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95화.
이미 한 차례, 자신의 손으로 내던졌던 인생이었다.
수통,
그저 물을 조금 만들어내는 능력.
마력 효율도 거지 같고, 능률도 떨어져 잘 쓰이지도 않는 한심한 D급의 물 창조 스킬.
원치 않던 각성은 장훈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고아가 만연한 시대의 바로 밑 세대.
가족이 당연한 세대에 태어나, 평범한 비각성자 집안에서 취미로 ‘검도’를 즐기던 장훈에게, ‘각성’이란 전혀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도리어 저주.
그래도 취미로만 검도를 즐겼던 것치고는, 나름대로 성적을 거둬 전국체전의 교체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성과를 거두었던 그.
그에게 내세울 수 있는 무언가란 오직 그 ‘검도’뿐이었는데···.
각성은 장훈에게 스포츠 세계에서의 영원한 퇴출이라는 망할 결과만을 안겨주었다.
장훈이 헌터군에 특히 더 적응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자신은 일평생 검도에 몸담고, 노력해 무언가를 거머쥐는 생을 살아왔는데···.
각성자들의 사회에서 D급 헌터는, 바로 어제 각성했다는 A급 이등병에게도 놀림감이 되기 일수였다.
노력이 없는 결과.
‘각성’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저 운.
운으로 국가 존망의 희비가 갈리고,
운으로 국력이 변하는 미친 세계.
이 세계에서 ‘노력’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에 놓았다.
양손에 아득바득 쥐고 있던 ‘검’을 잡을 빼 마다, 숱한 조롱과 비웃음을 사고도 그들에게 되돌려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래서 장훈은 검을 놓았다.
고작 수통이 검을 잡고 휘두른다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우스꽝스럽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기하고,
내려놓고,
멈췄다.
자신에게 남은 ‘가능성’ 따위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않고서는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말이다······.
허나, 아니었다.
‘노력’이 무의미하지 않다고,
언젠가,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이병이었던 이건우는 담담히 말했다.
솔직히 장훈은 그를 동정했다.
자신도 그런 시절이 있었기에 건우가 느낄 공허함과 허망함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달래줄 수 있을까.
그런 것이나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해냈다.
식은땀을 줄줄 흘려가면서, 손이 부르트고 이따금 피가 날 정도로 스스로를 담금질하며 ‘변화’했다.
건우는 대단한 인간이었다.
분명 자신과 같이 ‘인간 배터리’라는 조롱과 멸시를 매일 같이 들어가면서도, 그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몸속 어딘가, 그 기저에 깔려있던 새로운 가능성을 일깨웠다.
S급 헌터 이건우.
새로운 뇌왕 이건우.
그를 보며 알았다.
이 비참하고 미친 세계에도, 아직은 희망이란 것은 남아 있다는 걸.
그래서 노력했다.
어릴 적 아무런 생각 없이 검을 잡고 휘두르던 그 시절처럼.
노력하고,
노력하고,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면···.
정말로 무언가 변하기 시작했다.
비각성자이던 시절보다 훨씬, 훨씬 더 큰 노력을 들여야 아주 미세하게, 조금 변할 뿐이었지만, 변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장훈은 다시 검을 들었다.
그는 검에 물을 둘렀다.
많은 은인을 만났다.
2대대 철혈검사대의 대원들,
5군단에서 만난 기묘할 정도로 검에 집착하는 여인, 김수정 중사.
그들은 모두 연습장에서 하룻밤 내내 오롯이 검을 휘두르던 장훈에게 선뜻 먼저 다가와 주곤 했다.
변화는 만남을 만들었고,
만남은 검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마나를 검에 입혀 휘두르는 법을 익혔고, ‘물 창조’를 활용해 검의 위력을 올리는 활용을 배웠다.
