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제가 돌아왔다. 신병으로] - 66화.
통제할 수 없는 극악의 ‘요괴’들을 각성과 동시에 몸에 품게 되었던 그녀.
이초희의 생은 타인의 피로 얼룩져있었다.
압도적인 마나량,
각성자 직후부터 국내 모든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새 시대를 이끌어갈 S급 헌터라 불리던 타고난 천재.
모든 이들은 이초희에게 어마어마한 기대를 품었다.
하나, 하나가 B+급, A급 헌터와 맞먹는 힘을 가진 요괴를 무려 일백이나 가진 그녀는 비단 한국을 넘어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고,
세계는 그녀에게 새로운 태양이라는 이명마저 선사해주었다.
허나, 그로부터 대체 얼마나 지났을까.
게이트 재해에 약혼자를 잃고, 감정이 격해진 이초희는 요괴들의 고삐를 놓치고 말았다.
폭주하는 요괴.
엄습하는 요기.
피아식별이 사라진 요괴는 적과 아군 할 것 없이 일대의 모든 것을 찢어발겼다.
그런 그녀를 진정시킨 것은 A급 헌터이자 협회장의 아들 그리고···.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녀의 약혼자였다.
이미 다리 한 짝과 팔 한 짝이 날아간 상태로 가사상태에 빠져 있었음에도 처절하게 걸어와 이초희를 안고 진정시켜 주었던 약혼자.
뜨거운 핏물이 이초희의 뺨을 타고 흘렀다.
흥건하게 젖은 정장에 앙상하게 뜯긴 전신.
당장 죽어도, 혹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병원으로 달려가도 모자랄 판에, 그는 이초희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거리를 기어 다가온 것이었다.
-울지마···.
죽기 전, 그가 남긴 그 짧은 한마디.
그의 유언은 언제나 오만했던 이초희를 바꿨다.
이윽고 아들을 잃은 협회장은 장례식장에서 이초희에게 말했다.
“초희야. 우린 무덤 위에 살고 있단다. 지금껏 수많은 영웅과 호걸들이 우리의 삶을 위해 죽었고, 그렇게 쌓이고 쌓인 시체 위에 우리는 서 있지···.”
그걸로 끝이었다.
협회장은 ‘적’의 간단한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 모든 작전을 망치고, 끝내 자신의 아들마저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이초희를···.
꾸짖지 않았고, 원망하지 않았다.
고요하게 구슬픈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저 앞으로의 대한민국을 걱정하던 협회장.
이초희는 그날, 자신의 발밑에 앞 시대 영웅들의 무덤이 산처럼 쌓여 있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
‘백귀야행’이라는 이명은 사실, 존경이 아닌 공포에서 빚어진 명칭이었다.
강한 능력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약혼자를 잃고도 20년간, 매번 동료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입장이었던 이초희.
그녀에게 전투란, 함께 해온 소중한 이를 점차 잃어가는 장소를 의미했고,
그녀는 더욱, 더더욱 모든 일을 혼자서 도맡아 처리하려는 성향이 강해졌다.
그녀와 함께 싸우는 이들은 언제나 죽는다.
인간의 생과 삶을 걷어가는 백귀의 주인.
그게 백귀야행의 진짜 의미였다.
희생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모든 일을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해왔던 이초희.
그러나, 그런 그녀는 또 한 번 모두의 죽음을 그저 지켜봐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알데이란!”
-카아아아아아!!
부름에 응한 하늘 고래가 낙하한다.
대지를 뒤흔드는 지진이 일어나고, 결의를 다진 군인들은 로프를 떨어뜨렸다.
향하는 곳은 이전에도 알데이란의 추락으로 뚫어두었던 지하 43층까지의 수직 터널.
“하강!”
맨 먼저, 언제나 앞장서서 적과의 교전을 이끌던 선봉대, 7여단 2대대의 철혈검사대가 김은혜 대위의 지휘 아래 단결했고,
“죽으러 가자!”
그 뒤를 잇는 김우찬 중사와 24연대의 창사대.
그리고 1군단의 공병대도 마공학기기들을 양손에 쥐고 자유낙하를 개시했다.
