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85화 (85/175)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85화.

“다나 메이어······.”

내가 적잖은 경악과 경외 어린 심경을 한껏 담아 그 이름을 부르자, 다나 메이어는 손에 들고 있던 고풍스러운 찻잔을 내려두고는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이,

그냥 듣는 것만으로 감미로운 노래처럼 들릴 수가 있는 거였나···.

현실이라면 불가능하다 단언했겠다만, 이곳은 현실과는 조금 다른 어딘가. 이른바 꿈의 세상이니 가능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많이 놀라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의연하시네요?”

후후훗,

장난스러운 미소를 내보임에도 기품이 있다.

사소한 행동들 하나, 하나가 모두 그녀를 품격 있는 대성녀라 입증해주는 듯했고, 나는 묵묵히 그녀의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때, 다나 메이어가 입을 열었다.

“먼저, 헌터님을 멋대로 제 ‘꿈’에 초대해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그렇지만 제가 현실에서는 워낙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라서요. 이해해 주실까요?”

슬며시 웃으며, 자애로운 미소로 양해를 구하는 대성녀.

꿈의 초대라.

역시 그녀가 계속 악몽을 꾸고 있던 내 의식을 이곳으로 옮겨왔던 거였나.

“그러지.”

어차피 내가 싫다고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난 그저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후후훗. 역시 제가 너무 제멋대로라 화가 나셨으려나요. 그래도 전, 죽기 전에 딱 한 번이라도 당신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던걸요.”

“...대화를, 나와?”

“그럼요.”

기품있게, 찻잔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다나 메이어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 따라 시리도록 반짝이는 그녀의 은발과 초롱초롱한 에메랄드빛의 눈동자가 빛났다.

이렇게나 갑작스레 대성녀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기다니.

내게도 대성녀 다나 메이어는, 제대로 ‘힘’을 갖춘 후에는 이미 생을 마감했던 사람이었던지라 적잖은 당혹감과 자그마한 흥분이 일었다.

“왜 나를···?”

나 역시 흥미로운 마음으로 묻자 다나 메이어는 역시나 얼굴 가득 미소를 품은 그대로 내게 입을 열었다.

“주신께선 당신은 두 번째 생을 살아가는 존재라 칭하셨습니다. 또한, 저는 총 일천사백 하고도 일흔두 가지의 미래를 엿본 예언자로서, 제가 본 미래,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당신을 만나고 싶었답니다.”

나 스스로도 뭐라 답을 내어놓기 힘든 주제를 선뜻 입에 올리는 다나 메이어.

이에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녀는 얼굴에서 진지한 기색을 지우고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저는 당신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을 뿐이니까요.”

부드러운 분위기다.

허나, 범접할 수 없는 공기와 아우라.

보이진 않지만, 나의 그녀 사이에는 형언할 수 없는 크기의 벽이 존재하는 듯했다.

이게 1세대.

이것이 이미 세계를 한차례 구원한 바 있는 전설의 존재감인가.

“감사···?”

내가 의문 섞인 목소리로 그리 묻자.

다나 메이어는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은 본디 그 어떤 미래에서도 ‘죽을 수밖에 없던’ 아이를 살렸습니다.”

“...앤젤라 엘런?”

“예. 저의 후계자였으나, 그 존재 자체가 바티칸에 대한 종언이라 전해지던. 그 아이 말입니다.”

바티칸의 종언이라···.

2대 성녀는 중앙 집권을 바라던 성자를 움직이게 했고, 그간 ‘평화’만을 부르짖던 교황 역시 움직이게 했다.

지금껏 현상 유지에만 목을 걸고 있던 바티칸의 원로들도 성자와 교황의 변화에 발맞춰 움직였고 격동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결과, 성자는 교황의 목을 찌르고 중앙 집권에 성공하지만, 그 모든 상황을 ‘녹화, 녹음’하고 있던 불사왕은 바티칸과 성자를 세계인의 ‘적’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하여, 전생의 바티칸은 두 번째 전세계 합동 레이드의 대상이 되었고 장기간의 전쟁을 거쳐 멸망한 바 있다.

그러니, 대성녀 다나 메이어가 자신의 후계인 앤젤라 엘런을 ‘바티칸의 종언’이라 부르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설마 당신은, 앤젤라 엘런의 죽음을 바랐다···?”

