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71화.
“있잖냐. 선글라스야. 네가 봐도 좀 이상하지 않냐?”
요원의 목에 칼이 들이민 그 상태 그대로, 검왕 류자키는 마치 술자리에서 친구와 한잔하듯 가벼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가 말입니까.”
“아니, 아까 내가 말했던 뇌왕 방송 말이야. 솔직히 놈과 여러 번 만났던 나도, 뇌왕 그 자식이 미친 짓을 벌였다는 건 부정하지 않아. 그 자식은 그런 인간이었거든.”
너만 하겠냐.
라는 말을 간신히 삼킨 요원은 순순히 그 말을 경청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뇌왕 코타로 자식은 20년 경력에 A+급 헌텨였단 말이지? 근데 그런 놈이 레벨 ‘15’짜리에 어린 헌터한테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
“너도 이상하지? 안 그래? 나도 그게 궁금한 거야. 6연속 레벨업이라니, 심지어 배 타고 오는 사이에 이번에는 8연속 레벨업을 했고, 테라포밍을 막는 주역이었다잖아!”
진심으로 넌 허무맹랑한 그 이야기를 믿냐는 듯 ‘검왕’은 계속해서 피식거리며 온몸이 경직된 요원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네 목에 칼 대고 있는 우리 막내 있지? 걔가 레벨이 11이야. 근데 8연속 레벨업을 했다는, 어디 보자···. 23, 그래. 23레벨의 헌터라면 절대로 11레벨의 검사에게 질 리가 없겠지. 그렇지?”
경박한 웃음소리를 내며 하하하 웃는 검왕.
그러자 그 주변에 있던 ‘검제의 제자들’ 역시 검왕을 따라 앵무새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제야, 운전대를 잡은 요원은 그들의 진짜 의도를 눈치챘다.
뇌왕 방송.
그 속에서 드러난 뇌왕, 타테미츠 코타로의 추악한 면모와 인간쓰레기 같은 행동들.
그 영상이 있었기에 한국의 헌터 협회는 스즈키 외교관을 정당하게 가두고, 뇌왕의 죽음에 도리어 당당할 수 있었다.
허나, 지금 검왕이 하려는 짓은···.
레벨11의 막내 검사로 하여금 레벨 23의 헌터 이건우를 쓰러뜨리게 만들고, 사람들이 진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그 영상’에 의문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23레벨의, 뇌왕마저 가지고 놀았던 이건우가 11레벨의 검사에게 패배하는 건 도저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허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금 그 ‘막내’에게 칼을 겨뉘어지고 있는 요원은···.
그 압도적인 마력을 감각적으로 느끼며 ‘검왕’의 거짓말 하나를 눈치챌 수 있었다.
‘이 막내라는 녀석은··· 절대 11레벨이 아니야···. 오히려 19레벨인 나보다 더 훨씬 높은···. 최소한 24레벨은 될 것이다.’
이건우가 위험하다···!
그리고 ‘그 영상’에 사람들이 의구심을 품기 시작하면, 정정당당하게 스즈키 외교관을 가두었던 협회에게도 혼란을 야기될 것이 분명했다.
‘이 자식! 변호나 사죄는 무슨,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한국에 온 것이었나···!’
당했다.
그 생각은 요원이 운전대를 잡은 내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언제 정신을 잃었던 것인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해가 한, 두 번 떨어지고 다시 떠오르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긴 했다만, 정작 기억나는 것은 오로지 내가 행했던, 혈도를 더 크게 열기 위해 소드댄싱 뿐이었다.
“으으···.”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조금 마나를 운용해보자 전신에 걸쳐 골고루 퍼진 내상을 느낄 수 있었다.
‘심하네···.’
메시지가 나서서 경고를 날린 데는 역시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나 몸은 마치, 회귀 직후에 행하던 ‘오버 클럭’ 상태에 빠진 것처럼 숨만 쉬어도 고통을 느끼는 지경이 되어있었다.
