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72화.
꿀꺽꿀꺽.
나는 급하게 이서영이 준비해준 쉐이크를 들이키며 텅 빈 배와 목마름을 채웠다.
“안 뺏어 먹을 테니까. 천천히 먹어.”
급한 대로 과일이나 채소를 있는 대로 갈아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는데···. 역시 이서영이 만들어서 그런가 딱 내 입맛이었다. 10분 만에 벌써 큰 잔을 두 번이나 비웠다.
“대대장님은 빼앗지 않으시겠지만···. 그놈들은 그다지 오래 기다려줄 생각이 없어 보여서요.”
내가 말하는 ‘그놈들’이 가리키는 대상이 누군지 알기에, 내가 꿀꺽꿀꺽 쉐이크를 들이키던 모습을 퍽 흐뭇하게 지켜보던 이서영의 얼굴은 팍 굳었다.
“그것들은··· 하아······.”
그녀는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철혈검희 이서영과 검왕 류자키의 악연은 생각보다 더 오래된 것이니 말이다.
그녀는 아마 류자키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릴 것은 알지만, 정작 그 수단과 방식을 모르기에 나를 도울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물며 이번에 ‘검왕’에게 시비를 건 것은, 그가 아닌 내가 아니던가.
이번 일은 완전히 이서영의 통제를 벗어난 상황이었다.
꿀꺽.
“한 잔만 더 주세요. 진짜 맛있네요. 이거.”
“...한가로운 소리 할 때야? 정말로 무슨 대책이 있는 거지?”
잔소리를 하면서도 내가 내민 컵에 영양 주스를 한가득 퍼주는 이서영.
하지만 그녀는 이내, 금방 표정을 굳히고는 말을 이었다.
“성격도 드럽고, 하는 짓도 시궁창의 쥐새끼보다 못하지만, 놈의 검은 그럭저럭 쓸만해. 얕잡아 볼 대상은 아니라고.”
“누가 들으면 제가 검왕하고 붙는 줄 알겠네요.”
의외로, ‘검왕’ 류자키는 나의 도발에 걸려들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나를 찢어 죽을 법한 살기를 내뿜기에 이래저래 더 시비를 걸어봤지만, 놈의 반응은 변하지 않았다.
‘하긴···.’
내가 ‘검왕’과 맞붙어버리면 승패가 어찌 되건 그 ‘뇌왕 방송’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없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굳이 기자들을 대동해 그런 무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아예 기자들의 앞에서 폭발해주면 베스트.
폭발하지 않더라도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그 무시를 당한 이상 어떠한 액션을 취할 줄 알았는데···.
놈은 끝까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상태로 분노를 억눌렀다.
‘한국 방문의 목적 자체가 그거일 텐데, 자기가 화난다고해서 검제의 명까지 무시할 순 없었겠지.’
하지만 뭐,
최선의 수가 먹히지 않았다고 해서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검왕이 아니더라도 똑같아. ‘검제의 제자들’ 중에는 상식의 선으로는 통용되지 않는 기괴한 검을 다루는 녀석들이 많다고···. 정말 괜찮은 거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왕’이기 때문일까.
참, 이서영은 드물게 솔직한 자신의 불안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 정도로 대놓고 내 걱정을 해주는 건, 전생 후 처음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래서 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자그마한 손을 양손으로 움켜쥐고는 자신감 있게 말했다.
“걱정말아요. 솔직히 조금 피곤하긴 한데, 내가 그렇게 쉽게 당할 인간이 아니라는 거, 대대장님도 아시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괜찮아요. 이거 진짜 맛있네요. 금방 끝내고 돌아올 테니까. 이것 좀 더 만들어주실 수 있어요?”
이서영은 갑작스럽게 손이 잡힌 것이 낯간지러웠는지, 얼굴을 살짝 분홍빛으로 물들이고는 계속 자신의 손만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올게요.”
***
검왕, 류자키.
그는 겉으로는 아직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람처럼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지만, 의외로 그 속은 침착하게 현재 상황을 재점검하는 중이었다.
‘처음 나타나기 전, 이건우는 훈련장에서 나왔다···. 역시 놈은 아직 급격한 레벨업에 적응하지 못한 거야···.’
8연속 레벨업이라.
일반적으로 레벨업이 야기하는 헌터의 신체 변화는 비각성자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큰 경우가 많다.
일례로, 숙련된 30대 초반에 경력 10년의 헌터가 우연한 기회에 4연속 레벨업을 경험한 뒤, 한 달이나 자기 걸음에 적응하지 못해 넘어졌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좋게 봐서 8연속 레벨업이 정말이라면, 놈은 현재 23레벨.’