이윽고 갑작스러운 강습을 저지하기 위해 무너진 잔해 사이사이 블러드 엘프들이 고개를 들이밀지만,
“사격 개시! 이 악물고 버텨라! 기절할 때까지 화력을 집중해!”
이는 7여단 1대대의 자랑인 대마력포병대의 엄호가 막아냈다.
-콰아아앙!
가장 먼저, 알데이란이 충돌을 일으키자 뒤따라 내려가던 수많은 군인은 그 충격에 균형을 잃고 날아갔다.
그런 아비규환의 틈마저도 뚫고 들어오는 화살과 페어리의 독침.
단순한 ‘강하’만으로 많은 군인이 나가떨어진다.
허나, 끝끝내 많은 군인은 43층에 발을 디뎠다.
“씨발 뭐야!”
곧이어 그들을 맞이해 주는 것은, 지난 ‘타르타로스 탈옥’ 사태를 통해 그 이름이 알려진 휴거교도, 전도사 김총준이었다.
그는 더러운 욕지거리를 뱉으며 적록색의 식물 줄기가 뒤엉킨 지하의 저주를 발현하려 했지만,
“돌겨억!”
철혈검사대의 전진은 빨랐다.
-착!
울리는 쇳소리.
사방으로 퍼지며 날카로운 검광은 일순간에 흩뿌려지고, 안착한 검사대와 아수라장이 된 43층의 흡혈종이 맨 먼저 뒤엉켰다.
그중 혈철검사대를 이끄는 김은혜 대위는 단연 노을의 전도사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들었고, 그의 흑색 완드와 회색의 검이 부딪혀 불꽃을 튀겼다.
30초도 채 걸리지 않은 무시무시한 강습.
역시나 벽에서, 땅에서, 천장에서 그 모든 것을 휘감은 ‘포도 나무 줄기’로부터 새로운 흡혈종이 솟아났지만, 가장 먼저 결의를 다졌던 김우찬 중사의 창은 바람을 가르며 나아갔다.
“24연대! 저 지긋지긋한 것들을 쓸어버린다!”
“아아아아아아악!”
착지와 동시에 참전하는 검사대.
이에 오랜 시간 이초희와 합을 맞춰왔던 협회의 정예요원들은 이초희가 소환한 요괴의 등에 올라타 비행하며 포격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어딜!”
하지만, 전도사 김총준은 44층으로 향하는 입구를 등지고 서서, 자신의 그림자를 일으켜 세웠다.
눈앞에 놓인 자는 전도사 김총준과 이계의 군세.
그리고 그를 마주하는 아군은 수많은 군인과 뒤섞인 요원들.
냉정하게 오합지졸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다.
그만큼 군인들의 상태는 온전치 못했고, 부대의 구성원도 본래 합을 맞추던 이들이 아니었으니까.
“일어나라! 나의 종이여!”
하물며 ‘성역’의 영향으로 소환사 계열에 김총준과 철혈검사대의 리더인 김은혜 대위의 신체능력은 그다지 차이가 나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소환사인 김총준이, 검사인 김은혜를 압도하고 있었다.
결코, 44층으로 통과시켜 주지 않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43층의 바닥이 알데이란의 충돌에도 무너지지 않는 것을 보면 필시, ‘테라포밍의 줄기’가 이 밑을 가득 채워 충격을 흡수하는 듯했다.
그러니 유일한 길은 본래부터 존재하던 ‘길’ 계단뿐인 상황이었다.
강습부대는 난전을 펼쳐 이계의 군세를 일순 압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전도사 김총준이, 김 대위와의 전투를 이어가면서도 빠르게 소환해낸 이 거대한 혈좀비들을 막아낼 재간은 없어 보였다.
“다 쓸어버려!”
여유롭게 김 대위의 검을 흘리며 크게 외치는 김총준.
-Gaaaaaaa!
-Kaaaa!
혈좀비들은 게걸스럽게 침을 튀기며 함성을 내질렀다.
일반인의 2배, 약 3M의 크기를 자랑하는 혈좀비들은 양손에 움켜쥔 날붙이를 마구 휘두르며 군인들을 향해 돌진했다.
갑작스러운 강습에 다소 당황했던 김총준이었지만, 최상급의 혈좀비를 소환하면서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돌아왔다.
