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86화.
우려와 달리 대성녀, 다나 메이어와 ‘꿈’에서 나누었던 대화는 쉽게 잊히질 않았다.
잊히긴커녕, 도리어 그녀를 통해 받게 된 ‘성녀 구원’이라는 퀘스트 메시지를 펼치자 꿈속의 풍경과 대화의 내용은 더더욱 확실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이내 남은 것은···.
“거, 거거, 건우야아! 그, 그그그그. 그런 말을 다 보는 앞에서 하면 어, 어떻게 해!”
30분이나 지난 현재에도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내 가슴을 툭, 툭, 두드리는 남궁연과 부대원들의 오해뿐이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그때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 그래도오오!”
“자, 자. 두 분 다 치정 싸움은 그 정도로 하시고, 우선 작전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도 되겠습니까.”
양 뺨에 열꽃을 피운 남궁연을 말리며, 자신의 안경을 쓸어올리는 홍진웅.
“치, 치정 싸움이라니?! 그, 그렇게 말하면 뭔가 이상하게 들리잖아!”
“성녀님도 그만 진정하시고요. 우선해야 할 것은 소령님이 말씀해주신 ‘꿈’의 내용입니다.”
비몽사몽 했던 정신을 다시 바로잡는 것과 동시에, 나는 현재 이 부대시설에 남아 있는 지휘관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나와 다나 메이어가 나눈 대화를 간략히 들려주었는데···.
“바티칸 내부에서도 어떻게든 숨기고 있습니다만, 다나 메이어님은 이미 1년 전부터 의식 불명 상태이십니다···. 그런데 전후 사정은 물론 소령님이 2대 성녀를 구한 것도 알고 있다는 건···.”
“휴거교의 간계가 아닐까 의심된다는 거군요.”
내가 확인하듯 묻자 홍진웅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은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놈들입니다.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확실히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티칸의 대성녀를 의심한다니.
보통의 경우라면 그냥 듣고 넘길지 모르겠다만, 홍진웅은 전생에도 직감이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의 직감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다만···.
“합리적인 의심이시지만, 이번만큼은 거두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은 조금 경우가 달랐다.
“...어째서입니까.”
나의 확신에 묻는 홍진웅.
이에 나는 답했다.
“제가 꿈에서 봤던 다나 메이어는, 제가 과거 기독교의 주신에게 ‘계시’를 받았던 일과 그 내막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신성력’과 상극을 달리는 휴거교의 인물이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죠.”
정확히는 ‘두 번째 생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을 알고 있던 것이 결정적이었지만, 홍진웅이 납득할 수 있도록 말하려면 이렇게 돌려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까···.”
다행히도, 홍진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경계심을 거두었다.
이어서 나는 곧바로 그와 남궁연 그리고 전사장 마르쿠스를 포함한 다섯 사람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다들 한마디씩 거들며 ‘반수면’ 상태로 움직이는 앤젤라 엘런에 대한 목격담을 말하기 시작했다.
“...분명 얼른 꿈에서 깨고 싶다. 얼른 이 이상한 꿈에서 깨어나고 싶어.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마치, 이 현실이 꿈이고, 자신의 꿈을 현실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꿈과 현실을 거꾸로.
우린 전사장 마르쿠스의 첨언을 통해 모두 ‘신성력’이 이따금 멋대로 움직여 신도를 보호할 때도 있다는 정보를 사전에 공유한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의 케이스의 경우, 그 ‘신성력’이 앤젤라라는 작은 소녀를 위해 멋대로 환각과 환청을 보여주고 있음이라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던 것이다.
“깨어날 수 없는 꿈···.”
그리고 이 모든 대화를 듣고 있던 마르쿠스는 돌연, 참담한 심경이 고스란히 담긴 긴 한숨과 함께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대체 얼마나···. 힘드셨으면······.”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스스로를 향한 자책의 목소리에 회의실 내부의 시선이 오롯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이윽고 사색이 된 얼굴로 결심한 듯 고개를 들고 말했다.
“다른 분도 아니고, 다나 메이어님의 예언이오. 믿고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법이겠지”
동의.
‘수신’의 힘으로 앤젤라에게 간섭하길 원치 않던 전사장 마르쿠스가 동의하자 우리들의 행동 방침은 결정되었다.
“그럼···. 시작하죠.”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금일을 기준으로 흑룡의 태동까지 앞으로 남은 기한은 약 40일 내외.
그 전까지, 나는 앤젤라라는 작은 소녀에게 현실을 자각시키고, 신성한 불꽃이자 정화의 근원인 백염(白炎)을 다룰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야만 했다.
