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74화 (74/175)

[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74화.

숨을 멈춘 마르쿠스.

바로 옆까지 다가온 거한.

무언가 일어난다면 이미 진즉에 일어났어도 이상하지 않은 손에 땀을 쥐는 순간···. 거한의 입에서는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여, 잔제스! 자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

“자, 잔제스?!”

돌발적인 말에 놀라 전사장 마르쿠스가 고개를 돌리자, 극지방의 이누이트 같은 행색을 하고 있던 동양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분명 그는 자신과 초면일 텐데, 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과 반가움 따위가 여실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팔랑.

그때, 당황하는 마르쿠스의 앞으로 떨어지는 작은 쪽지, 그곳에는 아주 작지만 분명하게 ‘이건우’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일순간 마르쿠스의 눈이 커지고, 누군지 모를 그 동양인 사내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 친구! 설마 내 얼굴을 잊은 거야? 이거 서운하네. 나야 나, 보리스라고.”

마르쿠스는 그의 의도를 이제야 이해했다.

“오, 오. 자네야말로 여긴 무슨 일인가!”

‘이건우’.

성자와 성녀와 교황의 특권이나 다름이 없는 ‘계시’를 주께서 내려주신 대행자.

마르쿠스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수수께끼의 사내를 우선 믿어보기로 했다.

“나야 프랑스에 물건을 넘기고 돌아가는 길이지. 아니 글쎄 그 부랄이 달랑거리는 것들이 제발 자기네 상단에 팔아달라고 애교를 떠는데, 정말 지랄 맞더군.”

“이번에도 빙설화를 무더기로 캔겐가? 자, 자네 그러다 나라에 잡혀갈지도 모른다네.”

“하! 잘 팔리는 걸 팔아야지 어쩌겠나. 어떤가, 울란우데에서 위스키나 한잔하겠나? 자네 딸도 오랜만이군. 알리사, 잘 지냈니?”

임기응변으로 어떻게든 이어가는 대화.

그런데, 저 이누이트 복장의 동양인 남자는 혀에 버터라도 발랐는지 아주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더군다나, 거한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객실 복도에서 좌석 쪽으로 몸을 기울여 완벽하게 ‘2대 성녀’의 모습을 가리기까지 했다.

마치···.

이 비루한 추격전의 현황을 모두 이해하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절그럭!

그때, 마르쿠스가 있는 칸으로 들어오는 두 명의 팔라딘.

그 외향도, 행색도 모두 바꿔 보통 사람은 알아볼 수 없겠지만, 그들이 품은 신성력은 마르쿠스에게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두리번거리는 그들이 보인다.

허나, 다가온 거한은 그런 마르쿠스의 시선까지 몸으로 막으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쉿. 의식하지 말고 행동하게. 그리고 이것, 이것을 아이와 함께 잡고 있게.”

“...이건?!”

데스나이트 케일른이 가지고 있던 대성전사용 아이템. ‘뒤집힌 십자가의 성배’가 분명했다.

‘타락의 성물’.

신성력을 그 본질적인 뿌리에서부터 소멸시키는 성전사들의 유일무이한 약점.

그리고 저 타락의 성물은 분명 ‘데스나이트’ 케일른과의 전투 후, 이건우와 7여단에서 보관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던 그 성물이 분명했다.

‘저걸 가지고 있다는 건···.’

눈앞의 그는, 아주 분명한 아군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으으으···.”

타락의 성물을 손에 쥐여주자, 앤젤라 엘런의 입에서 작은 신음 따위가 흘러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신성력을 갈무리했던 전사장 마르쿠스마저 꽤나 따끔거리는데, 아무리 갈무리하려고 해도 갈무리 되지 않는 막대한 신성력의 성녀는 상당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은, 다가오는 팔라딘들의 소음에 극단적인 공포를 느껴 얼어붙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봐···!”

갑작스럽게 사라진 신성력.

그러자, 같은 칸에 들어온 팔라딘들이 거칠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쨍그랑!

그 순간,

큰 소리를 내며 전사장 마르쿠스 와는 정반대편의 객석에서 창문을 부수고 탈출하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고, 급박한 팔라딘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놈이다! 잡아!”

“베타한테 연락해! 놈은 횡단열차에서 탈출했다!”

들어왔던 이들은 이내, 열차에서 뛰어내린 누군가를 추적하고자 달려갔다.

-절그럭! 절그럭!

갑작스러운 상황에 마르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마르쿠스와 2대 성녀를 한 꺼번에 몸으로 가려주던 거한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걱정할 것 없네. 젊은 전사장. 뛰어내린 이는 교란작전을 위해 대기 중이던 우리 팀원이니.”