“무의미하다!”
최상급 혈좀비의 하울링에는, 그 소리 자체로 상대의 전의를 꺾는 ‘죽음의 외침’이라는 스킬이 달려있다.
산자라면 본능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
이로써 갑작스러운 상황은 금방 종료되고, 엉망이 되어 널브러진 저들을 전도사 김총준은 마무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푹!!
이윽고 눈앞에서 검을 휘두르던 김 대위의 어깨에 날카로운 뼈가시를 꽂아 넣는 전도사.
“크으윽!”
“무의미하다고! 내가 말했을 텐데!”
비명을 내지르는 그녀에게 격앙된 조소를 날리며 외치는 전도사.
고통과 공포, 살아 숨 쉬는 존재라면 누구든 전의를 상실하고 좌절해야 할 타이밍이 도래한 것이었다.
허나,
“아아아아아아!”
김 대위는 뼈가시에 어깨를 관통당한 그대로 김총준에게 달려들었다.
-으드드드득!
뼈가 부러지고, 살이 갈라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잔뜩 울려 퍼지지만, 그녀의 검은 끝내 김총준의 복부에 꽂혔다.
“무, 무슨···! 우웁!”
곧 목구멍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흥건한 피.
그제야 김총준은 보았다. 한쪽 팔이 아예 뜯겨 나갔음에도 두려움 없이 전진하는 군인을.
그런데, 그녀만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 도래한 모든 강습부대의 눈동자에는 아직도 전의가 깃들어 있다.
최상급 혈좀비는 수십 번 그 ‘죽음의 포효’를 내지르지만, 군인들은 잠깐의 멈칫거림도 없이 발을 내디뎠다.
‘이 녀석들···! 전부 이곳에서 죽을 셈이었나!’
죽음을 불사하는 항쟁.
그런 마음가짐으로 달려오는 이들에게 1차원적인 혈좀비의 저주가 먹힐 리가 없었다.
***
쓰러진다.
마력을 집약하고, 농축하여 쏘아내는 요괴 ‘스샤가’에게 이초희가 전신의 마력을 집중하는 사이, 그녀를 둘러싼 전방위적인 전장에서 하나, 둘 사람이 쓰러져갔다.
“크르륵!”
“으악!”
피를 토하면서도, 고통이 버거워 팔다리를 덜덜 떨면서도,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나아가 싸우는 군인들.
눈앞에서 이초희를 향해 날아오는 독침을 대신 맞고, 얼굴이 보랏빛으로 변한 이가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팔이 뒤로 꺾인 이도 이초희의 등을 지키다 끝내 숨을 거두었고,
싸울 수 없을 만큼 몸이 엉망이 되자 아예 고의로 마나 역류를 일으켜 자폭하는 이도까지 있었다.
“의미있는 죽음을!”
““숭고한 의지를””
유언처럼, 주문처럼 외는 스러져가는 이들의 외침.
이초희는 당장이라도 그들을 직접 돕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오직 그녀만이 테라포밍의 종자로 향하는 지름길을 뚫어낼 수 있는 화력을 가진 헌터였기 때문이었다.
집약되는 마력,
집중되고 모여,
또다시 한 점으로 응축되는 마력.
그녀의 능력치는 반으로 격감했기에 더 신중하게, 더 집중하여 과하다 싶을 정도의 마력을 모았다.
“스샤가!”
이윽고, 그녀의 부름에 요괴는 응하고, 거대한 공작새처럼 생긴 요괴는 넓게 펼친 꼬리에서 빛을 내뿜었다.
농축된 마력 포격이 향하는 방향은 다름 아닌 43층의 바닥.
알데이란의 충돌로도 뚫어낼 수 없었던 두텁고 강한 천연의 바리케이드였다.
오직 그곳을 뚫어 희망찬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이초희는 수많은 군인의 죽음을 방관했다.
희망,
우리가 모두 죽어도 끝내 승리할 수 있다는 그 희망을 위해서 말이다.
-쿠우우웅!
웅장한 굉음을 일으키며 스샤가의 빛은 끝내 땅을 꿰뚫었다.
“아니?!”
