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97화.
「그래. 재미있게 놀았으니 됐다. 이만하면 ‘놀이’는 충분했다는 게야.」
‘놀이’.
지금껏 있던 일이 모두 ‘놀이’였다는 말.
그 말은 다시금 전국 각지의 모든 사람을 절망하게 할 정도로 끔찍한 선언이었다.
「그리고 이젠, 계약을 이행해야겠지 그렇지 않은가? 필멸자여.」
-두둑!
어깨가 결리는 사람처럼 목을 좌우로 움직여 몸을 풀던 악마, 그레모리는 미소로 물들어 있던 얼굴을 천천히 무표정으로 물들이기 시작했고···.
돌연, 이건우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주 느린 슬로우 모션.
심장 박동의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려오고, 숨소리조차 제대로 울려 퍼지지 못하는 무인들의 경지.
‘틈’을 보는 ‘천검일로’의 정진권은 경악하는 얼굴로 두 눈을 크게 뜬다.
‘틈’은 세상 모든 것이 느려지고, 절정의 고수들만이 간신히 한 걸음을 더 내딛는 찰나에서도 다시 일순간에 이르는 ‘순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틈’을 볼 수 있는 무인인 정진권의 눈에는 보였다.
절정의 고수를 넘어 초절정의 경지 초입에 이른 자신조차 ‘틈’에서는 고작 두 걸음밖에는 내디딜 수가 없거늘···.
보통 사람의 크기로 줄어든 악마는, 부릅뜬 눈으로 이건우를 노려보며 달렸다.
한 걸음, 두 걸음의 개념이 아니다.
그냥 ‘틈’에서 두 발을 몇 번이고 움직이며 내달린 것이다.
이에 아주 느리게 정진권의 눈이 커지는 한편, 더 놀라운 광경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카···!
검이,
움직인다.
-가가가가가강!
누구의?
당연히, 이건우의 검. 혈검이자 신살검인 ‘본디오 빌라도’가 ‘틈’ 속에서 움직였다.
이내 다시 세상이 무채색에서 총천연색으로 물들면···!
-콰지지지지지직!
-카가가가가각!
「뭣이?!」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공간이동’을 행하기라도 한 것 보일 것이다.
그만큼 눈 깜짝할 세 이건우의 등 뒤에 도달한 악마 그레모리.
허나, 그런 악마의 주먹을 시퍼런 눈동자의 이건우는 막아냈다.
정진권의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았다.
‘틈’에서 달린 악마도 제정신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아득히 초월한 묘기를 선보였다 생각했는데···.
이건우는 도리어 검을 움직여, 그 신비를 선보인 악마가 놀라게 할 만큼의 일을 현실에서 행해버렸다.
「하하! 막았더냐! 내 주먹을 막았더냐!」
직후,
쉼 없이 많은 주먹이 이젠 정진권조차 쫓아갈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쏟아졌지만, 들려오는 것은 이건우의 군복이 찢어지고 그의 육신이 짓이겨지는 끔찍한 파육음이 아니었다.
-카강! 캉! 카가가가가각!
-챙! 채재재재쟁! 채쟁!
쇠와 쇠.
들려오는 것은 오직, 강철과도 같은 주먹과 신화급 무구가 부딪히는 소음뿐이었다!
「허나, 상관없다! 네놈이 어찌 이몸의 본체를 알고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내 주먹을 받아내고 있는 것인지는 궁금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찰나’를 다투는 전투의 연속에서도 쉼 없이 입을 여닫으며 말을 토해내는 악마.
「휴거교도는 나를, 오직 너를 죽이기 위해 소환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직도 모르겠더냐!」
-투, 우우우우우웅!
무언가를 지껄이는 외침과 함께 처음으로 이건우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 그의 복부에 꽂히는 새카만 주먹!
그 반동으로 이건우의 몸은 허공으로 날아가고, 악마는 또다시 ‘틈’을 파고들어, 날아가는 이건우를 따라잡아 허공에서 그의 몸을 더 가격했다!
「네 느려빠진 검은 내게 닿지 못한다! 이 몸의 육체는 네놈의 극한에 달한 뇌격마저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성질로 구성되어 있단 말이다! 그러니···!」
-콰직!
-투욱!
믿을 수 없이 거대한 타격음이 일순간에 두 번, 세 번씩 연속적으로 울린다.
「네놈은 날 이길 수 없다.」
이건우의 복부에서 피가 흘러나와 흥건하게 젖고, 그의 어깨와 머리와 팔과 다리의 군복들 역시 계속해서 찢어지며 넝마가 되어가고 있다.
「네놈은 날 이길 수 없어!」
바로, 붕 떠오른 저 허공에서, 미친듯한 속도로 사라지고 나타나길 반복하는 악마의 연속적이고 일방적인 폭력에!
「네놈이 죽어 이 국가의 절망이 되어라」
이건우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속도······.