혹시나 싶어 눈에 힘을 주며 그리 묻자, 다나 메이어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설마요. 당신을 초대한 건, 감사를 전하기 위해서라고 했잖아요? 저는 고마울 뿐이에요. 당신은 앤젤라의 죽음을 막았고, 그로 인해 미래는 처음으로 크게 변했으니까요.”

미래가 변했다.

당연한 결과다.

무려 ‘성녀의 좌’를 이을 소녀를 구해낸 것 아니던가.

성녀, 다나 메이어는 1472가지의 미래를 자신의 눈으로 목도한 존재.

흔히들 삼라만상을 깨우치고, 인간의 이해를 아득히 초월한 존재라 부르던 말 그대로의 초월적인 인간이었다.

그녀가 평생에 걸쳐 엿보았던 천 사백 가지의 미래.

허나, 앤젤라 엘런이라는 생존할 수 없는 존재를 생존시킨바.

그 모든 미래가 뒤바뀌었다.

그런데 바로 이 타이밍에 갑작스레 나를 자신의 꿈으로 불러들였다?

이건 아무리 그래도 너무 편리하다 느낄 만큼 타이밍이 좋다.

다시 말해···.

“새로운 미래를, 이미 봤군.”

그녀는 본 거다.

바로 어제, 내가 앤젤라 엘런을 구해낸 그 순간부터 크고 확실하게, 요동치며 변화한 새로운 미래를.

“정말 머리가 좋으신 분이네요.”

“나는 단순한 호의, 믿음 같은 걸 신뢰하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목적이 있고, 이유가 있지. 그리고 당신이 미래가 변한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은 지금, 나를 불렀다는 건···.”

“그에 걸맞은 목적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라는 추리인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성 자체가 없었으니까.

이내 다나 메이어는 처음으로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말했다.

“역시···. 예언을 뒤집는 자답네요. 정답입니다. 당신은 앤젤라를 구했고, 나는 그런 당신이 바꾼 미래를 보았고, 긴히 부탁드릴 것이 있어 당신의 의식을 초대했습니다.”

속내를 들켰다.

한없이 자애로운 대성녀의 상냥한 감사와 마땅한 보상 그리고 사소한 부탁, 아마 그녀는 이러한 흐름으로 대화를 주도하려고 했을 것이다.

허나, 그녀의 계획은 나로 인해 꼬였고, 신비롭게도 그녀는, 그 계획이 꼬인 것에 재미를 느끼는 듯 웃고 있었다.

“그럼 각설하고, 바로 진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진짜 본론?”

“예. 당신 말대로, 내가 당신을 이곳으로 초대한 진짜 목적 말이에요.”

그런 말을 입에 담고, 아무렇지 않게 다나 메이어가 허공에 손가락을 흔들자 다채로운 광택의 빛무리가 나타나 내게 날아들었다.

나, 아니, 정확히는 내가 언제나 목에 걸고 다니는 ‘호접지몽의 펜던트’를 향하는 빛무리.

이내, 그 빛무리는 신비롭게 허공과 나 사이를 유영하다 어느 메시지를 만들었다.

<알림>

ㅡㅡㅡㅡㅡㅡㅡㅡ

*엑스트라 퀘스트 - <수신의 길>

*진행도 (499/500).

ㅡㅡㅡㅡㅡㅡㅡㅡ

그건 바로 청명옥(靑明玉)의 엑스트라 퀘스트 메시지였다.

“헌터, 이건우. 당신은 엑스트라 퀘스트가 완료되지 않아 곤란한 상황이었지요?”

“성녀가 되면 그런 것도 알 수 있나.”

“알 수 있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저는 알 수 있습니다.”

왜, 어떻게?

라는 질문은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대성녀 다나 메이어 만큼은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 존재였으니 그럴 만도 하단 생각이 든 것이다.

게다가, 실제 그녀의 말대로 나는 최근 저 메시지에도 표기된 진행도 ‘1’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중이었다.

1.