“당신은 대체···.”

“어쩔 수 없었다는 건 이해하네만, 자네는 전사장이란 직급에 비해 조금 미숙한 감이 있군.”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안경을 쓰며 수수께끼의 거한은 그런 말을 내뱉었다.

마르쿠스는 그 갑작스러운 지적에 특유의 다혈질 성격이 올라올 뻔했지만, 자신의 팔을 꼭 쥐고 있는 성녀를 보곤 이성을 되찾았다.

그런 마르쿠스의 심적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작은 안경을 쓴 거한은 안경을 쓸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프랑스에 들렀을 때, 흑색 마탑을 찾아가 흑구름의 몰약으로 성녀를 잠시 ‘가사상태’로 만들어둬야 했네.”

갈무리하려 해도 갈무리되지 않는 성녀의 신성력.

그로 인해 추격자가 계속 붙는다는 건 전사장 마르쿠스 역시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던 바였다.

허나, ‘가사상태’라니···.

“성녀님을 앞에 두고, 그게 무슨 말버릇이오.”

장차 교단의 상징이 될 소녀에게 그 같은 강압적 행동이 통용될 리가 없다.

상황이 상황이니, 자신에 성격은 죽일지라도 성녀에 대한 무례를 용서할 순 없는 마르쿠사가 눈에 불을 켜자, 거한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모스크바에서 방치된 게이트를 역 이용해 추격자들을 떨어뜨려 놓는 것도 방법이었겠지.”

“...대체 언제부터 나와 성녀님을 지켜본 거요.”

화를 내는 것보다 먼저 마르쿠스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은, 눈앞의 거한이 마르쿠스의 이동 경로를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처음부터···. 라고 생각해도 좋을 걸세. 자네를 비롯해 제7번 성전사대에겐 전원 사람을 붙여두었으니. 아, 그리고 그들의 신변은 모두 확보해뒀으니. 걱정은 말게.”

“...고맙소.”

바티칸의 성전사 그리고 성녀에 대한 무례를 논하기에 앞서, 거한의 행동은 너무나 시원시원했고 또한 강대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어 마르쿠스는 할 말도 잊고 놀랄 뿐이었다.

뒤늦게 마르쿠스가 순수하게 감사함을 표하자, 거한은 험상궂은 얼굴에서 어떻게 지어낸 것인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난, 이준학이라 하오. 10년 전까지만 해도 일개 고고학자였지만, 지금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한국군에 속해있는 사람이지.”

“하, 한국군···?!”

한국군이라면, 다름 아닌 마르쿠스의 생명의 은인, ‘이건우’가 소속된 그곳이 아니던가.

단순히 고급 용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마르쿠스는 줄곧 그를 경계해왔는데···.

아예 같은 ‘군’ 소속이라면 믿어도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당신을 이리로 부른 건···.”

“그렇네. 이건우 상병의 요청으로 이렇게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지.”

“역시, 그랬단 말입니까.”

“뭐,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움직이지. 슬슬 추격대가 또 붙을 테니.”

잠시나마 긴장을 풀었던 마르쿠스의 몸을 일순 경직시키는 한 마디.

허나, 이준학이라는 군인은 그런 충격 선언을 하면서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방금···.”

“방금 따돌린 성자파의 성기사들은 바티칸 델타 분대의 3번 집행관 휘하의 병력들이네.”

“?!”

들려온 말에 마르쿠스는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아무것도 아닌 양 내뱉은 그 말은···. 대외적으로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성기사들의 지휘체계를 훤히 꿰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그, 그걸 당신이 어떻게······.”

마르쿠스는 놀란 눈으로 이준학을 바라보며 그리 중얼거렸지만, 이준학은 그저 안경을 빛내며 서두를 뿐이었다.

“그런 건 나중으로 하고, 우선 놀라지 말고 듣게, 성자는 이번 성녀의 추적에 알파분대까지 출동시켰네.”

“성자의 직속 정예부대인 아, 알파분대까지 말입니까···!?”

“그리고 이미 베타와 감마 분대는 각각 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향하고 있는 울란우데, 하바롭스크 기차역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지.”

“그, 그런···.”

간신히 추격자를 따돌렸다 싶었는데, 이젠 한발 앞서간 이들이 있다니, 마르쿠스는 다시금 눈앞이 어두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이준학이라는 이 군인의 반응은 몇 개월간 쫓겨 다니느라 녹초가 된 마르쿠스와 많이 달랐다.

“그러니, 얼른 움직이도록 하지. 베타, 감마, 델타는 몰라도, 알파분대와는 나도 엮이고 싶지 않으니.”