가혹하다고, 혹독하다고 욕을 먹어도 좋다.
허나, 나는 더 큰 재앙을 막기 위해 최대한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작전을 구상했다.
***
“충성!”
“충성.”
경례를 받으며, 굳은 결의를 다진 얼굴로 앤젤라의 방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
이젠 소령이 된 건우와 대위라는 직급보다는 ‘성녀’라는 명칭으로 더 자주 불리기 시작한 남궁연을 보며, 장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
“풋···.”
“웃지 마. 김 소위.”
“그렇지만, 흠, 저렇게 진지하신데 손에 들고 있는 게 총도 아니고 베개라니···. 조금 이상하지 않슴까.”
“소령님은 아직도 온몸이 피로에 찌들어 계실 거다. 그런데도 곧바로 작전에 임하시는 거잖아. 실례다.”
“흠, 흠! 알겠습니다. 홍진웅 중위님!”
최근에는 늘 그런 것처럼, 이럴 땐 한바탕 호탕하게 웃는 것으로 그냥 넘어가고 싶었던 장훈이었지만, 눈앞의 군인은 철두철미한 남자 홍진웅.
이미 군 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함께 해온 만큼, 장훈은 금세 얼굴에서 장난기를 없애고는 진지하게 답했다.
그제야 만족한 듯 굳었던 표정을 푸는 홍진웅.
오래도록 함께 해왔던 만큼 그에게 맞추는 것은 장훈에게 일도 아니었다.
‘직업 군인이라니···.’
새삼 자신의 군복에 달린 계급장을 보면서도 솔직히 실감이 가진 않았다.
지난 테라포밍 사태 이후, 장훈은 전역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으니까.
만일 전역을 앞둔 그에게 손을 내민 이가 건우가 아니었다면, 장훈은 결코 장교로 임관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D급이라 차별받고,
타고난 마력등급만으로 모든 걸 결정하던 나태한 군과 그에 대한 반항심으로 더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던 장훈.
그가 건우를 맞후임으로 받은 뒤 상상했던 1년 후는, 결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1년 후가 뭔가,
전역 후에도 끝끝내 ‘짐꾼’으로 활동하다 갑질이나 당하고,
밤에는 술이나 퍼마시는 그런 삶을 스스로 상상하고 있었을 지경이니 말 다 했지.
허나, 건우는 그런 자신을 바꿔주었다.
체력 훈련을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주었고,
‘수통’이라 조롱을 당하던, 그저 물을 창조할 뿐인 이 능력을 검과 함께 활용할 실마리를 여러 번 반복해서 가르쳐주었다.
대단한 사람이다.
군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이건우는 장훈에게 있어 정말이지 존경스러운 인물이었다.
“장훈아.”
그때, 함께 걷던 홍진웅이 돌연 그 참군인다운 말투를 벗어던지고 그를 불렀다.
“예. 홍 중위님?”
이에 자신은 FM말투로 대답하니, 홍진웅은 피식 웃으며 의외의 말을 꺼냈다.
“오늘은 6시에 퇴근해. 김 중사님이 화나서 전화하셨더라. 대체 어떻게 일주일 내내 집에 보내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내가 생각해도 신혼부부한테 그건 심했던 것 같아서 앞으로 이틀간 일정 빼뒀다.”
“예?! 하지만···.”
“됐다. 협회랑 757부대 그리고 7여단과의 회의도 다 앞당겨서 내가 처리해 뒀으니까. 얼른 들어가 봐. 신혼부부가 붙어 있어야지.”
계속해서 ‘신혼부부’라는 말을 강조하는 홍진웅.
그가 말하는 김 중사란, 5군단 소속의 마도부대, 김수정 중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홍진웅과 김장훈을 비롯한, 7여단 1대대에서 ‘휴거교’와의 교전 경력이 있는 병력들은 지난 석 달간, 5군단에 지원 병력으로 차출되었었는데···.
“설마, 일주일간 게이트에 고립됐던 두 사람이 결혼까지 보는 사이가 될 줄은 몰랐지.”
“홍 중위님? 이번으로 한 삼백 번째 말씀드리는 것 같은데, 아직은 그냥 동거고 결혼은 아닙니다.”
“아직은, 이라면 어차피 곧 한다는 거잖아? 그럼 똑같지.”