그간은 신성한 피를 조금만 먹여도 쑥쑥 오르던 그것이 기이하게도 그 끝에 가로막혀 미동조차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당장은 2대 성녀, 앤젤라 엘런의 생사가 걸려 있으니 뒷전으로 밀려 있었지만, 그 일이 끝난 현재, 그렇지 않아도 나는 저 ‘1’을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을 찾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마치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주려는 것처럼 진행도 ‘1’을 언급하는 다나 메이어.

나는 경계심을 누그러뜨리지 않으면서도 우선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 들어보기로 정했다.

“당신의 퀘스트는 다른 이들의 것과는 다릅니다. 당신은 단 한 사람의 ‘신자’도 없이 공허를 떠돌던 이계의 신과 처음으로 접하고 이 세계로 끌어들인 사람이니까요.”

“이계의 신···?”

“어머, 아직도 모르셨나요? ‘수신’은 저희 주신님과는 달리, 본래부터 이 세계에 존재하던 신님이 아니에요. 굳이 말하자면 대양, 오직 바다로만 이루어진 세계의 신이었죠.”

바다로만 이루어진 세계의 신···.

그래서 ‘수신’이었던 건가.

참 단순하면서도 우습기까지 한 말이었다.

그러나 웃음은 나오질 않았다.

웃기는커녕 도리어 수많은 의구심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이다.

“어떻게 그런 것을 모두 알지···.”

“궁금하면 당신도 저처럼 100년 넘게 살아보세요.”

후훗.

내게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한 것인지.

다나 메이어는 그리 말하고는 한차례 큰 미소를 흘렸다.

이에 내가 입을 꾹 다물고만 있자, 그녀는 천천히 진중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최초로 이계의 신격을 이 세계에 불러들인 자. 이 세계의 법칙을 바꾼 ‘메시지’는 그런 자들을 사도라 칭한답니다.”

사도,

많이 들어본 단어.

가장 최근에 남궁연 소위가 ‘수신의 성녀’로 거듭날 때도 그러했고, 전생의··· 휴거교의 주교 또한 그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이름으로 불렸다.

“휴거교···?”

생각이 거기까지 도달하자, 갑작스럽게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감각이 들었다.

전생의 끝.

마지막으로 나와 마주했던 그 재앙, ‘태고의 흡혈귀’ 역시 이 세계를 침범하기에 앞서 교단을 세우고 믿음을 전파하는 식으로 침략을 강행했었다.

“설마, 태고의 흡혈귀도···.”

“예. 이계의 신격 중 하나랍니다.”

“...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충격적인 발언을 꺼내는 다나 메이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대성녀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서늘하게 빛내며 말했다.

“세상에 돌연 나타난 게이트, 그리고 그 내부에서 쏟아져나오는 몬스터, 그런데 몬스터들 중에는 규율과 법도를 갖춘 형태의 ‘군단’이 존재하죠.”

군단.

그 말인즉슨, 몬스터에게도 이성이, 규칙과 규율에 따를 줄 아는 생각 머리가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군단의 꼭대기에는 언제나···.”

“자신을 ‘신’ 혹은 ‘왕’이라 칭하는 괴물들이 있었지.”

전생에 나는 만난 적이 있었다.

최후의 전쟁 후,

죽어가던 나를 향해 굳이 발걸음을 옮기던 그 ‘태고의 흡혈귀’외에도,

‘불사왕’ 프리드리히 파울라스의 힘으로 산처럼 쌓인 시체에서 태어나, 현실을 유영하던 괴물 중의 괴물.

그 괴물이 스스로를 칭하길 ‘사신’ 레골라스···.

신이라니,

전생에는 무슨 몬스터 주제에 왕이니 신이니 거들먹거리고 자빠졌느냐고 생각해 모두 불태워버릴 뿐이었지만···.

실제 ‘신’의 존재를 느끼고 실감한 현재, 그 기억은 전과는 조금 다르게 내게 다가왔다.

“역시 운명을 뒤엎는 자. 이미 만난 적이 있나 보군요? 저는 그저 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그 기상천외한 괴물들을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나 메이어는 내 대답을 듣지 않고도 이미 확신하는 눈치였으니까.

이에 그녀는 잠시 충격을 받은 나를 응시하더니, 느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각성자, 이건우. 나는 새롭게 변화한 두 가지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이윽고 양손을 넓게 펼치는 다나 메이어.

