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91화 (91/175)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91화.

-파지직!

시퍼런 낙뢰가 귀를 마비시켜 버릴 정도의 굉음을 뿜어내며, 하늘을 수직으로 갈랐다.

-카강, 캉!

-지이이이이익!

교차하는 검과 검은 날카로운 파열음과 둔탁한 쇳소리를 일으켰지만, 나가떨어지는 건 새하얀 갑주로 전신을 감싼 성기사들 뿐이었다.

두 번째 심장과도 같은 ‘오브’가 박동한다.

엄청난 열이 아랫배에 모여들고, 그 짙은 붉은 색의 마력은 푸른 전격과 부딪혀 폭발적인 마력의 폭풍을 일으켰다.

-파지지지직!

내리치는 낙뢰와 거센 폭풍 속에서도 미동이 없는 나의 검은 얼핏 자색으로 빛나는 것 같다.

허나, 이를 마주하는 성기사들의 검에는 새하얀 기운이 서리고, 그들의 절단된, 불탄 육신은 일순간에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니···.

“카르막 베르무트···.”

현실에서 만났던, 성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약한 가짜일지라도, 성자의 권능은 충분히 위협적인 ‘적’을 일구어냈다.

“당신은 교황이 보낸 히트맨입니까?”

언젠가,

이미 들어봤던 대사를 읊는 성자.

허나, 나는 그 오만한 눈빛과 태평한 여유에도 반응하지 않고 묵묵히 검을 들었다.

그 동력은 어디까지나 ‘신성력’이었다.

허나, 쓰러뜨려도, 으스러뜨려도 여전히 몸을 일으키는 것은 생을 모독하고, 삶을 부정하는 흡사 언데드와 같았다.

각각이 A급 헌터의 힘을 가진다는 성기사들의 갑주와 무구에 빛이 깃들었다.

조금만 신경을 놓으면, 그대로 치명상을 입게 될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

그러나 나의 눈앞에 ‘적’은 결코, 실제 성기사들과 성자에 미치지 못했다.

-서걱!

수평으로 그은 검격과 툭, 하고 썩은 사과처럼 땅에 떨어지는 성자의 머리.

이미 한번 본 적이 있는 광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큰 감응 없이 나는 으스러진 이 광신도들을 묵묵히 바라볼 수 있었고, 성기사들과 성자들은 그렇게 모두 죽었다.

“소용없어요.”

이윽고, 얼마나 서 있었을까.

이 ‘꿈’의 주인이자 창조자인 백발의 앤젤라는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내 등 뒤에 나타나 그런 말을 기계적으로 내뱉었다.

“제가 창조한 이 세계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그날까지 계속 ‘기능’하도록 만들어졌으니까요.”

새하얀 빛무리가 어김없이 앤젤라 엘런의 몸에서 쏟아져 나왔다.

-퍼드드득!

반짝이는 깃털을 흩날리며 앤젤라 엘런의 ‘신성력’은 날개를 펼쳤고, 세상은 다시금 그 새들의 빛으로 물들었다.

다시금 눈앞에 나타나는 건,

남궁연과 12일간 함께 지냈던 그 잔세스칸스 인근의 야산.

“건우야···.”

어느새 넓은 계곡은 사라졌고, 나와 그녀는 맨 처음 ‘시간 역행’을 체험했을 때와 같은 위치에 각각, 서 있었다.

“괜찮아?”

남궁연은 베어진 나의 전투복 곳곳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리 물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이제 시작입니다.”

지난 반복되는 12일간, 나와 그녀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당연히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전달해두었고, 나와 눈빛을 잠깐 교환하는 것으로 남궁연은 내 생각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조심해야 해···. 알겠지?”

이윽고 백발의 앤젤라 엘런을 만나 다짐하던 순간부터 예상했었던, 끝이 없는 항쟁은 시작된다.

밤이다.

첫날 밤.

동생의 생일을 축하하고 맛난 스튜를 먹다 구토를 쏟아내던 앤젤라 엘런.

“앤젤라. 괜찮아?”

남궁연은 수신의 가호, ‘굴절하는 물’의 힘으로 모습을 바꿔 앤젤라의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으로 금발의 앤젤라를 찾아갔다.

당연히, 금발의 앤젤라는 한눈에 남궁연이 자신의 어머니와 다른 인물임을 눈치채고 입을 닫았지만,

“어디 아픈 거야?”

“아이구, 애가 왜 이리 울상이야? 이리와 엄마랑 같이 자자.”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도 돼. 알겠지?”

남궁연은 입을 꾹 닫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는 그런 앤젤라조차 진심 어린 걱정과 함께 보듬어주었다.