50M의 거체로도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던 놈의 속도는 이를 그저 지켜보던 정진권마저도 전신을 떨게 만들만큼 압도적이었다.
「네놈의 죽음으로 피어난 절망은 분명 꽃보다 더 아름답겠지!」
부웅!
계속해서 뭔가를 지껄이기 바쁘던 악마 그레모리는 돌연, 무너져내리기 직전의 빌딩들을 딛고 올라, 저 하늘 위의 상공으로 제 몸을 날렸다.
이윽고, 그 악마가 상공에서부터 엄청난 불꽃을 일으키며 추락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태양이 이 땅에 떨어지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네놈이 죽어 이 세계에 절망이 되는 거다!」
흉측한 사형선고.
피같이 붉은 불꽃으로 타오르며 오직 이건우를 향해 쇄도하는 태양.
대한민국의 헌터들 중에선 가장 강한 정신력을 가졌다 자부하는 정진권조차, 순순히 포기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추락하는 태양 그 자체가 된 일격을 받아낼 자가 이 세상 그 어디에 있냔 말이다!
허나,
“죽음을···.”
돌연, 정진권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작은 중얼거림.
이내 참극에서 눈을 돌리려던 정진권이 빠르게 눈알을 굴려 이건우를 응시하니,
그 폭격을 맞아가면서도,
그만큼의 타격을 받아가면서도···.
아직도 시퍼런 눈동자를 매섭게 뜨고 떨어지는 태양을 응시하는 이건우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 눈은 결코, 패배자의 눈이 아니었다.
***
수신의 사도가 된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찰나와도 같으리라 여겼던 앤젤라 엘런의 꿈속에서 보낸 시간.
허나, 현실 세계에서도 시간은 40시간이 넘게 흘러 있었고···.
수신의 눈물 젖은 사과를 받고도 의연하게,
주마등을 보면서도 태연하게,
그러다 문득, 자신의 아이를 뱃속에 가진 아내, 김수정 중사를 떠올리고서야 비로소 죽기 싫다고 생각하던···.
장훈의 마음과 생각, 거기서 더 나아가 몇 번의 죽음을 딛고도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의지가, 나의 머리를 파고 들었다.
알 수 있었다.
그가 느낀 격통과 절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가진 의지와 자기 자신에게만 가혹한 잣대를 들이밀던 그 끈질긴 노력을.
그래서 더더욱 슬펐다.
다신 그 어떤 ‘동료’도 희생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 하나로, 두 번째 생을 살아왔던 나에게···.
‘김장훈’이라는 인물은 회귀 직후부터 함께 했던 너무나도 분명한 나의 ‘동료’였으니까.
그가 날 어떻게 생각했는지 안다.
그가 날 위해 얼마나 노력해주었는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더 절실하게 원하게 되었다.
나의 목숨을 위협하고,
나아가 내 동료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이윽고 이 세상 전체 인류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저 극악무도한 버러지들에게···!
“죽음을!”
-스으으으.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느리지만, 분명한 호흡의 소리였다.
그 원천은 어디인가.
다름 아닌 나의 입이다.
들이쉰다.
호흡은 심장을 울린다.
심장 박동에 맞춰 눈을 뜬다.
형(形)을 갖춘다.
세계가 느려진다.
아득하게 인간의 인지를 넘어선 그 ‘인식의 틈’에서 나는, 나를 불타는 눈동자로 악마 그레모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전생에는 닿지 못했다.
무인의 경지, 절정의 고수들만이 본다는 이 ‘틈’에 말이다.
허나, 보인다.
보이고 들린다.
들리니 느껴진다.
느껴지니 알 수 있다.
“네놈 같은 버러지들에게···! 죽음을!”
나는 저것을 벨 수 있다는 걸.
-터벅,
그 안에 발을 내디딘다.
세계는 무채색으로 물들고, 보이는 것은 오직 흑과 백의 연속이다.
허나, 비로소 보고, 듣고, 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된 무(武)의 경지에서도···.
비가 내린다.
뚝,
허공에 멈춰 선 것처럼 정지해있던 그 수억, 수십억 개의 물방울들이 응집한다···!
소용돌이치듯 모여드는 물방울 아니,
수신의 신력.
<알림>
ㅡㅡㅡㅡㅡㅡㅡㅡ
*수신의 사도, 이건우는 권능을 행사합니다.
*개방한 권능은 하늘을 집어삼킨 고래. ‘천경(天鯨)’의 힘입니다!
*흩뿌려진 신력은 오직 ‘사도’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이윽고, 검에 맺히는 것은 새파란 바다.
그리고 양손으로 올곧게 쥔 나의 검이 취하는 자세는 다름 아닌, 죽은 장훈의 검술 동작이었다.
수검(水劍) 제8형.
망망대양(茫茫大洋)
바다가 서울 일대를 뒤덮는다.