직접 성기사들을 상대하는 전사장 자신도 알지 못하는 정보를 당연하다는 듯 읊으며 당장 행동을 개시하는 이준학.

등장부터 지금까지 놀라움의 연속인 남자를 보며 마르쿠스는 이젠 아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판단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럼, 저흰 어디로···.”

그 때문에 마르쿠스가 다소 소심한 태도로 이준학에게 묻자 그는 거침없이 답했다.

“어디긴, 당연히 이건우 상병을 부른 곳 아니겠나.”

이건우 상병···.

그래, 주께서 직접 ‘계시’를 내려주신 그라면, 그라면 이 난관을 헤쳐나갈 활로를 찾아줄지도 모른다.

마르쿠스는 다시 한번 자신의 팔을 꼭 쥐고 굳어 있는 성녀를 한번 바라보고, 이준학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니까···. 류자키 네가 받은 지시는 ‘뇌왕방송’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켜라. 그게 다라는 거지?”

눈앞에 차려진 진수성찬.

나는 그것들을 바쁘게 입에 집어넣으며 추하게 양팔을 들고 서 있는 검왕, 류자키에게 질문을 건넸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난 ‘테스트’에서 비참하길 넘어 치졸하게 내게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까지 박던 놈은, 내 짧은 질문에도 얼굴을 활짝 펴며 그리 답했다.

“명색이 검왕이란 놈이···.”

이 진수성찬을 차려준 장본인, 철혈검희 이서영은 도끼눈을 뜨고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았지만, 검왕 류자키는 그런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눈치였다.

“정말로 테라포밍을 진압하는 방법, 수단 같은 건 관심이 없고?”

“예! 하이엘프님들께서는 꽤 관심을 가지셨지만, 저희 일본 정부쪽에서는 오히려 최대한 그런 정보를 듣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국토의 절반을 ‘이계’에 빼앗긴 일본.

겉으로는 ‘이계’와의 교역을 세계 최초로 시도한 국가니 뭐니 떠들지만, 그 실상은 비참하다.

그렇지 않아도 고등급의 헌터가 쉽사리 태어나질 않던 일본,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 한국에서의 ‘테라포밍’보다 더 강도 높은 침략은 그 국가를 덮쳤다.

그 결과가 바로 작금의 현실이다.

일본은 ‘이계’로부터 건나온 ‘엘프’들에게 국가 내정을 간섭받고, 보이지 않는 계급제와 불공정한 조약이 판을 친다.

또한, 이 시대에는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조차 밝혀지지 않았지만, ‘엘프’들은 일본 전역에 ‘세뇌 마법’을 펼쳐 일본 헌터들의 성격을 점차 극단적으로 만들고 있다.

그로 인해, 타국과의 관계는 점차 좋지 않아지고, 그 결과 다시금 ‘엘프’와의 교역에 의지하게 되도록 말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그런 문제는 차차 해두더라도, ‘엘프’와의 공생 20년. 현 일본 정부를 대표한다는 헌터, 정치인들이 정작 눈앞의 검왕, 그 뇌왕 그리고 스즈키 외교관 아닌가.

세뇌의 효과는 참으로 탁월했다.

뭐, 이런 세뇌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알게 되는 것도, 한참 나중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겠지.”

이러한 일본의 현실, 여기서 눈앞의 검왕에게 일본 정부에서 굳이 ‘테라포밍 진압법’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 말한 이유는···.

검왕이라는, 그래도 나름의 준특급 헌터를, 엘프들의 마수로부터 지키기 위해서였으리라.

‘그 엘프놈들이 자신들의 서식지이자 집인, 포도나무를 녹여버릴 방법을 알아낸 검왕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하지만, 일본이 실질적인 위협으로 거듭나는 것은 아직까진 먼 훗날의 이야기.

현재 나에게 중요한 건, 그들의 사정이 아닌 ‘2대 성녀’의 신변이었다.

‘불사왕에게 성녀의 고향인 네덜란드 잔세스칸스의 정보를 건네준 이상···. 앞으로 2주 정도만 지나도 그들은 성녀의 행방을 쫓아올 거다.’

만일 2대 성녀에게 불사왕의 손길이 닿으면 그녀는 죽는다.

마찬가지로 ‘바티칸’에서 직접 성녀를 보호하게 되어봤자 그녀는 권력의 집중을 원하는 성자의 손에 독살될 운명이다.

그러나, 그토록 쉽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아이가, 그 존재 자체로 불사왕의 억제력이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

‘나는 그 아이를 어떻게든 살려야만 한다.’

그런데도, 내가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처럼 당장 앤젤라를 찾아가지 않는 이유는···.