따스하게 안아주고,

이불을 덮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둘째 밤에도,

셋째 밤에도, 남궁연은 줄곧 혼자 낡은 침대에 누워있던 앤젤라 엘런을 찾아갔다.

찾아가 말을 걸고,

괜찮으냐고 걱정을 해주고,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으라며 그 어린 소녀를 독려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마주한다.

-스릉.

어둑한 계곡에서 섬뜩한 ‘빛’을 내뿜는 기사들과 그들의 우두머리이자, 앤젤라 엘런에게 있어 철천지원수나 다름이 없는 성자, 카르막 베르무트를.

“당신은 교황이 보낸···.”

검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마력은 굽이쳤고, 오러는 흩뿌려지며 성기사와 그들이 든 서슬 퍼런 검신과 성자의 무식한 비장의 수, ‘성검’을 마주했다.

“젠자아아아앙!”

발악하는 성자.

이미 숨이 끊어진 줄로만 알았던 성기사가 바닥에서부터 하늘로 검을 내뻗어 복부가 관통되었다.

-푹.

아찔한 격통과 함께 일순간에 눈앞이 흐려졌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뒤로 쓰러진 성자의 목을 갈랐다.

-서걱!

갈라지는 성자의 목.

자색으로 빛나는 혈검의 검신에 피가 튀겼다.

성자의 목을 거른 것은 세 번째였다.

하지만 참으로 무심하게도, 이 꿈의 ‘세계’는 그것을 기점으로 다시 한번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되감긴 세계.

허나, 근본적으로 ‘신성력’이 아닌 ‘수신의 신력’의 영향을 받기에, 되감기는 세계와 달리, 나의 몸에 남은 상처는 그대로였다.

피가, 관통상을 당한 복부에서 새빨간 피가 흘렀다.

남궁연은 곧바로 경악하는 얼굴로 나를 치유해주었지만, 서로 다른 ‘신력’의 영향인지, 치유는 조금 고통이 줄어드는 데 그쳤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멈추지 않았다.

남궁연은 앤젤라 엘런에게,

나는 그 어둑한 계곡에 향한다.

그리고 마주하는 것은, 또 한 번의 곡예.

세 번,

네 번,

다섯 번을 넘겨 다시 여섯 번.

“왜 그러는 거예요···.”

시간이 반복되었고,

나의 몸에 흉측한 흉터가 이다지도 많이 생겨난 바로 시점에, 백발의 앤젤라는 다시 내 앞에 감췄던 그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고요···!”

다시 나타난 앤젤라는 놀랍게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처음 조우했을 때의 그, 무감각한 ‘적의’가 아니었다.

아주 분명하게 찡그린 눈썹과 이를 앙다문 입.

그리고 그 소녀의 목소리는 떨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거의 다 된 상황이었어요. 앤젤라 엘런은 자기 의지로 이 꿈의 세계에서 목을 매고···. 나는 그 후에 눈을 뜨고, 현실을 직시하면 되는 것뿐이었다니까요···?”

지이이익.

나는 자신의 전투복 안감을 입으로 찢고, 아직도 피가 줄줄 흐르는 상처 부위에 둘러 강하게 조였다.

격통은 배로 늘었지만, 반복된 전투에 지쳐 머리가 어지러워지던 것이 조금 완화되는 느낌이었다.

당황한 듯,

화가 난 듯 행동하는 앤젤라에게서는 다시금 빛무리가 흘러나와 세상을 물들이기 시작했고,

나는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려 흐릿해져 가는 백발의 앤젤라 엘런을 그저 바라보다 담담한 어조로 나지막이 고했다.

“말했잖아. 나는, 너를 구한다고.”

일곱 번.

수를 센다면 총 일백하고도 쉰 명이 넘는 성기사를 불태우고 베어 죽였다.

이미 성자는 여덟 번이나 ‘본디오 빌라도’에 목이 잘려 그 명을 달리했고, 나는 복부와 흉부와 다리와 어깻죽지에 각각 다섯 번 이상의 치명상을 입었다.

허나, 세계는 되감긴다.

성자와 성기사들은 다시금 완전 무장의 풀 컨디션으로 돌아오겠지만, 나는 달랐다.

남궁연의 치료를 받고도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력은 벌써 바닥이 났고, ‘오브-성혈’의 개방 역시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숱한 헌터들이 정신력의 한계를 체험했던 것처럼 나에게도 한계라는 것이 있다.

내가 인간인 이상, 나도 정신력과 체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헛고생이라는 걸 안다.

내가 이곳에서 성자와 성기사들 아무리 쓰러뜨려도, 현실에는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럼 그만두면 되잖아요. 그렇게 아프면, 그렇게 힘들면 그냥 그만두면 되는 거잖아요···! 한 마디만 말해요. 이 꿈에서 나가고 싶다고, 그냥 나가게 해달라고, 그럼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내보내줄 테니까···!”