그러다, 건우의 조언을 통해 수검(水劍)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함을 알았고, 그의 조언은 길을 잃었던 장훈에게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언제나 부딪히던 막다른 길도,
건우의 짧은 조언에 의외로 쉽게 해결이 되곤 했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갑작스러운 ‘수신의 신자’라는 퀘스트를 클리어하면서 장훈은 웬만한 A급 헌터들 이상의 이질적이면서도 강인함 검을 가지게 되었다.
무려, 일본에서도 손에 꼽히는 헌터. 검왕, 류자키를 딱 한 번이지만, 완벽하게 꺾어냈을 정도로 말이다.
스스로 돌이켜봐도 이상할 정도로 술술 풀리는 인생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이 찾아온다.
해결책으로 자신을 다시 갈고닦으면 그 검을 활용할 무대가 펼쳐지고, 그는 그곳에서 그저 검을 휘두르며 점점 더 큰 명성을 얻었다.
자신에게는 과분한 행운이란 생각이 있었다.
남몰래 사랑하던 여인이 홀로 게이트에 갇힐 위기에 처하고, 그녀를 다름 아닌 자신의 손으로 구하고, 고백까지 받았다.
그런 건 동화 속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장훈은 그것을 실제로 행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과분한 행운이었고,
그것만으로도 과분한 행복이었다.
어째서 자신의 생이 이토록 크게 격변할 수 있었던 걸까.
자신은 어떻게 이토록 큰 행복과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던 거였나.
“그래···. 그런 거였어. 나, 나는······.”
장훈은 지금껏 그 이유가 항상 궁금했는데,
이젠··· 알 것 같았다.
-서걱!
눈앞이 붉다.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자신의 목소리는 덜덜 떨려왔고, 팔다리는 끊이지 않는 경련에 휩싸여 계속해서 후들거렸다.
허나, 장훈이 쥔 ‘수왕검’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촤악!
“이, 이이이이이! 괴물 같은 놈이이!”
-치이이이!
‘수신의 신력’을 한껏 머금은, 장훈의 물 창조 스킬에 온몸이 젖은 알프레드 아들러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흡혈귀와 성수의 부조화.
극한을 달리는 상성 속에서도 눈앞의 흡혈귀는 움직였다.
오직 장훈의 끈질긴 명줄을 끊어놓기 위해서 말이다.
온몸이 타는 듯한 고통에 휩싸인 놈은 얼굴을 한껏 찡그리고 장훈의 목에 흉측하게 핏줄이 튀어나온 팔을 꽂아 넣었다.
“큽읍!”
장훈의 입에서는 자연히 피가 한 움큼 역류했지만, 그가 쥔 검은 움직인다.
수검(水劍), 제3형
굽이치는 파도.
유연하게 허공을 가로지르며 시퍼런 물줄기를 세상에 아로새기며 장훈의 ‘수왕검’은 다시 한번 흡혈귀의 두 팔을 베어버렸다!
“크아아아아아악!”
알프레드 아들러의 입에서 격통으로 물든 비명이 터져 나온다.
장훈은 이를 보며 다시금 ‘수왕검’을 쥔 손에 힘을 주어 공격을 강행하려 했지만, 그의 시야는 돌연, 새카맣게 물들었다.
‘...?’
눈을 뜨면, 그곳은 지하 벙커가 아니었다.
마치 바닷속에 누워 하늘을 보는 것처럼 경이로운 푸르름에 휩싸인 광경.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옮기면, 그곳에는 물빛 머리카락을 가진, 가녀린 소녀 하나가 장훈을 보고 있었다.
슬픔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두 눈에서 큼지막한 눈물을 뚝, 뚝 흘려가며, 물빛 머리카락의 소녀는 장훈에게 눈물 젖은 사과를 반복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고통을 줘서 미안해요···. 놓아주지 못해서···. 이렇게 계속 당신을 혹사시켜서 미안해요···.
그러고 보면, 장훈은 이 바닷속과 같은 세계에 이미 몇 번이고 왔던 기억이 있었다.
이곳은 자신이 목숨이 끊어질 때마다 방문하게 되던, 신비로운 장소.
