을 보낸 입장으로써 엘더 그라다는 이 ‘합동 레이드’를 주관하던 ‘마천신교’의 움직임 역시, 절대 범상치 않음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아니, 모두가 각자의 목적을 위해 이곳에 모였던 거지···.’

허나, 그들의 목적이 무엇이건 뭘 원하건 정작 블러드 엘프들에게 중요한 것은 역시나 ‘피’일 뿐이었다.

성체의 용에게만 채취할 수 있는 순수한 마력 덩어리. 용혈(龍血).

사실 위대한 흡혈귀들은 앞으로 있을 거사의 밑거름이 되어줄 그 재료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공략대가 전멸하건, ‘불사왕’이 날뛰건 ‘천마’가 득세하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손해를 감수하며 싸우는 건 모두 너희의 역할이다. 우린 그저 취할 것을 취하고 유유히 제 갈 길을 하면 그뿐인 게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가장 큰 이득을 거머쥔다.

어딜 어떻게 보아도 이 아수라장의 최종적인 승자는 엘더 그라다를 필두로한 ‘블러드 엘프’임이 분명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엘더 그라다는 각국의 정상들이 모이는 순간, 더더욱 빠른 진군을 주장했다.

유럽 연합의 괴멸과 ‘저스티스 가디언즈’가 회복을 위해 자금성으로 돌아간다는 저어엉말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으나,

그럴수록 더 당당히, 더 확고한 의지를 다지고 나아가야 한다고 엘더는 각국의 수장들을 설득했다.

흑태자와 중동 연합의 전차부대.

각기 다른 개성이 뚜렷한 ‘제이슨 스트라우스’의 헌터들.

거기에 버림 패에 불과할지라도 일본계 헌터 천 명이 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렇게 무사히 합류한 저녁 5시부터 해가 진 늦저녁까지 설득의 설득을 반복한 결과, ‘제이슨 스트라우스’의 동의를 끝으로 이 ‘선봉대’는 위험천만한 야간 진군을 개시하게 되었다.

끝내 나아가는 군단.

마주하는 적의 수는 정말 끝이 없다.

이미 2천에서 3천의 막대한 수가 토벌되었음에도 오만하게 머리에 왕관을 뒤집어쓴 ‘킹 미노타우로스’의 등장과 함께 진군은 멈춰선다.

어마어마한 수의 포구가 돌아가고, 밤하늘을 다채롭게 반짝일 만큼 흑태자의 전자부대는 불을 뿜는다.

‘결국, 이런 흐름인 게다.’

이건우는 이번 ‘흑룡 레이드’에서 예기치 못한 불상사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분주하게 정보를 탐닉하고 움직여 ‘언데드’들을 함정에 빠뜨려 제압해낸 것 같지만,

끝내, 헌터 대군이 ‘흑룡’에게 도달해 엘더 그라다가 충분한 양의 용혈을 획득하게 된다는 전체적인 흐름을 뒤바꿀 수는 없었다.

그도 그렇다.

이건우가 아무리 대단한 헌터이고 상식을 벗어나는 각성자라 할지라도, 결국 그도 한 사람의 인간이다.

한국에서 일어났던 자질구레한 사건들은 몰라도, 끝내 ‘흑룡, 아뮤르타스’의 토벌이라는 역사적인 큰 시류를 뒤엎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전투가 한창 치러지던 어둑한 밤.

상식과 규범, 관례와 법칙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결코 일어날 리가 없을 줄 알았던 이변이······.

엘더 그라다의 옆에 나타난다.

“호오오. 벌써 하고 있구먼? 하여간 젊은이들은 혈기가 왕성해서 좋단 말이야.”

낡은 복식을 입은 노인.

머리와 수염은 저 하늘의 흰 구름을 연상케 할 만큼 새하얗게 세었고, 걸음걸이나 행동거지 하나, 하나가 사시나무 떨리듯 힘없이 초라해 보인다.

다만, 그의 허리춤에 꽂힌 세 자루의 검만은 눈부신 광택을 번뜩이니······.

“······넌?!”

존재 자체로 거대한 ‘이변’.