저 멀리서 이제야 계획을 눈치챈 전도사의 당혹스러운 음성이 들려왔지만, 이초희는 계속, 계속해서 마력을 집중할 뿐이었다.
-쿠웅! 콰과광!
지층의 심연을 뚫고 나아가는 빛은 무려 6개의 층을 박살 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49층.
그곳은 이미 수직의 마공학 감옥 ‘타르타로스’라 보기 힘들 정도로 굵직한 줄기에 둘러싸인, 정글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이백여 명의 군인과 최강이라 불리우는 S급 헌터의 전력으로 드디어 뚫어낸 희망의 길.
이윽고, 그 길로 향할 진짜 전사들은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대업을 이루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이초희.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다가오는 한 마리의 검은 맹수.
노란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이족 보행을 하는 검은 표범은 천천히 이초희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자네의 결단, 내가 이어받겠네.”
그는 ‘야수화’라는 특급의 고유 스킬을 가진 남자.
여단장 최중철이었다.
“...소장님. 부탁드립니다.”
흑표, 일인 전차라는 별칭을 가지고, 높은 직책에 올라서도 언제나 전장의 최선봉을 지키던 자.
그는 이초희가 품에서 꺼낸, 이건우의 그 ‘맹독’을 받아들었다.
이윽고 그 비좁은 통로로 몸을 던지는 2차 강습대.
성전사가, 저주를 해주하는 남궁연 소위가 그리고 대기중이던 모든 병력들이 검은 표범의 뒤를 따랐다.
마치 성화처럼,
한 중사가 피워올린 결의의 불꽃은 이초희의 손으로 그리고 이젠 여단장 최중철의 손으로 이어진 것이다.
-크르릉!
맹수의 울부짖음은 지천을 울렸고, 이초희는 마나 고갈로 팔다리를 바들바들 떨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강습을 펼쳤듯, 잇따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저 이계의 군대를 막기 위해 몸속 마나의 밑바닥까지 전부 끌어모아 다시 한번 ‘알데이란’을 소환하는 이초희.
-카아아아아아!
모든 부대원들의 하강을 확인한 이초희는 적의 원군을 막기 위해 알데이란으로 그 구멍을 메워버렸다.
갑작스레 찾아온 어둠.
이제 그녀에게 남은 일은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부디 여단장 최중철이, 그 혈창의 소유자를 뚫고 테라포밍의 ‘종자’에 그 맹독을 던져넣을 수 있기를···!
***
이초희의 경고대로, 이 지하세계는 돌연 어둠에 휩싸였다.
허나, 이곳에는 이백의 병사들과 넓은 지평을 밝힐 남궁연 소위가 있기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선발대는 무려 부대의 절반을 남겨두고서 43층부터 49층으로 뚫어내는 대업을 이룬 것이다.
남은 것은 마지막 한 층.
‘알데이란’을 날려버리고, 이초희의 한쪽 팔을 불태워버렸다는 신화적인 괴물이 기다리는 50층뿐이었다.
대업을 이룬 1차 강습대.
허나, 그럼에도 이쪽에는 아직 절반의 병력이 남아 있었다.
때문에 여단장 최중철은 49층을 이초희가 뚫어낸 순간, 생각했다.
이 무모한 작전은 결국, 성공할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더군다나 퇴로는 없다.
우리들의 손으로 직접 막았다.
죽음이 두려워 도망치는 행동이 곧 도리어 죽음으로 이어지도록, 잔혹한 방법이지만, 이 한국에 다시 한번 전쟁의 불씨가 피어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이초희가 택한 결의의 한 수였다.
그렇기에 나아간다.
오롯이 앞으로만 나아간다.
이윽고 여단장이 마주한 것은, 야수화된 전신의 털이 일순간에 곤두서게 만드는 믿을 수 없는 공포의 위압.
이윽고 드디어 도달한 종착점, 타르타로스의 최하층에서 여단장 최중철은 괴물을 마주했다.
「나의 삶은 차디찬 겨울이었다.」
들려오는 저주.
피어나는 붉음.
그리고 그 괴물이 천천히 눈을 뜨자.
오직 핏줄기로 채워져 있는 것만 같은 깊은 적안과 검은 표범의 노란 눈은 서로를 마주했다.
한 겨울에 내리는 비 -2