그리고 항상 이곳에서 자신의 몸을 강제로 기워 붙이고 있는 이 소녀는···. 자신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던 신. ‘수신’이리라.
이 소녀였다.
이미 죽어도 한참 전에 죽었던 장훈을 계속해서 되살려내는 신비로운 현상의 정체 말이다.
장훈은 차분히 몸을 일으켜 물빛 머리칼의 소녀을 조용히 응시했고, 그 소녀의 눈에 ‘책망과 질책’에 대한 공포가 옅게 서리는 것이 보였다.
“풉···.”
신이라는 존재가, 원망 어린 소리를 들을까 봐 겁을 먹다니.
장훈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짧게 터트리고는 진지한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 나에게 생명의 은인에게 보답할 기회를 줘서···. 정말 고마워···.”
그 직후, 다시금 암전되는 시야.
이내 장훈이 눈을 뜨면, 그곳은 또다시 지하 벙커였다.
꿰뚫린 목이 채워졌고, 부러진 팔다리가 돌아와 있다.
이내, 떨어진 검을 잡고 일어서면, 그런 장훈을 공포로 얼룩진 눈으로 바라보는 알프레드 아들러가 보였다.
마지막,
이미 몇 번이고 으스러지고 기워 붙여진 육체는 어디 하나 빼놓지 않고 격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장훈은 이번에야말로 마지막이란 것을 알았다.
마지막 부활.
그리고 마지막 기회.
무작정 누워 잠에 빠져든 건우를 원망스럽게 보았다가도, 이내 장훈은 그게 아니라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이상하리만큼 행복했고,
기이하리만큼 행운이 따르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 자신이 이곳, 이 순간에 이렇게 서 있는 이유는···.
“괴, 괴물! 죽어! 죽으라고오오오!”
어느새 엄습하는 흡혈귀의 형상.
알프레드는 이미 검을 고쳐잡기도 전에, 장훈의 양팔을 손톱으로 찢어버렸고, 자연스레 장훈이 잡고 있던 ‘수왕검’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허나, 처음부터 검을 휘두를 여력 따위 남아 있지도 않았던 장훈은 팔꿈치까지가 날아간 반쪽짜리 팔로 코앞까지 다가왔던 알프레드 아들러의 몸을 단단히 붙들었다.
자신의 입으로 흡혈귀의 목덜미를 물면서까지 처절하게.
“이런 미친노옴이!”
-퍽! 퍽!
그러자 팔꿈치로 장훈의 머리를 계속해서 가격하는 알프레드 아들러.
그러나 장훈은 다만,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뿐이었다.
“나······. 난 말이야···!”
이미 장훈은 피로 점철된 입을 비집고 나오는 짧은 목소리.
이내 ‘끝’을 결심한 장훈은 자신의 몸을 이루고 있는, 막대한 신력을 모두 방출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 모두···!”
은혜를 갚기 위해.
그것이 바로 장훈이 떠올린 자신이 아직도 살아있는 이유였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고!”
“크아아아아아악! 치, 치워! 저리 꺼져라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격한 비명을 토해내는 알프레드 아들러.
허나, 그보다 더 빠르게 죽어가는 것은 도리어 장훈의 쪽.
수신이 직접 불어 넣어준, ‘생을 연명하게 해주던’ 신력마저 모두 내뿜는 그는, 알프레드 아들러라는 흡혈귀가 죽어갈수록, 그보다 더 빠르게, 죽음에 이르기 시작했다.
“아.”
짧은 읊조림.
그 공허한 단말마와 함께 장훈의 눈앞에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건, 장훈이 사랑했고, 장훈을 사랑해주었던 한 사람. 김수정 중사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입은 웃고 있다.
방긋 웃는 입은 말한다.
-우리 아이, 이름은 꼭 자기가 정해줘야 해?
그 덧없이 해맑은 웃음에 장훈은 반사적으로 입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택한 죽음이다.
자신이 선택한 동귀어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리도 자신은 울상을 짓고 있을까.
아직도 살고 싶어서?