이미 수 세기를 살아온, 장생의 엘프마저도 일순간에 모든 안면근육을 총동원해 경악을 표하게 만드는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스으윽···!

‘검’은, 뽑는 동작을 눈으로 보기도 전에 이미 검집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착!

이내 그것이, 일순간의 ‘틈’ 속에서 검집에 꽂히며 경쾌한 소음을 내뿜자.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깨끗하게 잘려나간 엘더 그라다의 목이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야가 뒤집힌다.

그 검에는 오러도, 일말의 마력도 실려있지 않았다.

그저 뽑고, 베었을 뿐인 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의 수평 베기가 있고 난 뒤, 엘더 그라다와 ‘사용’하던 총 스물여섯 명 껍데기들의 머리가 하나도 빠짐없이 땅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이윽고, 들린다.

나타난 것만으로도 역사적 흐름을 바꿀 자의 목소리가.

“요즘은 망할 ‘장이족’들도 동료로 받나? 말세로구나. 말세야.”

-후두두둑!

일검에 스물 여섯의 목을 땅에 떨어뜨려 놓고도 태연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혀를 차는 방랑 협객, 라오 위.

그가 바로 한때, 검 한 자루로 세상을 평정했던 정점에 검사, ‘검성’이었다

“거···. 검성이 어째서 이런 곳에···!”

목구멍의 밑바닥에서부터 피 끓는 소리를 내며 외치는 엘더 그라다.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한 육신인지라 고통이라고는 일절 없었으나, 엘더 그라다의 얼굴은 격통을 느끼는 이처럼 잔뜩 구겨져 있었다.

이윽고, 엘프와 같은 이종족과는 대화조차 섞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듯 ‘검성’은 그라다의 경악에도 눈썹 하나 꿈틀대지 않고 침묵을 일관했으나,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그분을 모셔온 건 나다. 엘더, 그라다 투라스 비타투비스.”

정확히 엘더 그라다의 풀네임을 읊으며 터벅, 터벅 어지러운 전장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남자. 그는 다름 아닌, 이건우였다.

앞선 회의에서까지만 해도 끝내 말을 아끼고만 있던 그가 당당히 입을 벌리고, 마치 자랑하듯 이야기하는 것이다.

“영리하다고 생각했겠지···.”

“...”

“네놈은 언제나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이, 배신자들을 다시금 배신할 계획을 세우고 이 ‘흑룡 레이드’에 자원한, 용맹한 헌터들을 쉼 없이 비웃고 조롱해왔겠지.”

-으득!

그렇게 땅에 떨어진 ‘오이카와 미츠히로’의 머리채를 쥐며 들어 올리는 이건우.

시퍼렇게 부릅뜬 두 눈으로 엘더를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앞선 회의에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던 격노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 세상이 굴러가는 순리와 진리를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구는 오만방자한 네놈들에게 내가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주마.”

-파직!

손가락에서 튀기는 시퍼런 스파크.

허나, 마력의 발현이라기엔 너무나 미미하고 아무런 의도가 없는 행동이었다 여기기에는 너무나도 반짝이던 전격.

이에 엘더 그라다가 의문을 표하던 바로 그 순간···.

어둑한 하늘 위, 옅게나마 이 세상을 내리쬐던 달빛이 사라졌다.

“상식의 선에서 아무리 기발한 발상을 떠올려도 너희의 계획은 결코 나의 계획보다 앞설 수 없다.”

그리고 그 위, 구름보다도 더 높은 창공의 어딘가에서 거대한 기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세계에 단 3척 밖에 존재하지 않는 하늘을 나는 배, 비공정이 분명했다.

하물며 엘더 그라다의 눈앞에 나타난 비공정은 가장 거대하고도, 최고로 견고하다 일컬어지는 용병대, ‘황해’의 비공정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너희가 가진 상식을 송두리째 뒤엎어버리기 위해 살아가고 있으니까.”

이윽고 이건우의 손짓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 비공정.

하늘에서도 다시 창공에 떠올라 있던 그 무형의 기함을 시작으로 목만 남은 엘더 그라다의 눈앞에는 연이어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배신자의 배신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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