‘예상보다 레벨업을 하지 않은 건가?’
레벨업은 헌터의 육체를 어느 정도 회복시켜주는 기능도 있는데, 현재의 내 몸은 너무나도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나의 추측을 비웃듯.
눈앞을 아른거리는 투박한 빛에 힘겹게 눈꺼풀을 열자,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중략)
난, 레벨업 메시지 밑에 ‘중략’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 걸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허나, 놀람과 동시에 조금 흐려져 가는 의식.
“하아아아아, 후우우우.”
나는 곧바로 숨을 길게 쉬며 내 정신을 바로잡았다.
이 정도 레벨업이라면, 닥터 곽재신이 필요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회복 작용이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러고도 몸 상태가 이 정도라는 건, 아마 레벨업만으로는 상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경험치를 단번에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리라.
‘대체 어느 정도길래···.’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나는 몸상태가 최악을 달리는 그 와중에도, 눈에 힘을 주어 상태창을 띄웠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격변’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Lv. 32.
[생체전기량]: 41000Wh ▶ 115000Wh
[제어력]: 890Wh ▶ 2020Wh
‘8연속 레벨업’이라는 다소 믿기 힘든 소식으로 전세계의 언론사를 뒤흔들었던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인데··· 나는 거기서 한술 더 떠 ‘9연속 레벨업’을 이루어낸 것이다.
하물며, 그 충격적인 레벨업의 여파만으로 내 능력에 모든 기반이 되는 ‘능력치’들은 모조리 두 배 이상으로 격상되었다.
“허···!”
도합, 17레벨.
흡혈귀인 개벽의 장로를 잡고, 소림사의 대환단이 품은 기를 모조리 흡수한 내 몸의 변화는, 나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막대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소림사의 대환단’의 내공을 나눠 흡수한 ‘오브-성혈’의 활성도가 비약적으로 증대됩니다!>
쉼 없이 번쩍이던 레벨업 메시지를 모두 치우자, 그 뒤에 숨겨져 있던 새로운 메시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심지어 그건,
한번 정착하고 나면 무슨 짓을 해도 잘 변화하지 않는 ‘오브’ 활성도가 올랐다는 메시지였고, 그 수치는 무려···.
[활성도]: 12% ▶ 46%
34%였다···.
“허, 허허허···.”
목은 말라비틀어졌고, 지금의 나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힘든 상태였지만, 그런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만일 그 이성적치고 매사에 침착하던 전생의 이준학 준장이 이를 봤더라면, 아마 아무리 그라도 뒤로 넘어갔을 만큼 압도적인 상승량이었다.
그때, 나는 문득 드는 생각에 슬며시 고개를 돌려, 기절했던 내 옆에 떨어져 있던 혈검, ‘본디오 빌라도’를 바라보았다.
-꿀걱!
나는 마른 침이 절로 삼켜진다.
‘이 정도의 미친 성장이라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최저의 컨디션, 최악의 몸 상태. 허나, 나는 꼭 지금 당장 그것을 손에 쥐어보고 싶었다.
잡는 것만으로도 격렬한 오러를 내뿜으며 사용자의 생명을 갉아먹는 혈검.
본래라면 절대 이 같은 상태에서 쥐어선 안 되는 마검이지만···.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것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띵!
직후, 들려오는 메시지 음.
허나, 그것은 피로 글씨를 쓴 것만 같이 흉흉한 형태의 경고 메시지가 아니었다.
맨 처음, 내가 데스나이트 케일른을 눈앞에 두고, 혈검을 쥐었던 순간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는 내게 생의 남은 시간을 3분 47초라 표기해 주었었다.
심지어 ‘오브-성혈’을 활성화해 그 흉흉한 핏빛 오러에 저항을 시도한 뒤에도, 내가 ‘본디오 빌라도’를 휘두를 수 있었던 시간은 고작 10분 02초.