여덟 번째.

내 앞에 나타난 앤젤라는, 이젠 온몸에서 성한 곳을 더 찾기가 힘들어진 나를 슬픈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리 말했다.

그 얼굴은 이젠 눈으로 구별할 수 있을 만큼 변해 있었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아주 조금이지만 확실하게 참극에 도달하지 않은 앤젤라 엘런은 다시금 ‘감정’을 되찾기 시작하는 것이 분명했다.

헛고생?

잠시나마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돌연 우습게 느껴졌다.

저 얼굴을 보라.

내가 상처에 신음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더 괴롭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겁을 먹었으면서도 굳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거는 저 소녀를 보란 말이다.

소녀는 나를 조롱하지도, 욕하지도 않았다.

그저 손에 쥔 가시넝쿨을 내려놓고 평온해지길 조언했다.

참,

타인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할 줄 아는, 진정한 성흔의 보유자 다운 성품이란 생각이 든다.

군세를 보유한 성자보다, 그저 현실에 안주한 교황보다 이 소녀가 더 신의 대리인을 자청하기에 어울린다.

“괴롭냐.”

핏방울이 목구멍을 틀어막아 이상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래도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큰 무리가 없을 법한 말.

이에 소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풉.”

나는 그런 소녀의 반응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는 억지로 입을 움직여 말을 씹어 뱉었다.

“남궁연에게 들었다. 금발의 앤젤라가 조금씩, 서러웠던 일을, 괴로웠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고.”

“그럴···리가······.”

“그리고 금발의 네가 말했다더군. 군복을 입은 이상한 사람이 매일, 매일 피를 흘리고 상처를 입어가면서 자신을 지켜준다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일이, 너무나 괴롭다고 말이야.”

‘이성’의 앤젤라와 ‘감성’의 앤젤라.

두 소녀는 현재, 바티칸의 금기인 창조 스킬을 통해 분명 별개의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또 그렇지만은 않다.

‘이성’을 의미하는 백발의 앤젤라도,

‘감성’을 부여받은 금발의 앤젤라도,

결국은 현실에서는 한 사람, 그냥 앤젤라 엘런이 아니던가.

백발의 앤젤라가 보고 듣고 사고한 모든 일들은, 금발의 앤젤라 역시 보고 듣고 그에 걸맞은 ‘감정’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금발의 앤젤라는, 아주 분명하게 남궁연에게 마음을 열고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성자가 당도하기 전 이틀,

총 여덟 번 반복 되었으니 보름에 달하는 시간 동안 듣게 되었던 소녀의 진심.

나는 이미 그 모든 사실들을 알고 있기에, 얼핏 초월자처럼 세상만사에 초연한 듯 행동하는 저 어린 성녀의 등장에 이젠 동요하지 않게 되었다.

“너는, 이 세상이 흑백으로 보인다지.”

“그건···!”

“소리는 멀어져만 가고, 물건을 만져도 촉감을 느낄 수 없고,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으며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지.”

정곡이 찔렸다는 듯.

몸을 움찔 떠는 앤젤라.

나는 그런 작은 소녀를 향해 말했다.

“나도 괴로웠다. 너 같이 어린 꼬마가···. 아무런 이유 없이 죽어야 하는 이 미친 세상이 싫었고, 네가 이 잔혹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괴로웠다.”

“그건 필요한 일이니까···.”

“필요해도, 그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지라도 달라지는 건 없어···.”

응시하고, 눈높이를 맞춘다.

무려, 24일 만에 반복해보는 첫날의 그 시선교환.

이 세계를 ‘꿈’으로 여기는 이 백발의 앤젤라에겐 찰나의 시간이었을지라도, 나에게 지난 여덟 번의 회귀는 아주 분명한 24일의 시간이었다.

나는 불안한 듯 조금씩 떨려오는 앤젤라의 눈동자를 응시했고, 그 에메랄드빛의 찬란한 눈은 아주 분명히 지난번과는 달라져 있었다.

“아이가, 아이로 있을 수 없는 세계가 이 세상의 유일한 구원이라면, 난 그 세계마저도 갈기갈기 찢어 길바닥 쓰레기통에 버려버리겠다.”

이를 똑바로 응시하며, 조곤조곤히 쌓아 올리듯 읊조리는 말.

“그리고 찾으마, 네가 울고 싶을 때까지 울 수 있는 세계를···. 네가 그냥 아이로 있을 수 있는 세계를 말이야.”

이윽고,

드디어,

앤젤라 엘런의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이가 아이로 있을 수 있는 세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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