“전혀 다릅니다만···. 우선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지고 들고 싶은 부분은 많았지만, 장훈은 그냥 순순히 홍진웅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결혼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 무엇보다 장훈 스스로가 하루빨리 김수정 중사를 보고 싶었으니 말이다.
장훈은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는 듯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으나, 오랜 기간 그와 함께해온 홍진웅이 보기에 그는 이미 충분히 신난 모습이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윽고 저녁 6시.
칼같이 시간에 맞춰 부대를 나가는 장훈.
허나, 그런 그에게 쓴소리를 날리는 행정병이나 간부는 한 사람도 없었다.
김수정 중사는, 마법을 마도병기에 담아 쏘는 연구를 진행하는 5군단에서도 유독 독특하고 특출난 사람이었다.
마도병으로 부대에 자원해 놓고서, 돌연 열병이가 아닌 ‘검’을 연구하던 괴짜.
성격도 드세고 신경질적이었으며 작전의 발상도 상당히 과격해, 언제나 그녀의 소대에는 부상자가 속출했다.
또한, 그 특유의 성격으로 ‘외부 원군’인 7여단의 병사들을 대놓고 적대시한 건 당연했다.
곱상하고 여려 보이는 외모와 달리 엉망진창에 고집불통인 성품. 그런데 그 와중에 말과 행동까지 거칠고 타협을 모른다.
모두가 그런 그녀에게 질려,
같은 5군단의 병사들마저 그녀가 위기에 처하자 못 본 척 지나가기에 이를 지경이었다.
눈앞에 당도하는 건, 태산처럼 거대한 휴거교의 블러드 골램.
모두가 등을 돌려 도망가고, 모든 부대원이 후퇴를 발작적으로 외치던 바로 그 순간, 묵묵히, 그저 묵묵하게 자신의 소임을 다하던 장훈만은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명령하면 따르고, 그렇지 않으면 솔선수범 움직이는 일이 없던 장훈의 그러한 돌발 행동은 많은 이들을 당혹스럽게 했지만···.
결과, 그는 자신만의 ‘수검류’로 끝내 그녀를 지켜냈다.
‘후퇴’에 성공한 본대와 나뉘어 고립된 두 사람.
모두가 그들의 ‘죽음’을 논했지만, 장훈은 김 중사와 서로를 의지하며 자력으로 그 사지를 탈출했다.
그 고립된 일주일간, 그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의 일 이후 어째서인지 장훈은 김 중사와 함께하며 성격이 변했다.
자기 의사 표명이 없던 장훈은 호탕한 아저씨처럼 변하기 시작했고, 자기주장만 강하던 김 중사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존중하는 면모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필시 장훈과 수정, 그 두 사람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리란 것을 추측할 수 있을 정도였다.
프랑스 총리의 조력, 성전사나 흑마도의 도움을 받아 금세 ‘휴거교’를 척결한 수도권과 달리, 지방은 꽤나 기나긴 기간을 ‘휴거교’에 신음하는 상황이었다.
삭막하고, 각박한 매일의 반복.
그 때문에 지칠 대로 지쳐있던 5군단의 군인들에게 두 사람의 스토리는 또 다른 활력소가 되어주었고 장훈과 수정은 5군단에서나 7여단에서나 알아주는 사이가 되었다.
뭐, 아직 실제로 결혼한 것은 아니니 부부는 아니지만, 그 두 사람의 좋은 관계는 그 자체로 다른 군인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다.
“정말···. 그 김수정 중사랑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남자가 세상에 존재했다니······.”
“심지어 그게 장훈이라니! 난 그게 더 안 믿긴다.”
“그래도, 김 중사가 얼굴은 예쁘잖아.”
“아니야. 이젠 성격도 엄청 다정다감해졌다고. 다 장훈이 녀석이랑 붙어 지낸 덕분이겠지.”
홍진웅, 김장훈과 함께 그 경남의 전쟁을 겪었던 5군단, 7여단 출신의 간부들이 자리를 비운 장훈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자. 다들 쉬지 말고 얼른 일합시다.”
이를 그리 나쁘지 않게 생각하던 홍진웅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뼛속부터 FM 참군인. 금세 간부와 장교들을 다그쳐 잡담을 없애고 업무 효율을 올렸다.
김장훈.
솔직히 홍진웅으로서는, 이미 옛날부터 비범함을 한껏 선보이던 이건우보다 김장훈의 비약적인 발전과 변화가 더 놀라웠다.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그렇지 않아도 ‘수검류’라는 독자적인 검술을 창시해낸 장훈은, 이번 ‘수신의 신자’ 퀘스트를 클리어하며 더 강인해졌다.