그런데,
<알림>
ㅡㅡㅡㅡㅡㅡㅡㅡ
*각성자, 이건우(Lv. 32)의 육체는 신화급 무장, ‘본디오 빌라도’의 오러와 균형을 이룹니다!
*육체의 붕괴까지 걸리는 시간이 대폭 증대되었습니다.
*육체의 붕괴까지 남은 시간: 51분 12초.
ㅡㅡㅡㅡㅡㅡㅡㅡ
눈앞에 나타난 알림 메시지는, 이 최악의 컨디션에다 아직 ‘오브-성혈’을 활성화하지도 않은 상태였음에도···.
51분이라는 막대한 시간을 내게 허락해주고 있었다!
이는 다시 말해, 순수한 나의 육체가, 이젠 ‘본디오 빌라도’의 미친 오러를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성장했다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이젠···.
나는 자질구레한 조건 없이, ‘본디오 빌라도’를 휘두를 수 있는 진짜 혈검의 주인이 되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번 ‘소림사의 대환단’의 가치는 증명이 되고도 남는 수준이었다.
***
내부에서만 열 수 있게 설계된 훈련장의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본래의 원칙대로라면 손님도 들어올 수 없는 협회 사옥에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꺼져, 류자키!”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고양이 마냥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으르렁거리며 외치는 철혈검희 이서영.
그녀는 본디 이 사옥을 자유롭게 왕래하던 사람이니 그리 이상한 건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녀의 맞은편에 서 있는 기모노 차림에 허리에는 길고 짧은 3개의 검을 매달고 있는 남자였다.
“허어, 그 잘난 ‘검성’에게 비참하게 버림받은 ‘검희’를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
그는···. 전생의 나와도 결코 좋은 사이로 남지 못한 희대의 싸이코, 검왕 류자키가 분명했다.
“개 같은 소리 집어치우고 꺼져! 여긴 너 같은 게 발을 들일 장소가 아니니까.”
“하! 그 어린 헌터놈하고 정분이 났다던 소문이 과연 진짜였던 모양이지? 네 낭군님이 있는 곳이니, 번견처럼 지키겠다. 뭐 그거냐? 심히 역겹구나. 검희.”
두 사람은, 전생에도 눈만 마주쳐도 진심으로 서로에게 검을 휘두를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
아마 ‘검성’과 ‘검제’라는 머나먼 라이벌 관계의 제자들이라 그런 것일진 모르겠지만···.
뭐, 솔직히 나도 저 싸이코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이서영의 의견에 찬성한다.
갑작스럽게 한국을 방문한 검왕.
그를 주의 깊게 살피며 잠시 전격 방출계 헌터 특유의 탐지 기감을 넓혀 보니, 이 사옥 주변을 크게 둘러쌀 만큼 대규모의···.
그래, 카메라와 펜 그리고 수첩을 들고 있는 저 인파는 아무래도 기자들이 분명해 보였다.
‘이목을 집중시켰다라···.’
어쩐지 전생에도 비슷한 일을 겪어본 듯한데···.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이번에는 아예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니, 이곳에 몰려든 대부분이 ‘일본계 기업’에 후훤을 받는 국내 언론사들이란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이건···. 그거 같은데···.’
갑작스럽게 ‘검왕’씩이나 되는 인물이 한국에 방문한 표면적 이유야, 당연히 ‘스즈키 외교관’ 때문일 것이겠지만···.
고의로 모은 기자들,
거기에 화제의 인물인 내가 있는 이곳에 굳이 저 ‘검왕’이 찾아왔다는 건···.
‘또, 실제 레벨을 숨긴 검사를 내세워서 진검승부니 뭐니 허울 좋은 명분으로 전투를 벌이고, 그 결과로 여론을 바꿔볼 셈인가.’
전생에도 이미 겪었던 일이다.
뇌왕 코타로가 주로 방송을 조작해 여론을 주물럭거렸듯,
검왕 류자키도 매번 ‘검제의 제자들’의 레벨을 속여 등록해, 이렇게 필요할 때마다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사용하곤 했으니까···.