그러자 조금 전 생겨났던 그 빛무리가 넓게 퍼지며 노을 진 황혼의 세계를 밝게 물들였다.

“한 꿈은 당신의 승리를, 다른 한 꿈은 당신의 죽음을 내게 보여주었죠.”

이어서 다나 메이어가 오른손을 척, 들어 올리자 우현의 빛무리가 나비의 형상으로 변화했고 점차 질서정연하게 움직임을 바꾸기 시작했다.

“퀘스트를 드리겠습니다.”

“...퀘스트, 준다고?”

인간이?

당혹스러운 단어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읊조렸지만, 다나 메이어의 목소리와 함께 크게 일렁이던 빛의 나비들은 하나의 거대한 형상을 취했다.

<알림>

ㅡㅡㅡㅡㅡㅡㅡㅡ

*바티칸의 ‘주신’은 당신에게 퀘스트를 발주합니다.

*달성 조건 : 자신의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2대 성녀 ‘앤젤라 엘런’의 구원.

*보상 : 엑스트라 퀘스트, ‘수신의 길’의 최후 진행도 ‘1’.

ㅡㅡㅡㅡㅡㅡㅡㅡ

“본디, 진정한 사도로서 거듭나기 위한 퀘스트의 끝에는 그 어떤 신이라도 공통으로 480일간의 수양과 아흔아홉 번의 제천의식을 필요로 한답니다.”

제천의식이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듣고 보니, ‘수신’도 명색의 ‘신’이고 내가 그 사도인데 그런 의식이 필요할 법도 하단 생각이 들었다.

‘부족했던 건, 경험치도 명성도 아닌, 제천의식이었던 건가···.’

조금 어처구니가 없단 생각도 들었다.

‘이 게임’처럼 변한 세계에서, 제천의식이라니.

앞서 말했듯, 나는 단순한 호의나 믿음 따위를 신뢰하지 않는 인간이니까.

‘그런 내가 사도라서, 표면적인 조건을 다 만족시켜도 마지막 포인트가 차오르지 않았던 것이군.’

신이 실존함은 잘 알았다.

허나, 그럼에도 나는 그 누구에게도 무조건적 신뢰를 가지지 않는다.

난, 그런 인간이니까.

“흠.”

짧게 한숨을 내쉬며 생각을 정돈해보았다.

당장, 내게 다나 메이어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가려낼 방법 따윈 없었지만, 어느정도의 믿음은 가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거짓말을 해도 시스템 메시지는 거짓을 논하지 않으니까.

“즉, 시간이 부족한 나, 그리고 행동이 불가능한 당신. 이른바 거래를 하자는 것이었군.”

대성녀와 거래라니.

영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은 분명 아닌 듯했지만, 다나 메이어는 도리어 즐겁다는 듯 미소지으며 시원스럽게 이를 인정했다.

“맞아요. 당신은 사도가 되기 위한 퀘스트를 편법으로 클리어하고, 나는 본디 죽을 운명이었던 내 후계자에게 정식으로 성녀의 좌를 넘길 겁니다.”

확실히 서로에게 손해될 것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바티칸의 미래를, 나는 보다 높은 차원의 힘을 얻는 것이다.

어떻게 다나 메이어가 퀘스트를 준 건지.

흡혈귀를 숭배하는 ‘휴거교’,

언데드와 연구하고 ‘사신’ 레골루스를 소환했던 ‘불사왕’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의문은 많았지만, 나는 구태여 그것을 입에 담지 않았다.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곧, 내가 이 다나 메이어의 세계에서 튕겨 나갈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휘이이잉!

실제로 나의 그러한 예측을 증명하듯, 나를 중심으로 축축한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수분기 가득한 바람은 눈앞의 다채로운 빛의 나비 무리와 대적하듯 내 주변에 특유의 일렁거리는 보호막을 만들었고, 나는 점차 눈앞의 풍경이 흐려져 가는 것을 보았다.

“멋대로 당신의 혼을 납치해서 그쪽의 수신님께 미움을 산 모양이네요.”

“...”

그녀의 말을 듣자 하니, 이 묘하게 평온한 물방울들은 ‘수신’의 신력인 듯했다.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시간이 없으니 딱 한 마디만, 가장 중요한 말씀만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뭐지?”