대양을 향해 추락하는 ‘악마’는 태양과도 같이 거대한 겁화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지만, 아득하고 아득한 바다는 그 태양마저도 집어삼키려는 듯 넘실거렸다.
-쐐애애애액!
-파아아아아아!
흑색의 불꽃과 백색의 바다가 격돌한다.
찰나에서도 다시 일순간,
아주 짧은 경각에 일어난 막대한 충돌.
허나, 태양은 대양과 닿는 동시에 그 어마어마한 열기를 잃기 시작했다.
마기의 악마와 신력의 원초적인 상성 관계.
신성한 성수가 마를 정화하는 것이다!
마치 흡혈귀인 알프레드 아들러를 녹여버렸던 ‘김장훈’이 그랬던 것처럼.
동시에, 나의 신살검(神殺劍)은 악마의 목을 파고든다.
동시에, 나의 신살창(神殺槍)은 악마의 심장을 파고든다.
그러자,
자신의 패배를 직감한 그레모리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진다.
허나, 그러면서도 악마는 다만, 팔을 내뻗는다.
흉악한 손톱이 나의 머리를 향해 쇄도한다.
겁화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손톱은 나 머리를 일순간에 찢어발길 참격을 일으키지만, 나는 놈의 목을 반쯤 가르던 ‘본디오 빌라도’를 과감하게 손에서 놓고, 허공으로 손을 내뻗었다.
이윽고, 허공에서 피어나는 황금의 번개가 나의 손에 쥐어진다.
-파직···! 파지지지지직!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황금빛 오러의 거대한 망치.
금빛으로 번뜩이는 번개가, ‘신력의 바다’를 물들인다.
그저 들고, 꽉 움켜쥐는 것만으로도 퍼져나가는 막대한 ‘신력의 낙뢰’.
악마의 마기는 충분히 진하고 위협적이었으나, 부드럽게 뒤엉켜 서로의 신력을 배로 끌어올리는 바다와 낙뢰의 조화는 그런 악마의 몸을 산산조각내기 시작했다.
세계가 점멸한다.
구름이 갈라진다.
무채색으로 물든 세계에서도 나의 시야에는, 내가 휘두른 거대한 바다에 하늘이 둘로 쪼개지는 광경이 보였다.
하늘과 하늘 사이, 황금의 대양이 떠올랐다······!
***
세계가 점멸한다.
시야가 뒤틀리고,
거대한 공압이 모여들고 응축되어 서울 일대를 날려버릴 핵폭탄처럼 한점으로 모여들었다.
육안으로도 단번에 확인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농축된 에너지 덩어리.
허나, 신비롭게도.
순수한 힘과 힘의 충돌과 그 반발력으로 만들어진 핵폭탄급의 폭발을 이건우의 검격과 함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황금의 대양’은 집어삼켰다.
폭발이니, 폭풍이니 하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처럼 깔끔하게 말이다.
-끼이이이이익!
이윽고 하늘 위,
금빛으로 번쩍이는 바다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모든 것의 종막을 고하듯 긴 비음을 내지르는 거대한 고래의 그림자.
천경(天鯨).
그 경이롭고 신비로운 광경을 범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은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의 신비.
그만큼의 경이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허나, 시간이 멈춘듯한 그 신비의 광경 너머 한 줄의 메시지는 돌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수신의 사도, ‘이건우’는 서열, 423위의 악마. ‘그레모리’를 쓰러뜨렸습니다!>
<적정 보상을 집계 중입니다···.>
그것은 하늘 고래의 울부짖음보다 더 명확한 승패의 선언이었다.
천지지변 급의 격돌과 그 끝에서 승리를 거머쥔 것은 괴물이 아닌, 인간이라는 위대한 선언.
“와아아아아아!”
“살았어! 우린 살았다고!”
“살았어어!”
“뇌왕, 결국 뇌왕이 악마를 벤 거야!”
“S급 헌터 이건우가 또 한 번 이 국가를 구한거라고오오!”
메시지의 출현과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함성과 찬사.
그 압도적인 광경과 들끓어 오르는 분위기에 ‘천검일로’ 정진권도, ‘백귀야행’ 이초희도, 이제야 현장으로 돌아온 ‘검은 산군’ 조성우도 넋을 놓는다.
세계 9위, 17위 21위에 빛나는 그 세 명의 S급 헌터들조차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레벨의 전투 그리고 승리가 눈앞에 있었기에.
심지어는 서 있다.
이건우는 황금빛의 바다로 하늘을 가르는 경이를 실현하고도 두 눈을 부릅뜬 그 모습 그대로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우뚝 서 있었다.
그야말로 절대자의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치, 소환만으로 지축을 흔드는 스카이 타이탄과 수십의 거신병, 수백의 스컬 와이번, 수천의 구울과 수만의 스켈레톤을 소환한 채 진군하던···.
명실공히 세계 랭킹 1위의 헌터인 프랑스의 총리, 프리드리히 파울라스와 감히 비견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여름 장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