아니다.
그런 게 아니었다.
그건 작은 미련.
부탁을 받았음에도 끝내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던, 아주 작은 미련이었다.
‘···아직 못 정해줬는데······. 수정아···.’
그 짧은 단말마.
그 애절한 소망의 되뇜과 함께···.
극악무도하게 끈질긴 생을 살아왔던 흡혈귀는 녹아내렸다.
***
홍진웅이 지하 벙커의 문을 열었을 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으스러진 인간의 시체가 비참하리만큼 널브러져 있었다.
그 사이사이, 대체 누구의 것인지 모를 으스러진 팔, 다리가 자리해 있었고, 그 참혹하기 짝이 없는 절단면은 홍진웅마저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히는 감각에 사로 집히게 만들 정도였다.
이윽고, 그 중심에 있는 피와 물이 쉼 없이 뒤엉킨 듯 보이는 기괴한 형상의 호수.
그리고 그 호수 위에는 한 남자가 몸을 웅크리고 이상한 것을 안아 들고 있었다.
남자···.
그 외형은, 그 누구보다 홍진웅에게 친숙한 모습이었다.
“거, 건우야···?!”
홍진웅이 반사적으로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일순간에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깃들었다.
결국, 건우가 늦기 전에 깨어나 흡혈귀를 쓰러뜨렸구나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친 것이다.
허나,
홍진웅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 이건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제야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누군가의 시체가 보였다.
사지가, 온갖 장기가 들어차 있어야 할 흉부와 복부에 거대한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힐 것만 같은 잔혹하고 비참하게 으스러진 시체 한 구.
정면에는 몸을 웅크린 바티칸의 2대 성녀 앤젤라 엘런과 그 고사리 같은 소녀의 몸을 끌어안고 양손으로 입을 막은 모습으로 굳어 있는 수신의 성녀, 남궁연의 모습도 보인다···.
홍진웅은 그제야 건우가 안아 들고 있는 시체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자······. 장훈이···!”
대체 어떤 싸움이 있었던 것인가.
한 인간이 대체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길래 시체가 저렇게 훼손될 수 있단 말인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상상하려 해도,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처절하고 끔찍한 전투가 있었을 것이다.
너무도 충격적인 광경에 홍진웅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어딥니까···.”
건우는 아주 무거운 목소리로 홍진웅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에 도저히 머리가 굴러가지 않는 홍진웅은 그저 멍하니 자신을 응시하는 건우를 마주 보았는데···.
귀신의 얼굴을 한 이건우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적’은 어디에 있냔 말입니다!”
-파직, 파지지직!
침묵.
허나, 그의 눈동자에서 튀기는 스파크만은 그의 격렬한 분노를 여과 없이 투영해 내비치고 있었다.
***
갑작스러운 ‘휴거교’의 습격에 방송국을 점거당한 지 이미 3시간이 넘게 지났다.
멋대로 방송국 헬기를 띄워 S급 헌터와 ‘악마’의 싸움을 중계하기 시작한 그 해괴망측한 행보에 JCV의 방송국장은 참담한 심경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악마라니,
‘시베리아의 악몽’이라는 역사적 흠을 남긴 그 ‘악마’라는 존재가, 실제로 서울 대도심 한복판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갑작스럽게 출현한 ‘황해의 비공정’은 이곳에 붙잡혀 있는 방송국장의 심장까지 두근거리게 할 정도였다.
모두,
이 방송을 시청하는 전국의 모든 대한민국인이 간원했다.
대한민국을 헌터 강국이라 불리게 만드는 그 근본적인 이유, S급 헌터의 셋의 승리를 말이다.
그들이 패배한다면 희망은 없다.
세계에서도 9위, 17위, 21위에 빛나는 절대 강자들이 힘을 합쳤음에도 ‘악마’를 이겨낼 수 없다면, 세상 그 누가 저들을 당해낼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허나, 현실은 참으로 비극적이게도, 그 마지막 희망을 무참히 짓밟는 메시지는 나타났다.