어쩐지 외로운 듯 목소리를 낮추는 다나 메이어에게 나는 그리 되물었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각성자, 이건우. 당신이 진정한 수신의 사도로 거듭나는 건, 시작일뿐입니다. 당신의 죽음과 승리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는······. 지금 당신의 뒷주머니에 들어 있는 ‘아카식 레코드’였어요.”

아카식 레코드.

지난 테라포밍을 막고 그 뿌리로부터 찾아낸, 세계의 진실에 닿아 있다 전해지던 열쇠.

나로서는 또 다른 히든 피스를 거머쥐기 위한 수단으로 챙겨둔 것뿐이었는데···.

아무래도 ‘세계의 진실’에 닿아 있다는 아이템의 설명문처럼, 그 열쇠에는 뭔가 그 이상의 비밀 숨겨져 있는 듯했다.

“...!”

나는 당황하며 그제라도 무언가를 묻기 위해 입을 움직였지만, 기이하게도 내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빛과 물방울이 교차하고 눈앞이 흐려진다.

그 멀어져가는 전경 속에서 나는 씁쓸하고 서글픈 듯한 목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저는, 당신을 기다리기 위해 그 오랜 세월을 악착같이 살아남았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다리가 땅을 파고들고,

정신이 저 멀리 강물을 따라 흐른다.

그렇게, 나는 갑작스러운 다나 메이어와의 꿈에서 깨어났다.

***

눈을 뜬다.

머리는 다소 어지러웠고,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하자 현기증이 심하게 일어났지만, 나는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곤 내 개인실을 박차고 나갔다.

-벌컥.

“어? 소령님. 좀 더 주무시지 말입니다.”

“안색이 좀 안 좋으신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그러고 보니 이른 새벽에, 남궁연 대위님이 소령님의 복귀 소식을 들으시고 부대로 돌아오셨습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이젠 퍽 친해진 번개 중대의 대원들이 있었다.

바티칸으로 향한 두 팀 외에도 ‘번개 중대’는 국내 특수 임무도 몇몇 임하고 있으니 눈앞의 부대원들은 아마 국내 임무를 전담하는 팀일 것이다.

뭐, 그런 것은 됐고,

나는 ‘꿈’에서 보았던 것을 잊기 전에 얼른 ‘그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지금, 현재 남궁연 대위는 어딥니까.”

다소 비몽사몽인 상태이긴 했다만,

당장 전해두지 않으면 말 그대로 ‘꿈’처럼 금세 까먹어버릴 것 같아 급히 말하자, 마침 맞은편 문이 열리며 남궁연 대위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 이건우 소령님!?”

부대원들의 앞이라 다소 딱딱한 어조로 나를 부르는 남궁연.

그녀는, 몸이 안 좋다고 들었다. 괜찮은가. 등등 여러 가지 안부 인사를 내게 건네왔지만, 나는 그녀의 양쪽 어깨를 덥석 잡고, ‘그 말’을 입에 담았다.

“오늘 밤은 저와 같은 침대에서 자시죠.”

휴,

앤젤라 엘런을 벗어날 수 없는 ‘꿈’으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퀘스트.

그리고 ‘꿈’이라 한다면 이 세계의 그 누구보다 ‘성녀’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의 영역이다.

그러니, 앤젤라 엘런을 구하기 위해선, ‘수신의 성녀’로서 재각성한 남궁연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다른 건 몰라도, 핵심은 전해두겠단 심산으로 내뱉은 그 말.

나는 그래도 할 말을 해뒀다는 안심감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는데, 주위의 반응은 영 좋지 않았다.

“에에에엣?!”

“이, 이건우 소소소소령님?”

“아니, 보는 눈도 많은 곳에서···.”

“휘유~ 남자십니다 소령님.”

“야, 멋지다~!”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아, 아무것도 못 봤고, 못 들었다고요!”

한 박자 늦게 들려오는 수많은 목소리,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입술만 달싹거리는 남궁연,

나는 그제야 이 번잡한 소리에 제정신을 차렸고···.

“아······.”

내가 또 실언했음을 깨달았다.

꽃과 풍차와 피의 도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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