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88화 (88/175)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88화.

삐빅-! 삐빅-!

“끄으응···.”

사람의 귀에 특히나 거슬리는 고음역의 불규칙한 신호는 방금까지 사랑을 나눈 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김수정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쓰윽, 쓰윽.

눈을 뜨자 보이는 옷가지를 주워입고 있는 장훈의 모습.

일반적인 셔츠나 청바지라면 좋으려만, 그는 이 늦은 새벽에 군복을 주워 입고 있었다.

그가 손목에 차고 있는 ‘신호기’에선 붉은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붉은빛은 비상사태를 의미하고, 아까부터 귀에 거슬리는 이 불규칙한 신호음은 부대 복귀를 상징한다.

헌터군에서 중사까지 복무해본 경험이 있는 김수정은 잠결에도 장훈이 어떤 상황인지를 곧장 유추해낼 수 있었다.

“심각한 상황···?”

그래서 걱정스러운 어조로 그리 담백하게 묻자 장훈은 엇, 하며 목소리를 내더니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안 깨우고 다녀오려고 했는데···.”

“나도 저번 달까진 군인이었는데, 그게 어떻게 되겠니.”

“그런가. 행정반 통신 기기가 응답을 안 해서 아직 통화는 못 해봤는데, 아무래도 좀 상황이 안 좋은가 봐.”

“...”

“그렇게 걱정하지 마. 난 현장이 아니라 부대 복귀 명령을 받았으니까. 아마 번개 중대 본부에 있는, 건우랑 성녀님들을 지키는 임무가 될 것 같아.”

성격이 다정다감해졌다고는 해도, 아직 말주변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닌 김수정.

장훈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운 바가 있던 그녀는 그의 연인으로서 그를 걱정하면서도, 입안에 맴돌고 있는 ‘안 가면 안 돼?’라는 한 마디를 끝내 내뱉을 수가 없었다.

불안함.

본디 이유가 없는,

본능적인 촉을 통해 느껴지는 기분 나쁜 불안감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경계하던 감각이었다.

막연한 불안감은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주범이니 말이다.

더군다나 수정은 장훈과 마찬가지로 바로 저번 달까지만 해도 직업 군인이 아니었던가.

그 역시 죽도록 가기 싫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수정은 그냥 묵묵히, 도리어 그가 챙겨가야 할 물건들을 찾아 장훈에게 하나, 둘 건네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슴 언저리에 맺힌 불안감을 최대한 티내지 않고, 장훈을 묵묵히 돕다 보니 그의 준비는 금방 끝나고 말았다.

“...”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나오질 않았다.

예전부터 그녀는 감이 좋은 편인 인간이 아니었기에.

“그럼, 다녀올게.”

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현관에서 손을 흔드는 장훈은······.

아무런 근거는 없으나 너무나 멀리 떠나갈 것만 같아서 수정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려다 말고, 뒤돌아 문을 여는 장훈을 뒤에서 껴안았다.

왜,

이렇게나 불안한 걸까.

어째서 가슴이 크게 뛰고, 식은땀이 흘러나오는 걸까.

수정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장훈의 등을 더 새게 껴안았고,

“수정아?”

장훈의 의문 가득한 목소리에 흠칫 제정신을 차렸다.

“...잘, 다녀와요. 다치지 말고.”

“그럼, 내 명줄 긴 건 다들 알아주잖아. 허허허.”

장훈은 걱정 가득한 수정의 목소리에 애써 호탕한 아저씨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퉁.

그렇게 두꺼운 철문이 닫히고 장훈은 밖으로 나갔다.

허나, 수정은 이미 일주일 전부터 줄곧 느껴지던 그 엄청난 불안감에, 한동안 아무도 없는 그 문 앞에서 한참이나 가만히 서 있었다.

***

“크윽! 으그그극!?”

성자, 카르막 베르무트의 목덜미에서 피 분수가 솟아올랐다.

놈은 곧바로 치유의 기적을 행하려는 듯 양손을 모았지만, 나는 그마저도 가만히 두질 않고 시뻘건 혈창으로 놈의 손을 관통시켜 버렸다.

“뭐야. 대체 뭐야?! 네가 뭐길래 이런 힘을···!?”

말투, 표정, 목소리 무엇하나 실제의 카르막 베르무트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허나, 결정적인 것 하나.

앤젤라 엘런의 ‘꿈’속에서 만난, 성자의 힘은 결코 진짜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촤악!

‘본디오 빌라도’는 고작 스물여덟 번의 합 만에 놈의 목에 닿았다.

“말도 않···!”

놈의 머리는 짧은 단말마와 함께 땅에 툭, 하고 떨어졌다.

“그래. 말이 안 되긴 하지. 이 꿈의 상황이 말이야.”

행복하지 않은 앤젤라의 꿈.

나는 본디, 악을 자처해서라도 그 아이를 꿈에서 깨우려 했지만, 이 세계는 이미 불타는 네덜란드의 꽃과 풍차의 도시 잔세스칸스를 비추고 있었다.

“소대장님.”