요약하자면 이렇다.
레벨 ‘10’ 언저리로 협회에 등록된 검사가 세간에는 레벨 ‘23’이라 알려진 나를 압도적으로 꺾는다.
그럼 내가 그에게 패배했다는 사실 자체가 지난 ‘뇌왕 방송’에서 내가 뇌왕 코타로를 어떻게 압도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구심의 촉매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그 ‘뇌왕 방송’은 과연 조작되지 않은 진짜였을까?
그런 의문은 생겨난다.
과연 사기꾼은 누구인가.
사실은 뇌왕을 제거해 일본측 헌터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한국의 함정이 아니었을까?
또한, 그렇다면 스즈키 외교관의 투옥은 과연 정말로 정당한 행위였을까?
아마 이딴 식으로 ‘작은 사실’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는 의문을 굳이 기자회견을 통해 제시하여 일본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여론을 흔들려고 하는 것이다.
전생에도 겪어봤다.
상당히 더럽고, 치졸하기 짝이 없는 녀석의 수법.
“하···.”
허나, 한눈에 이를 모두 파악한 나로선···.
저 ‘검왕 일행’ 모두가 나의 밥과 휴식을 방해하는 귀찮은 놈들로 보일 뿐이었다.
“정말···. 뻔뻔한 것도 능력이군.”
몰랐다면, 하물며 1세대가 세운 상식이 마냥 진리로 통용되는 이 시대라면, 아마 놈의 간계에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저 ‘검제의 제자들’은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본 실력과 실제 레벨을 체계적으로 숨겨온 집단이니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놈의 간계와 그 내막마저 알고, 이를 정면에서 파훼하는 방법까지 알고 있는데.
-터벅, 터벅.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나는 배가 고프다.
아마 하루는 아니고 이틀 정도를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다른 것보단 우선, 밥을 먹고 싶단 말이다.
그러나 저 추악하기 짝이 없는 놈이, 순순히 내 휴식을 기다려줄 리가 없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나는 차라리 먼저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띠리리~!
청명한 리듬과 음으로 울리는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
“엇?!”
“어어?”
“이, 이건우?!”
한창 사옥 밖에서 웅성거리던 기자들은 정작 내가 직접 문을 활짝 열어주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나는, 상식적으론 말이 안 되는 말을 꺼냈다.
“들어오세요.”
“드, 들어와?”
“지금 내, 내가 잘못 들은 것, 아니죠?”
기자들은 일순간 내 당혹스러운 언행에 숨을 삼켰지만, 나는 말 없이 몸을 돌려 주저 없이 이서영과 류자키에게로 향했다.
“이, 이건우!”
나를 발견하자마자, 굳이 왜 모습을 드러낸 것이냐는 듯 철혈검희 이초희가 나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아마 그녀는 나와 류자키가 차라리 만나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언성만 높이던 아까와 달리 지금 그녀는 자신의 애검, 백룡도를 뽑아 들고 있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웅성웅성.
허나, 내 뒤를 새끼 오라마냥 줄줄이 쫓아오는 기자무리를 보자, 그녀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검집에 되돌렸다.
“이건우···.”
대체 무슨 생각으로 기자들을···.
오래 합을 맞춰온 덕분일까.
나는 그녀가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는 것만 들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드물게 감정을 숨기지 않은 불안한 얼굴로 이서영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아마 그녀도 어느 정도는 아는 거겠지.
싸이코 검왕 류자키와 엮이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피를 보게 된다는 걸.
그리고 그런 이서영과 완벽히 반대로 검왕, 류자키는 나를 보자마자 비열한 미소와 함께 큰 목소리를 냈다.
“하! 드디어 주인공이 납셨군.”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일말의 주저 없이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검왕. 이건우라고 합니다.”
“음?”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당당히 손을 내밀자 도리어 멋쩍은 표정을 짓는 검왕.