‘소림사의 대환단’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했다면 어차피 나는 그곳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할 운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상대해야 할 적은 세계급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 성기사들과 성자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난 다르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류자키의 ‘도움’으로 현재의 내가 준특급의 헌터조차 압도할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확인하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그 대상은, 일본 내부에서 열 손가락에 드는 강자, 검왕이었다.

이젠 이곳저곳에서 깽판을 치고 다닐 준비가 된 것이다.

“류자키.”

그리 생각을 모두 정돈한 나는 차분한 어조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검왕을 불렀다.

“예···!”

내가 호명하는 것만으로도 퍽 긴장한 기색을 보이는 검왕.

나는 그 좀 우스꽝스러운 피식 웃고는 놈에게 말했다.

“넌, 내 목숨으로 장난질을 치려고 했다. 허나, 나는 실제 레벨을 숨기고 기괴한 공작질을 하려는 너희의 비밀도 기자들에게 공개하지 않고 숨겨줬지.”

-꿀꺽.

‘죄’에 대해 하나, 하나 나열하자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키는 검왕과 그 뒤에 주르륵 손을 들고 서 있는 ‘검제의 제자들’.

협박이 제대로 먹히는 걸 확인한 나는 이번엔 오히려 목소리에서 힘을 쭉 빼고 입을 열었다.

“난 너희를 용서한다. 현 일본 정부의 사정과 ‘엘프’들의 비열한 장난질에 희생된 너희의 국가를 동정해.”

“그···. 그 말씀은···!”

눈을 크게 뜨고 감동한 표정을 짓는 류자키.

그닥 보기 좋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나는 마지막 한 마디를 위해 최대한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만약 너희가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내가 오히려 나서서 너희를 변호해주마.”

“그, 조건이라 하심은···.”

“간단하다. 너희의 검을 단 한 번만, 나를 위해 휘둘러 다오.”

나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꽤나 정중한 어조로 내뱉은 부탁, 그러자 검왕, 류자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계속 끄덕이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누굽니까. 어떤 적이 새 시대의 주역인 S급 헌터 이건우님의 앞길을 막는단 말입니까! 저희 검제의 제자들이 솔선수범, 놈의 멱을 따버리겠습니다!”

자신의 가슴을 퉁, 퉁, 두드리며 그리 말하는 류자키.

나는 정말 고맙다고 말하며, 아주 특별한 ‘계약서’ 하나를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나도 참 마음이 편해지는구나. 자, 여기 사인만 하면 너와 나는 ‘적’이 아닌 같은 편이 되는 거야.”

-팔랑!

탄력있는 소리를 내며 아주 독특한 마나를 풍기며 테이블에 올라온 ‘계약서’.

“당연합니다! 이러한 대양과도 같은 아량과 큰 은혜 저희가 꼭···.”

류자키는 곧바로 그 ‘계약서’에 지장을 찍으려 들다가도, 갑작스럽게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시선이 집중된 곳은 다름 아닌 테이블의 ‘계약서’.

“저······. 이건우 경? 이건···.”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떨떠름한 얼굴로 그리 묻는 류자키.

허나,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답했다.

“‘계약서’잖아. 왜. 사인하기 싫어?”

“아, 그게···. 계약서는 계약서인데 말이죠. 이건······.”

끝까지 류자키가 읽지 못하는 계약서의 가장 첫줄.

가장 큰 문장으로 쓰여있는 글귀는 다름 아닌 ‘노예 계약’이라는 단어였다.

심지어 단순한 종이가 아닌, 이 세계의 법칙을 바꿔 놓은 시스템의 공인을 받을 수 있는 ‘매직 스크롤’에 적힌 노예 계약서, 그것이 바로 내가 이들에게 제안한 계약서의 정체였다.

“아, 그냥 말만 노예 계약서인 거야. 말만, 너희가 잘만 하면 난 약속을 지키고 너희를 변호해줄 생각이라니까? 왜······. 나를 못 믿겠어?”

그렇게 말하며 매섭게 눈을 바로 뜨자 숨을 집어삼키는 검왕, 류자키.

나는 그런 놈이 가만히 굳어 있자, 아주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허리춤에 걸린 ‘본디오 빌라도’를 향해 손을 내리기 시작했다.

“히, 히익!”

용서?

용서는 개뿔,

나는 결코 나와 내 주변인들을 함부로 건드리는 놈들에게 그렇게 쉽게 등을 맡기지 않는다.

“혀, 형태만, 그, 그런 것···.”

“그래. 바로 그거야.”

마치 주문처럼 내가 했던 말을 더듬으며 되풀이하는 류자키.

나는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지만 분명하게, ‘노예 계약서’에 자신의 손으로 이름을 적어넣는 그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검왕.”

이래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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