난 버릇 적으로 남궁연을 그리 불렀고, 그녀는 그 말만으로 내가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인지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움직였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당연히 인근의 산으로 뛰어 올라가던 앤젤라 엘런이 있는 곳이었다.

무릎이 다 까져서, 피가 치마의 무릎 단을 붉게 적실 만큼이나 아파하면서도 야산을 오르던 아이.

그렇게나 절실한 모습으로 도주를 이어가는 데에는 분명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을 거란 것이 나의 예상이었다.

“흐윽··· 흐으윽···.”

이윽고, 아주 작게만 들려오던 흐느낌을 따라 걷자 거대한 나무뿌리 사이, 파인 흔적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앤젤라를 찾을 수 있었다.

“앤젤라.”

나는 주변을 조심스럽게 훑은 남궁연을 등 뒤에 두고, 차분한 어조로 그 아이를 불렀다.

불어터진 손.

피딱지가 진 무릎과 자잘한 상처가 눈에 들어온다.

허나, 그럼에도 아이는 자신의 동생을 품에 안고 덜덜 떨고 있었다.

“누, 누구···.”

한국으로 돌아오는 헬기에서 내내, 반쯤 눈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던 2대 성녀.

때문에 나는 당연히 이 아이가 날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눈앞의 앤젤라는 나를 모르는 눈치였다.

“S급 헌터 이건우. 성자 카르막 브르무트에게서 널 지켰고, 지금은 널 이 꿈으로부터 데리고 나가려고 이렇게 찾아왔다.”

“...이, 이건우? 서, 성자? 그게, 무슨···.”

아무래도 접근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치의 앤젤라 엘런을 보며 말투를 바꿔보기로 했다.

“음···. 말하자면 널 돕기 위해 찾아온 거다. 이젠 안전해.”

다른 말은 몰라도, 안전하다는 말에는 반응이 있었다.

아마,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그럼, 그 번개는···.”

“내가 했다. 넌 안전하고, 네가 안고 있는 네 동생도 안전해.”

나는 그나마 큰 반응이 있던 ‘안전’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그리 말했다.

우선 말이 통해야 앤젤라 엘런에게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때문에 나는 잡으라는 의미에서 천천히 손을 내미는데···.

“아니야···.”

앤젤라는 돌연 고개를 휙, 하고 치켜들더니 매서운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은, 그때 이곳에 없었잖아.”

“...뭐?”

“당신은 가짜야. 가짜는 없어야 해, 내가 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적의,

지금까지 그 여린 몸을 공포로 물들이고, 덜덜 떨고 있던 모습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앤젤라 엘런은 매섭게 치뜬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진하고도 분명한 적의를 보내왔다.

“지금 무슨······.”

적의라니?

예상치 못한 행동에 내가 당황하는 한편,

돌연 앤젤라 엘런의 눈은 단순한 연녹색이 아닌 에메랄드빛의 광택을 발했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연한 금색 머리칼은 회백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분명한 성흔의 증거.

그리고 성녀, 성자, 교황에 한하여 ‘권능’을 휘두를 자질이 있음을 증명하는 외향.

이내 앤젤라 엘런은 고고하면서도 고풍스러운 품격이 느껴지는 눈빛이 되었다.

마치 다른 ‘인격’이 깨어난 것처럼 말이다.

“성녀···.”

이에 나는 어쭙잖은 착한 사람 흉내는 관두고 본래 내 말투대로 입을 열었지만, 회백색의 머리칼 그리고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세계를 관망하는 앤젤라는 기계처럼 무심한 목소리를 낼뿐이었다.

“...외부 조력은 불필요. 각성자 이건우, 이계 신의 성녀 남궁연, 속히 이 세계에서 나갈 것을 권유합니다.”

허망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면서도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그런 눈빛으로 말을 읊조리는 소녀.

그러자 앤젤라의 ‘말’은 이 꿈의 세계를 비틀어 나와 남궁연의 주변에는 수많은 깃털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퍼드드드득!

마치 새가 날갯짓하듯,

빛으로 이루어진 깃털은 나와 남궁연을 각각 휘감았고, 눈을 감았다 뜨는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자,

어둑한 밤은 밝은 대낮이 되어있었다.

“엇?!”

“이게 무슨···?”

우리 두 사람은 이 세계가 ‘꿈’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허나, 그럼에도 이토록 갑작스러운 현상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우린 말 없이 주변을 쭉 훑어보았다.

눈앞의 광경은 분명 조금 전까지 나와 그녀가 서 있던, 앤젤라 엘런이 도망쳐온 그 야산이었다.

그러나

내 전류에 감전되어 기절했던 농부들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고, 시뻘건 홍염에 휩싸여 잿더미가 되었던 잔세스칸스는 기이하게도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있었다.

“시간이···.”

“되감겼다?”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입에서 튀어나온 한마디.

더군다나 이 야산의 중턱에서도 들리고 보이는 광경은 퍽, 예사롭지 않다.