이서영 대령, 검왕 류자키와 같은 규격 외의 검사들을 제외한다면, 아마 국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검사가 된 것이다.
“하아아.”
설마, 그 1소대의 맴버들이 이렇게 다 함께 S급 헌터, 이건우의 휘하 부대에 있게 될 줄이야.
정말 그 누구도 알지 못했으리라.
시간은 흐르고,
변화는 더 크게 다가온다.
어딘가 모르게 뿌듯하고, 가슴 한켠이 뜨뜻해지는 성취감.
홍진웅은 마냥 목석같이 딱딱한 생을 살아가던 과거의 장훈을 떠올리고, 허허 웃는 현재의 장훈과 비교하다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먼 친척 동생이 이젠 출세하여 당당해진 모습을 보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뭔지 모를 흡족함 따위를 느낄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홍진웅은 왠지 모르게 계속 느껴지는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무런 근거가 없으니 스스로 말하긴 다소 쑥스럽지만, 홍진웅의 ‘직감’은 꽤나 잘 맞는 편이다.
단순한 기우일지도 모른다.
허나, 홍진웅의 얼떨떨한 표정을 잠시 지켜보던 건우 역시 뭔가를 느낀 듯 홍진웅에게 이것저것을 묻지 않았던가.
흑룡에 대하여,
중국의 새로운 정부를 세운 마교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그가 옛날부터 적극 주장하던 ‘불사왕’과 그 종복들에 대하여.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건우는 ‘마녀’의 존재를 걱정하고 있었다.
-아무리 이준학 준장이라도, ‘마녀’를 완전히 따돌릴 수는 없었을 텐데···?
홍진웅의 대답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을 작게 중얼거리던 이건우.
분명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닌 듯했지만, 홍진웅의 귀에는 특정 단어가 확하고 꽂히는 느낌이었다.
마녀.
마녀가 어떤 존재를 말하는 것인지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 중 모르는 사람이 더 적을 것이다.
흑색 마탑의 수장,
프랑스 총리, 프리드리히 파울라스.
그리고 어느 시대, 어느 순간에도 그의 옆을 떠나지 않는 보랏빛 머리카락의 여인.
바로, 흑색 마탑의 부마탑주,
주느비에브 리샤흐 수석 교수를 말하는 것이었으리라.
길고 헝크러진 머리칼로 언제나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는 미스터리한 여자.
공식적으로 그녀는 제대로 된 공격 마법 하나 다루지 못하는 일개 학자라 알려졌지만, 마령(魔靈)학의 권위자인 그녀가 정말로 무능하리라 여긴다면 그것은 머저리이리라.
고요했다.
창밖은 이미 어둑해졌고,
번개 중대의 부대시설은 별다른 문제 없이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다.
‘성녀 구조’라는 큰 사건이 한차례 지나간 후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홍진웅은 계속해서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잘근거렸다.
“저리다···. 왜지···? 저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데, 대체 어째서?”
이 고요가 그저 평화일지, 아니면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폭풍 앞 잠깐의 침묵일지 홍진웅은 끝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
같은 시간대,
앤젤라 엘런의 침대에서 함께 잠든 이건우와 남궁연은 충격적인 광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풍차와 튤립의 도시 잔세스칸스.
게이트의 영향도, 헌터의 출현도 이 행운의 도시에서는 먼 나라의 이야기이다.
네덜란드는 특이하게도, 게이트가 열린 적이 없는 세계 유일의 땅이었으니까.
허나,
화마가 있었다.
튤립을 집어삼키고,
풍차를 붕괴시키고,
사람을 먹어치우고,
민가를 불 싸지르는,
끔찍한 화마가 잔세스칸스라는 드넓은 땅을 불태우고 있었다.
붉은 대지와 늦저녁의 하늘은 크게 다르지 않다.
붉었다.
마치 ‘휴거교’의 저주를 받고 세상을 관망하던 순간처럼 세상 모든 것이 붉었다.
이내 제정신을 차린 건우와 남궁연의 귀를 파고드는 것은,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꺄아아아악!”
“사, 살려주세요.”
“기사 나으리! 우린 죄가 없습니다. 서, 성기사 나으리 제발!”
사람.
주민.
잔세스칸스가 피로 물든 날.
두 사람이 도달한 ‘꿈’은 다름 아닌, 바로 그 현장이었다.
“이건 대체···.”
나의 예측과는 너무나도 다른 광경에 짧은 탄식을 흘렸다.
꽃과 풍차와 피의 도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