허나, 아직도 주위에 몰려들고 있는 인파, 기자들을 인지하고 그는 내 손을 맞잡았다.
“그래! 테라포밍을 저지하고 한국, 아니 세계를 구한 새로운 영웅! 이 몸은 자네를 만나고 싶었다네!”
방금까지 이서영을 대하던 적개심은 어디로 갔는지,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밀자 그는 자기가 무슨 엄청난 웃어른이라도 된 양 대범하게 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심히 보기 좋지 않았지만, 우선은 기자들의 눈앞 아닌가.
나 역시 빙긋 웃으며 그에게 어쩌다 이런 곳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물었고,
그는 역시나···.
저번 ‘뇌왕 방송’으로 전 세계에 송출된 그 영상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뭐, 검왕인 자신은 나를 한 점의 의심 없이 믿지만, 그래도 일본 내부에서는 의심의 시선이 적지 않다.
그러니 그들을 검왕이 직접 설득해볼 수 있도록, 계기를 달라.
대충 그런 말을 아주 장황하고 감성적으로 늘어놓은 것이다.
“개같은 헛소리 말고···.”
검왕의 검은 속내를 알고 있는 이서영은, 어떻게든 나를 돕고자 했는지 많은 카메라 앞에선 잘 하지 않는, 험한 말로 입을 열었지만···.
나는 팔을 번쩍 들어 올려 그녀를 막아서고는 대신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가, 별 시답지 않은 소리나 길게 지껄이던 검왕에게 대놓고 말했다.
“그렇군요. 그러니까 검왕 류자키씨의 말씀은, 이 기자분들의 앞에서 실제로 보여주면 좋겠다. 그런 말씀이시죠?”
“역시 새 시대를 이끌어갈 재목! 자네는 말이 통하는 군···?”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말에 동조하는 것이라 여겼는지, 검왕 류자키는 곧바로 큰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는데,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나의 말을 이었다.
“제가 검왕, 당신을 압도하는 모습을 말이죠.”
침묵ㅡ
일순간 나의 목소리를 끝으로, 끊임없이 웅성거리던 이 사옥 전체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그리고 몇 초나 지났을까.
이마의 십자핏줄을 곤두세운 검왕은, 그 젠틀하던 태도와 얼굴은 어디에 갖다버리고 온 것인지, 죽일 듯이 부릅뜬 눈으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지금, 뭐라고?”
그러면서도 입은 그나마 점잖을 빼려는 것인지 그런 질문을 건네왔지만, 나는 그런 그에게 산뜻한 미소를 되돌려주며 말했다.
“보고 싶다며, 내가 뇌왕을 압도했던 그 광경 말이야. 당신들 중 뇌왕과 급을 맞추려면, 검왕 류자키. 당신뿐이잖아?”
나는 이제 아예, 말까지 놓으며 놈의 질문에 도발적인 대답을 돌려주었고, 그러자 놈은 상당히 열을 받았는지 대놓고 흉흉한 ‘살기’를 풍기며 입을 열었다.
“평생 땅을 치며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게 좋을 텐데···?”
그는 마지막 경고라는 것을 알리듯 목소리에 힘을 주어 그리 말했지만, 나는 도리어 그가 가장 열 받아 할 만한 대답을 애써 골라 입에 담을 뿐이었다.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 그럼 뭐, 내가 나를 죽이고 내 동료들을 유린하겠다는 헛소리나 지껄이던, 뇌왕의 오랜 벗인 네놈에게 고개라도 숙여야 할까?”
내 입에는 미소가,
놈의 안면에는 살의가 맺혔다.
아주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순간,
당장이라도 격돌할 것만 같은 나와 놈의 눈싸움은 퍽 오랜 시간 이어졌고,
“이, 이건우···!”
그런 나를 옆에서 지켜보던 이서영은 답지 않게 매우 당황한 얼굴로, 연신 내 전투복 밑단을 잡아 꾹꾹 당기고 있었다.
상상은 자유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