레벨을 초기화 당하고 다시 처음부터 올리는 것이 아닌 이상, 그런 급격한 변화에 금방 적응할 수 있는 헌터는, 이 세상에 없으리라.
‘이번 계획은, 의외로 싱겁게 끝나겠군.’
아직, 자기 몸에 제대로 적응조차 못 한 이건우. 그에 달리 이쪽은 이미 2년 전, 레벨 20을 넘긴 괴물 같은 루키가 있다.
그런데도 이건우가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이유야 뻔하다.
‘레벨업도 하고, 우연히 큼직큼직한 게이트의 얽힌 일도 척척 해결되니 세상이 자기 발밑에 있는 것처럼 보였겠지.’
어린 나이에 거머쥔 힘.
마치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만 같은 모습들을 보고 있으니 그리되는 것이다.
‘그 오만방자하고 방약무인한 태도···. 이번 기회에 이 몸이 뜯어 고쳐주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적잖은 유혈이 낭자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검왕, 류자키는 세간에는 아직도 레벨 ‘11’의 검사라 알려져 있는 괴물 루키,
그리고 이건우를 번갈아 떠올리고는 속으로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류자키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상태로 명상을 하고 있던 사이, 저 멀리에서부터 작지 않은 웅성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건우.”
“이건우가 왔다.”
“정말로 30분만 쉬고 돌아왔잖아?”
“쫄아서 도망가려는 거라고 했던 새끼들, 돈 내놔.”
이서영이 바로 옆이 있음에도 굳이 나서서 시비를 걸던 이건우.
그런데 정작 검왕이 당장 시작하자고 소리치자 이건우는 아주 잠깐의 휴식을 요구했었다.
이에 대해 기자들 사이에서는 내기가 걸릴 만큼 이래저래 말이 많았는데, 이건우는 당찬 걸음으로 당당하게 그들의 중앙에 섰다.
“얼른 시작하죠. 저 배고픕니다.”
그는 정확히 검왕, 류자키를 바라보며 전혀 긴장한 기색 없이 그리 말했다.
“하!”
그 태도가 너무나 기가 차, 콧방귀를 훅 내쉬는 류자키.
그리고 그걸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검제의 제자들’의 검귀가 자신의 검을 잡고 이건우의 앞에 섰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의 이건우.
그리고 ‘귀신’과도 같은 재능으로, 열다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검제’의 선택을 받은 괴물 루키.
두 사람은 서로를 특유의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스릉!
-후우웅!
두 사람은 동시에 허리춤, 어깨에서 검을 잡아 들었다.
이건우의 손에 들린 것은, 검은 안개의 형상을 띠고 있던 새카만 흑검. ‘이터널 패인’.
맞은 편의 루키는 남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한손 직검을 쥐었다.
“개(開)!”
카운트다운 없이 시작된 승부.
‘귀신’의 재능을 가진 막내, ‘검귀’는 시작과 동시에 이건우의 허점을 파고들자 했는지, 단박에 거리를 좁혔다.
-챙!
눈을 움찔 떨며, 귀신의 검을 받아내는 이건우.
그 오묘한 당혹감을 감지한 검귀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채쟁!
하단에서 상단, 대각과 대각,
고속의 두 검은 점차 속도를 올린다.
쇠와 쇠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더 크게 울리고, ‘검귀’는 자신의 날카로운 직감으로 ‘헌터’보다는 ‘검사’에게 유리한 초근접 고속 검합전을 걸었다.
이는 검의 가치나 그 검에 감기는 오러, 마력이 중요한 것이 아닌, 숙달된 경험과 본능에 가까운 반응속도를 요하는 전투 방식.
‘역시···. 스승님이 인정한 재능의 화신 검귀(劍鬼).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을 찾아내는군.’
너무나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미소를 짓는 검왕 류자키.
‘오직 검을 휘두르는 속도와 즉각적인 반응속도가 전부인 쾌검(快劍)의 접전에서, 저 어린 검귀를 꺾을 수 있는 건 우리 검제의 제자들 중에서도 오직 나 하나.’
오직 쾌검이라는 제한을 둔다면, 막내 검귀는 사실상, 검왕 바로 아래의 실력자였다는 것이다.
‘어딜 어떻게 보더라도, 이건우는 검귀를 이길 수 없다.’
그때,
-휘리릭!
무언가를 잡아 찢는 듯한 고음이 크게 울려 퍼지고, 류자키는 승리를 확신했다.
‘끝났군.’
검귀의 비수.