‘마경(魔境) 선포’
모든 악마종의 힘이 500% 상승한다니.
이건 헌터가 아닌 자신이 보아도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일이란 것은 알겠다.
신이 한국을 버렸다.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윽고, 화면 속.
보이는 광경은 너무나 참담해 방송국장은 이를 줄곧 바라보면서도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단단하지 않느냐. 이렇게 단단한 장난감은! 정말 오랜만이란 말이다!
웃는다.
새카만 이를 드러내고 ‘악마’는 웃고 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손아귀에 잡혀, 빌딩과 바닥에 전신을 쓸리고 짓이겨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대한민국 헌터 협회의 부회장.
백귀야행의 이초희였다.
-그만둬어어어어!
처절한 외침과 함께, 이초희의 하반신을 으스러뜨리고 있는 악마의 손에 뒤틀림이 일어난다.
그 공간 자체를 뒤트는 힘은 분명, ‘검은 산군’ 조성우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하하하하하하!
악마는 계속해서 웃었고,
모든 능력치가 5배로 상승한 악마는 그저 이초희를 쥔 손을 몇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뒤틀린 공간’ 그 자체를 으스러뜨렸다.
S급 헌터가, 죽어간다.
피를 흘리다 못해 붉은 웅덩이를 만들 만큼, 처절하고 비참하게 버티고 버티던···.
대한민국의 미래와, 희망과, 자부심과, 자존심이 돌연 나타난 악마에 의해 무참히 짓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그 웃음소리는 사람을 미치게 한다.
이젠 보다 못한 JCV의 방송국장이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막지만, 그 끔찍한 웃음 소리 만큼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만···.”
홀로 갇힌 독방에서 방송국장은 절규했다.
“그만둬···! 제발!”
일어서라.
다 죽어가는 것도 안다.
이미 몇 번이고 몸이 부서져, 더는 설 여력이 없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다.
“지지마! 제바아아알!”
허나, 그에게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화면 속 S급 헌터에게 다시금 일어서서 싸워주길 기도하는 일뿐이었던 것이다.
“젠자아아아앙!”
절망.
남은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뻔한 그 상황 속에서, 비가 내린다.
새카만 밤하늘이지만, 먹구름 따위는 어디에도 없거늘.
비는 내렸다.
-투둑, 투두두둑.
짧고 간결하게, 멀찍이 쓰러져 있던 정진권의 귀를 때리던 빗소리.
허나, 그 비는 고작 수초도 되지 않아 폭우로 돌변했다.
-파아아아아!
검은 하늘에 내리는 비.
돌연, 새카맣게 물든 세계를 양단하는 번개는 내리치고······.
-쿠르르릉!
세상이 하얗게 물드는 찰나.
“놔라.”
화면 속에서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찌 필멸자가···.
세계를 번뜩이게 할 만큼 거대한 낙뢰와 함께 갑작스레 출현한 남자.
악마는 새카만 이를 드러내며 그런 남자를 향해 계속해서 주문처럼 외던 그 말을 또다시 내뱉으려 했다.
그때였다.
-서걱.
시뻘건 참격이 번개와 함께 번뜩이고, 2.5톤의 트럭보다 더 두꺼운 악마의 손목이 양단된 것은···!
-퉁!
툭,
떨어지는 악마의 손.
찰나의 시간조차 걸리지 않고 일어난 일에,
봉변을 당한 악마도,
그 손에 잡혀 풍전등화의 생명을 연명하고 있던 백귀야행의 이초희도,
이 방송을 지켜보던 대한민국 전역의 시민들도,
입을 크게 벌리고 경악하는 얼굴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내, 붉은 오러를 꽃피우는 ‘본디오 빌라도’와 함께, 이건우는 시퍼렇게 물든 눈동자를 굴려 악마를 응시했다.
“놓으라고, 했을 텐데···?”
처음으로 악마의 눈에 거짓 없는 당혹감이 차올랐다.
하늘을 가른 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