마을에서는 수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평화로운 초원을 거닐며 여물을 뜯는 소들과 목축업, 관광업 등의 생업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거리로 나온 이들도 보인다.

평화로운 잔세스칸스.

그래. 이 풍경이야말로 내가 처음부터 예상하던 그 풍경.

정신 붕괴를 막기 위해 ‘신성력’이 보여주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그 꽃과 풍차의 도시.

잔세스칸스의 전경이 분명했다.

“...”

나와 남궁연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지켜보자.

서로 대화를 주고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눈앞에서 일어난 이 기현상을 보고 다른 생각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나와 남궁연은 무려 4번의 참극을 지켜보게 되었다.

***

신성력이란 뭘까.

기적이란 뭘까.

종교적인 믿음으로 이능을 행하는 이들을 앞에 두고 던져보았던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기초적인 질문들.

전사장 마르쿠스는 그리 말했다.

우리의 믿음에 응한 신께서 싸울 힘을, 대항할 무구를 하사하시는 거라고,

또한, 전생의 어린 전사장, 메리는 말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가장 필요한 순간에 주는 것 그게 기적이고, 믿음이고, 신성력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뭘까.

“꺄아아아아아악!”

“왜, 왜 이러십니까요! 성기사 나으리!”

“사, 살려주십시오!”

“악마라니요! 저희 마을에는 그런 불결한 것은 없습니다.”

“아아아아악!”

3일이었다.

남궁연 대위와 야산에 눌러앉아, 인기척을 감추고 마른 전투 식량을 먹으며 기다린 3일 뒤, 이 극악무도한 ‘참극의 밤’은 또다시 반복되었다.

남궁연은 아무래도 그 끔찍한 광경을 보기 힘들었는지, 눈을 돌리고 귀를 막고는 내게 기대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보았다.

집, 사람, 이웃, 동물, 불꽃, 피, 비명, 광기, 마지막으로 도망.

차가운 겨울이었다.

흐르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얼어붙어 살을 애고 치가 떨려올 만큼의 고통을 주는 차디찬 혹한.

흐르는 강마저도 꽁꽁 얼려버릴 그 겨울은 반복되고 있었다.

짧디짧은 3일간의 평화.

그리고 부조리한 살육.

이 세계가 순수한 앤젤라 엘런의 꿈이 아닐지라도, 그 아이는 분명 나와 남궁연의 눈앞에서 ‘자신의 의지’로 시간을 되감았다.

그리고 ‘내가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라는 그 의문의 말.

마르쿠스는 말했다.

‘신성력’이란 싸울 힘을 주는 매개체라고,

그렇다면, 지난 4번의 반복 동안 앤젤라 엘런이란 아이는 싸웠는가.

아니. 아이는 싸우지 않았다.

매번 끔찍한 살육의 시간을 대비해 가족과 이웃을 설득하긴 했으나 아이는 싸우려는 의지조차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이 반복되는 시간은 앤젤라에게 있어 무슨 의미일까.

어째서 아이는,

무려 ‘자신의 의지’로 이 무자비한 죽음을, 끔찍한 기억을 되뇌고, 되새김질하고 자꾸만 다시 토해내는 걸까.

자신의 의지로 시간을 되감았다는 건, 아이에게 목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 여길 나가야 해요!”

“안나! 안나! 얼른 언니한테 업혀!”

“아빠! 아빠아! 내 말 좀 들어줘요. 여긴 위험해요! 제발요···. 제발요!”

스스로 해야 한다.

자신의 의지로 되감는다.

매번 필사적으로 이 잔세스칸스의 사람들을 지키고자 발버둥을 친다.

“할아버지! 아저씨! 모두 위험해요!”

“내 말을 들어줘요! 정말 무서운 일이 생길 거라니까요!”

목이 쉬어도,

이상한 눈초리를 받으며 광인 취급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이 꿈속의 ‘앤젤라 엘런’은 계속해서 외치고, 설득하며 마을 사람들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아이는 스스로도 너무나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무려 네 번의 반복.

12일간, 한 자리에서 이를 차분히 목도하던 나는 문득 한 가지 중요한 사실에 대해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런 거였나···.”

1대 성녀 다나 메이어가, 손에 쥐여준 ‘성녀 구호’ 퀘스트의 이름이 유독 특이했던 것.

처음에는 퀘스트의 제목이란 것이 다 추상적인 것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을 골똘히 생각해볼 시간이 생기니 이젠 알 것도 같았다.

‘새로운 나 만들기.’

시간을 몇 번이고 되감는 것도 앤젤라 엘런.

그리고 그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하는 것도 앤젤라 엘런.

이 ‘꿈’의 세계에서,

옅은 금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앤젤라와 ‘성녀’를 상징하는, 회백색에 찬란한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진 앤젤라는 별개의 인격이었던 것이다.

“바티칸의 금기라면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할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 깨닫고도 쉽게 믿을 수 없는 진실.

만에 하나라도 나의 가정이 올바른 것이라면, ‘성녀 앤젤라’는 잔세스칸스의 어린 소녀 ‘앤젤라 엘런’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필요한 세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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