저 ‘진동검’은 검사들 간의 숨 막히는 접전 사이, 상대의 허를 찌르기에 딱 알맞은 검이다.
왜냐하면, 기습적이고도 강대한 저 진동은···!
-챙!
오직 속도에 집중하던 ‘쾌검전’에서 일정한 힘으로 쥐고 있던 검을 놓치게 만드는 기습이니까.
이건우의 흑검은 검귀의 ‘진동검’에 부딪히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이윽고 몸을 크게 회전시키며 날리는 연속적인 참격. 이로써 이건우는 최소한 중환자실에서 두 달은 보내게 될 끔찍한 상처를 입게 될 것이었다.
헌데,
-챙!
검왕의 귀를 스치는 건, 사람의 몸을 가르는 검의 잔혹한 소음이 아닌, 검과 검이 부딪히는 충격음이었다.
‘뭣?!’
놀란 검왕이 눈에 힘을 주자, 분명 허공으로 날아가던 그 흑검을 손에 쥐고 있는 이건우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건, 그 ‘흑검’과 ‘이건우’ 사이를 타고 흐르는 굵직한 전류의 연결.
‘전기!? 그래. 애초에 놈은 검사가 아닌 전격 방출계 헌터···.’
허공으로 날아가던 검을 다시금 손으로 불러들인 건, 아마도 전격 방출계 헌터들이 곧잘 사용하는 ‘자기력’이었을 것이다.
‘허나, 그 고속 전투 도중에 반응해 마력을 운용하려면···.’
그건, 단순한 반응속도만으로 커버가 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허나, 이렇게 반응을 해냈다는 건 다시 말해,
‘예측했다? 매스컴에도 공개된 적 없던 검귀의 비수를···?!’
이번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검왕.
한편, 검왕이 그런 독백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두 사람의 검은 계속해서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파지지직!
다만, 마치 이제야 본 실력을 드러낸다는 것을 은연중에 뽐내듯, 이건우는 지금껏 휘두르지 않던 ‘전격’을 그 쾌검의 접전 도중에서 수시로 뿜어대기 시작했다.
“으으읏!”
검과 검이 교차하며 커다란 쇳소리를 퍼트리는 것은 같다.
허나, 이건우의 방대한 전격은 검들의 접전과는 별개로, 계속해서 검귀에게 쏟아져 내라고 있었다.
“으윽! 아아아악!”
검을 주고받을 때마다 검귀에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이내 몇 번의 합을 더 주고받았을까.
-풀썩.
전격의 연쇄에 눈에 띄게 움직임이 느려져 가던 검귀는 허망한 비명만을 흘려대다 그대로 땅에 엎어지고 말았다.
“후. 생각보다 감 잡기에 도움 되는데?”
그리고 엎어진 검귀를 보며 이건우가 중얼거리는 그 한마디.
검왕, 류자키는 그의 말에 어떠한 사실을 눈치채고는 눈을 부릅떴다.
설마, 이건우가 처음부터 전격을 사용하지 않았던 건, 쾌검을 받아내느라 그럴 여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와중에도 변화한 자신의 신체능력을 테스트하고 있었다는 건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의문.
허나, 검귀와의 전투 후에도 숨조차 급해지지 않은 이건우를 보면, 그 의문을 쉽게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때,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검왕에게 이건우는 손에 쥔 ‘이터널 패인’을 겨누며 말했다.
“다음,”
다, 음?
검왕은 잠시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아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금방 떠오르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이 내뱉었던 ‘승부’의 방식.
검왕, 류자키는 분명 일본의 국민들을 제대로 설득하기 위해 ‘검제의 제자들’을 ‘밑’에서부터 꺾으며 이건우에게 자신의 힘을 스스로 입증해보라 말했었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해놓고, 실제로는 이건우가 ‘검귀’를 이길 거라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었기에···. 다음이니, 순번이니 하는 건 검왕의 머릿속에 없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검왕의 귓가를 스치는 기자들의 웅성거림.
“...기삿거리가 될지 말지는 제쳐두고, 정말 기대되는군.”
“그러니 말이야. 세상에 이렇게 치열한 전투를 직접 보게 된다니···!”
“난, 11레벨의 검사와 23레벨의 헌터가 아니라, ‘30레벨’ 간의 전투인 줄 알았네”
“이건우 헌터가 대단하다는 건 이제 다들 알지만, 검제의 제자들도 듣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데?”
이런저런 말들은 모두, ‘앞으로’는 또 얼마나 어마어마한 전투가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11레벨 막내의 힘이 이 정도인데, 당연히 그 뒤가 더 궁금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정작 검귀 류자키는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상상은 자유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